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96화 (19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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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내 생활은 여전했다.

    지루해. 지겨워. 지치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더 이상 성투가 즐겁지 않았다. 승패를 결정짓는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레 생긴 부작용이었다.

    1월도 거의 지나 민족의 명절인 설날이 왔음에도 슬럼프는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삼촌 식구들에게 줄 선물을 구하며 시원하게 돈을. 아니, 경험치를 쓰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가 되어 주었다. 이런 모습은 비단 내게 국한 된 게 아니라는 게 좀 새롭다면 새로울 뿐이었다.

    "명절 대목이 이제 보스에게도 통용될 줄이야.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다 늙은이처럼 중얼거리며 삼촌네 아파트로 들어섰다.

    "이거 불편해요. 너무 꽉 껴요. 어? 미야프 가슴이 커졌나 봐요! 아얏!"

    "헛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있기로 약속한 거 잊지 말자. 응?"

    "미야프는 착한 어린이에요. 약속은 지키라고 있댔어요!"

    "누가?"

    "우리 선생님이요! 저 말 잘 들어요! 그래야 쑥쑥 큰다고 했어요!"

    미야프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사실 정식 유치원은 아니었다. 그냥 내가 자비로 만든 몽마 전용. 정확하게는 종속 전용 교육 시설이었다. 심지어 몽마 어린이집의 보육 교사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남궁 감옥에서 갱생이 끝난 왕족 몽마들이 바로 특이한 유치원의 선생님이었다.

    원생은 미야프가 전부였다. 애초에 미야프를 위해 만든 놀이터 개념이니 당연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돌변했다. 하나의 소문 때문이었다.

    집 근처에 만든 유치원은 시설이 좋기로 명성이 자자했다. 게다가 몽마들의 지식 습득력은 차원이 달랐다. 자연스레 최고의 시설과 최고의 교사가 있는 유치원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여전히 열성적인 어머니들의 입원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미야프가 혼자 있어서 심심하다고 징징거렸고.

    그러다 보니 개원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몽마 어린이집 1기를 받게 되어 버렸다. 그나마 행정 절차 때문에 다음 달부터 정식 개원을 한다는 게 다행이었다. 또한 정식 보육 교사 자격증을 가진 이들을 채용하는 문제도 있었다.

    그렇게 장난감을 만들려다 진짜 유치원을 만들게 되며 골치가 아팠지만, 미야프가 좋아하는 걸 보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달부터 등원하는 거 알지? 가서 사고치지 말고."

    "우히힛!"

    이거 불안한데…….

    미야프가 푼수 같은 웃음소리로 답하는 게 꽤 미심쩍었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종속에게 걸린 제한은 지켜질 테니까.

    "누굴 다치게만 하지 않으면……. 야! 뛰지 마! 유치원 없애 버린다!"

    "히끅!"

    친구가 생긴다는 것에 신이 난 미야프가 엘리베이터 안에서 깡충깡충 뛰며 내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녀석을 얼른 품에 안았다. 깜짝 놀란 미야프가 딸꾹질을 하며 내 눈치를 보더니 이내 통통한 두 팔로 내 목을 껴안았다.

    "딸꾹질이 안 멈쳐요. 가슴이 아파요. 미야프 아파요."

    "후……. 아무래도 안 되겠다. 유치원은 네가 더 말을 잘 들으면 그때부터 다니자."

    "잘못했어요! 흐끅, 안 그럴게요! 막 뛰고 안 그럴게요! 흐끅."

    이게 어디서 수작질을.

    미야프가 울먹이며 애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표정을 굳혔다. 몽마라도 애는 애니까. 이런 건 통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기에 더욱 더 단호하게 잘못을 혼내야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삼촌댁 초인종을 누르고 3초 뒤.

    나는 미야프가 통하지도 않을 수작질을 했는지 깨달았다.

    "어머! 우리 미야프 왔네?"

    "할무니……! 으아아앙!"

    "아니, 왜 울어? 누구니? 누가 우리 미야프를 울린 거니? 이 할미한테 말해 봐. 할머니가 아주 요절을 내줄테니까."

    빌어먹을.

    미야프가 내 품에서 훌쩍 뛰어 내리더니 환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숙모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더욱 크게 울어 버렸다. 아주 집이. 아니, 지구가 떠나가라 서럽게 울어 재꼈다.

    망했네.

    미야프의 목표는 숙모였고, 이제 남은 건 하나였다.

    "훌쩍. 아빠가. 아빠가 나보고 유치원. 유치원. 으아아앙! 약속했는데. 미야프랑 약속했는데. 흐끅."

    "뭐야? 아빠가 유치원 안 보내 준다고? 보내 준다고 했는데? 이런. 약속을 지키지 않는 나쁜 아빠네. 할머니가 혼내 줄게. 그만 울고. 뚝. 흥!"

    "후엥!"

    "올지. 잘하네. 할머니가 우리 미야프 주려고 맛있는 거 많이 해 놨다. 얼른 가서 먹자."

    "갈비찜! 새우튀김! 동그랑땡! 미야프는 잘 먹어요! 많이 먹어요!"

    "그럼, 그럼. 다 있지. 그래도 꼭꼭 씹어 먹어야지?"

    미야프를 능숙하게 달랜 숙모가 이내 녀석의 작은 손을 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지키던 사람이 사라지니 무심한 철문은 본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철컥.

    "……저기 숙모?"

    뭐지? 나 버림받은 건가?

    잠시 후 삼촌이 문을 열어 줄 때까지 나는 그대로 방치됐다.

    ***

    요물에게 한 방 먹었다.

    이래서 부모이기는 자식이 없다는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구 맘대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지는 게 싫었다. 그것이 하물며 완전히 내 딸이 된 미야프라도 말이다.

    지루함에 파묻혔어도 내 승부욕은 아직 죽지 않았다.

    설욕을 다짐하며 삼촌에게 인사하고 거실로 들어선 나는 기세 좋게 미야프를 혼내려고 했다. 이번 기회에 미꾸라지의 장난질을 멈추려고 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뜻밖의 사람이 앞치마를 매고 부엌에서 나와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어? 오셨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 눈앞에서 능숙한 우리말로 다소곳한 인사를 하는 여자는 소파에 앉아 시누이 짓을 하는 선영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리아였다. 하는 짓이 꼭 이집 며느리 같은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어느새 리아의 곁에 선 선호가 헤픈 웃음을 보이며 바보처럼 웃었다.

    이걸로 확실했다.

    "……니가 왜 우리 집에 있어?"

    "에이, 형. 왜 그래? 이 사람 민망하게."

    "우리 집은 무슨. 여기가 왜 너네 집이야? 우리 집이지!"

    "누나는 또 왜 그래? 명절인데. 싸우지 말자. 응?"

    여전히 날카로운 선영이가 끼어들었지만 이미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언뜻 불안감이 느껴졌다.

    차남보다 결혼을 늦게 하는 장남이 된 느낌?

    점잖은 삼촌의 한 마디가 이런 내 불안감을 절정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새아가가 네 밑에서 한동안 일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사람 직업은커녕 직책으로 면박을 주면 안 되지. 내가 널 그리 가르치지 않았다. 앞으로 한 식구가 될 제수씨니. 어색하더라도 잘 지내 보거라.

    예. 쟤가 제 밑에서 일하긴 했죠. 삼촌은 상상도 못할 그 일을요.

    "이이는 또. 쓸데없이 무게 잡지 말고 와서 전이나 좀 부쳐요. 상에 올리려면 아직 멀었네. 그리고 고영아. 너도 얼른 장가 가야하지 않겠니? 어디 참한 색시 없어?"

    그건 좀. 지겹긴 하지만 전설의 카사노바 생활이 나쁜 건 또 아니라서요.

    "쟤가 결혼? 풉! 엄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어썸 바나나 몰라? 쟤가 어썸 바나나야. 당장 미국 시민권 얻어서 대통령 선거 나가면 쟤가 당선 될 걸?"

    멍청한 것아. 미국 대통령은 미국 출생만 가능한 거 모르냐?

    "너! 선영이 너 말 본새가 그게 뭐야! 오빠한테. 이게 어디 오빠 무서운 줄 모르고!"

    선영이의 어그로에 숙모가 폭발했다.

    더 이상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는 명절에 대판 싸우게 생겼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리며 숙모를 식탁으로 모시고 도망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명절인데 분위기를 망쳐서야 쓰겠나.

    "에이, 쟤가 저러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됐어요. 그것보다 숙모. 이거."

    "응? 이게 뭐니? 선물 같은 거 사오지 말라니까."

    "에이, 그냥 정성이지. 선물은 무슨. 아무튼 손자도 보고 그러려면 오래 사셔야죠."

    "어머? 그렇게 말하면 섭하다? 아직 환갑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늙은이 취급은 싫다, 얘."

    내가 숙모에게 건네준 건 다름 아닌 보스 아이템이었다. 작은 인형의 머리핀 같은 그것은 호르몬 조절을 통해 노화를 방지하고 더욱 건강한 육체를 만들어주는 보물. 즉, 아티팩트였다. 비록 전투에 쓰이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실생활에는 더 귀중한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물론 또 다른 효과 때문이었지만.

    나는 슬쩍 숙모에게 미야프를 맡기고 삼촌에게 다가가 애기 돌 반지 같은 걸 내밀었다.

    "삼촌. 막둥이 봐야죠. 비싼 겁니다."

    "……고맙다. 잘 쓰마."

    보스의 등장으로 인류의 생활이 변했기 때문일까.

    삼촌은 평소 민망해할 법한 대화에도 덤덤했다. 남자들의 눈빛을 통해 대화를 나눈 삼촌은 지체 없이 반지를 손에 꼈다. 순식간에 10년은 더 젊어 보이는 삼촌이 뜨거운 눈빛으로 숙모를 바라보는 게 꽤 의미심장했다.

    그렇게 삼촌과 숙모를 챙긴 나는 선영이에게 다가가 귀걸이 하나를 툭 던졌다.

    "선물."

    "……흥."

    힘없는 콧방귀를 뀌며 선영이가 소파에서 일어나 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더니 옆에서 실실 웃는 선호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대신 자리를 잡았다. 소파로 쫓겨 온 선호가 주먹을 내밀며 뒤늦게 날 반겼다.

    "역시 형이야. 땡큐!"

    "헛소리 하지 말고. 도대체 언제 상견례 했어?"

    "상견례는 무슨. 그냥 동거하는 거 들켜서 억지로 온 거야. 사실 아직 결혼할 생각은 아니고. 아직 졸업도 못했잖아?"

    "레이드도 못 뛰는 놈이 졸업은 무슨. 아무튼 잘 해라."

    뭉뚱그려 한 말이지만 선호가 귀신 같이 알아먹었다.

    "근데 형. 내 선물은? 난 뭐 없어억! 악! 아프다고! 쫌!"

    "철 좀 들어라, 인마. 너 삼촌이랑 숙모한테 뭐라도 사 드렸냐?"

    "에이, 가족끼리 뭘. 마음이 중요하지, 마음이."

    이쯤 되면 피터 팬 증후군이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내가 선호에게 잔소리를 막 하려고 할 때였다.

    후다다닥! 후다다닥!

    "혀가 탔다! 먀압! 우악! 무울! 물 주세요! 켁켁! 매워! 물! 물……. 켁!"

    "할머니가 뭐랬어! 그거 맵다고 했지? 얼른 이리 와. 우유 마셔, 우유!"

    "우웩! 혀가 타써여! 피나요, 피! 크닐 나써여. 미야프 혀가 빨개요."

    "얼른 이거나 마셔! 그러다 밤새 속앓이 해!"

    뭘 잘못 집어 먹었는지 미야프가 난리도 아니었다. 약 먹은 투계처럼 홰를 친 미야프가 벌컥 벌컥 우유 한 팩을 다 마셨다. 그래도 혀가 진정되지 않는지 갈비찜을 하나 집어 들더니 혀를 막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처구니없는 미야프의 모습에 다들 웃음이 터졌다.

    그제야 명절 분위기가 제대로 나는 것 같았다.

    ***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었다.

    가족끼리 오붓하게 모여 화투도 치고, TV도 보며 연휴가 빠르게 지나갔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잃지 않았고, 그것은 매너리즘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마음껏 휴식을 취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강박에 쌓여 있었구나.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이 발단이었다. 정체된다는 건 곧 퇴보를 의미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압박감이 생겼고, 그 압박감이 내 시야를 좁혀 버렸다.

    이제야 알았다.

    내게는 보스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따스하게 맞아주는 가족도 있었고, 진심으로 도와주는 동료도 있었다. 중요한 건 보스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중요한 건 내 삶이지, 보스가 아니야."

    주는 현실이었고, 보는 성투였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였다. 아무리 보스가 문화로써 우리네 삶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고는 해도, 그것이 우리의 삼 자체가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이제야 그것을 깨달으니 나도 참 어리석은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나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여전히 내 가슴 속에는 결코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있었다. 이 상처는 아마 내 삶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할 터였다. 그 어떤 행복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니까.

    "하지만 상처 없는 사람은 없잖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상처가 있다고 해서 그 삶이 꼭 불행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평생 상처를 돌보는데 삶을 쓰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나는 내 상처를 가장 아픈 상처라 여기며 거기에 모든 걸 밀어 넣었다. 그 어떤 즐거움이 있어도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빻아 버렸다. 그러다 보니 금세 지칠 수밖에 없었다. 내 상처는 밑 빠진 독 같았으니까.

    결국 다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그 욕심을 놓아 주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지. 선호가 좀 부럽기도 하고.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순 없으니까."

    화목한 가족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나는 더 이상 상처를 돌보지 않았다. 상처를 돌보기보다는 상처를 안은 채 사람들과 함께하는 게 낫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은 심적 변화가 보이지 않았던 올가미에서 날 풀어 주었다.

    드디어 상처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

    [최종 임무 '여신의 초대'를 생성합니다.]

    보스가 내게 하나의 시험을 던졌다.

    성투가 지구에 뿌리를 내린 지 딱 666일째 되는 날.

    1만의 성투사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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