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화
“제가 아르바이트로 바빠서 수영을 배울 시간이...”
사실은 매우 한가하지만요!
너무 한가에서 월세도 못 내고 쫓겨날 지경이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목적이...?”
“생활비요.”
“그러면 이렇게 하죠. 숙식을 제공하겠습니다. 대학교 기숙사와 식당이긴 하지만. 어떻습니까?”
“흠...”
‘대박이잖아!’
고민하는 척하면서 마음속으로 만세를 외쳤다.
월급이 없는 건 아쉽지만, 그것까지 바랄 순 없었다. 수영을 배우면서 돈까지 달랄 순 없으니까.
다만,
‘기간이 좀 애매하네.’
내 적성은 수영선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운 좋게 넘겼지만, 1년 동안 배워도 실력이 제자리걸음이면 쫓겨나게 되리라.
그래도 시간을 벌었다.
1년.
나를 고용해준 감독님께는 죄송하지만, 그 안에 그럴싸한 직장을 구할 계획이다.
‘이 감독님도 나랑 비슷한 생각 중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1년이란 제한을 두지 않았을 테니까.
앞으로 1년 동안 내 능력을 살펴본 후에 계약을 연장할지 신중하게 결정하리라.
“문수 형.”
“기다려.”
“응.”
그럴 리 없겠지만, 최강훈이 혹시라도 이상한 말을 할 수도 있기에 조용히 시켰다.
‘변수는 곤란하지.’
내 생계와 직결된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에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감독님.”
“결정했나요?”
“...네. 하겠습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감독님도 쉽지 않은 결정이셨겠지만,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월세방을 빼야 하니까요.”
“아...”
“무슨 일이 있어도 말씀하신 1년을 보증하는 계약서를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수락하면 바로 쓸 예정이었으니.”
“감사합니다.”
“여기서 계약서를 쓸 순 없으니 장소를 옮겨볼까요?”
“네.”
이해가 일치한 우리는 수영장에서 사무실로 이동했다.
* * *
“흠...”
나는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봤다.
이미 검증된 기본양식에 ‘1년 동안 숙식을 보장한다.’라는 내용을 추가했을 뿐이지만.
“됐습니까?”
“...감독님. 이건 무슨 뜻인가요?”
척.
나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손끝으로 가리켰다.
“이중계약. 저랑 합의되지 않은 시합에 출전하거나 팀에 소속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하!”
“다른 질문이 있나요?”
“네. 이거요.”
“계약 기간이 만료됐을 때, 재계약의 우선권을 제가 갖는다는 조항입니다. 남의 선수를 빼앗는 악습을 차단하는 조치죠.”
“아하!”
아는 척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궁금하면 과감히 물어봤다.
‘절대로 안 되지.’
아버지는 자신의 적성도 아니면서 전문가 흉내를 내다가 망하셨다.
오만의 대가.
그렇기에 나는 꼼꼼하게 계약서를 살펴보며 질문했다. 나중에 몰랐다는 변명은 통하지 않기에.
“뭐든지 물어보세요.”
“...이젠 없는 것 같아요.”
“그러면 계약을 진행할까요?”
네.”
스슥-
문제없다고 판단한 나는 계약서에 서명했다.
스슥-
이어서 감독님도 서명했다.
“짧으면 1년, 길면 5년 동안 잘 부탁합니다. 강문수 씨.”
길면 5년.
매우 의미심장한 표현이었다.
‘송선영이 말했었지.’
더 젊은 기린아들이 매년 치고 올라오기 때문에 운동선수의 전성기는 매우 짧다고.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저도 잘 부탁드려요. 그리고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감독님.”
“하하! 1년 뒤에도 함께하게 되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네.”
내 실력이 안 되면 인정(人情)에 휘둘리지 않고 단호하게 계약을 끝내겠다는 의미.
나도 그게 편했다.
“기숙사는 저 창문 밖에 보이는 파란색 건물입니다. 식당은 여기서 안 보이는데...”
“제가 찾아볼게요.”
그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쓸 기숙사 방은 323호. 2인실이라서 개학하면 누군가가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생활해야 한다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지금은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드르륵.
사무실 책상 서랍을 연 감독이 카드를 내게 줬다.
“정기권입니다. 점심과 저녁에 1회씩 쓸 수 있고, 다른 식당에서는 이용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식당 입구에 적힌 오늘의 메뉴 중에서만 고를 수 있습니다.”
“이해했습니다.”
‘와! 선택지가 있다니!’
고등학교 급식처럼 정해진 식단이 아니란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공짜!
아주 마음에 든다.
“아! 그리고 강문수 씨는 학생 신분이 아니라서 도서관이나 컴퓨터실 같은 편의시설은 이용할 수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훈련이 없을 때는 기숙사에서 쉬거나 일을 알아볼 거니까.
“통학버스는 이용해도 되지만, 학생증을 불시에 검사할 수 있기에 맹신하진 마세요.”
“네.”
대학교에 학비를 안 내기 때문에 불만은 딱히 없었다.
내가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기숙사, 수영장, 식당.
이해했다.
“저도 이것저것 준비해야 해서 오늘과 내일은 짐을 옮기고 모레부터 훈련을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어떤가요?”
“가능합니다.”
매우 한가하니까요!
당장 내일부터도 가능하다.
“그러면 수요일 오전 8시에 이 사무실로 오세요.”
“네.”
우리는 완만한 분위기 속에서 무사히 계약을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내 부탁으로 조용히 따라오기만 했던 최강훈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문수 형. 이젠 말해도 돼?”
“어. 말해.”
“수영선수가 될 생각이라고 미리 언질을 줬으면 좋았잖아.”
최강훈이 무척 서운해했다.
“미안.”
미리 짜놓은 대본이 아닌 우연처럼 자연스럽게 진행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비밀을 지키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도 있잖는가?
“아쉬워서 그래.”
“뭐가?”
“말해줬으면 나를 가르쳐준 국가대표 감독님을 소개해줬을 텐데...”
“음?”
이건 무슨 소리?
“아빠가 이분을 후원하거든. 내가 부탁하면 들어주실걸? 형의 실력이 뒤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
“그분은 국가대표를 맡고 계셔서 감독 중에서도 대우가 남달라. 선수들도 특별대우를 받고. 모르긴 해도 지금보다 조건이 더 좋을걸?”
“......”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아무튼, 잘 됐다! 여기는 고등학교랑 가깝잖아! 학교 끝나고 놀러 오기 좋겠어. 헤헤.”
“그러게. 정말 잘됐네. 하, 하, 하...”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 * *
그는 조금 전에 떠난 강문수가 서명한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선수 못지않게 감독들도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뛰어난 선수를 영입하려면?
P의 적성검사를 본 후보생들에 관한 정보를 다른 감독들보다 빠르게 선점해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독점도 좋고.
“이건 기회일지도...”
그로선 경쟁할 엄두도 못 내는 유명한 수영 감독들이 앞다투어 탐내던 후보생이 있었다.
송선영.
국가대표 출신인 모친의 피를 진하게- 아니, 그 이상의 잠재력을 품었다고 평가되는 신동(神童).
하지만 그 소녀는 수영을 안 한다고 못을 박아버렸다.
아무리 설득해도 본인이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설득을 도와줄 부모마저 딸의 선택을 존중하는 상황!
그러니 포기할 수밖에.
‘그리고 이건 내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겠지.’
무기 없이 전쟁터로 뛰어갈 순 없는 법.
마찬가지로, 가르칠 선수가 없는 감독은 감독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안전요원을 자처하면서 직접 옷 벗고(?) 찾아다닐 만큼 주위에 선수가 없었다.
송선영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제법 괜찮은 후보생들은 유명한 감독들이 싹 가져간 탓!
“망할 돼지들.”
P의 적성검사에서 ‘수영선수’가 나온 사회초년생은 전국에 발에 치일 정도로 많다.
하지만 국가대표가 되려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야 한다. 천재들을 압도하는 재능이 없으면 안 된다는 의미. 강도 높은 훈련을 견뎌낼 근성도 필요하고.
즉, 아무리 잘 가르쳐도 선수의 기량이 못 따라오면 올림픽 메달은커녕 국가대표조차 될 수 없다.
스윽-
그는 호주머니에 넣어둔 초시계를 꺼냈다.
「01:54:28」
“1분 54초.”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처음부터 기대를 품고 의도적으로 접근하긴 했지만, 시합 결과를 확인한 후에 또 놀라서 초기화하지 않고 남겨둔 기록.
200m 자유형 세계신기록이랑 20초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20초가 적은 건 아니지만, 그 비실비실한 몸으로?’
터무니없다.
진짜로!
“무당이 어떻게 이런 기록을... 물귀신을 잡으려면 헤엄도 잘 쳐야 해서 그런가?”
슥-
그는 계약서를 갈무리하면서 히쭉히쭉 웃었다.
‘수영만 잘하면 뭐...’
적성은 아무래도 좋았다.
* * *
“지긋지긋한 단칸방이여! 안녕!”
이사를 도울 용역이나 트럭을 부를 돈도 없지만, 챙길 짐도 별로 없어서 괜찮았다.
게다가,
“와! 형! 문수 형!”
이사를 꼭 도와주고 싶다며 보채는 한가한 동생도 있다.
이 부잣집 도련님에게 ‘시간은 돈이야!’ 같은 충고는 안 통하겠지.
“이것만 들어줘.”
“어디로 이사 갔는지 절대 안 가르쳐줘서 진짜 궁금했어!”
“뭐...”
창고 같은- 아니, 실제로 창고였던 이곳을 최강훈과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가난과 불행을.
학교에서는 늘 말끔히 하고 다닌 덕분에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보고 놀랐어.”
“그러냐.”
내가 너무 힘들게 살아서 깜짝 놀란 모양이다.
“괜히 무당이 아니구나! 귀신이 튀어나올 것 같아!”
“......”
“문수 형은 역시 대단해! 진짜 남자다워! 나는 무서워서 하루도 못 지낼 것 같은데...!”
“...가자.”
“응!”
짐을 정리하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간 걸까?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들키지 않기 위해 등을 돌린 채 녀석을 불렀다.
“강훈아.”
“응!”
“힘든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이 형에게 말해. 내가 금전적인 문제 빼고는 다 도와줄게.”
“와아! 정말로?”
“남자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남자! 응!”
우리는 짐을 싸들고 체육대학교 기숙사로 향했다.
덜컹덜컹.
그동안 이 낡은 상가건물에 살며 안면을 튼 상인에게 빌린 작은 수레 덕분에 힘은 들지 않았다.
수레가 들어갈 수 없는 기숙사 복도와 엘리베이터에서 조금 쩔쩔매긴 했지만,
“끄응...!”
“강훈아. 무리하지 말고 저것만 들어줘.”
“응.”
최강훈이 거들어준 덕분에 금방 옮길 수 있었다.
‘고맙다.’
이건 진심이다. 금전적인 문제 빼고 다 도와준다는 약속도.
“형. 침대가 2개야.”
“2인실이라고 했으니까. 2명이 써야 해서 제법 넓네.”
모르는 사람이랑 사생활을 공유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지만, 방 내부에 화장실이 딸려있었다.
상가의 공용화장실을 이용해야 했던 이전이랑 비교하면 호텔이나 다름없는 주거환경.
마음에 들었다.
“으으... 어깨가 뻐근해.”
푹신~
빈 침대에 걸터앉은 최강훈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기다려. 1층 현관에 자판기가 있더라고. 뭐 마시고 싶어? 콜라, 사이다, 냉커피...”
“형. 그보다 할 말이 있어.”
최강훈이 내 눈치를 보듯 말을 머뭇거렸다.
“편히 말해.”
“뭐든지 도와준다고 했잖아.”
“그랬지. 금전적인 문제 빼고.”
부잣집 도련님이 돈을 빌려달라고 할 것 같진 않지만.
“바로 부탁해도 돼?”
“당연하지.”
“형님을 기억해? 자주 놀지는 못했지만...”
“기억하고말고.”
최강훈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이복형 ‘최강민’뿐이다.
하지만 깍듯한 호칭에서 알 수 있듯이 가깝게 지내던 형제 사이는 아니었다.
“강민 형이 왜?”
“아빠가 그랬잖아. 형님을 치료하려고 무당들을 불렀었다고.”
“그랬지.”
“하지만 다 가짜였고.”
“그랬지!”
적성이 ‘무당’도 아니면서 무당 행세를 하는 사람들 탓에 나도 간접적으로 피해를 봤다!
“하지만 형은 진짜잖아.”
“그렇- 음?”
“형의 적성은 무당이 맞잖아? 적성검사결과표에 무당이라고 쓰여 있었잖아. 나도 봤어.”
“뭐... 그렇긴 하지.”
“형님을 치료해줘.”
“하지만 나는 귀신은커녕 점도 볼 줄 모르는-”
“약속!”
“...그래.”
실망하게 되겠지만, 병문안 간다고 편하게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