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화
더는 최강민의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돈! 그리고 돈! 또 돈...!
자본주의사회에서 살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싫은 일도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나도 어른이 되어가는 거겠지...’
공짜 밥이나 얻어먹을 생각이었던 안일한 마음을 내려놓고, 상체도 살짝 앞으로 숙이면서 진지한 태도로 대화에 임했다.
“이 돈을 전부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최강민의 치료비는 내가 10년 동안 아르바이트해도 모을 수 없는 액수였다.
이걸 어떻게 거절해?
나는 한 번 잡은 기회는 절대 놓치지 않는 남자다.
“흐음~”
나를 보며 눈웃음을 짓는 서혜주 과장님의 표정이 의미심장했다.
그 의미는 아마도,
“제가 돈에 취약합니다.”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선 당연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것 같네요. 아! 강문수 씨가 원한다면 계약서를 써줄 수도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서혜주 과장님을 믿으니까요.”
꿈에서 본 ‘서혜주 원장’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나를 해할 기회는 많았어.’
엘몰랑스 병원에서 나쁜 의도가 있었다면, 정밀검사 도중에 나를 감금해서 끔찍한 생체실험을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해부, 고문, 투약...
하지만 그녀는 호기심의 충족보다 내 인권(人權)을 우선시했다.
“좋게 봐줘서 고맙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를 농담이나 허풍으로 치부하지 않고 진지하게 들어 주셔야 합니다.”
“어려운 조건이 아니군요. 의사의 덕목 중 하나가 환자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는 거니까요.”
“아하!”
하지만 진지하게 듣는 태도가 믿음의 척도가 되진 않는다.
‘그렇다면...’
현재, 나는 서혜주 과장님의 개인연구실로 짐작되는 장소에 초대받아서 앉아있었다.
자격증, 메달, 트로피...
꿈에서 만난 ‘서혜주 부원장’의 연구실이랑 비슷했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해파리를 안 키우시네요.”
수많은 동식물 중에 콕 찍어서 해파리를 언급한 탓일까?
서혜주 과장님의 표정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 해파리가 투리토프리스 누트리큘라를 말하는 건가요?”
“학명(學名)은 모릅니다. 무슨 보호 해파리라고...”
“작은 보호탑 해파리.”
“아! 맞아요. 그 이름이었어요.”
“놀랍군요. 제가 취미로 소소하게 연구 중인 해파리를 강문수 씨가 어떻게 알고 있죠?”
“꿈에서 봤으니까요.”
“설마, 꿈에서 그 해파리를 키우는 저를 봤다는 건가요?”
“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꿈은 그 사람의 기억과 정보를 토대로 재구성되니까요. 제가 투리토프리스 누트리큘라를 연구 중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 중에 당신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듣고 싶으신가요?”
“무조건! 강문수 씨는 대화를 유리하게 주도할 줄 아는군요. 사업을 해도 잘할 것 같아요.”
“칭찬인가요?”
“그 이상의 극찬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믿을 수밖에 없는 밑밥을 깐 후에 순조롭게 대화를 이어갔다.
* * *
“초현실적인 능력. 즉, 초능력이 실존하는 세계에 최강민 환자가 빠져 있다는 얘기군요.”
“네.”
“요즘 유행하는 가상현실게임 중독이랑 매우 흡사하네요. 어떤 외부의 충격에도 깨어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가 매우 크죠.”
게임은 접속기기의 전기 콘센트를 뽑으면 바로 끝나니까.
“최강민 환자의 문제를 재쳐놓고 보더라도 무척 흥미로워요. 저도 그 꿈을 체험해보고 싶을 만큼! 강문수 씨. 13년 뒤의 지구는 기술이 많이 발전했나요?”
“글쎄요. 13년 뒤에도 자동차는 바퀴로 움직이던데요?”
“꿈의 한계이거나, 가시적인 발전이 없는 모양이군요.”
서혜주 과장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무척 아쉬워했다.
“아! 과장님은 미래에도 지금이랑 별 차이 없는 외모였습니다. 전혀 안 늙으셨더라고요.”
“그건 지금까지 들은 얘기 중에서 가장 희망적인 소식이군요!”
“그런가요?”
최강민의 목숨은 어느새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환자를 치료할 방법만 찾으면 됐었는데, 의외의 수확이 많네요.”
“그다지 도움이 안 됐던 것 같은데...”
“여자에게 외모는 목숨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으로 최소 13년 동안은 외모가 보장된다는 정보는 돈으로 살 수 없는 큰 수확이죠.”
“아하!”
가벼운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잡다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할 말이 떨어졌을 때쯤,
“슬슬 정리해볼까요?”
“좋습니다.
뒷전으로 밀려난 최강민의 문제로 돌아왔다.
“최강민 환자는 약 7년 동안 혼수상태- 정정하죠. 숙면 중입니다. 그동안 꿈속에서는 20년이란 시간이 흘렀고요. 맞나요?”
“네. 현실보다 약 3배 빠른 것 같아요.”
자살하면 과거로 돌아가는 송선영의 꿈도 그랬다.
그녀에게 수영을 배우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했지만, 현실은 고작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정말 기가 막히네요. 의사는 환자를 깨우기 위해 7년 동안 발버둥 쳤는데, 정작 환자는 영웅 놀이에 심취해서 깨어날 생각이 없다니...”
“음? 잠깐만요!”
“뭐죠?”
“깨어날 생각이 없다고요?”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맞아! 그렇네!’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쭉 간과해온 맹점.
“상황이 그렇잖아요? 가게에 진열된 장난감을 사고 싶어서 안 놓는 아이처럼, 환자는 마법소년으로 변신하는 자신을 꿈이 아닌 진짜라고 세뇌하며 버티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최강민은 딱 그랬다.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그곳을 꿈이라고 주장하는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죽여서 입을 막는다는 형태로.
‘미친 새끼.’
그는 내 목숨을 간단히 빼앗지 않고 괴롭히면서 요구했다.
꿈을 현실로 인정하라고.
하지만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부정해줬다.
“제 추론이긴 하지만, 최강민 환자가 꿈이라고 인정하면 깨어날 겁니다. 더 늦기 전에.”
“그렇겠죠.”
서혜주 과장님의 추측에 나도 동의했다.
같은 생각이라서?
아니.
이건 확신이다.
* * *
“강문수 선수는 회복이 무척 빠른 것 같은데... 타고난 건가?”
“노력입니다.”
서혜주 과장님은 치료법을 곧바로 검증하고 싶어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
주말에만 시간이 나니까!
공휴일이 아닌 평일에는 체육대학교 수영장으로 출근해서 감독님의 눈도장을 찍어야 한다.
“흠. 내가 여러 선수를 키워봐서 아는데, 노력만으로는 안 돼. 노력으로 다 됐으면 P의 적성검사를 맹신하지도 않았겠지.”
“그것도 그렇네요.”
최소 1년 동안은 내게 말을 놓지 않고 거리감을 유지하겠다고 단언했던 수영 감독님.
하지만 단 2주일 만에 깨졌다!
“내 눈이 정확했어. 기록이 나날이 좋아지는군!”
“감독님께서 저를 믿고 훌륭하게 지도해주신 덕분입니다.”
“하하! 믿은 건 사실이지만, 지도했다는 건 너무 뻔히 보이는 아부야. 싫진 않지만.”
그랬다.
내 수영 기록은 매일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2분 32초, 2분 29초, 2분 26초...
감독님의 다소 과장된 표현을 빌리자면, 수영선수 적성을 보유한 천재 중에서도 0.2% 최상위권만 가능한 경이로운 성장 속도!
내가 자만하도록 옆에서 부추기는 것 같다가도….
“적성이 정말로 무당이야?”
이 질문을 할 때마다 진심이 느껴져서 헷갈린다.
“정말입니다. 자꾸 의심하셔서 적성검사결과표도 보여드렸잖아요.”
“거참!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무당이 수영선수보다 수영을 잘하는 게 말이 되나?”
“P에게 따지세요.”
“하하! 개발자에게 따지겠다는 건 아니고. 네가 매우 잘해 주고 있다는 의미야.”
“네.”
나도 감독님 못지않게 무척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게 말이 돼?’
꿈속에서 송선영에게 수영을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개헤엄밖에 할 줄 몰랐으니까.
수영을 배울 의지와 기회가 없었던 탓이지만, 그걸 고려해도 지금의 내 폐활량은 송선영을 만난 이후로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리고 이 결과는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아! 그리고 강문수 선수. 내일은 중요한 시합이 있으니 체력을 아껴두도록 해.”
“시합요? 갑자기?”
“내가 다른 감독을 슬쩍 도발했거든. 하하!”
“저기요?”
이 사람이 지금 뭐라는 거야?!
“이해해줘. 곧 새 학기가 시작되기 때문에 조금 무리했다.”
“왜요?”
“너를 위해.”
“저를 위해서요?”
“지금 네가 쓰는 기숙사가 2인실인 건 알고 있지?”
“네.”
그게 어쨌다고?
“입학식이 끝나면 신입생이랑 같이 쓰게 될 거야.”
“그렇겠죠.”
“혼자 쓰고 싶지 않아?”
“...그게 내일 시합이랑 연관이 있나요?”
“오! 눈치가 빠른데? 맞아. 이기면 상대 선수가 2인실을 너 대신 신입생이랑 쓸 거야. 좋은 소식이지?”
“전혀요!”
“왜?”
“지면 자존심 상하고, 이기면 원망받잖아요.”
몇 번을 생각해봐도 암울한 미래밖에 그려지지 않았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이기면 고기를 사주마.”
“소고기로 사주세요.”
“허! 강하게 나오는군! 좋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1등급 꽃등심으로 3인분! 어떠냐?”
“좋습니다.”
내일 시합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더 걸려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내 주거환경 개선에만 신경 쓰자!
* * *
낡은 상가건물에 어울리지 않는 미모의 소녀가 3시간째 복도를 서성이고 있었다.
“......”
“......”
지나가다가 우연히 그녀를 발견한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을 만큼 보기 드문 미모.
특히, 남성들은 그녀의 청바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는데...
‘와! 누구지?’
‘몸매가 미쳤네!’
‘진짜 예쁘다...’
일반인보다 눈에 띄게 긴 다리의 맵시에 침까지 흘려가며 구경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당사자는 주위에 시선을 일절 신경 쓰지 않고 짜증만 내고 있었다.
“저기...”
“진짜 건방지잖아! 나를 기다리게 하다니!”
“아가씨?”
“오기만 해봐. 내가 밤새도록 잔소리해줄 테야!”
“실례하-”
“저를 알아요? 강문수가 아니면 말 걸지 마세요.”
“죄, 죄송합니다! 남자친구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녀의 미모에 반해서 말을 건 용감한 청년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녀는 집을 비운 소년을 의심하면서 분노를 키웠다.
그때,
“예쁜 아가씨.”
이 소식을 접한 부동산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
하지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없는 사람 취급!
그래도 부동산 아주머니는 잔뼈가 굵은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재차 대화를 시도했다.
“누구를 기다려?”
“......”
“집을 보러 온 거야?”
“...무슨 말이에요?”
공기처럼 무시하던 소녀가 드디어 반응을 보였다.
“무슨 말이긴. 여긴 빈집이라서 하는 말이지.”
“잠깐! 잠깐만요! 비었다고요?”
“어.”
“언제부터요?!”
“한... 보름쯤 된 것 같은데.”
“살던 새끼- 남자애를 혹시 아세요?”
“강문수?”
“네! 맞아요!”
“그 성실한 학생이라면 당연히 알지. 내가 소개해줘서 이 단칸방에 들어왔는데.”
“그는 어떻게 됐어요?”
“바람처럼 떠났지!”
부동산 아주머니의 시원한 한마디에 그녀는 울화통이 터졌다.
‘이사 갈 계획이 없다더니...!’
거짓말이었다.
“...어디로 갔어요?”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런데 아가씨는 그 학생이랑 무슨 관계야?”
“그건 왜 물으세요?”
“호호! 부동산끼리 정보를 주고받으니까. 혹시 알아? 어디로 이사 갔는지 알 수 있을지도...”
“여자친구요.”
“어머나!”
“그 새끼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제 남자예요.”
송선영은 부동산에 이름과 연락처를 남기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