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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브레이커-7화 (8/232)
  • 007화

    “거참….”

    신성한 학교에서 연애질이라니?

    너무 기가 막혀서 최강훈을 3학년 교실에서 쫓아내고 싶었지만, 미래를 바꾼 제삼자의 ‘흔적’을 놓칠 순 없었다.

    “사소한 고백 얘기라도 해봐.”

    “응. 3학년 선배가 쉬는 시간에 찾아와서 내게 쪽지를 줬는데, 거기에 좋아한다고 적혀 있었어.”

    “...끝?”

    “응.”

    “그 뒤에는?”

    “응?”

    “고백받았잖아. 그 선배에게 뭐라고 답해줬어?”

    “답해줘야 해?”

    “......”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하는 최강훈의 머리를 쥐어박으려다가 말았다.

    ‘일단은 정보부터.’

    이 심오한 주제에서 한 번 이탈하면 의심 없이 되돌아오기 힘들 것 같았으니까.

    “강훈아.”

    “응.”

    “여성의 고백 쪽지를 무시하는 행동은 남자답지 않아.”

    근거 없는 발언을 생각나는 대로 내뱉었다.

    “어? 남자다운 거 아니야?”

    “아니야.”

    내 지적에 최강훈이 이마를 찡그리며 반박했다.

    “왜? 도도한 나쁜 남자 같다고 생각했는데.”

    “드라마를 너무 봤구나!”

    ‘이것이 가진 자의 여유인가!’

    최강훈을 바라보는 내 미소가 점점 썩어갔다.

    “드라마는 안 봤지만, 이러면 안 된다는 거지?”

    내 표정을 오해한 최강훈이 잽싸게 정정했다.

    “맞아.”

    “형은 역시 대단해. 가진 자의 여유가 느껴져.”

    “내가?”

    교과서, 참고서 살 돈도 없어서 쩔쩔매는 소년가장인데?

    “그래서 인기도 많잖아.”

    “전혀 아닌데.”

    “겸손하긴. 형은 저학년생들 사이에서도 제법 유명해. 성적 좋고, 운동 잘하고, 부지런하고, 남자답게 생겼고…. 다방면으로 잘났잖아.”

    “흠.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오만한 시절이 있었지.”

    부정하진 않았다. 아버지가 무책임하게 돌아가신 뒤부터 정말 치열하게 살았으니까.

    하지만 적성검사결과에서 ‘무당’이 나온 뒤부터 겸손해졌다.

    “그러니 도와줘.”

    “뭘?”

    “쪽지로 내게 고백한 선배에게 답장해주라며. 하지만 뭐라고 답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아니, 동생아. 정말로 나는 조언해 줄 게 없는데.”

    최강훈이랑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면서 머릿속으로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강훈이에게 고백했다는 3학년 여학생이 혹시…?’

    조사해봐서 나쁠 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치사하네.”

    “동생아.”

    “좀 도와줘.”

    “그래. 도와주마.”

    “이렇게 부탁하- 어?! 정말로 도와줄 거야?!”

    “그렇다니깐.”

    여자라는 생물을 아예 몰라서 최강훈이 바라는 전문적인 상담은 불가능하지만, 이 오컬트를 해결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양심을 따질 때가 아니란 얘기.

    그래서 조금 더 아는 척하기로 했다.

    “너는 그 선배가 마음에 들어?”

    “아무 생각 없어. 좋아한다는 고백을 처음 받아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군.”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단순히 내 운이 남들보다 조금 나빴다고 생각했는데, 적성검사결과를 받은 뒤부터는 생각이 바뀌었다.

    인생은 참 불공평하구나, 라고.

    “형. 어떻게 할까?”

    “이름은 알아?”

    “어…. 듣긴 했는데, 기억이 안 나. 이름이 중요해?”

    “그건 아니다만….”

    그 여학생의 이름만 알면, 최강훈이랑 동행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조사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잖는가?

    “이름은, 네가 그 여학생에게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시험해본 거야.”

    “아! 그런 깊은 뜻이…!”

    “두 번째 질문.”

    “응.”

    “그 여학생의 헤어스타일은?”

    “긴 생머리.”

    빙고!

    얼굴은 못 봤지만, 옥상의 그녀도 머리카락이 긴 편이었다.

    “세 번째 질문. 그 여학생의 가방 색깔은?”

    “응? 가방?”

    “대답하기나 해.”

    나도 질문이 이상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철면피 깔고 꿋꿋하게 밀어붙였다.

    “어….”

    “몰라?”

    “당연히 모르지.”

    “흠. 어쩔 수 없지. 이따가 내가 2학년 교실로 갈게. 그 여학생을 같이 찾아보자.”

    쉬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 탓이다.

    “형이 온다고?”

    “어. 왜?”

    “남의 일에 이렇게 적극적인 형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헛소리할 시간 있으면 그 여학생의 이름이나 알아놔.”

    “응! 이따가 봐!”

    손을 흔들며 총총걸음으로 떠나는 최강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방금 대화를 곱씹어봤다.

    “남의 일이라….”

    막상 해보니 그렇게 싫진 않았다.

    * * *

    “저 선배야.”

    “그렇게 말하면 모른다.”

    “교실 창문 밖에 고개 내밀고 운동장을 구경하고 있는 선배.”

    “흠...”

    교실 안을 쓱 훑어보았다.

    “아, 저 애로군.”

    최강훈의 상세한 해설에 부합하는 여학생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다만,

    ‘가방을 안 메고 있네.’

    등교나 하교할 시간대가 아니기에 당연했다.

    최강훈에게 고백한 저 여학생의 가방을 확인하기 전에는 동일인물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래도 뒷모습은 얼추 비슷한 것 같은데...’

    가녀린 체구와 분위기가 그랬다.

    그때, 옆에 있던 최강훈이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형. 이젠 어떻게 해? 가서 싫다고 말하면 돼?”

    “기다려!”

    나는 매우 심각한데, 이 녀석은 인생 자체가 8차선 고속도로였다.

    “이름은 알아놨어?”

    “응. 교실에 두고 온 쪽지에 적혀 있었어. 송선영 선배야.”

    “송선영?”

    “응.”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은데.”

    “교실은 달라도 똑같이 3학년이잖아. 우연히 들었겠지.”

    “그런가.”

    송선영, 그 이름을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입력했다.

    “형.”

    “왜?”

    “아까부터 선배들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맞아. 기분 탓이야.”

    인생은 정말 불공평하다.

    “형.”

    “또 왜?”

    “송선영 선배야.”

    “아, 그렇네.”

    2학년 후배에게 좋아한다고 쪽지를 보낸 3학년 여학생.

    흔하게 볼 수 있는 긴 생머리와 교복 차림이었지만, 꾸미면 제법 예쁠 것 같다는 감상이 절로 들었다.

    왜?

    ‘아아, 다리가 길구나.’

    교복 치마를 줄이지 않았음에도 그 밑으로 학처럼 쭉 뻗은 다리 때문에 착시를 일으켰다.

    “형. 어떻게 해?”

    “...당장 결정은 어려우니 시간을 달라고 해.”

    나도 연애는 쥐뿔도 모른다.

    “응.”

    “나는 이만 간다.”

    “어?!”

    “강훈아. 이 형의 조언을 새겨들으렴. 남자는 자신감이다.”

    “자신감?”

    “그래. 자신감.”

    “남자는 자신감...”

    “그래서 내가 있으면 방해야. 자신감 없는 것처럼 보이니까.”

    송선영.

    그녀가 학교 옥상에서 투신자살하는 여학생임을 확인했다.

    ‘예상대로네.’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 이 오컬트에 송선영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되어 있었다.

    일단, 나도 앞으로의 계획을 위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친애하는 후배 최강훈은...

    “그렇구나~”

    “......”

    엄청난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눈빛이 살짝 불안했다.

    얼굴만으로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동생이라서 문제없겠지.

    최강훈을 자극하기 위해 남자를 들먹였지만, 자신감은 누구에게나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남자답게, 남자답게...”

    “갈게.”

    “응.”

    “...진짜 간다.”

    “응.”

    정말로 괜찮겠지...?

    * * *

    “강문수 학생. 나와서 338쪽의 3번 문제를 풀어보세요.”

    “......”

    전혀 괜찮지 않았다.

    송선영을 조사해볼 틈도 없이 발동한 5번째 회귀.

    “강문수 학생?”

    “아, 네.”

    “졸았나요?”

    “...아닙니다.”

    나는 반쯤 넋을 놔버린 상태에서도 거침없이 문제를 풀었다.

    이걸로 3번째.

    이젠 눈 감고도 풀 수 있다.

    “아…. 정말 완벽해요. 선생님이 지적하거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잘 풀었어요. 역시 강문수 학생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다른 선생님들처럼 기대가 매우 커요. 강문수 학생의 적성검사결과가.”

    “...저도요.”

    선생님들의 기대와 달리, 꿈과 희망 따위 없음을 잘 알기에 적성검사결과는 관심 밖이다.

    그 대신,

    ‘드디어 실마리가 보이는걸!’

    지금까지는 아는 게 없어서 오컬트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지만, 나를 찾아온 최강훈 덕분에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송선영.

    오컬트는 쥐뿔도 모르는 나의 단순한 직감이지만, 그 여학생이 열쇠를 쥐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틀림없어.’

    나처럼 기억을 온전히 보전한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정황상 그럴 확률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이제, 그녀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리라.

    그런데...

    “어라?”

    교실과 복도에서 송선영을 찾을 수 없었다.

    ‘화장실에 갔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나는 그녀의 교실을 기웃거리며 느긋하게 기다려봤지만, 다음 교시 수업이 시작될 때까지도 그녀를 만날 수 없었다.

    그 후에도, 그 어디에서도….

    송선영은 없었다.

    “저기, 물어볼 게 있는데.”

    “음? 뭔데.”

    그래서 나는 그녀랑 같은 반의 학생을 붙잡고 질문했다.

    “송선영은 어디 갔어?”

    “몰라.”

    “모른다고?”

    “어.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서 지금 난리야.”

    “...그래.”

    이걸로 더욱 확실해졌다.

    ‘나랑 똑같아!’

    회귀해도 기억을 잃지 않는다. 아니라면 이렇게 극단적인 변화가 있을 수 없으니까.

    일단, 실종된 그녀가 학교로 돌아오길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 * *

    송선영은 모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일하기 싫어라~”

    항상 그래왔듯, 학교가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다.

    컴퓨터 게임에 심취한 사장님은 내가 일찍 와서 편의점을 맡을수록 좋아하고, 나도 월급 외의 추가수당을 받아서 좋다.

    다만,

    “하암...”

    최근에는 전혀 좋지 않았다.

    착한 어린이들이 꿈나라로 간 한밤중에 편의점의 계산대에 선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정신을 깨웠다.

    더러우면 청소하고, 손님이 오면 인사하고, 좀도둑을 감시하고, 빈 상품을 진열하고...

    하는 일이 늘 비슷해서 피로도는 낮은 편이지만, 또 회귀하면 월급을 못 받는다는 사실에 의욕이 자꾸 떨어졌다.

    ‘내 인생도 참...’

    체감상으로는 보름 동안 무보수로 일하는 중이니까. 증명할 방법이 없는 오컬트라서 노동부에 신고할 수도 없고.

    억울할 따름이다.

    “0시 29분. 그 손님이 올 시간이네.”

    1분 뒤에 술에 취한 아저씨가 와서 T사 담배를 주문할 거다. 이어서 화장이 짙은 아가씨가 와서 S사 매운 컵라면을 고를 거고, 30분쯤 뒤에는 시끄러운 커플이 와서 H사 맥주 2병을...

    어떤 손님이 와서 무엇을 살지 다 알기에 더욱 따분한 것 같다.

    딸랑~♪

    “어서 오세요!”

    편의점 출입문에 걸린 작은 종이 흔들리며 소리가 나자마자 밝은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담배-”

    “여기요.”

    톡.

    나는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는 아저씨의 말을 듣지도 않고 T사의 담배를 꺼내서 계산대 위에 올렸다.

    “어? 내가 T사라고 말했나?”

    “네.”

    “그런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별 의문 없이 계산한 아저씨가 비틀거리며 편의점을 나갔다.

    ‘아저씨. 술은 적당히 드세요. 하나뿐인 인생마저 알코올처럼 증발하는 수가 있으니까.’

    내 아버지가 그랬다.

    편의점의 유리 벽 너머로, 추위에 떨면서 방금 산 담배에 불을 붙이는 아저씨가 보였다.

    ‘담배꽁초를 또 바닥에 버리고 가겠지. 편의점의 쓰레기통이 장식인 줄 아는- 어?!’

    똑같은 손님의 똑같은 만행을 무기력한 시선으로 4번째 지켜보고 있던 내 눈이 크게 떠졌다.

    손님 때문에?

    아니다.

    담배와 함께 수명과 건강을 태우기 바쁜 아저씨 옆으로 스치듯 지나간 여학생.

    내가 잘못 봤을 리 없다.

    “송선영이잖아!”

    딸랑~♪

    망설임 없이 편의점 밖으로 뛰쳐나갔다.

    “야! 잠- 어흠. 송선영 학생! 잠시만요!”

    일단은 송선영이 떠나지 않도록 무작정 불렀다.

    “누구-”

    “같은 학교 학생입니다! 할 말이 있어요!”

    “저는 없네요.”

    “......”

    딱 잘라 거절하는 그녀에게 외쳤다.

    “최강훈이랑 잘 안 됐나요?”

    뚝.

    그 한마디에 발걸음을 멈춘 송선영이 몸을 돌려 나를 쳐다봤다.

    무척 놀란 얼굴.

    “어, 어떻게...?”

    내가 기억을 잃지 않았음을 눈치챈 것이리라.

    “저는...”

    뭐라고 대답할지는 이미 정했다.

    “무당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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