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93화 (19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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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지가지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맞이한 내가 처음으로 떠올린 말이었다.

    두려움도, 걱정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신기했다.

    "도대체 무슨 깡이지?"

    그냥 어이가 없었다.

    나름의 작당 모의를 한 것 같았지만, 내가 생각할 때 결과는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와 신흥 왕족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게 있었다.

    약 16개월.

    내가 폭군으로 군림한 이후 새로운 왕족이 등장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아무리 권태에 휩싸여 흥미를 잃었다지만 가만히 놀고 있었던 내가 아니었다. 매일 할당량을 채워 몽마를 사냥하고, 결투를 치렀다. 그렇게 모인 경험치로 영지를 발전시켰고, 동시에 스스로를 성장시켰다. 성장이라는 건 끝이 없는 시간과 같았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몇 달간 10개의 기술치를 바른 하나의 기술이야말로 이러한 내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사냥하는 게 귀찮아서 만든 기술이지만."

    문득 기술을 창제할 때가 떠오른 나는 괜히 목이 간지러웠다. 기술 차제는 엄청났지만, 그 태생이 좀 부끄러웠다. 한 마리씩 기술을 사냥하는 게 너무 귀찮아서 만들어진 기술은 내 귀차니즘의 정수였다.

    "차라리 잘 됐어. 슬슬 한 번 발라 줄 때가 됐으니까. 그동안 반쯤 은거했더니 기어오르네."

    잘 걸렸나 싶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참 많이 변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여전히 결함 있는 성격 탓에 외부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처음에야 호기심으로 한 번 둘러보기는 했지만, 볼 때마다 얼굴이 벌게지는 게 창피했다.

    그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자존심이다.

    나는 성투에 한해서는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았다. 30년 넘게 살아오며 유일하게 마음을 준 게 성투니까. 지루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게 섹스 배틀이었고, 지금까지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고 있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여야 했다.

    "지고 싶지 않아. 그게 뭐가 됐든지."

    성 기능을 회복한 뒤로 유일한 목표라면 목표이자 바람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패배를 당한다면 최악의 삶을 살던 그 시절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렇기에 질 수 없었다.

    "두 번 다시 고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이번 도전도 마찬가지였다.

    ***

    영지전을 준비하기 위한 이레의 시간.

    그동안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올랐다.

    반대로 나는 한 없이 느긋했다. 질 거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기에 남아도는 경험치를 사용하여 남궁을 조금 더 강화시키기는 했다.

    남궁 개조를 끝내고 돌아온 내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구시렁거리는 현호가 보였다. 슬쩍 녀석의 핸드폰을 들여다보니 자극적인 헤드라인이 보였다. 기사를 읽고 있었나 보다.

    [끝판왕에 도전한 왕족 군대! 그 결과는?]

    [묵묵부답 중인 폭군. 현재 그의 심경!]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영지전. 전격 해부!]

    [변화의 새바람! 만인전의 주인을 바꾼다.]

    [프랑스의 자존심! 노마의 선전포고!]

    주먹을 쥐거나 소심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현호의 모습에 실소를 흘린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인마. 뭐하냐?"

    "악! 형!"

    "그거 볼 시간에 렙업이나 해. 그러고 잠이 오냐?"

    "……언제 적 유행어를. 글고 고영이 형. 나도 이제 만렙이거든?"

    아, 맞다.

    선호뿐만 아니라 부엌에서 새신부 코스프레를 하는 리아도 만렙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2층에서 미야프와 놀다가 계단을 구른 김아연도 만렙이었고, 활황인 사업체를 팽개치고 작전 부대를 내 서재에 설치한 모지현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남자가 이 녀석이라는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럼 뭐해? 영지 하나 못 얻고."

    "……그것보다 형은 인터뷰 안 해? 저기 김아연 씨도 있는데. 아주 제대로 해 버려!"

    "귀찮아. 그리고 이제 쟤 아나운서도 아니잖아?"

    김아연은 결국 세 달 전에 가면을 벗어 던졌다. 그녀는 국민 며느리가 되기보다는 세기의 섹스 심벌이 되고 싶어 했다. 뉴스의 클로징 멘트로 보밍. 아니, 보스 아웃을 해 버린 덕분에 시원하게 잘리긴 했지만 말이다.

    슬쩍 꼴사나운 꼴로 자빠진 김아연을 바라보던 선호가 괜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래도 엄청 인기 많잖아? 김아연 씨 SNS에 한 마디만 하면 기사화하는 건 아무것도 아닐 걸?"

    "어? 너 기자회견하게?"

    어느새 다가온 김아연이 이게 웬 떡이냐는 얼굴로 달라붙었다.

    나는 되도 않는 유혹질을 하는 김아연의 이마를 검지로 콕 찍어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귀찮다니까. 그리고 이제 오빠라고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오빠는 무슨. 됐네요. 너한테는 죽어도 오빠라 못 불러!"

    "왜?"

    "……몰라서 물어?"

    아, 맞다. 쟤도 한 자존심 하지.

    꽤 오랫동안 내게 좋은 경험치 공급원으로 활약했던 김아연이라면 노마 쪽에 붙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노마가 아니라면 붙고도 남았을 터였다. 반란군의 수장인 노마가 그녀와 라이벌이라면 라이벌이라 할 수 있기에 날 도우려고 했지만.

    김아연과 노마의 SNS 신경전을 떠올리고 있을 때 서재 문이 활짝 열리며 정장 차림의 모지현이 뛰쳐나왔다. 새해 첫날에도 회사에 출근했던 그녀는 영지전 소식을 듣자마자 그대로 날 찾아왔고, 그 뒤로 외벌 신사. 아니, 외벌 숙녀처럼 지내고 있었다.

    "고영 씨! 구했어요! 아마조네스가 의뢰에 성공했어요!"

    외벌 숙녀처럼 며칠 지낸 모지현이지만, 그녀의 재산은 나보다 많았다. 보스가 세계 최고의 프로 스포츠로 자리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상속의 힘을 넘을 순 없었다.

    나는 막 출력해서 따듯한 출력물을 넘겨받으며 담담히 답했다.

    "고마워요. 근데 딱히 필요하지는 않을 텐데."

    "와……. 모 사장님이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진짜 못 됐네. 아예 고맙다고 하질 말던가?"

    김아연과 썩 사이가 좋다고 할 수 없는 모지현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만 봐도 그녀가 서운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괜히 헛소리를 지껄인 김아연을 밀쳐내고 빈 옆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여기 앉아요. 뭐 하나 보여줄 테니까."

    "네? 네."

    모지현이 내 옆에 앉자 나는 핸드폰을 꺼내 보스 앱을 실행했다. 화면에 내 상태창을 띄운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내가 건넨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3초가 지났다.

    벌떡!

    "……거, 거짓 말! 말도 안 돼요! 이, 이건! 이건 정말! 아씨. 진짜 너무……. 하아."

    무언가 시원하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말이 떠오르지 않나보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모지현의 입장에서는 상상 못할 수치들이었을 테니까.

    나는 모지현이 떨군 핸드폰을 주우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지현의 손을 잡아당기며 그녀를 진정시켰다.

    "내가 거짓말 못하는 거 알잖아요? 그래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요. 그래도 이렇게 와줘서 고마운 건 맞으니까."

    "……됐어요. 진작 말 해주지 그랬어요? 그럼 이 꼴로 3일 밤낮을 보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 그게. 그때 지현 씨가 너무 극적인 모습을 보여줘서."

    극적인 게 아니라 분노했지.

    차마 쌍욕을 퍼부으며 스스로 서재에 똬리를 트는 모지현을 당시에는 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서슬 퍼런 모습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으니까. 그 뒤에는 이미 늦었다 싶어서 말을 못했었고.

    뒤늦게 자신이 첫날 노마를 향해 전 세계의 모든 욕을 퍼부으며 나타난 모습을 떠올린 모지현이 벌게진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나는 나이도 잊고 소녀처럼 행동하는 모지현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그래도 고마운 건 맞아요. 도움은 안 되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도와주려고 왔으니. 다들 와서 구경해요. 아, 선호 너는 안 되겠다. 제수씨도 그렇고."

    "어? 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근데 형 진짜 괜찮아? 나랑 리아랑 진지하게 만나는 거?"

    아무렇지 않은 내 목소리가 그렇게 놀라운 건가?

    선호가 머쓱한 얼굴로 말하며 여전히 부엌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리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그냥 내 시선을 피하는 것 같았다. 이 녀석도 내가 은근히 고지식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내가 담담히 두 사람 사이를 인정하는 게 어색한 모양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고지식한 놈이 맞았다. 다만, 세상이 변하는 걸 못 따라 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미 세상은 3년 전과 많이 달라졌다.

    특히 섹스에 관해서는.

    "키스나, 섹스나. 이젠 그게 그거잖아?"

    "아니지, 멍청아. 키스나 섹스 배틀이나. 섹스랑 섹스 배틀이랑 같냐? 요즘 결혼할 때 서로 전적 관리창을 공유하는 게 트렌드인 것도 모르지?"

    전적 관리창은 다름 아닌 참가자가 된 이후의 전적을 집계한 창을 말했다. 그 창 안에는 섹스 배틀은 물론이고 성적 행위와 관련된 모든 정보가 기입되어 있었다.

    "그래서 순진한 남자들이 노났지. 신분 세탁해서 들이대는 여자 망신 다 시키는 애들이 사라졌으니까."

    "사라진 건 아니죠, 아연 씨. 여전히 많대요. 덕분에 사기꾼 직업을 가진 애들 벌이가 쏠쏠하다고 했던 거 같은데."

    갑자기 열띤 토론이 벌어졌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곧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끝낸 리아가 사람들을 모았기 때문이다. 의외로 솜씨 좋은 리아의 상차림 덕분에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후식으로 저마다 선호하는 차를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것도 잠시 모두의 시선이 거실 벽에 걸린 시계로 향했다.

    "슬슬 준비해야겠네요. 선호랑 리아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우리는 좀 빠져 줍시다."

    영지전이 다가왔음에도 장난스런 농담을 하는 내 모습에 다들 깔깔 거리며 웃었다. 그 중에는 영약함의 표본도 있었다. 바로 미야프였다.

    "처바르러 가요! 내가 다 발라 줄 거야! 전어는 맛있는데 까시가 시러요. 제대로 발라 먹어야 해요!"

    또 시작이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고 있는 미야프의 모습에 좌중이 또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영재 사기꾼은 여기 두고 가야 하나?"

    "안 돼요! 아빠 잘못해써요! 미야프가 잘못했어요!"

    "뭘 잘못했는데?"

    "음……. 전에 한 마리만 먹겠다고 약속했는데. 치킨 두 마리 다 먹은 거? 아니, 아니. 할머니가 아빠 먹으라고 해준 갈비찜을 내가 고기만 쏙 빼 먹은 거? 다 잘못했어요! 나도 데리고 가주세요. 미야프가 잘할게요. 저 잘해요! 이케……읍! 읍읍!"

    이 요망한 녀석이 또 날 당황하게 하려고 수작을 부렸다. 물론 그동안 면역이 됐기에 허무하게 당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미야프의 입을 막고 무릎에 올리며 작게 속삭였다.

    "너 내가 모를 줄 알지? 속성석 사는 거 동화 1개잖아?"

    "흡!"

    미야프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갔다. 스스로 무얼 잘못한 지 아는 모양이다. 나는 괘씸한 녀석에게 꿀밤을 먹이며 단호하게 혼냈다.

    "또 거짓말하면 정말 혼난다. 알았지?"

    "……네. 잘못했어요. 너무 배가 고파……. 읍! 읍읍!"

    "하아……. 애들은 다 이런 건가."

    나와 미야프가 한 편의 콩트를 보이자, 주변은 또 다시 웃음바다가 됐다. 그 중 가장 미야프를 귀여워하는 리아가 다가와 미야프를 품에 안았다. 나는 손에 힘을 풀며 리아가 미야프를 데리고 가도록 해 주었다.

    다행히 미야프는 더 이상 짓궂은 장난질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아에게 미리 부탁했던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저 녀석 좀 부탁할게."

    "네. 다녀오세요. 선호랑 같이 보고 있을 게요. 아, 그리고 전에 말씀하신 거 세팅 끝났대요."

    "오케이. 그럼 다 됐네."

    오랜만에 일을 시킨 리아는 여전히 똑 부러졌다. 선호가 리아의 반만 닮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나마 철든 선호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잘해라.

    내 눈빛을 읽은 선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손뼉을 치며 수많은 여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자! 다들 갑시다. 아주 재미있을 겁니다. 아주!"

    "또, 또. 저 사악한 인간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수작이라니? 나 그런 사람 아냐."

    "웃기시네! 그 음흉한 미소를 보고도 모를 것 같아? 전에 봐준다고 덤비라고 할 때 그 모습이랑 똑같아. 백수 투하에 떡실신 당한 걸 생각하면……. 으으!"

    김아연이 10성이 된 백수 투하의 위력을 떠올리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내 실험체가 됐던 여자들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10성이 되며 즉시 발동되는 백수 투하는 그 위력도 위력이었지만, 부작용까지 증폭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1회전에 맛탱이가 간 김아연은 내게…….

    "오빠라고 잘도 하더만. 하여튼. 자, 갑시다!"

    "아악! 하지 마! 닥쳐!"

    김아연의 히스테리에 몇몇 여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내 말에 따라 각자 자리를 잡는 게 보였다. 남궁에 갈 때 되도록이면 현실의 육체를 보호할 필요가 있으니까.

    뭐, 몇 초나 지날까 싶지만.

    잠시 후 모두가 한 자리씩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남궁으로 떠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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