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화
[서장-1절] 나는 나쁜 어른이다.
구름 위에 세워진 초현실적인 궁궐의 어느 테라스.
실용성을 찾아보기 힘든 호화로운 황금 갑옷을 착용한 남자가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드디어 안정됐군.”
그는 수많은 강적을 무찌르며 성장했고, 마침내 세상을 뒤에서 지배하던 흑막마저 쓰러트렸다.
물론, 그 사이에 고난과 역경이 쉴 틈 없이 있었다.
친구의 죽음, 연인의 배신, 왕의 견제, 어둠의 암살자...
하지만 그는 이 모든 걸 이겨냈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현재는?
“호호!”
“후후후!”
그를 연모의 눈으로 바라보는 아름다운 여인들.
그녀들의 등에는 ‘신의 사자’를 상징하는 새하얀 날개가 3쌍씩 달려 있었다.
천사(Angel).
겉모습이나 행동은 연약한 여성이지만, 개개인이 강대국에 맞먹는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늘은 누구랑... 우헤헤헤!’
선정적인 복장으로 몸매를 한껏 과시하는 천사들을 차례차례 훑어보면서 음흉한 상상을 하는 남자.
적수가 없는 이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굴러간다고 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내일도, 다음 내일도...
꿈과 희망으로 가득할 것이다.
쾅-!
“무슨...?”
궁궐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한 폭음에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도 적이 남았나?
뿅!
허공에서 무기를 소환한 그의 얼굴에 긴장이나 걱정은 없었다.
그저 반가울 뿐!
적대 세력은커녕 경쟁자마저 없어서 무료해진 삶에 살짝 질리던 참이었으니까.
“상대가 됐으면 좋겠는걸.”
강해지길 갈망했으나, 막상 강해지고 나니 적수가 없어서 모든 게 시시했다.
쿠구구구-
일반인은 넘어질 만큼 격렬한 지진과 함께 궁궐이, 최강자에게 걸맞은 그의 집 일부가 무너졌다.
“여보!”
“주인님!”
“폐하!”
인연을 맺는 과정과 사연이 다 달랐던 까닭에 천사들이 그를 부르는 호칭도 제각각. 하지만 그녀들의 목소리와 시선은 무한한 신뢰로 가득했다.
“걱정하지 마.”
오랜만에 무기를 쥔 남자는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현장을 주시했다.
쾅~!
쿠웅!
궁궐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우르르 몰려갔으나, 제압은커녕 소란과 피해만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놀랍군.’
남자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곳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니까.
마법, 무기, 갑옷, 기술...
그가 일일이 직접 관여해서 키워낸 강자들. 그래서 여태까지는 이들 선에서 정리됐었다.
“꺅~?!”
“으악~?!”
“컥~?!”
그런데 그 방어선이 허무하게, 매우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급기야,
쾅-!
침입자가 던진 돌멩이가 포탄처럼 날아와서 테라스를 파괴했다.
“재미있군.”
펄럭!
남자는 날개를 활짝 펼친 아름다운 천사들에게 안긴 채 천천히 지상에 착지했다.
“안녕하십니까.”
경비병들에게 포위된 침입자가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가볍게 인사했다.
하지만 집주인은 그 인사를 순순히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다.
명백한 적이라서?
아니다.
“정장...?”
이 세계에 존재할 리 없는 검은색 양복 차림이었던 까닭!
집주인의 시선과 관심이 복장에 집중된 걸 눈치챈 침입자가 시원시원한 어조로 답했다.
“업무 중이니까요. 편한 옷을 입을 순 없죠.”
“업무? 암살 사주를 받았나?”
“아뇨.”
“누구나 처음에는 부정하지. 의뢰인을 순순히 밝힐 수 없으니까. 그래도 이것만은 답해줬으면 좋겠군. 그 복장은 어디서 났지?”
“제 것입니다. 돈 주고 산 건 아니지만.”
“...너도 지구에서 왔나?”
“외람되오나, 방금 질문은 대전제부터 잘못됐습니다. 저희는 여전히 지구에 있으니까요.”
“지구...?”
“네.”
“......”
남자는 침입자의 발언이 이해되지 않았다. 마법과 괴수가 존재하는 이 세계는 지구가 될 수 없으니까.
하지만 헛소리로 치부하기에는 상대의 태도가 너무 당당했다.
“여보.”
“응?”
“지금은 한가롭게 대화할 때가 아니에요. 상대는 침입자, 명백한 적이라고요.”
“...그렇지.”
당연히 분노해야 하지만, 오랜만에 출현한 강자라는 반가움이 더 앞서고 말았다. 그만큼 평화로운 삶이 따분했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침입자. 암살이 아니라면 여긴 왜 왔지?”
지금은 분노하는 아내들에게 동조하기로 했다.
“당연히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죠.”
“그래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행패를 부렸나?”
“행패가 아닙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고용한 사람이니까요.”
“거짓말!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어!”
“당신을 낳아준 진짜 어머니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말했잖아! 어머니는 나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김영희.”
“그, 그 이름을 어떻게...?!”
“저를 고용해서 이곳으로 보낸 고객님의 함자니까요.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짓말.”
“진실입니다.”
“거짓말이야! 다 거짓말! 그럴 리 없어! 내 이름은 카이저! 신에게 선택받은 남자다...!”
“강철수 씨.”
“아니야! 강철수는 죽었어...!”
“당신은 의식을 잃은 채 6년 동안 병실에 누워 있습니다.”
“헛소리! 나는 이 세계에서 다시 태어났어...!”
팟-
흥분한 남자가 침입자의 입을 막기 위해 힘껏 도약했다.
“거참...”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탄한 청년이 검은색 정장 안쪽에서 녹색 쇠붙이를 꺼냈다.
슥-
칼날이 두꺼워서 의장용으로나 쓰일 법한 빗살무늬 청동검.
살상용 무기로는 하자가 많은 그것을 쥔 청년은, 세계의 절대자가 발산하는 맹렬한 공세를 피하지 않고 맞받아쳤다.
캉!
“강철수 씨.”
“닥쳐!”
검과 검이 충돌한 순간, 구름 위에 세워진 궁궐이 파괴됐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생명들은?
“강철수 씨.”
“나는 카이저다!”
“직접 지으신 이름인가요? 카이저는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에서 유래한 독일 황제의 칭호-”
“닥치라고~!”
쾅! 펑!
혼자서 세계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강대한 힘을 가졌음에도,
‘대체 왜!’
그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불순물 같은 존재’의 입을 막지 못했다.
“강철수 씨.”
“닥쳐!”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지 마!”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당신을 응원하던 여자들이 휘말려서 다 죽게 생겼-”
“헉!”
헛바람을 삼키며 후퇴한 남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으...”
“윽...”
온몸이 너덜너덜해져서 날개도 펴지 못하는 천사들.
“......”
“......”
그리고 그중 일부는 영원히 날개를 펼 수 없게 됐다.
“이, 이럴 수가... 안 돼...”
털썩.
자신의 부주의로 아내들이 다치거나 죽었음을 자각한 남자는 망연자실하며 주저앉았다.
“강철수 씨. 슬퍼하지 마세요.”
“네놈이 이상한 소리를 해서...!”
“구약성경 에스겔서 1장 5절.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양이 이러하니 그들에게 사람의 형상이 있더라.”
“뭐?”
갑자기 성경? 죽은 아내들의 명복이라도 빌어주려는 건가?
자세히 들어보니 아니었다.
“그들의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으며 날개가 있다.”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그룹(Cherub).”
“그룹?”
“그룹은 신이 빚어낸 천상의 존재(heavenly being)로, 천사보다 월등한 창조물입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일단 들어보세요. 위로가 될 겁니다.”
“......”
“성경(聖經)에 묘사된 모든 천사는 날개가 없는 미소년입니다. 날개, 여성, 아기 천사는 화가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이죠. 당신을 응원하던 여자들도 포함해서.”
“뭔...”
“날개 달린 존재는 천사가 아닌 그룹(Cherub)입니다. 하느님이 만들어낸 완벽한 창조물. 인간이 아닌 동물의 머리를 갖고-”
“닥쳐!”
양손으로 귀를 막은 남자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강철수-”
“닥치라고! 제발...!”
이젠 분노가 아닌 애원에 더 가까운 어조.
하지만 청년은 가차없었다.
“여성 천사의 존재. 이 세계가 허구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아니야!”
“인정하세요.”
“그럴 리 없어! 성경이 틀린 거야! 여성 천사는 존재해!”
“당신의 어머니 김영희 씨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아니라고...”
부정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강철수 씨.”
“아니라고 해줘... 제발...”
“죄송합니다.”
“흑...”
강철수는 떼쓰는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영양실조로 죽고 싶으세요? 지금도 뼈만 남은 상태입니다.”
“......”
“교통사고로 입원할 당시에는 15살의 미성년자였지만, 이젠 어엿한 성인입니다. 어른답게 현실을 받아들이세요.”
“...네.”
남자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나,
“여전히 인정을 안 하시네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날개 달린 여성 천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룹은-”
“그것들은 머리가 짐승입니다. 아름다운 여성은 고사하고 인간조차 아니죠. 포기하세요.”
“당신은 대체...?”
“아차! 깜빡했네요. 제 이름은 강문수입니다. 이런 일을 하고 있죠.”
“이런 일?”
“나쁜 어른 역할이요.”
“그게 무슨...”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청년은 무너져 내리는 세상을 보며 한껏 기지개를 켰다.
* * *
“철수야! 나를 알아보겠니?”
“어, 엄마...”
“그래. 엄마야! 아아!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여보! 빨리 병원으로 와요! 당신 아들 철수가 깨어났어요!”
“다 꿈이었다니...”
“아들?! 왜 우니?! 어디 아파?! 악몽이라도 꿨어?!”
“아, 아니요. 흑흑!”
나는 손목에 꽂혀 있는 링거를 뽑고 환자복에서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후, 울음바다가 된 병실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스마트폰의 날짜와 시간부터 확인.
“...나쁘지 않군.”
신학(神學)을 틈틈이 공부해두지 않았다면 훨씬 오래 걸렸으리라.
그래도 빨랐다고는 내 입으로 말할 수 없었다.
부재중 통화가 53통!
부동산과 보험 광고 사이로 똑같은 연락처가 계속 반복됐다.
“흠...”
내 스마트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연락처였지만, 망설임 없이 통화를 시도했다.
따르-♬
1초나 지났을까?
멜로디가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됐다.
“강문수입니다. 무엇을 도-”
“도와주세요! 제 딸이 열흘째 의식이 없어요!”
“그러시군요. 따님의 나이가?”
“18살입니다.”
“지하철 광고를 보셨나요? 아니면 지인 소개인가요? 지인 소개는 20% 할인이 있습니다.”
“병원장님이...”
“아하! 따님이 입원한 병원이 어디죠? 지금 예약하시면 사랑과 우정, 꿈과 희망을 아주 저렴한 가격에 부숴드립니다.”
내 직업은 나쁜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