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6화
세계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시합에서 이기긴 했지만, 이걸로 전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송선영이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옆에서 돕지 않는다면 무책임한 게 아닐까?
그동안 남남처럼 지내온 것도 내 나름의 배려였다.
‘배려라고 느꼈을지는 살짝 걱정되지만!’
약속을 잘 지키는지 감시하는 건 상대를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도와달라고 한 이상, 발 벗고 나서야 한다. 내가 무관심해서 관망만 하던 게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그 시작의 첫 번째로,
“이젠 쉬는 시간마다 교실 앞에서 기다릴게.”
“감시하려고?”
“어.”
적성검사가 끝나고 마지막 겨울방학이 가까워지면서 모든 수업이 해이해진 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감시망에 구멍이 많아서 하는 의미가 없었으리라.
“화장실도?”
“그건 봐줘...”
항상 내가 옆에 있을 필요는 없다.
가족, 친구, 학생, 선생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옥상에서 뛰어내려는 여자애를 만류할 만큼의 정의감만 있으면 충분하다.
“애들이 다 볼 텐데?”
“그건... 어쩔 수 없지.”
대의(大義)를 위해 약간의 부작용은 감수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운명이 내 손에 걸렸으니까!
* * *
딸랑~♬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한 여자애의 손바닥 위에 놓인 세계의 운명도 중요하지만, 당장 내 눈앞에 닥친 월세와 생활비도 무시할 순 없었다.
“열심이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까지 따라온 송선영이 무척 신기하다는 눈으로 구경 중.
그녀의 손에는 사장님이 컴퓨터 게임 하러 떠나기 전에 준 음료와 빵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안 줬었는데!’
이 편의점에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해온 성실한 직원보다 처음 보는 여자애를 챙기다니?
기가 막혔다.
“문수야.”
“말해.”
“계산대 앞에 가만히 서 있으면 심심하지 않아?”
“그래서 손님이 없을 때는 이것저것 하면서 시간을 보내.”
“예를 들자면?”
“학교 숙제.”
“...심심해도 가만히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네.”
“다른 것도 해. 저쪽에 꽂혀 있는 잡지도 읽어.”
“어... 과학이 많네.”
“사장님의 친구가 운영하는 출판사에서 공짜로 준 월간지야.”
“읽는 손님이 있어?”
“컵라면 선반으로 쓰는 사람은 종종 있더라.”
우리는 시답잖은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딸랑~♬
“어서 오세요!”
그러다가 손님이 오면 잠시 대화가 중단되는데...
“옆의 아가씨도 직원인가?”
“아니요.”
여전히 짧은 교복 치마 차림으로 우월한 다리를 꼬고 앉은 송선영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은근히 많았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아가씨. 내 명함이야.”
금테가 둘려진 고급스러운 명함을 내미는 사내라던가.
“전화번호 좀...”
자신의 스마트폰을 그녀에게 내밀면서 전화번호를 물어보거나.
“남자친구 있어?”
옆에 있는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짙은 관심을 보이거나.
또, 또...
하여간 매우 많았다.
“인기 많네.”
“알아.”
자주 겪는 일이란 듯이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송선영.
금테가 둘려진 고급스러운 명함은 이미 종이 쓰레기로 분류되어 분리수거함에 들어갔다.
전화번호는 단칼에 거절. 남자친구가 있냐는 물음에는,
“눈이 장식품인 모양이야.”
“그렇다고 손님에게 눈이 없냐고 물어보는 건...”
꾸겨지는 손님의 표정이 통쾌하면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손님이거든?”
“아, 네.”
내가 그랬으면 곧바로 사장님 호출이었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
“같이 가.”
“너는 손님을 봐야 하잖아.”
“괜찮아.”
그녀가 화장실로 안 가고 옥상으로 향하면 큰일이니까. 손 놓고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다.
“나 때문에 네가 피해를 받는 건 싫은데.”
“자주 편의점을 비우면 사장님께 혼나지만, 이 정도는 괜찮아. 손님이 뜸한 새벽이기도 하고.”
“그렇다면야...”
그래도 송선영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화장실은?”
“...그냥 참을래. 그런데 이 아르바이트는 언제까지야? 학교에도 가야 하잖아.”
“나는 아무런 소식이 없는 네 부모님이 더 신기한데. 연락 안 해줘도 돼? 걱정하실 수도 있잖아.”
“안 해.”
딱 잘라서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도 더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곧 끝나. 다음 아르바이트생이 올 시간이야.”
“하암! 잠은 대체 언제 자?”
입을 가리지도 않고 크게 하품하면서 자신이 무척 졸린다는 걸 강조하는 송선영.
“지금부터 대략 1시간 뒤.”
“너, 사람 맞아?”
“나도 처음에는 절대 못 할 줄 알았어. 그런데 하다 보니 되더라고. 너는 어떻게 할래?”
“알면서 뭘 물어.”
“그래. 내가 네 집 앞까지는 바래다줄게.”
헤어지자마자 집이 아닌 옥상으로 향할 수도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확인해야 한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너의 집으로 가야지.”
“내 집으로? 너도?”
“부모님은 만날 때마다 싸우기 바빠서 딸은 신경도 안 써. 내가 갑자기 사라져도 모를걸?”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집까지 쫓아오는 건 안 된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 * *
진짜 운이 좋았다. 바로 전날에 담임선생님이 오셔서 쓰레기장 같았던 집을 청소해뒀으니까.
내가 사는 상가건물의 단칸방을 본 송선영이 소감을 밝혔다.
“벌써 독립했어?”
“그런 셈이지.”
부모님이 아예 안 계신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해서 다행이다.
“부럽네. 하지만 너처럼 아르바이트하며 살긴 싫어.”
“그것도 올해로 끝이야. 학교만 졸업하면 시간은 많으니까. 본격적으로 취업을 준비해야지.”
“대학은 안 갈 모양이네.”
“무당이 가서 뭐해?”
이 나라에는 귀신을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대학이 없다.
지구 반대편에는 오컬트만 전문으로 가르치는 종합학교가 있다는 소문이 있긴 하지만.
“무당이 적성에 맞는 모양이네.”
“적성이 무당이거든?”
“아, 그랬지.”
“하지만 무당이 아닌 다른 일을 알아볼 거야. 나는 유일암처럼 방송으로 돈을 벌 자신이 없으니까.”
“취업이 쉽지 않을 텐데.”
“그래도 해봐야지.”
적성이 안 맞는 사람을 고용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작업효율이 떨어지니까.
의사는 의사.
간호사는 간호사.
약사는 약사.
고유의 역할이 다 있다.
예로, 적성이 대통령인 사람에게 국가보다 덩치가 작은 기업 경영을 맡기면 잘할까?
전혀!
쓸데없는 정치 발언으로 투자자랑 시비나 안 붙으면 다행이다.
“다른 일...”
“선영이도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어때?”
“...가능할까?”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을 따기보다는 쉽지 않을까?”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을 월등히 넘어선 초인들의 전쟁!
저들이 나와 같은 인간이란 게 믿기지 않는 괴물들이랑 4년마다 다퉈서 ‘세계 4위’ 안에 들어야만 메달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
“나는 수영 외에는 특별히 잘하는 게 없는데.”
“...모델 어때?”
“모델?”
“지금도 예쁘긴 하지만, 네가 그 수영복을 입었을 때는 진짜 눈을 뗄 수 없었어.”
“비키니?”
“어.”
“...나는 누군가가 내 몸을 상품처럼 훑어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
“흠...”
적성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녀가 남의 시선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적성검사도 다른 결과가 나왔으리라.
“나, 졸려. 얼른 자자.”
“침대에서 자. 나는 바닥에 이불 깔면 되니까.”
“어머! 여자라고 신경 써주는 거?”
“어.”
“수상한데... 네가 매일 쓰던 침대잖아. 임신하면 어떡하지?”
“안 해!”
남자의 정자(精子)는 평균 3일, 매우 건강하면 7일까지도 생존할 수 있다지만.
“장담할 수 있어?”
“...불가능해.”
자신감이 조금 떨어졌다.
“혹시라도 잘 때 건드리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불안하면 집에 가서 자.”
“그래도 돼?”
“아니, 미안해. 실언이었어. 제발 여기서 자주세요...”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이곳에 송선영을 들인 이유가 감시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잘 자.”
“너도.”
하루 정도는 충동적으로 가능할 순 있지만, 계속 이렇게 함께 생활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자?”
“......”
“선영아.”
“......”
벌써 꿈나라로 떠난 걸까? 불러도 대답이 없다.
‘대책은 나중에.’
그녀보다 먼저 일어나서 감시를 이어가려면 빨리 잠들어야 한다.
수면에 집중하기로 했다.
“......”
“......”
우우우웅-
나는 스마트폰 진동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이 시간에 어떤 또라... 헉!”
「발신자: 송선영」
목이 꺾길 기세로 침대를 돌아본 나는 아연실색했다.
없다!
송선영이 사라졌다!
삑.
“어디야!”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하는 내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그것은 공포.
그녀를 영원히 못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옥상으로 와.)
“꼼짝 말고 기다려!”
자살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연락하지도 않았을 터.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고 상가건물 옥상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 * *
“선영아!”
“무당 씨. 어서 와.”
송선영은 옥상의 난간에 걸터앉아 있었다.
“위험해. 일단 거기서 내려와.”
“멈춰.”
뚝.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가던 내 발걸음이 그녀의 경고 같은 한마디에 바로 멈췄다.
“선영아. 이건 아니야.”
“미안. 약속을 못 지킬 것 같아.”
“......”
당장 달려가서 그녀의 가녀린 몸을 꽉 붙잡고 싶지만,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떼면 바로 자살.
내가 안심하고 잠든 시점부터 외통수였다.
‘애초에 무리였지.’
나도 먹고 싸는 사람인지라 24시간 감시할 순 없다.
“사실은 알고 있었어. 뭘 해도 적성이 바뀌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바꾸고 싶었어.”
“알아. 네가 얼마나 바꾸고 싶어 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안다.
“고마워. 내 억지에 어울려줘서.”
“앞으로도 계속 어울려줄게. 그러니 거기서 내려와.”
“그건 안 돼.”
“......”
“이렇게 불러낸 이유는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야.”
“유언...?”
“네 불안처럼 완전히 죽을 수도 있으니까. 다시 못 보게 된다면 너무 슬프잖아.”
“그걸 알면서 왜...”
“못 참겠어.”
마약의 금단증상처럼 그녀는 괴로워하고 있었다.
“진정해.”
“문수야.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자살할게. 성공하면 부자는 힘들더라도 돈을 제법 벌 수 있어. 나, 네가 일하는 동안 틈틈이 주식을 봐뒀거든.”
“선영아...”
나와 한 약속 때문에 힘들어하는 송선영의 모습을 쭉 봐왔다.
학교에서도, 편의점에서도, 길에서도, 집에서도...
그래서 잘 안다. 그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웃으면서 다시 보자.”
“잠깐만.”
“......”
“급한 건 아니잖아? 이게 정말로 우리의 마지막 대화일 수도 있어.”
“...거기서 말해.”
이것이 마지막 기회.
나는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지만,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너는 죽어.”
“아닐 수도 있어.”
“불확실한 희망을 품지 마. 나는 무당이야. 이런 오컬트가 전문인 사람이라고.”
내 적성이 ‘무당’이란 사실에 감사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무당...”
“너처럼 기억을 안 잃는 것만 봐도 알잖아?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이번엔 확실하게 죽는다고.”
“...그러면 유언이 되겠네.”
“선영아!”
“미안.”
몸의 무게중심을 조금만 뒤로 젖혀도 추락하는 아찔한 자세!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뛰어내리진 않았다.
‘혹시... 무서운 건가?’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자살하던 그녀에게 망설임이 생겼다.
이건 기회.
마지막의 마지막 기회!
나는 그녀에게 한 번 더 거짓말하기로 했다.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너는 모델이 되면 성공할 거야.”
“말했잖아. 못 해.”
“모든 사람이 마네킹이라고 생각해봐.”
“마네킹...?”
“네가 먼저 말했잖아.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마네킹처럼 보인다고. 그래서 백화점에서도 속옷을-”
“그 얘기는 하지 마.”
“네.”
우리는 눈싸움을 벌이듯 서로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
갈등하는 게 보였다.
“과거의 송선영이었다면 모델은 무리였겠지. 하지만 지금의 너에게는 P의 적성검사기로 측정할 수 없는 경험이 있어.”
“......”
“모든 사람을 마네킹 취급하면 부끄럽지 않을 거야. 내 말이 틀려?”
“맞아.”
“너는 모델이 되면 무조건 성공할 거야. 내가 장담할게.”
“......”
“선영-”
“...해볼게. 모델.”
“선영아!”
드디어 발을 뗀 나는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와락!
“아, 아프잖아!”
“고마워!”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기세로 꽉 끌어안았다.
“뭐래…. 나야말로 정말 고마워.”
“선영아. 할 말이 있어.”
“잠깐. 내가 먼저 말할 거야. 나는 문수가 정말 좋-”
* * *
“아...?”
마음속까지 차가워진 송선영의 몸에 온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뭐지?’
송선영이 자살하지 않았는데도 시야가 바뀌었다.
게다가,
‘학교가 아니잖아?’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내 복장은 새하얀 환자복이었고, 손목에는 링거가 꽂혀 있었다.
그렇다면 병원일까?
“윽!”
고개를 들어서 주위를 좀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과거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내게 입원한 기억은 없으니까.
이 상황을 누가 설명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머! 선생님! 선생님! 환자가 깨어났어요!”
“뭣?! 정말입니까?!”
“네! 혼수상태였던 강문수 씨가 열흘 만에 깨어났어요!”
“오오! 이런 기적이...!”
“......”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