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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30화 (31/232)
  • 030화

    “으으... 감기인가? 몸이 싸하네.”

    취업한 뒤부터 수영복으로 갈아입는 게 일상인데, 등골이 갑자기 오싹했다.

    한 맺힌 처녀 귀신이 뒤에서 노려보는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대신 옆에,

    “어허! 시합이 있으니 건강에 유념하라고 일렀거늘.”

    내 의식주를 책임져주는 수영 감독님이 혀를 찼다.

    “괜찮아요, 감독님. 경기력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그건 이따가 시합 기록을 보면 알겠지.”

    “네.”

    나도 구차하게 이러쿵저러쿵 반박하지 않았다.

    결과가 말해줄 터.

    오늘의 수영장은 평소 연습할 때랑 분위기부터 달랐다.

    “......”

    “......”

    수영복 차림의 선수들이 긴 수건을 어깨에 걸친 채 관중석에서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다.

    ‘젊네.’

    P의 적성검사로 매년 쏟아져 나오는 천재들 때문일까?

    연륜보다는 패기!

    그리고 그 밑바탕에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확고한 자신감이 깔려있었다. 하나같이 오만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2군이야.”

    “학교 대표요? 그러면 1군은 어디에 있어요?”

    “1군은 호화유람선을 타고 태평양으로 합숙 훈련을 떠났다.”

    “헐….”

    합숙 훈련을 호화유람선에서?

    성적으로 나눈 극명한 차별대우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우리도 갈 수 있어. 일단은 2군에 들어가는 것부터다.”

    “그런데 2군에 들어가도 감독님은 같나요?”

    “왜? 내가 마음에 안 들어?”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감독님은 가볍게 내 어깨를 주물러주면서 답했다.

    “1군까지 함께한다. 나랑 일찍 헤어지고 싶으면 1년 안에 국가대표가 되면 돼.”

    “불가능하겠네요.”

    “그건 네가 하기에 달렸지.”

    “......”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기 전까지 딱 1년만 선수 생활을 할 계획이었다.

    ‘감독님도 큰 기대는 안 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기대치가 훨씬 높은 것 같다.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어제만큼만 해봐.”

    “네.”

    그 기대치를 다시 낮추기 위해 대충할 생각은 없었다.

    뭐든 시작했으면 열심히!

    내가 편의점 사장님께 오랫동안 신뢰받을 수 있었던 이유다.

    “드디어 오는군.”

    감독님이 눈짓으로 가리켰다.

    “...기네.”

    굳이 재보지 않아도 나보다 팔다리가 긴 게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물고기의 지느러미처럼 물을 밀어내기 편한 넓은 손바닥!

    적성이 수영선수였던 송선영이 가지지 못한 신체적 유리함이 저 선수에게는 있었다.

    “네 상대다.”

    “감독님. 몸만 봐도 제가 질 것 같은데요?”

    “너도 나쁜 편은 아니야. 일반인치고는.”

    “전혀 위로가 안 되는데요?”

    “소고기가 먹고 싶다며?”

    “오! 갑자기 기운이 나네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좋아! 바로 그 정신이야!”

    내가 준비운동으로 가볍게 몸을 푸는 동안, 감독들끼리 만나서 악수하며 안부를 물었다.

    “망신당하기 좋은 날씨지?”

    “그래. 비가 와서 울어도 티가 안 나겠어. 하하!”

    “쯧쯧. 어디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는 애를 주워왔냐?”

    “저녁에 실컷 먹이려고 굶겼지.”

    “어이가 없군. 저런 비실비실한 몸으로 완주나 할 수 있겠어?”

    “네 선수 걱정이나 해. 게으르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헛소문을 들을 시간에 참치회를 살 돈이나 마련해놔.”

    “아차! 이길 생각이라서 깜빡하고 안 챙겨왔네.”

    “...약속을 깰 셈이냐?”

    “누가 깬대? 이긴다고 했잖아.”

    “시합 결과를 보면 알겠지.”

    “끝나고 보자.”

    선수보다 감독의 신경전이 더욱 흥미진진한 대결이 시작됐다.

    * * *

    “사람 살려~!”

    “으아앙! 엄마! 엄마!”

    “도, 도와주세요!”

    아무런 징조도 없이 아파트가 통째로 얼어붙고, 길거리의 사람들이 액체질소에 들어간 것처럼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리고 이 참혹한 현장의 한복판에서 즐겁게 웃는 자가 있었으니...

    “으하하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 위에 얼음으로 만들어진 갑옷을 걸친 은발의 남자.

    상식을 벗어난 개성적인 복장 못지않게, 그가 바라보는 모든 것들이 꽁꽁 얼어붙었다.

    나무도, 풀도, 곤충도, 사람도...

    그의 주변에는 살아있는 생명체가 없었다.

    “쏴!”

    “발사!”

    탕탕탕탕-

    이런 능력 탓에 접근하지 못한 경찰과 군인들이 멀리서 총을 쏘며 견제했다.

    평범한 흉악범이었다면 이 압도적인 화력에 제압됐을 터.

    “하하! 가소롭다!”

    하지만 총알이 남자의 몸에 닿기 직전에 얼어붙어서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유효한 타격을 전혀 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도시 한복판에 미사일을 쏠 순 없잖는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지원병력 요청을...!”

    “놈이 온다!”

    “후퇴! 전원 후퇴~!”

    “방어선을 뒤로!”

    경찰과 군인들은 술래잡기처럼 남자를 도발하며 도망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이런 행동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감사합니다!”

    “헉! 헉! 살았다!”

    시민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으윽...!”

    “움직이실 수 있습니까?”

    “다, 다리가 얼어서...”

    부상자보다 사망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만큼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말은 안 했지만, 그들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다.

    ‘언제 오는 거야!’

    ‘왜 이렇게 늦어!’

    이런 마음이 드디어 닿은 걸까?

    마침내 ‘영웅’이 왔다.

    “세계와 적성을 수호하는 마법소년 등장...!”

    붉은색 망토를 펄럭이며 하늘에서 마법소년이 내려왔다.

    펑! 펑!

    아무런 무대장치를 하지 않았음에도 착지한 그의 좌우에서 알록달록한 폭죽이 솟구치듯 터졌다.

    “마법소년이다!”

    “이젠 살았어!”

    “마법소년~!”

    초현실적인 힘을 가진 살인마의 무차별적인 공격에 벌벌 떨던 시민들은 안도의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건, 국민의 재산과 목숨을 지키기 위해 총화기에도 끄떡없는 괴물이랑 대치해야 했던 군인과 경찰들도 마찬가지.

    “휴!”

    “왔군.”

    적성에 맞는 일인 만큼 사명감으로 군인과 경찰이 됐기 때문에 범죄로부터 눈을 돌리거나 도망치는 짓은 안 했지만, 그들도 사람이다.

    한 발도 위험한 총알로 샤워해도 피부에 생채기 하나 없는 ‘악(惡)’을 보고 있으면, 허탈함을 넘어서서 신(神)을 찾을 수밖에.

    그리고 그 신이 드디어 왔다.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마법소년이 왔으니까!”

    외모뿐만이 아니라 목소리와 말투까지 어린애처럼 바꾼 최강민.

    그는 늘 해왔던 것처럼 악당을 쓰러트리기 위해 돌진했다.

    “마법소년...!”

    마법소년에게 수없이 당해본 경력(?)이 있는 남자는 철천지원수처럼 노려봤다.

    휘이이잉~!

    공기마저 얼려버리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시원한걸?”

    하지만 최강민은 수많은 생명을 빼앗은 그 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뚫고 지나갔다.

    “마법소년! 깔보지 마라!”

    “싫은데?”

    “나를 또 방해- 컥?!”

    와장창-!

    마법소년이 둔기처럼 휘두른 지팡이에 얼음으로 된 남자의 갑옷이 맥없이 파괴됐다.

    일격(一擊).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은 악당의 최후로는 너무나 허무했다.

    “마법소년이 이겼다!”

    “우리의 영웅! 마법소년!”

    “마법소년! 만세!”

    멀리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도시를 구한 그에게 환호했다.

    “으윽...”

    “눈을 빨리 가리고 포박해!”

    “네! 경관님!”

    패배한 살인마를 사형시키지 않고 다시 감옥으로...

    초현실적인 힘을 연구하고, 악인(惡人)을 교육해서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으로 만든다는 취지!

    하지만 탈옥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마법소년에게 다시 붙잡히는 전개가 20년째 반복 중이다.

    “마법소년.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감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닌걸요!”

    현장책임자를 만난 최강민은 평소처럼 겸허하게,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런데 좀 늦으셨군요.”

    “......”

    “당신을 탓할 생각은 없지만, 피해가 컸다는 것만 알아주십시오.”

    “......”

    “요즘 들어 자주 늦는다는 소문이 있던데...”

    “...단순한 소문일 뿐이에요!”

    최강민은 흐트러질 뻔한 표정을 애써 유지하며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일방적으로 도움받는 처지에 불평까지 할 순 없는 노릇이죠.”

    “......”

    이미 말해놓고 신경 쓰지 말라는 건 무슨 심보?

    최강민은 현장책임자의 머리통을 부숴버리고 싶었다.

    아니-

    ‘당신, 기억해두겠어.’

    마법소년이 아닌 기업가 최강민의 입김이면, 일개 공무원 하나 끌어내리는 건 일도 아니다.

    없는 죄도 만들어서 연금이 안 나오는 불명예 퇴직을 시켜주리라!

    “가볼게요!”

    “수고하십시오.”

    자신의 인생이 이미 끝났음을 모르는 현장책임자가 경례했다.

    펑! 퍼엉!

    퇴장도 폭죽으로 화려하게!

    하지만 하늘 높이 날아오른 최강민은 주위에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젠장...! 빌어먹을...!”

    근거 없는 헛소문이 아니다. 최근에 출동이 늦어지고 있는 건 엄연한 사실이니까.

    지각하는 이유가 대단하면 또 모르겠는데...

    ‘대체 뭐가 문제야!’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는 시간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

    지구 반대편까지 1초면 날아가는 마법소년이 정신을 놓는다고?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

    (...회장님!)

    “아!”

    최강민은 귀에 넣은 통신기기로 들려오는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그새 또 정신을 놓은 걸까?

    전혀 몰랐다.

    (빨리 돌아오셔야 합니다. 사람들이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얼마나 대답이 없었지?”

    (5초쯤 됩니다.)

    “알겠다.”

    대답하는 사이에 이미 그는 마법소년에서 사업가 최강민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초.

    멍하니 있지 않았다면 훨씬 빨리 회사로 돌아왔으리라.

    “회장님. 어서 회의장으로.”

    통신기기에서 입을 뗀 비서는 자주 겪는 일이라서 놀라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늦었지?”

    “23초입니다.”

    “쯧. 성질 급한 주주들이 한마디씩 했겠군.”

    “그렇습니다.”

    최강민이 많이 늦는 건 아니다.

    하지만 1초 차이로 사업을 뺏기거나 차지하는 이 세계에서는 매우 치명적!

    그건 세상을 구하는 마법소년의 일도 마찬가지다. 도시가 파괴되고 사람이 죽기까지 몇 분씩 걸리는 건 아니니까.

    심지어 그가 상대하는 ‘악’은 하나 같이 대량학살에 특화된 초현실적인 존재들!

    그래서 그가 현장에 도착하는 시간이 1초 늦어질 때마다 피해가 엄청나게 불어난다.

    “불만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디가 그랬지?”

    “언론사는 아닙니다. 그곳은 저희가 확실하게 장악했으니까요. 주로 사설 사이트에서...”

    “바람잡이들은?”

    마법소년을 무조건 찬양하는 아르바이트 친위대!

    그 숫자는 적지만, 자발적인 친위대가 20년 동안 꾸준히 모이면서 철옹성이 되었다.

    그런데...

    “유가족들을 중심으로 동정론이 퍼지는 바람에 쉽지 않습니다.”

    “그러면 해커를 고용해서 사이트를 아예 닫아버려.”

    “네. 회장님.”

    비서에게 지시하는 최강민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애초에 그가 늦지 않았으면 없었을 논란.

    20년 동안 이런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더욱 곤혹스러웠다.

    ‘대체 왜!’

    몸은 매우 멀쩡한데, 몇 초씩 정신을 놓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점점 더 잦아지는 추세.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강문수가 왜...”

    이 세계는 꿈이며, 그가 곧 죽는다고 주장했던 한 남자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아니야! 절대로!’

    번뜩!

    부정하는 최강민의 눈동자에 광기가 깃들고 있었다.

    * * *

    “시합 끝! 승자는 강문수 선수...!”

    “헐? 정말로?”

    내 적성은 무당인데?

    꿈이 아닌 현실에서 수영선수를 이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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