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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24화 (25/232)
  • 024화

    “보통은 주민등록증 도용으로 신고했겠지만, 재취한 피의 혈액형과 유전자가 15년 전에 부검한 강문수 씨랑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아...”

    “정말로 본인이십니까?”

    “네. 저는 강문수입니다. 믿으실지 모르지만.”

    내가 ‘나’라는 걸 입증해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

    생소한 경험이었다.

    또한,

    ‘미치겠네!’

    주민등록증에는 이름 옆에 적성이 적혀 있다.

    그래서 주민등록증 도용은 적성을 속인 것으로 간주하여 강력한 처벌을 받는다.

    이 세계(꿈)에서 빠져나가긴커녕 법의 심판을 받고 감옥에 갇힐지도 모른다는 의미!

    위험하다.

    “사실, 제 적성은 건강의학과가 아니라 유전자공학과입니다. 엘몰랑스의 일원이란 자부심도 있죠.”

    “......”

    이 의사 선생님이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렇기에 의학적 지식과 실력에도 자신 있습니다. 그런 제가 판단한 바로는, 당신은 유전자를 복사한 복제인간이 아닌, 강문수 씨 본인이라고 100% 확신합니다.”

    “아!”

    “지옥에서 현세로 돌아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강문수 씨.”

    “아, 네.”

    죽은 적은 없지만요!

    “어떻게 15년 전의 외모를 유지하고 계시는지 궁금하지만, 지금부터는 제 소관이 아니므로 배턴을 넘기겠습니다.”

    “지금부터? 또 뭔가 남았나요?”

    “경찰은 아니니 안심하십시오. 말소된 주민등록증을 복원하실 때,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건 제가 알아서...”

    “복제인간으로 취급되어 인권을 유린당하고 싶으시다면 당장 퇴원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제가 알아서 못 할 것 같네요. 선생님. 지금부터 뭘 하면 될까요?”

    나는 병원의 판단을 무조건 따르기로 했다!

    * * *

    유전자공학과 선생님이 말한 다음 일정, 배턴을 받을 사람은 내 예상보다 한참 뒤에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는 어두컴컴한 병원 복도를 걷고 있었다.

    “강문수 씨, 여기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간호사의 정중한 안내로 찾아간 병원 연구실에는 최강민 형의 주치의가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어서!”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 모니터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가 무척 반가운 얼굴로 나를 환대해줬다.

    “안녕하세요.”

    “곧바로 만나고 싶었는데, 하던 수술을 남에게 넘기는 건 불법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괜찮습니-”

    꼬르륵.

    “......”

    몸은 괜찮지 않은 모양이지만!

    검사받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일까. 배에서 밥을 달라고 아우성치기 시작했다.

    “어머! 미안합니다, 강문수 씨. 저를 기다리다가 식사 시간을 놓치셨군요. 과자라도 드릴까요?”

    “주시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공짜는 늘 옳으니까!

    엘몰랑스 병원의 모든 시설과 장식이 우수한 편이지만, 여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뭔가 많네.’

    놓을 자리가 없을 만큼 트로피와 메달이 빼곡하게 진열된 붙박이식 장식장이 한쪽 면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반대쪽 벽면은 상장과 자격증이 든 아크릴 액자 수백 장이 걸려 있고...

    그것들이 너무 화려해서, 엘몰랑스 병원의 명성에 어울리는 최고급 가전제품과 각종 가구가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저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은 올랐나요?”

    “네? 아, 네.”

    “트로피와 메달이 창고에 더 있지만, 방이 협소해서 지금 수준으로 타협했습니다. 이 정도만 돼도 환자와 손님들에게 신뢰를 얻기에는 충분할 것 같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방이 좁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침대를 포함한 각종 의료기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해파리를 키운다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원통형 유리시험관 안에 몸길이가 5mm쯤 되는 반투명한 해파리가 잔뜩 들어있었다.

    “투리토프리스 누트리큘라.”

    “...네?”

    “그 해파리의 학명(學名)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작은 보호탑 해파리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죠.”

    “그렇군요.”

    이름이 어쨌든 해파리. 관심이 바로 식어버렸다.

    “이 해파리는 불사조처럼 영원한 생명을 삽니다.”

    “수명이 긴 모양이네요.”

    “아니요. 정말로 영원히 삽니다. 몸이 손상되거나 죽을 때가 되면 다시 알로 돌아가니까요. 그래서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젠가 죽어도 저 해파리들은 살아가겠죠. 후임자가 버리지 않고 수조를 관리해준다면.”

    “헐...”

    식었던 흥미가 다시 샘솟았다!

    “투리토프리스 누트리큘라를 보고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강문수 씨에게도 흥미가 많습니다.”

    “저에게요?”

    “죽었다고 알려진 남자가 15년 만에 돌아왔으니까요, 그때의 젊은 모습으로. 영원히 사는 투리토프리스 누트리큘라랑 비슷하지 않나요?”

    “아!”

    “그렇기에 강문수 씨, 당신을 직접 만나고 싶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그 누구보다도 빨리! 약속도 다 취소하고 시간을 냈습니다.”

    “굳이 그렇게까지...”

    굉장히 부담되는걸?

    “제 소개를 하겠습니다. 저는 엘몰랑스 대학 부속병원의 서혜주 부원장입니다.”

    “와! 굉장히 높으신 분이셨군요.”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적성에 맞게 살아온 증거일 뿐. 당신처럼 시간과 죽음을 초월하거나 마법소년처럼 신비한 힘도 없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인간이죠.”

    마법소년.

    내가 살던 지구랑 닮은 이 세계에 떨어진 뒤부터 심심찮게 등장하는 단어.

    “평범하다고 말씀하시는 부원장님도 전혀 늙지 않으셨는데요.”

    “예전에 저를 본 적 있나요?”

    “어... 인터넷에서 검색하다가 우연히 사진을 본 적 있어요.”

    “...그런가요. 제 젊음의 비결은 의학계를 선도하는 엘몰랑스의 힘입니다. 투리토프리스 누트리큘라처럼 젊음을 되돌리진 못하지만, 최대한 오랫동안 붙잡아둘 순 있죠.”

    “그렇군요.”

    몸이 유일한 재산이라서 값싼 종합비타민만 간신히 챙겨 먹는 나에게는 머나먼 얘기였다.

    “강문수 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어떻게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었나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보고받기로는 1906호 앞에서 방황하고 계셨다는데...”

    “맞습니다.”

    “어째서 최강민 씨를 찾고 계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얼굴이 최강민 형이었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과연... 상당히 흥미롭군요.”

    “제가요?”

    “네. 왜냐하면, 최강민 씨는 엘몰랑스 5대 주주이기 때문입니다. 제 고용주인 셈이죠.”

    “......”

    최강민 형은 세계적인 거부(巨富)가 되어있었다.

    * * *

    내가 ‘형’이라고 불렀던 최강민은 엘몰랑스 병원 1906호에 식물인간처럼 누워있으며, 앞으로 살날이 100일도 안 남은 암울한 처지다.

    반면, 이 세계(꿈)의 최강민은 끔찍한 사고로 돌아가신 부친의 뒤를 이어 대기업 총수가 됐다.

    “20년 전, 마법소년이 처음 등장한 시기에는 모두가 경계했습니다. 하지만 최강민 총수가 그에게 투자하는 과감한 결단력으로 세계 시장을 석권하게 됐습니다.

    ‘두 최강민이 너무 달라.’

    거기까지 생각했던 나는 문뜩 떠오른 질문을 했다.

    “저...”

    “부원장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부원장님.”

    “질문이 있나요?”

    “네. 최강훈을 아세요?”

    “압니다. 최강민 회장의 이복동생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요. 그 최강훈이 뭘 하고 있는지도 아시나요?”

    이복형이 혼수상태에 빠지는 바람에 부친의 후계자 수업을 받아야 했던 동생.

    적성과 현재 하는 일이 매우 궁금했다.

    “여전히 감옥에 있습니다.”

    “...예?”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군요.”

    “다, 당연하죠! 어째서 감옥에 간 건가요?!”

    ‘최강훈이 감옥에?!’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부친을 살해하고 도망치다가 마법소년에게 붙잡혔습니다. ”

    “......”

    “함께 있던 비서도 살해하면서 가중처벌에, 마법소년 특별법까지 적용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째 복역 중입니다.”

    “말도 안 돼...!”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녀석이 부친을 살해했다고?

    무언가가 크게 잘못됐다.

    “흥미롭군요. 그때의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그때의 일이요?”

    “강문수 씨가 사망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리고 최강훈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간 날은 20년 전입니다.”

    “아!”

    시간순으로 보면, 최강훈이 감옥에 가고 5년 후에 ‘강문수’가 죽었다.

    그러므로 죽기 전에 벌어진 사건을 알고 있어야 정상.

    하지만 나는 모른다. 모르는 게 당연하고.

    “강문수 씨는 최강훈의 변호사였습니다.”

    “제가요?”

    “네. 적성이 변호사도 아닌 남자가 무보수로 재판에 뛰어들어서 전문 변호사들을 농락했다는 기사로 한때 떠들썩했죠.”

    “설마... 그 남자가 저인가요?”

    “맞습니다.”

    “......”

    이 세계(꿈)의 나는 굉장한 걸물이었던 모양이다.

    “무려 4년 동안 이어진 재판은 당신의 사망으로 흐지부지 끝났고, 그때부터 최강훈이 언론에 주목받는 일은 없었습니다.”

    “......”

    최강훈의 투옥.

    변호사 강문수의 죽음.

    더러운 음모의 악취가 진동했다.

    왜?

    ‘나는 나를 믿어.’

    아무리 친분이 있더라도 최강훈이 정말로 부친을 살해했다면 절대 변호하지 않았을 테니까.

    누명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강문수 씨는 죽음만 초월한 게 아닌 것 같군요. 신체 나이가 10대 후반으로 젊어지면서 기억도 그때로 돌아간 것 같군요.”

    “......”

    완전히 잘못 짚었지만, 서혜주 부원장님이 멋대로 착각하고 수긍해주면 나로선 설득하는 수고를 덜어서 좋았다.

    그보다,

    “부원장님.”

    “당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궁금한 거겠죠?”

    “그렇습니다.”

    “운이 나빴습니다. 당신이 근무하던 변호사사무실 위로 외계인의 비행선이 추락했거든요.”

    “하아?”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던 나는 죽음도 상상을 초월했다!

    “마법소년에게 패배한 외계인의 비행선이 하필이면 도심 한복판에 떨어졌습니다. 그때의 사고로 많은 생명이 목숨을 잃었죠.”

    “......”

    또 마법소년이랑 연관되어 있었다.

    ‘최강훈도, 강문수도.’

    머리가 차갑게 식어갔다.

    마법소년, 최강민.

    둘을 따로 보면 우연이지만, 동일인물이라고 단정하자마자 모든 우연이 퍼즐처럼 딱딱 맞아떨어지면서 필연이 됐다.

    “그렇게 죽었군요.”

    “얘기를 끝까지 들으세요.”

    “네.”

    “운 좋게 살아남은 당신은 엘몰랑스 병원으로 이송되어 응급처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룻밤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죠.”

    “이미 늦었었군요.”

    “아니요. 부러진 갈비뼈가 폐를 살짝 찌른 정도였습니다. 당장 움직이긴 불편해도 죽을 만큼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죠.”

    “......”

    “당시의 자료에는 외계인의 향토병(鄕土病)이란 웃기지도 않는 사망원인이 적혀 있더군요.”

    “정말로 안 웃기네요.”

    내 목젖에 예리한 칼날이 닿는 것처럼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엘몰랑스 병원에서 부활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곳에서 임종을 맞이했으니까요.”

    “네.”

    계속 헛짚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한, 저희가 부검한 덕분에 당시의 자료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유전자부터 꼬리뼈까지 전부. 당신이 진짜 강문수란 사실을 입증할 자료가 충분하죠.”

    “그렇군요.”

    설명을 들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은 묻고 싶었습니다. 되살아난 당신에게.”

    “뭘요?”

    “이미 예상하셨을 텐데요.”

    “......”

    “강문수 씨.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그래도 물어볼게요. 누가 당신을 죽였나요?”

    “......”

    나는 15년 전에 죽은 ‘강문수 변호사’가 아니라서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몰라도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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