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드림 브레이커-15화 (16/232)
  • 015화

    [1장-5절] 우리는 신이 아니야.

    다음 날, 영화배우처럼 교실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도 멀쩡하게 등교한 나를 본 친구들의 질문 사례에 시달렸다. 그 현장에 계셨던 선생님을 찾아가서 사과도 드리고.

    고3병.

    어디에 껴맞춰도 말이 되는 완벽한 변명거리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문수의 적성은 영화배우가 아닐까?”

    “그건 아니지. 위험한 장면은 스턴트맨이 대신하잖아.”

    “그러면 스턴트맨이 되겠네!”

    “스턴트맨도 문수처럼 무모한 짓은 안 하거든?”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나의 적성을 주제로 이러쿵저러쿵 토론했다.

    ‘영화배우, 스턴트맨. 둘 다 틀렸어. 내 적성은 무당이거든.’

    예전의 나였다면 적당히 맞장구치면서 어울렸겠지만, 지금은 저들의 대화를 가만히 바라보며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달라졌으니까!

    똑같은 시간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세상이 전부 아름답게 보였다.

    “야. 문수의 얼굴을 봐.”

    “갑자기 실실 쪼개면서 웃는데?”

    “내버려 둬. 재미있는 상상이라도 하나 보지.”

    “상태가 안 좋네.”

    오해를 받더라도 말이다!

    “드디어...”

    이전까지는 마네킹처럼 무시해온 이들이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사람이 모여 사는 공간에 내가 있음을 실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

    사람과 사회가 정한 약속.

    내 마음속에서 잃어버렸던 것들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아니지.’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 오늘 시합에서 송선영에게 패배하면 또 잃게 되니까.

    “강문수 학생.”

    “네.”

    “싫으면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 말고 선생님께 말하세요. 341쪽 2번 문제를 풀어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문제를 풀어달라고 학생에게 부탁하는 상황!

    오컬트로 회귀해서 없었던 일로 만들면 편하겠지만, 이건 내가 감수해야만 하는 업보(業報)다.

    “물론입니다.”

    그래야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에.

    * * *

    자세히는 모르지만, 국가대표였던 송선영의 어머니 인맥으로 체육대학 수영장 일부를 잠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는 것 같다.

    ‘떨리네.’

    탈의실에서 수영복을 갈아입고 수영장에 입장하자마자 긴장으로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적성검사를 ‘처음’ 받았을 때보다 훨씬!

    ‘송선영은... 아!’

    늘 나보다 늦던 그녀가 오늘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일찍 왔네.”

    나를 이기겠다고 마음먹은 송선영의 수영복은 물의 저항을 고려한 일체형의 선수용.

    늘 예쁘게만 보이던 그녀의 긴 다리도 오늘은 무섭게 느껴졌다.

    “약속, 잊지 마.”

    비장감마저 느껴지는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는 송선영.

    그녀에게 초창기의 여유나 오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따라잡힌 상황이니까.

    “너도.”

    내가 이기면, 어떤 적성이 나오더라도 자살하지 않겠다는 약속.

    반대로 내가 지면, 송선영의 아담이 되어 둘만의 낙원으로...

    ‘져도 나쁘지 않겠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걱정 없이 아름다운 이브랑 영원히 사는 삶!

    모두가 마네킹처럼 보여도 혼자가 아니기에 괜찮다. 송선영도 이걸 생각하고 있을 터.

    ‘이겨도 좋고, 져도 좋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최악은 없었다.

    ‘...아니지.’

    반드시 이겨야 한다. 한 번이라도 오컬트가 발동하지 않으면 송선영이 죽으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오컬트에 의존하는 안일한 마음을 떨쳐냈다.

    “준비...!”

    심판은 적성이 수영 감독인 안전요원이 맡았다.

    체육대학에서 오랫동안 선수들의 시합을 감독해온 만큼 일반인보다는 훨씬 잘 볼 것이다.

    “......”

    “......”

    다른 이용자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수영장 일부를 비운 우리는 나란히 출발선 위에 섰다.

    출발 신호는 이번에도 수영장 정면에 걸린 시계판.

    초침이 12시를 가리키면 출발이다.

    똑딱, 똑딱, 똑딱... 똑-딱!

    ‘지금...!’

    풍덩!

    부드러운 다이빙으로 출발한 나는 정면만 바라봤다.

    ‘호흡, 동작, 체력...’

    송선영이 어디에 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고 최고의 속도를 내는 것만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에게 배운 지식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촤아아-

    가로막는 물길을 밀어내면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고마워.’

    자신감을 깎아서 적성을 바꾼다는 계획을 짠 송선영.

    이런 그녀 때문에 억지로 배우기 시작한 수영이었지만, 즐겁고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했다.

    탁.

    손끝이 벽에 닿았다.

    그 얘기는,

    “푸하!”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삐이이이-

    그리고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가 천둥처럼 요란하게 들렸다.

    ‘송선영은?’

    바로 고개를 돌려서 송선영의 위치부터 확인했다.

    “후하...”

    수영장의 벽에 등을 기댄 그녀도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졌나? 이겼나?’

    누가 이겼는지 바로 확인이 안 되는 상황.

    같은 생각을 한 우리는 동시에 안전요원을 쳐다봤다.

    “누가 이겼죠?”

    “누가 빨랐죠?”

    손에 든 초시계의 기록을 보면서 넋을 놔버린 안전요원.

    우리의 재촉에 정신이 번쩍 든 그가 외쳤다.

    “아, 맞아. 승자는...!”

    * * *

    나란히 붙어 앉은 우리는 수영장 물에 발을 담근 채 온몸의 열기와 땀을 식히며 시간을 보냈다.

    “......”

    “......”

    서로의 표정을 확인하지 않고 대화도 없었지만, 지금은 이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 이 침묵도 영원할 순 없었다.

    “...내가 졌어.”

    찰싹찰싹~

    담담한 어조로 패배를 인정한 송선영이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장난스럽게 물장구쳤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태연한 척하는 게 느껴졌다.

    “아슬아슬했어.”

    “그래도 졌다는 건 똑같아. 엄마도 중요한 시합에서 그랬고... 아깝게 졌다면서 반쪽짜리 메달이나 연금을 주진 않아.”

    “누군가와 경쟁하는 게 싫어?”

    “...싫어하진 않아. 정말로 싫었다면 수영선수가 안 나왔겠지.”

    “그건... 그렇네.”

    무심코 말하긴 했지만, 정말 한심한 질문이었다. 애초에 경쟁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면 적성검사에서 수영선수가 안 나왔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자신의 적성을 싫어하고 있다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뭘 하고 싶어?”

    “모르겠어.”

    “일단은 적성검사부터 본 후에 고민하는 게 어때?”

    “...문수야.”

    “말해.”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아. 그래도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준비한 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자살하면 안 될까?”

    “무슨 준비?”

    “부자가 될 준비.”

    “아...”

    송선영은 주식이나 부동산 정보를 암기한 후에 마지막으로 회귀하려는 것 같다.

    이건 융통성의 문제.

    하지만 예외를 둔 마지막 한 번이 안전하다는 보장은?

    없었다.

    “약속을 안 지키겠다는 말이 아니야. 마지막으로 딱 한 번이면 돼.”

    “......”

    “나쁜 제안은 아니잖아? 너도 부자가 될 기회인데.”

    “흠...”

    간단히 뿌리칠 수 없는 악마의 유혹처럼 치명적이었다.

    합리적, 실리적, 미래지향적...

    오컬트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발동한다면 완벽한 계획이다.

    “문수야. 그렇게 하자.”

    “...미안.”

    “왜?”

    “쉽고 빠르게 부자가 되는 방법이란 건 알겠어. 하지만 목숨을 담보로 걸 가치는 없어.”

    “지금까지 문제 없이 과거로 돌아갔잖아.”

    “이젠 아니야.”

    내 직감이 강하게 외치고 있었다.

    지금처럼 오컬트에 의존하면 크게 후회할 거라고.

    “그걸 어떻게 알아?”

    뚜렷한 근거나 증거는 없다. 하지만 보여줘야만 했다.

    “무당이니까.”

    확신하는 이유를.

    “아...”

    “무당이라서 알 수 있어.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는 걸.”

    “...확실해?”

    “확실해.”

    틀리면 그녀에게서 부자가 될 기회를 영영 빼앗는 셈.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못 믿겠어.”

    “나도 부자가 될 기회를 포기하기 싫어.”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

    “아...”

    “너만 포기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다음은 없으니까.”

    “...알겠어.”

    “믿어줘서 고마워!”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물어볼게.”

    “뭐든지.”

    “만약, 내가 이기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다음은 없다며.”

    충분히 궁금할 수 있는 문제.

    나는 고민 없이 답했다.

    “그때는 같이 죽을 생각이었어. 말리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

    “못 믿겠어?”

    “...부탁 하나만 할게.”

    “뭔데?”

    “내가 또 자살하려고 하면 말려줘.”

    “알겠어.”

    “슬슬 가자. 저 사람이 귀찮게 하기 전에.”

    시합 기록에 놀란 수영 감독이 먹잇감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시선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숙녀 먼저.”

    “뭐?”

    “내가 상대하고 있을게. 먼저 가.”

    “아! 고마워.”

    내 말뜻을 이해한 송선영이 피식 웃으며 탈의실로 향했다.

    “저기, 학생...!”

    “친구입니다. 제가 이기기도 했고요. 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에게 해주세요.”

    곧 아르바이트가 있어서 오래 대화할 순 없지만요!

    * * *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귀중한 시간이란 생각 때문일까?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알차게 사용했다.

    “문수 형~!”

    코흘리개 초등학생일 때부터 친하게 지내온 2학년 후배 최강훈이 쪼르르 달려왔다.

    남자의 외모에는 관심 없어서 여태 몰랐던 사실인데, 이 녀석도 송선영 못지않게 다리가 긴 편이었다.

    ‘혹시, 이 녀석도...?’

    수영장 옆을 걷는 꽃미남을 응원하는 소녀 군단이 머릿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형?”

    “어흠! 아무것도 아니야. 왜?”

    “형이 예쁜 선배랑 사귄다는 얘기를 들어서.”

    “누가 그런 헛소문을...”

    “학교에 소문이 쫙 났던데? 백화점에서 여성 속옷을 고르는 형을 본 학생이 있다더라고.”

    “......”

    소문을 퍼트린 녀석의 목을 비틀어주고 싶다.

    “형. 그게 정말이야?”

    “어. 정말이야. 사귄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수영 시합이 끝난 뒤부터 우리의 관계는 서먹서먹해졌으니까.

    학교 복도에서 마주쳐도 눈빛만 교환하는 정도다.

    “우와!”

    “허구한 날마다 여자애들에게 고백받는 네가 보기에는-”

    “진짜 대단해! 남자다워!”

    “그러냐...”

    ‘여자의 고백을 걷어차는 게 남자답다고 했던 것 같은데?’

    최강훈이 생각하는 남자다움이 뭔지 알 수 없게 됐다.

    “형! 형!”

    “또 왜?”

    “나도 형처럼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면 남자다워질까?”

    “켁! 절대로 따라 하지 마! 흉내도 안- 콜록콜록!”

    너무 놀라서 사레들린 나는 가슴을 치며 극구 만류했다.

    ‘죽으려고 작정했나!’

    녀석이 생각하는 멋진 남자보다 귀신이 먼저 될 것이다.

    “나도 알아. 나는 무서워서 못 뛰어내린다는 거.”

    “그래... 응? 그걸 어떻게 알아?”

    “집에서 시도해봤어.”

    “신이시여...”

    최강훈의 부모님이 얼마나 놀랐을지는 안 봐도 훤했다.

    만약, 나 때문에 시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소름이 쫙 돋았다.

    “형은 정말 대단해.”

    “강훈아. 멀쩡한 계단을 놔두고 창문을 이용하는 인간은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바보야.”

    “그거 말고.”

    “그러면?”

    “조금 전에 적성검사결과가 나왔잖아. 형만 아무렇지 않아서.”

    “뭐...”

    적성검사결과를 한두 번 받아봤어야 말이지.

    “그래서 적성이 뭐야?”

    “이건 소문이 안 난 모양이네.”

    “방금 받았잖아. 소문이 나기에는 아직 이르지 않아?”

    “아, 그렇네.”

    과거의 기억이랑 혼동했다.

    “항상 주목받는 형이라면 금방 소문나겠지만... 그래서 형의 적성은 뭐야?”

    “무당.”

    “와! 진짜로?!”

    “어.”

    “대단하다! 문수 형은 적성도 남자다울 줄 알았다니까!”

    “...강훈아?”

    “응!”

    “무당이 뭔지는 알고 있니?”

    “당연히 알지! 나쁜 귀신을 혼내주는 사람이잖아. 내가 유일암의 방송을 얼마나 많이 봤는데!”

    “그러냐...”

    나와 최강훈이 생각하는 ‘무당 유일암’이 전혀 다르다는 건 아주 잘 알겠다.

    “앗! 형! 뒤에 여자친구가 왔어!”

    “나는 여자친구가...”

    “무당 씨.”

    정말로 등 뒤에서 송선영의 나를 불렀다.

    그건 괜찮은데, 생선을 문 고양이 같은 표정의 최강훈이 매우 신경 쓰였다.

    “방금 나온 적성을 벌써 가르쳐준 거야?! 멋져! 여자친구를 가장 먼저 챙기는구나!”

    “그건-”

    “눈치 빠른 나는 얼른 빠져줄게! 안녕~!”

    “야. 이 형의 말을 우선- 최강훈! 야! 야~!”

    휙~

    최강훈은 긴 다리를 활용해서 바람처럼 떠났다.

    “눈치는 무슨...”

    “너야말로 눈치가 없네. 친한 동생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내가 여자친구가 아니면 뭔데?”

    “여자친구지!”

    “아닌데?”

    “......”

    “농담이야. 하지만 살짝 의심되는걸. 여자친구의 적성이 궁금하지 않아?”

    “궁금해!”

    안 궁금하면 매우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정말로?”

    “정말로.”

    “그러면 봐.”

    펄럭~

    송선영이 자신의 적성검사결과가 적힌 용지를 활짝 펼쳤다.

    「수영선수」

    “아...”

    “그래서 문수야. 부탁이 있어.”

    “자살만 아니면.”

    “계속 곁에 있어 줘. 나, 너무 자살하고 싶어.”

    “...그래.”

    안 들어주기에는 너무 무서운 부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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