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97화 (19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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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맹약의 시간이 도래 했노라.

    세 번의 고난을 뚫고 나아가.

    실망한 여신의 분노를 피하라.

    ***

    맹약, 고난, 분노.

    1월의 마지막 날 터진 이 세 단어로 인해 세상은 처음 보스가 등장했을 때처럼 몸살을 앓았다. 그때처럼 비관론이 튀어 나왔고, 사람들의 걱정은 쉬이 잦아들지 않았다. 모두가 보스의 통제를 벗어난 두려움에 몸을 맡기려고 할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았다.

    성투가 처음 뿌리를 내렸던 때와 지금은 달랐다. 달라도 너무 달랐고, 그 중 가장 다른 점을 들자면 바로 랭커들이었다. 사람들은 최상위 랭커들이라면 고난을 뚫고 나아가 여신의 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런 이야기가 힘을 얻으며 사람들은 언제 두려워했냐는 듯이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들은.

    [랭커가 존재하는 이유. 이제 그들이 필요할 때!]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영웅이 필요한 시대, 그들의 결정은?]

    [닥치고 어썸 바나나. Fucking Father? 성투의 교황이 된 그는 지금 어디에!]

    만인전에 소속된 이들이 이번 일을 해결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반응이 좀 심해 박고영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으로 변질되는 부족용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도 책을 잡지 않았다. 지금 분위기에 딴죽을 걸었다가는 몰매를 맞을 게 분명했으니까.

    사실 기사의 논조가 점점 자극적으로 변하는 이유가 있었다.

    [1만의 랭커 실종 사태? 도대체 무슨 일이?]

    [사라진 사람들. 그들의 현재 상태는?]

    [혼란이 가중되는 상황. 이대로 괜찮은가.]

    말 그대로 하늘로 솟은 그들의 모습에 처음 사람들이 더욱 혼란스러워한 것도 없지 않았다. 처음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게 그 증거 중 하나였다. 심지어 종말론이 다시 대두되며 통제가 불가능해 질 지경으로 사태가 악화될 것만 같았다.

    각국 정부가 불안에 떨고 있는 그때.

    사라졌던 랭커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귀환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랭커들의 귀환! 신의 현신?]

    [빛무리와 함께 나타난 랭커는 최하위?]

    [기절 후 병원으로 이송된 랭커들.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알려져.]

    고작 하루 사이에 벌어진 극적인 변화였다.

    신이 땅에 내려오는 것 같은 황홀한 모습으로 나타난 랭커들은 기사대로 최하위 권에 위치한 이들이었다. 현실로 복귀한 뒤 그들은 모두 의식을 잃고 쓰러졌지만, 다행히 잠이 든 것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날 귀환 랭커들의 인터뷰가 공개되며 좋은 의미의 파문이 일었다.

    [첫 번째 시련은 바로 만인전 토너먼트!]

    [랭커들의 랭킹전! 우승자는 어썸 바나나?]

    [성별을 뛰어 넘었다? 결투 방식 집중 해부!]

    어찌된 상황인지 알게 된 사람들은 그제야 심적 여유를 가지게 됐다. 혼란은 점차 수그러들었고, 반면 호기심이 솟아올랐다. 모든 언론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풀어 주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기는 했지만, 별다른 소득이 없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물론 전혀 소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단 세 가지 시련 중 첫 번째 시련이 공개됐다. 바로 1만 명의 만인전 소속 참가자들끼리 서로 결투를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것이었다. 이런 방식으로 단 한 명의 우승자를 추리면, 그 우승자가 두 번째 시련에 도전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강한 강자가 시련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에 대체로 사람들은 만족했지만, 반대로 불안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아무래도 혼자 보다는 여럿이 낫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이겨도 전쟁에서 질 수 있다는 걸 역사가 증명하니 이 주장도 꽤 힘을 얻기도 했다.

    사람들의 의견이 두 갈래로 갈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련에 영향을 끼치는 건 없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패배한 랭커들이 속속 귀환했고, 기자들은 랭커들을 괴롭히며 새로운 정보를 쥐어짜냈다.

    [신이라 칭한 존재. 그 정체는?]

    [최강의 정예가 신에 도전한다!]

    [앞으로 3일! 과연 첫 번째 시련의 승자는?]

    총 13일 동안 치러지는 첫 번째 시련도 점점 막바지를 향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사흘이 지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귀환자가 아프리카의 작은 마을에 나타났다.

    흑진주를 깎아 만든 것 같은 묘령의 여인.

    새하얀 빛과 함께 검은 땅 위에 내려온 여자가 그대로 쓰러지자, 어떻게 알았는지 노파가 나타나 그녀를 품에 안았다.

    "고생했다. 마리아. 고생했어."

    굶주림에 허덕이던 마을을 홀로 먹여 살린 무거운 어깨가 오늘따라 편안해 보였다.

    타란툴라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귀환자는 없었다.

    세상은 이 사실을 알 지 못했다.

    ***

    처음에는 놀랐다.

    그 다음 화가 났고.

    종국에는 허탈 했다.

    내 의지와 반해 알 수 없는 공간에 소환된 나를. 아니, 우리를 기다린 건 깊은 후드를 눌러 쓴 음침한 남자였다. 언제나 꾀를 내어 상대를 골탕 먹이는 그 존재는 일전에 한 번 본적이 있는 로키였다. 그래도 신이라 불리는 존재였지만, 우리 앞에 나타난 그는 그저 안내자였을 뿐이었다.

    "붉은 달이 차올랐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손에 쥔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합니다. 부디 맹약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주시길 바랍니다. 맹약만 이루어 주신다면, 제가 큰 선물을 하나 드릴 테니."

    질문은 받지 않았다.

    로키는 자기가 할 말을 끝내고 그대로 사라졌고, 우리는 그의 손짓 한 번에 또 다시 날아가야 했다. 우리가 새로이 이동한 곳은 언뜻 익숙한 느낌을 주는 널찍한 방이었다.

    몽마의 성체.

    일명 악마의 자궁이라는 그곳이었다. 며칠 뒤 그게 아니라 피라미드라는 걸 알게 됐지만. 어쨌든.

    구조는 일단 간단했다.

    방과 방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방과 방 사이 마련된 무대에서 결투를 치렀다. 이후 승자는 위층으로, 패자는 지구로 돌아갔고.

    운이 없는지 나는 아는 사람을 자꾸 만났다. 그래봤자 상대가 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물론이고 랭커들은 반 강제적인 결투를 매일 치렀다.

    그렇게 오른 12층에서 존재감 없는 R.I.P를 격퇴한 나는 가장 먼저 13층에 오를 수 있었다.

    "도대체 방식이 어떤 건지 모르겠네. 1만 명이면 토너먼트를 치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딱 떨어지지 않으니까."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2의 13승이 8,192라는 걸 암산하며 역시 이상하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쿠르르…….

    석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인영이 12층에서 올라오는 게 보였다.

    흑인이네?

    처음 든 생각은 별 거 아니었다. 그동안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인종과 섹스 배틀을 했으니까. 거리낄 것도 없었고, 이상할 것도 없었다. 다만 놀라기는 했다.

    처음 보는 여자다.

    나름 최상위 랭커와 안면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가 보다.

    의외의 상황에 놀랍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사를 하기는 해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막 전투를 마쳐 정신적으로 피곤할 게 분명한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는 반짝이는 눈동자로 날 빤히 바라보며 입을 다물었다.

    귀엽네. 눈이 예쁘기도 하고.

    본능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도 벌써 그녀의 전신을 빠삭하게 파악했다. 탄력 넘치는 피부는 물론이고 적당힌 박힌 근육이 건강함 그 자체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육체를 가졌다는 생각을 하며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박고영. 아니, 어썸 바나나라고 합니다."

    "……타란툴라."

    가뭄에 몸서리치는 쩍 갈라진 목소리였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주저앉아 있는 타란툴라의 옆에 앉으며 친근히 물었다.

    "어차피 시간이 되려면 멀었으니, 이야기나 나눌까요?"

    끄덕.

    숫기가 없는 것인지 타란툴라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인가?

    나는 석벽에 편히 등을 대며 타란툴라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간단하게 말문을 열며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갑자기 끌려와 난리를 치지만. 그래도 좋네요. 타란툴라 당신을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왜?"

    "내 바로 밑까지 쫒아 온 추격자가 누군지 궁금하니까요."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언제나 내 아래에 바짝 붙어 있는 타란툴라를 그냥 한 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타란툴라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미지?

    타란툴라의 행동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하지 못한 내가 고개를 모로 누였을 때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관심 없어요. 그런 거. 직업일 뿐."

    "……미안합니다."

    서로 알몸으로 앉아 있는 상황. 게다가 바로 옆에 위치했다. 내 눈은 그리 나쁘지 않았고, 그녀의 몸 곳곳에 있는 상처를 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짤막한 단어들의 조합이지만 타란툴라가 말하고자하는 건 분명했다.

    살기 위해 했을 뿐이다.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만큼 절실하게 보스에 뛰어든 이가 없을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자만이자 교만이었다.

    그 뒤로 길게 묻는 내 물음과 짧게 답하는 그녀의 답변이 이어졌다.

    많은 걸 알 수 있는 시간이었다.

    씁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내 입에서 흘러나올 정도로.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땀 흘리는 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니까."

    "불평은 안 해요. 그럴 여유가 없어요."

    불만을 가질 여유가 없다.

    맞는 말이다.

    과연 세상이 아름다운 적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 더 이상 이와 같은 주제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나처럼 물질적 여유를 가지고 산 사람이 또 없을 테니까. 그런 내가 타란툴라의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 처지는 되지 못했다.

    의미 없는 말 대신 서로 공통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정보를 캐묻지는 않았다. 그건 불문율이었으니까.

    결국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눈 덕분에 나는 타란툴라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마리아. 그럼 너는 마을 주변에서만 지냈는데 그렇게 빠르게 성장한 거야? 그게 가능 해?"

    "모르겠어. 그냥 됐어. 몽마를 잡으니 더 강한 몽마가 나왔어. 지금도 그래. 왕족 몽마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야, 대단하네."

    솔직히 꿀빤 거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먹고 살 돈도 없는 그녀의 처지에 어딜 이동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니까. 그보다 너무 순진한 친구라 괜히 내가 화가 났다.

    "그래도 좀 물어보지! 고작 밀가루 한 포대에 귀족템을 팔았다고? 도대체 어떤 새끼야?"

    "화내지 마. 그 사람 덕분에 우리 부족이 굶어 죽지 않았어. 난 상관없어."

    아이고, 이 화상아.

    왜 이렇게 착한 사람들은 순진할까.

    괜히 가슴이 답답했다. 속물적인 소인배인 나라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괜히 타란툴라의 옆에 있다 보니 내가 더 작아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넘쳐흐르는 경험치를 퍼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저렇게 조용조용하고 착한 여자도 자존심이 있으니까.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서는 아니 됐다.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무릎을 끌어 모아 턱을 베고 있는 마리아에게 몇 가지 정보를 알려 주었다.

    "이거 친구 추가 해. 우리나라에 있는 재단인데. 다른 나라에 구호도 하고 그러더라. 네 사정을 말해주면 도와줄 거야."

    "……고마워."

    "그리고 좀. 아니. 아니다. 아무튼 꼭 연락해봐. 믿을만한 곳이니까."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다. 비록 내가 만든 재단이라는 걸 숨겼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마리아는 처음으로 미소를 보이며 날 믿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이 콕콕 찔렸지만.

    새로운 친구를 알게 됐다는 즐거움도 잠시.

    이제 친구와 싸워야 할 시간이었다.

    "……좀 어색하네."

    "……나도. 그렇게 보지 마. 부끄러워."

    그러는 너는 어딜 보는데.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는 척 하며 눈동자를 요리조리 돌리는 마리아의 모습에 쟤도 여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앵……!

    "시간이 됐네. 아무튼 잘 부탁해. 얼른 집에 가야지."

    "응. 가족이 보고 싶어."

    태어나 가장 오래 가족을 보지 못한 마리아는 꽤 우울한 모습이었다. 섬뜩한 닉네임과 달리 말이다. 이래서 여자는 제 3의 종족이라고까지 하는지도 몰랐다.

    서로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난 남자였다. 게다가 선공은 먼저 올라온 이가 취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니 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나는 마리아의 손을 잡고 무대 중앙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리아는 부끄러워하며 날 따라왔고, 이내 바닥에 누우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마음 약해지게……. 어어? 마리아! 이건 반칙이야!

    머쓱한 기분도 잠시 나는 화들짝 놀랐다. 바닥에 누워 전투를 준비하는 마리아의 자세 때문이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다리를 말 그대로 쫙 벌렸다. 아주 적나라하게.

    "부끄러워……. 빨리 해, 고영."

    거짓말이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진짜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며 너무 적나라해서 미칠 것 같은 마리아의 다리 사이에 몸을 잡았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이젠.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승패는 정해져 있다고 여겼다. 미야프의 버프나 내 고유 기술이 없다고 해도.

    최대한 후유증이 없도록 나는 아무런 버프를 걸지 않은 채 그대로 마리아의 몸을 덮쳤다. 그녀의 봉긋한 가슴 위에 얼굴을 파묻으며 동시에 허리를 튕겼다. 그녀의 비림을 향해.

    미끌!

    Miss!

    "으잉?"

    전기톱이 마리아의 허벅지 사이로 미끄러지는 순간 내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게임 속 뻘건 글씨가 보이는 착각 속에 나는 잠시 얼떨떨한 느낌에 상황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이내 내 공격이 허무하게 실패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쪽팔리는 탄식을 터트린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단단한 석벽으로 이루어진 방안에는 작은 구멍하나 보이지 않았다.

    "풉! 이상해."

    내가 당황한 사이 마리아가 해맑게 웃었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아닌가? 나는 어어 하는 사이 그대로 차가운 돌바닥에 등을 누이고 말았다.

    어느새 내 허리춤 위에 올라탄 마리아가 나를 보며 씽긋 웃었다.

    뭐냐, 그 음탕한 미소는!

    오싹했다.

    뒤늦게 불안감이 치솟았다.

    마리아는 물 위를 미끄러지는 한 마리의 뱀처럼 움직였다. 이미 내 전기톱은 그녀의 몸속으로 들어가 빨판 같은 속살에 붙잡힌 상태였고, 그녀는 양손을 내 가슴 위에 올린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내 물건을 받아들인 마리아의 모습이 너무 자극적이었다. 물론 이런 체위쯤이야 수백 번도 더 치렀지만, 이상하게 마리아는 색다른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젖꼭지를 꼬물꼬물 거리고 있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으음."

    "고영. 좋아?"

    "……싫을 리가 없잖아."

    솔직한 내 대답에 마리아가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것도 잠시.

    마리아의 눈빛이 돌변했다.

    "그럼 물을 주세요. 내게 물을 주세요!"

    기우제를 지내려는 건가?

    마리아의 삶을 들었기에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그런데 이 터무니없는 생각은 결코 터무니없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기우제를 지내고 있었다.

    그 대상이 하늘이 아니라, 나라는 게 문제였지만.

    "니가 측우기도 아니고옥! 어헉!"

    "물! 물을 주세요!"

    마리아가 방아를 찧으며 계속 물 달라고 조를 때마다 전기톱이 뽑혀 나가는 것 같았다. 아니, 탈수기에서 돌아가는 빨랫감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정도로 마리아의 속살은 미쳐 날뛰고 있었다.

    돌바닥에 손톱이 긁히는 줄도 모른 채 나는 바닥을 북북 긁었다. 그러지 않으면 저 요망한 측우기에게 물을 빨릴 것 같았다. 물론 시원하게 한 번 싸보는 게 소원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결단코 지금은!

    쭈읍! 쭈읍! 쭈우읍!

    "으으윽!"

    "물을 주세요! 제발 물을 주세요!"

    펌프에 물 빨리는 소리가 이어지며 날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미 전기톱은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불알에서는 닥치고 쏘라고 외치고 있었다.

    안 돼! 안 된다고! 그년에게, 그년에게 복수하기 전까지는!

    한 발 쌀 법도 했지만 나는 쌀 수 없었다. 이번 임무. 아니, 신탁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기 때문이다. 내 동정을 앗아갔던 디테. 그녀에게 복수할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으으윽! 까득!"

    "제발 물을! 제가 한 발 쏴주세요!"

    이빨이 부러져라 앙다문 입술을 비집고 신음이 터지는 그때 마리아가 마지막 주문을 외웠다. 순간 깨달았다. 이것만 버티면 된다고.

    쭈우우웁……!

    마리아의 질수기에 걸린 내 전기톱의 끝에 물이 모여 들었다. 이제 한계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안 돼! 안 된다고!

    소리 없는 절규를 내뱉으며 마지막까지 버티는 그때.

    마리아의 공격이 끝났다.

    ['타란툴라'에게 2,572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아……. 역시, 대단해."

    "후아, 후어. 헉, 허억."

    감탄을 터트리는 마리아와 달리 나는 거센 숨을 몰아쉬며 헐떡일 뿐이었다.

    생각보다 데미지는 별로였다. 아니, 내 항마력을 생각한다면 이정도 데미지는 왕족 몽마쯤 돼야 줄 수 있었다.

    데미지는 중요하지 않지. 쌌다면 그걸로 끝이니까.

    마리아의 기술은 데미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데미지와 무관하게 사정을 하는 순간 게임은 끝났다. 그러니 실제로 더 위험천만한 기술이라 보는 게 맞았다.

    "후우. 그건 그렇고. 이제 내 차례지?"

    호흡을 가다듬은 나는 각오하라는 눈빛으로 마리아를 도로 눕혔다. 그런데 마리아의 눈빛이. 아니, 얼굴이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그 이유가 곧 검은 입술을 타고 흘러 나왔다.

    "역시 대단해. 졌어. 내가 졌어. 처음이야. 이걸 버틸 남자는."

    잠깐만. 아니지? 아닐 거야. 그치? 너 치사하게…….

    "내가 졌어. 이제 가족을 보러 가고 싶기도 하고. 친구를 만나서 좋았어. 고영. 나중에 봐."

    설마 하는 생각도 잠시.

    마리아가 이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해 버렸다.

    "야! 이건 아니지! 이런 게 어디 있어!"

    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보스는 마리아의 기권을 받아들인 뒤였다. 이윽고 마리아가 내 속을 뒤집어 놓은 것도 모른 채 해맑게 웃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홀로 남게 된 나는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마지막 층계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나타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러면 진 거 같잖아."

    이겨도 이긴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여자는 하나 같이 요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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