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화
[1장-2절] 꿈이 틀림없어.
“......”
“강문수 학생. 나와서 338쪽의 3번 문제를 풀어보세요.”
“......”
“강문수 학생?”
“흠...”
‘나는 학교 정문 밖으로 틀림없이 나갔을 텐데...?’
어째서 나는 교실에 있을까?
아무런 징조도 없이 학교 체육관으로 순간이동 한 경험 덕분에 놀라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괜찮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어째서 또-
“강문수 학생. 나와서 338쪽의 3번 문제를 풀어보세요.”
“아, 네.”
낯익은 선생님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먼지 수북한 옥상 대신 친숙한 3학년 교실과 학우들.
심지어 수업 시간이었다.
‘미치겠네!’
문제의 여학생이랑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오컬트가 발동했다. 심지어 시간과 장소도 바뀐 듯하고.
“강문수 학생?”
“아, 죄송합니다. 머리가 살짝 어질어질해서.”
현기증이 난다.
“흐음~ 정말로 혈색이 좀 창백한데... 많이 아픈가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러면 338쪽의 3번 문제를 풀어보세요.”
“네.”
일단은 눈앞의 문제부터 풀고 생각하기로 했다.
* * *
방금처럼 교실 앞으로 나가서 338쪽 3번 문제를 예전에도 풀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어렴풋이.
즉, 3번째 푸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날짜를 확인해봤다.
“역시...”
체육관에서 적성검사를 받은 날보다 훨씬 과거로 되돌아왔다.
오컬트가 또 오컬트를 했기 때문에 놀라울 건 없지만...
‘갑자기 왜?’
그 이유를 몰라서 문제다.
과거로 돌아가는 오컬트에 휘말린 원인도 아직 못 찾았는데, 시간대마저 바뀌었네?
“아이고...”
생각할 게 너무 많아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한 학생이 앉은 책상을 가운데에 두고 원탁의 기사처럼 둥글게 모여 있는 친구들의 대화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야. 지금 법전을 본다고 해서 적성검사결과가 바뀌진 않아.”
“맞아. 포기해. 10년 후에 재검사를 받아도 똑같다더라.”
“공부도 못 하는 녀석이 법전을 보니 웃기긴 하다.”
“나처럼 종교의 힘을 빌려보는 건 어때?”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여.”
살면서 딱 한 번 받는 적성검사가 코앞까지 다가온 시기라서 모두가 민감한 시기.
적성검사를 얌전히 기다리는 학생은 매우 드물다.
탁!
“나를 내버려 둬!”
주위의 말을 무시하다가 한계에 도달한 학생이 두꺼운 법전을 덮으며 외쳤다.
‘...저것도 기억나네.’
나는 이때 화장실을 가서 보지 못했지만, 일이 커져서 몸싸움이 벌어지기 직전까지 갔었다고 들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오지랖이 넓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발은 이미 ‘참견’하러 가고 있었다.
“그만해. 자기 아버지처럼 훌륭한 재판관이 되고 싶다는데. 두 형이 이미 변호사와 판사로 일하고 있어서 더 부담되겠지.”
“......”
“......”
중재를 위해 나선 내게로 시선이 집중됐다.
그런데...
‘뭐지?’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저기, 문수야.”
“왜?”
“나는 지금까지 학교의 그 누구에게도 내 가족을 소개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
“어...”
그야 말싸움을 벌이면서 소개했으니까. 그때 소문이 쫙 났다.
하지만 이건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
그리고 앞으로 안 벌어질 미래이기도 하다. 가족들의 직업이 알려진다는 점에선 같지만.
큰 문제는 아니다.
‘...아닌가?’
공개되지 않은 정보를 내가 알고 있다는 건 확실히 문제일지도?
“문수가 스토커였다니….”
“설마, 너…?”
“취향이 그쪽일 줄이야!”
“실망했다, 강문수.”
친구들이 이상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우리는 친구로만 지내자.”
“아니라니깐!”
“문수야. 감추기에는 이미 늦었어.”
“뭘 감춰?!”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 * *
‘꿈은 무슨...’
어느 순간부터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나를 발견했다.
근거는 많지만, 꿈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길고 또렷하니까. 과학적인 접근은 포기했다.
또한,
“문수야. 도와줘서 고마워.”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녀석이랑 친구가 되었다.
“괜찮아, 괜찮아. 친구끼리 돕고 살아야지. 누가 알아? 나중에 네가 훌륭한 법관이 돼서 역으로 내게 도움을 줄 날이 올지.”
나는 손사래를 치며 겸허한 미소로 회답했다.
“그날이 정말로 왔으면 좋겠네. 그래도 불법은 안 돼.”
법관 꿈나무도 마주 웃었다.
“그래.”
“아! 그리고 문수야. 또 하나 주의해줬으면 하는 게 있어.”
“뭔데?”
“적성검사결과에 상관없이 친구의 선은 넘지 말자. 나는 남자보다 여자가 좋아.”
“그건 오해라고~!”
적성검사를 보기 직전으로 돌아갔을 때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 같은 훌륭한 재판관이 되기 위해 쉬는 시간에 법전을 보고 있던 학우.
예전에는 그의 사연을 듣고도 시큰둥했지만, 이렇게 과거로 돌아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이건 기회일지도?’
적성검사결과는 한참 뒤에 재검사를 받아도 ‘절대’ 뒤집히지 않는다는 게 정론.
타고난 재능이 바뀔 리 없으니 어찌 보면 타당하다.
하지만 그것이 ‘첫 검사’의 결과도 안 바뀐다는 의미는 아니다.
억지?
그래도 상관없다.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잖아?’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서 과거로 돌아간 사람이 없기에 ‘절대’ 안 된다는 장담은 금물.
내가 이 분야를 개척해서 선구자가 되리라.
“흠... 아! 이 기회에 판타지 소설이나 좀 읽어볼까?”
내가 모르는 새로운 영역!
과학이 아닌 공상과학!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어떤 식으로든 적성검사결과에 영향을 줄 것이다.
‘비싸면 곤란한데...’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서 판타지 소설의 가격을 쭉 살펴보았다.
“생각보다 싸잖아?”
아메리카노 한 잔 가격이면 두 권이나 읽을 수 있었다.
‘좋아.’
적성검사를 받는 운명의 날까지 남은 시간은 앞으로 약 3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틈틈이 읽어보자.
* * *
판타지 소설에서는 과거로 돌아가는 전개가 상당히 많았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다 읽어본 건 아니지만, 과거의 선택이나 실수로 실패한 인생을 바꾸는 주인공의 성공신화를 다룬다.
매우 매력적인 소재.
누구나 한 번쯤은 과거를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읽으면서 공감하기 쉽다.
‘나도 기대해볼까?’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 상황도 판타지 소설이랑 흡사했다. 과거로 돌아간 원인이나 원리가 불분명하다는 점까지.
남은 건?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과학적인 규명은 과감히 포기하고 실패한 미래를 바꾸는 것이다!
“헛!”
“오셨다!”
“모두 자리에 앉아!”
적성검사에서 ‘고등학교 선생’이 나온 담임선생님이 봉투를 잔뜩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여러분, 오래 기다렸나요?”
“......”
“네!”
정말로 오래 기다렸다.
적성검사 3일 전부터 결과가 나오는 오늘까지, 시간이 이토록 안 갈 줄 몰랐다.
‘그만큼 노력했지.’
비과학적이라서 프롤로그부터 공감하기 힘들었던 판타지 소설을 잔뜩 읽고 적성검사를 받았다.
판타지 소설이 나의 이성적인 대뇌를 잠식해서 적성검사에 영향을 줬으리라고 기대 중.
“1번, 강문수.”
“네!”
“2번- 헛! 교실에서 뛰지 마세요.”
“죄송합니다!”
“2번, 강승호.”
“네.”
담임선생님이 호명하자마자 바람처럼 달려가서 봉투를 받았다.
‘...긴장되네.’
나도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처럼 미래를 바꾸고 싶다.
좋은 적성을 받으려면 판타지 소설이 아닌 학술서나 논문을 읽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뇌리에 스쳤지만, 지금은 무당만 아니면 뭐든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제발...!”
간절한 소망을 담아서 적성검사결과를 봤다.
“아...”
「무당」
기적은 없었다.
* * *
적성이 바뀌기에는 3일이 너무 짧았던 걸까? 아니면 판타지 소설을 읽는다는 방향성의 문제...
아무튼, 실패를 핑계로 느긋하게 좌절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5번은 선을 넘었지!’
또 과거로 돌아가는 전개만 피하고 싶으니까. 피할 수만 있다면 무당이라도 상관없다.
물론,
“야, 강문수. 언제까지 감출 거야?”
“맞아. 반에서 너만 적성검사결과를 감추고 있어.”
그게 적성을 공개하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무당 유일암을 또 만나고 싶진 않으니까.
“치사하다! 강문수!”
“야! 그렇게 살지 마라!”
친구들이 뭐라고 비난하든 별 감흥이 없었다. 최소 한 번씩 들었던 대사들이라서.
‘거참...’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이 말할까?
이처럼 같은 상황을 5번째 반복하면 미쳐버릴 것 같다.
하지만 이 오컬트- 판타지 소설의 용어로 ‘회귀’가 발동하는 조건이나 원인을 모르기에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선, 스마트폰으로 담임선생님께 문자를 보내서 여학생의 자살을 예방하는 것부터-
“아니지.”
문제의 여학생이랑 접촉하지 않아도 회귀가 발동했으니까. 이젠 그녀를 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옥상에 먼저 가서 기다릴까?’
직접 만나서 자살하려는 이유를 캐물으면 또 회귀했을 때 대처하기 수월하기 때문이다.
...4번째 회귀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내가 싫다.
“조용. 수업을 시작할게요.”
“네! 선생님!”
척척.
나를 포함한 교실의 모든 학생이 자리에 앉았다.
“교과서 427쪽을 펴세요.”
“427쪽...”
이번 수업이 끝나면 옥상에서 여학생이 오길 기다리자.
“......”
“......”
“강문수 학생. 나와서 338쪽의 3번 문제를 풀어보세요.”
“음?”
* * *
여태까지 회귀는 방과 후에 발동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우 일찍, 수업 도중에 벌어졌다.
유일하게 안다고 생각했던 시간의 규칙성마저 사라진 상황!
이젠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됐다.
‘미치겠네!’
정말로 미치기 전에 이 오컬트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강문수 학생.”
“네.”
“이 어려운 문제를 암기하듯 푸는군요. 예습했나요? ”
“네.”
무려 3번이나 했습니다.
“정말 훌륭해요! 다른 학생들도 강문수 학생을 본받으세요.”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서 선생님께 감동을 준 것까지는 좋지만, 그것도 한두 번일 때의 얘기.
같은 칭찬을 3번째 들으면 아무런 느낌도 없다.
그러니,
‘찾아야 해!’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시간이 되감기는 이 오컬트의 발동 조건을 밝혀내야 한다.
‘원인이 뭘까?’
옥상에 쓰러져 있던 여학생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혼란스러웠다.
‘...아니. 틀림없이 그 여학생이랑 연관은 있어.’
나는 오컬트 전문가가 아니지만,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묘한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그 여학생의 이름과 얼굴을 모르고, 복장도 교복이라서 분별력이 없다는 게 문제.
유일한 단서는?
‘그 책가방.’
당시에는 책가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대충 봤다. 그래서 분홍색이란 것 외에는 기억 나는 디자인 정보가 없었다.
결국,
‘예정대로 옥상에 먼저 가서 대기하는 수밖에 없나...’
분홍색 책가방을 가진 여학생이 이 학교에 한 명뿐이겠는가? 검은색이나 갈색만큼 흔하진 않아도 희귀한 색은 아니다.
“좋아.”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이 상황을 즐기자.
회귀할 때마다 판타지 소설을 구매한 돈도 회수되니까. 공짜로 읽는다고 생각하며 마음의 위안을-
“문수 형! 안녕!”
“음?”
뒤편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뇌가 정지했다.
“문수 형?”
“어-?!”
또 들려온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나는 혼란에 빠졌다.
‘이건 무슨 상황...?’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형. 뭘 그렇게 놀래? 무서운 귀신이라도 본 얼굴이네. 내가 귀신으로 보여?”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나는 곱상한 미형의 소년이 천진난만하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아닌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2학년 후배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최강훈.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 자신의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부잣집 도련님이다.
“형. 무슨 일 있어?”
“강훈아.”
“응.”
“이상한 질문이란 건 아는데, 네가 3학년 교실은 왜 왔냐?”
“정말로 이상한 질문이네. 형을 만나려고 가끔 오잖아.”
“그건... 그렇지.”
‘하필이면 지금이라서 문제지!’
예전부터 종종 나를 찾아오는 친한 동생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즉,
‘나 말고도 더 있어!’
정해진 미래를 바꾸는 사람이!
최강훈이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도록 유도한 그 누군가를 당장 만나야 한다.
탁.
그걸 위해, 나는 최강훈의 어깨 위에 팔을 걸치며 친근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강훈아.”
“응!”
어깨동무가 남자답다는, 근거 없는 이유로 좋아하는 최강훈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웃으니 진짜 여자 같구먼.’
친한 동생에게 마음의 상처가 될 감상을 고이 감춘 채, 나는 마주 웃으며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네 얘기 좀 해봐.”
“내 얘기?”
“어. 오늘 학교에서 있었던 일. 사소한 거라도 좋아.”
338쪽 3번 문제를 그만 풀고 싶으니까. 적성검사도 포함해서.
“사소한... 아! 있어.”
“뭔데?”
“선배에게 고백받았어.”
“고백? 여자에게?”
“응.”
“...그게 사소한 일?”
“응!”
“그렇구나~”
이 배부른 꽃미남을 응징한 후에 대화를 시작해도 늦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