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화
‘신기하네.’
기적이 벌어졌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송선영을 절대 못 따라잡는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수영이란 스포츠는 경험만 많다고 되는 게 아니기에.
육체의 능력도 매우 중요하다. 기술보다 타고난 신체 비율이 훨씬 중요한 종목이 있을 정도.
그렇기에,
‘말이 안 돼.’
내가 송선영의 기록을 따라잡은 건 기적이다. 그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육체 단련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는 수개월을 투자해서 몸을 만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회귀로 초기화되네?
운전자의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자동차 엔진의 성능이 떨어지면 빠르게 달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
그런데 그 불가능을 해냈다.
촤아-
재시합이 시작되고, 체력을 완벽하게 회복한 나는 팔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헤엄쳤다.
내 눈에는 항상 똑같은 몸뚱이.
그 탓에 성장도 멈췄다.
아니-
멈췄어야 정상이다.
“푸하!”
“파!”
회귀로 체력을 완전히 회복한 후에 치러진 재시합.
탁!
타악!
이번에도 우리는 동시에 도착해서 승패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누가 이겼나요?”
“제가 이겼죠?”
수영장의 안전요원에게 공정한 심판을 봐달라고 부탁했기에 서로 이겼다고 우기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승자는?
초시계에서 눈을 뗀 안전요원이 선언했다.
“제 눈에는 여성분이 미세한 차이로 이겼습니다.”
“이런.”
기적은 있었지만, 이번에도 패배의 쓴맛을 보고야 말았다.
옆을 봤더니,
“...미세한 차이요?”
송선영은 이겼음에도 이전처럼 우쭐대며 웃지 못했다.
“네. 저 같은 수영 감독, 심판관이 아닌 평범한 사람은 육안(肉眼)으로 구분 못 할 정도로 아슬아슬한 차이였습니다.”
“......”
“그나저나 기록이 정말 어마어마하네요. 두 분은 적성이 수영선수이신가요?”
수영 감독이라고 자연스럽게 자신을 소개한 안전요원의 질문.
우리는 각자 답했다.
“아직 적성검사를 안 받았아요.”
“아뇨.”
송선영은 자신의 적성을 알면서도 대답을 회피했고, 나는 아니라고 단언했다.
그러자 안전요원- 수영 감독이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허! 남성분은 적성이 수영선수가 아닌데도 이런 기록이 나왔다는 건가요?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적성인지 알 수 있을까요?”
“무당이요.”
“무당? 그... 귀신을 쫓는...?”
“네. 그 무당이요.”
적성에 해탈한 나는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어... 음... 물에 사는 물귀신을 쫓아내려면 수영도 잘해야겠죠. 이해했습니다.”
“하하! 그런 셈이죠.”
수영 감독에게 맞장구치며 어영부영 상황을 넘겼다.
‘송선영은?’
수영에 재능이 없는 일반인에게 져서 적성을 바꾼다는 계획을 세웠던 송선영.
그녀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미세한 차이라니...”
“왜?”
정말로 궁금해서 질문했다.
나에게 지고 싶은 것 아니었나?
송선영은 내 성장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자존심 상한 범고래 같다고 할까!
“무당 씨. 다시 해.”
“바로? 네가 이겼잖아. 좀 더 연습한 후에...”
“아슬아슬하게 이겼잖아! 진 거나 다름없어.”
“오! 그러면 이제 적성검사를 받으러 가자!”
약속대로 자살도 그만하고!
내 기대 어린 시선을 받은 송선영이 코끝을 찡그렸다.
“뭐래?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
“......”
“지금부터는 나도 몸을 풀고 진지하게 할 거야.”
“진지하게? 이미 진지하게 한 것 아니었어? 시합 전에 말했잖아. 제대로 한다고.”
“몸이 안 풀렸었어.”
“뭐... 좋아. 다시 한다고 기록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나도 이대로 흐지부지 끝내기는 아쉬웠다. 따라잡긴 해도 이긴 건 아니기에.
마무리가 시원찮다고 할까?
그래서 송선영의 억지를 들어주기로 했다.
* * *
강문수.
전교 1등처럼 압도적으로 특출나지 않았음에도 학교의 모든 선생님이 친자식처럼 예뻐하는 모범생.
하지만 내게는 조금 다른 의미의 남자애였다.
‘나랑 똑같아.’
적성이 무당인 강문수에게는 과거로 되돌아가도 기억을 잃지 않는 신비한 힘이 있었다.
두근.
교실에서 뛰어내리는 그를 보자마자 가슴이 또 아려왔다.
“얼른 가자!”
최근에 나를 따라잡은 뒤부터 목소리에 의욕이 넘쳐났다.
“선영이라고 불러.”
“선영아! 얼른 가자!”
“잠깐.”
“왜?”
“...지금까지 열심히 했잖아. 목표였던 나를 거의 따라잡았고. 그러니 조금만 쉬자.”
“그래.”
강문수는 학교 담장을 넘으면서 순순히 승낙했다.
그 뒤에 나도-
움찔.
담장을 넘기 위해 다리를 들다가 멈췄다.
“문수야.”
“또 왜?”
“고개 돌려.”
“응?”
“다른 곳을 보고 있어. 속옷 보이잖아.”
“걱정하지 마. 안 보이던...”
“빨리!”
“어.”
“......”
나도 갑자기 신경 쓰이기 시작한 이유를 모르겠다.
지금까지 학교 담장을 수백 번 넘었지만, 단 한 번도 교복 치마를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척!
나는 주변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담장에 발을 걸치며 넘었다.
“됐어. 이젠 봐도 돼.”
“어디 가고 싶어?”
두근.
강문수에게 질문을 받자마자 심장이 또 이상 신호를 보냈다.
“...너는?”
“괜찮은 식당. 먹을 필요성을 못 느껴서 쭉 생략했잖아.”
“아!”
나는 체육대학 수영장의 이용시간이 끝날 때쯤에 자살했다. 그래야 곧바로 또 이용할 수 있으니까.
여기에 맹점이 있었다.
“지금도 배고프진 않지만...”
공복감을 느끼지 못하기에 무언가를 먹을 생각도 못 했다.
문수도, 나도.
그건 다시 말해,
“삭막했네.”
또래의 남자애랑 추억을 공유하고 함께했다. 그런데 우리는 물 한 잔조차 같이 한 적이 없었다.
수영! 수영! 또 수영!
‘조금 충격인걸.’
같이 영화를 보고 수족관에 간다는 계획은 잠시 보류했다.
“문수야. 네가 가고 싶은 식당으로 가자.”
“그러면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 갈까? 점원 특권으로 싸게-”
“야!”
“놀랐잖아!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
“나처럼 괜찮은 여자애를 누추한 편의점에 데려간다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편의점을 애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화가 났다!
“편의점을 무시하지 마. 요즘은 건강식도 잘 나오는-”
“따라와. 지금부터 편의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마.”
“......”
“그래도 취향은 존중해줄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라면.”
“편의점은 말하지 말랬잖아!”
“편의점에서만 라면을 파는 건 아니거든?”
“생각을 좀 하고 말해. 너는 나 같은 여자애랑 싸구려 라면을 먹고 싶니?”
“진정해.”
“빨리 생각해!”
나도 왜 흥분하는지 모르겠다.
* * *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급 레스토랑 ‘빠르나루’에 갔다.
빠르나루.
이곳의 주방장은 요식업계를 주름잡는 거장으로, 최고의 맛과 향을 위해 가격을 타협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강이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착석한 우리 주위에는 지갑이 두둑할 것 같은 복장의 손님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가 와도 되나...?”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툭 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재벌가 딸내미라도 된 것처럼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앉은 송선영이 메뉴판을 보며 웃었다.
“그렇다면야...”
방송으로나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지만, 직접 들어와서 시식을 해볼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손님. 주문하시겠어요?”
빠르나루의 명성과 고급스러운 분위기에 취한 나는 직원들마저 최고로 보이는 착시에 빠졌다.
‘여기 직원들은 전부 적성을 보고 뽑은 거겠지...?’
내가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주문할게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전부 주세요.”
“...손님. 두 분이 먹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것 같은-”
“주문한다고 했을 텐데?”
방금까지 기분 좋게 웃던 송선영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고, 말투도 싸늘하게 바뀌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숙이며 사과한 직원이 부랴부랴 떠났다.
“...나름 조언해준 건데, 너무 쌀쌀맞게 대한 거 아니야?”
비슷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음에 두지 마. 회귀하면 싹 잊어버릴 건데.”
“그건... 그렇지.”
저 종업원에게 사과한다고 해서 바뀔 건 없었다.
“여기 음식은 전부 괜찮은 편이니 전부 맛봐.”
“많이 남을 것 같은데...”
일일이 세어본 건 아니지만, 20인분은 족히 되지 않을까.
“나도 알아. 처음부터 남길 생각으로 잔뜩 시킨 거였어.”
“너무 아까운데... 돈도 아깝고.”
삶이 팍팍해진 뒤부터 뭐든지 바닥까지 핥아먹는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사치였다.
“그러면 배 터질 때까지 먹어. 탈나도 회귀하면 나으니까.”
“거참...”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거만한 부자처럼 행동하는 그녀에게 가벼운 핀잔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만큼 눈치 없진 않다.
척, 척, 척, 척...
우리가 주문한 요리가 기차처럼 줄줄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
고급스러운 은접시 위에 예술품처럼 올려진 요리는 건드리기 아까운 수준이었지만, 여기서 풍겨오는 냄새가 내 침샘을 자극하는 바람에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찰칵-!
접시를 헤집기 전에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서 남겨두기로 했다.
“뭐해?”
“보면 몰라? 음식 사진 찍잖아.”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거든? 어차피 곧 사라질 텐데, 뭐하러 찍느냐고 묻는 거였어.”
“아...”
송선영의 핀잔에 나는 스마트폰을 살포시 내려놨다.
‘헛짓했네.’
내가 열심히 기념사진을 찍어서 추억으로 남기고 싶어도, 회귀하면 싹 사라지니까.
과거로 돌아가도 사라지지 않는 내 기억 속에 흐릿하게라도 담아두는 수밖에 없다.
“얼른 먹자.”
“잘 먹겠습니다!”
빠르나루 레스토랑.
가격 빼고 전부 만족스러웠다.
* * *
만족스러운 식사 후, 송선영은 자연스럽게 같은 건물 지하에 있는 수족관에 갔다.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도 얼떨결에 따라가게 되고...
“물고기도 적성이 있을까?”
“P의 적성검사기는 인간 전용이라서 다른 생명체는 검사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개조하면 되잖아.”
“모든 나라가 적성검사기의 양산화에는 성공했지만, 입맛대로 뜯어고치는 건 실패했어.”
“잘 아네.”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편의점에 매달 오는 과학 월간지가 있거든. 손님들 보라고 놔둔 건데, 아무도 손을 안 대서 내가 대신 봐.”
“문수는 과학이 재미있어?”
“어. 흥미롭잖아.”
과학을 알면 알수록 우리가 잘못 알거나 오해하는 지식이 매우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얻은 과학 지식을 일상에서 종종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어서 더욱 좋고.
다만, 오컬트는 과학으로 설명이 안 돼서 도움보다 혼란을 가중하고 있다.
“나는 과학이 싫은데.”
“취미를 존중해줘.”
“다른 취미는 뭐가 있어?”
“흠...”
‘내게 다른 취미가 있나?’
남들이 취미생활을 즐길 시간에 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편의점에 손님이 없어서 심심할 때는 스마트폰으로 과학 관련 기사를 찾아보는 게 유일한 낙(樂).
최근에는 판타지 소설을 주로 보긴 했지만.
‘최근이라...’
날짜로 보면 최근인데, 회귀를 너무 자주 한 탓에 체감상으로는 아주 오래된 것 같다.
“걸으면서 말을 많이 했더니 목이 좀 마르네...”
그렇게 운을 떼면서 수족관 내부의 매점을 쳐다보는 송선영.
눈치가 아예 없지 않은 나는 자연스럽게 제안했다.
“...뭐라도 마실래?”
“어!”
“이번에는 내가 살게.”
“그래.”
예전의 나라면 탄산음료를 원가의 100배 가격에 절대 사 마시지 않지만, 송선영처럼 회귀를 믿고 큰 지출을 결심했다.
‘곧 돌아올 돈이니까!’
그렇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계산하기 위해 꺼낸 직불카드를 쥔 오른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기, 주문하신 두 잔이요.”
“감사합니다.”
나의 피 같은 월급으로 산 탄산음료를 송선영에게 건냈다.
“고마워. 공짜이긴 하지만.”
“하, 하...”
음료가 공짜라는 말에 점원이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가면서 마시자.”
“좋지.”
우리는 본격적으로 수족관의 물고기를 관람했다.
“오!”
“와아!”
우리의 머리 위로 상어와 가오리가 헤엄쳐서 지나가기도 하고...
“신기하네.”
“그러게.”
스스로 빛을 내는 해파리와 몸이 투명한 열대어도 보고...
“귀여워.”
“이게?”
전혀 귀엽지 않은 펭귄과 수달에서 의견이 갈리기도 하고...
「물고기 친구들에게 과자를 주지 마세요!」
「물에 손을 넣지 마세요! 물릴 수 있어요!」
호기심 많은 아이들을 위한 경고문도 있었다.
“이 녀석들은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헤엄칠 수 있어서.”
“꼭 그렇지도 않아.”
“뭐가?”
“녀석들의 주둥이를 봐. 거기만 색이 옅지? 벽에 너무 부딪혀서 닳은 거야. 자유를 잃고 인간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 음?”
송선영에게 조잡한 지식을 뽐내던 나는 두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마음에 안 들어.”
콸콸!
그녀가 마시던 탄산음료를 수조 안에 붓고 있었던 탓이다!
“뭐해?!”
“왜?”
“탄산음료를 부으면 어떻게 해! 그러다가 물고기가 죽으면-”
“딱히 상관없잖아? 죽어도 다시 살아날 텐데.”
“그건 그런데...”
다행히 나 외에는 본 사람이 없는 듯했다. 그러니 해도 괜찮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지만.
“재미없어졌어. 이만 나가자.”
“...그래.”
중요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