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91화 (191/200)

<-- A Year of Revolution -->

***

화려하다.

윌리엄 왕세손의 초대를 승낙하고 그의 거처로 들어선 순간 느낀 감정이었다.

세월이 얼마나 흐르더라도 왕이라는 존재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줄 수 있는 존재임에 틀림이 없었다. 실제로 영국 왕실의 부는 한화로 십 수조원이 넘을 정도였다. 이런 막대한 부를 축척한 영국 왕실의 직계가 머무는 곳도 당연히 화려할 수밖에 없었다.

근데 부럽진 않네.

나는 맞은편에 앉아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는 윌리엄 왕세손의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수북한 머리칼이 만금보다 더 값지게 느껴졌다. 나보다 고작 몇 살 많은 왕세손의 황량한 그곳과 달리.

그것보다 이거 꽤 불편한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여유도 잠시였다. 나는 내 맞은편에 앉아 말없이 미소만 지은 채 찻잔을 들고 있는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의중을 모르겠다. 소탈한 생활을 즐기며 남을 돕는 일이 천직인 그가 이리도 화려한 궁에 초대한 건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다.

이런 내 의심과 달리 윌리엄은 반듯한 모습만 계속 보여주었다. 물론 계속 말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찻잔에 담긴 찻물을 반쯤 마셨을 때 드디어 입을 열었다.

"우선 갑작스런 초대에 응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오래 있고 싶지는 않으니까."

나도 모르게 뾰족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자연스레 내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단순히 실언을 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애초에 실언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날카롭게 반응했는지, 그 이유를 바로 알아챘다.

긴장했구나.

강자와 약자를 알아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강자는 앞에 누가 있더라도 한 가지를 가지고 있었고, 약자는 앞에 있는 이들에 따라 그 한 가지가 없었다. 여기서 그 한 가지는 다름 아닌 여유를 일컬었다.

나는 난데없이 벌어진 지금 상황을 부담스럽게 여겼고, 그것은 곧 으르렁 거리는 하룻강아지처럼 행동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런 나와 달리 윌리엄은 여유가 넘쳤다. 아무리 일찍 떠나보낸 모친에게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았다지만, 그런다고 해서 그의 환경이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었다. 평민들이 다니는 학교 다녀도 그의 핏줄은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나마 윌리엄의 성품이 올곧은 편이라 다행이었다.

"하하! 이거 민망합니다. 아니. 미안합니다. 억지로 시간을 훔쳐왔으니. 내가 잘못한 게 맞습니다."

최소한 인터넷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정신 나간 아파트 주민들은 아니었다.

독대한 이후로 점점 소탈한 모습을 슬며시 보이는 윌리엄의 모습에 그제야 긴장이 조금씩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도 처음과 달리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봤자 별 티도 나지 않았지만.

"내가 시간이 좀 없습니다."

은근히 본론을 꺼내라는 말에 윌리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서 찻잔을 내려놓았다.

"미쳐버린……. 몽마 때문이지요.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햄프턴 코트가 민간인들에게 공개되어 있기는 하나. 그래도 우리 왕실의 역사고, 재산입니다. 길지는 못해도 여유롭게 대화를 나눌 시간 정도를 벌어 놓았습니다."

템스 강의 런던 버러 가에 있는 영국의 옛 궁전은 런던에서 약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나름 주요한 관광지다보니 당연히 민간인들에게 공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마다 궁전 안 중앙 공원에서 축제와 꽃 박람회가 열리기도 했다.

나는 윌리엄 왕세손의 묘한 기색을 읽으며 잠시 고개를 갸웃 거렸다.

이거 뭘 부탁하려고……?

처음에는 그저 원래 소탈한 성품이라 날 편하게 대한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게 아니었다. 여유가 없을 때는 상대의 느긋한 모습을 여유로 착각했지만, 여유가 돌아오자 억지로 쥐어짠 여유가 눈에 들어왔다.

다시 고개를 세운 나는 윌리엄 왕세손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아주 단도직입적으로.

"부탁이 뭡니까?"

"……역시 들었던 대로 화끈합니다. 한국인들이 그렇게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지요?"

이 친구가 어디서 수작을.

여전히 아쉬울 게 없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느릿느릿 말하는 윌리엄이었지만, 이미 내 눈에는 그의 잔뜩 긴장한 속마음이 훤히 보였다.

"누구한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난 맵고 짜고 그런 음식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것보다, 다른 말을 듣고 싶은데요."

결국 윌리엄 왕세손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 나왔다. 언제나 밝게 웃는 이미지를 가진 그의 얼굴에 그늘이 보였다. 답답한 기색이 역력한 한숨을 꽤 오래 토해내고 나서야 그의 입에서 본론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하게 물으니, 시원하게 답하겠습니다. 미쳐버린. 아니, 머리 없는 왕비를. 우리 영국의 길드와 함께 사냥해 줄 수 있겠습니까?"

머리 없는 왕비.

꽤 섬뜩한 이름이었다. 다만 영국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오래전 참수 당한 왕비를 떠올릴 수 있었다. 거기에 나타난 장소가 햄프턴 코트 궁이라면…….

앤 불린인가.

헨리 8세를 유혹하기 위해. 아니, 자신이 낳은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천륜과 인륜을 모두 어긴 여자였다. 연이어 왕자를 낳는데 실패하자 결국 동생까지 왕실로 불러 욕망을 잉태하는데 성공했지만, 결국 벌을 받았는지 사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 들통 나서 화형을 당했다던가? 아, 감형돼서 머리가 잘렸지.

헨리 8세가 그래도 자기 아내인 여자의 목을 베기 위해 프랑스에서 목 자르는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초빙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영화에 관심이 많아 원작인 책까지 사서 읽었을 때 느꼈던 충격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짧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다시 윌리엄을 바라보며 솔직한 대화를 시도해 보았다.

"솔직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봤자 몽마 아닙니까?"

"맞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합니다. 다만 어른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의 손을 빌려 왕실의 얼룩을 지우는 건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라 하십니다."

뭐래?

순간 어이가 가출해서 두 눈을 뚫고 나왔다. 윌리엄이 내 눈빛에 어린 뜻을 읽고 이내 눈을 감았다.

에효. 저 친구가 무슨 잘못이냐.

기구한 삶을 살다 이제야 가정을 꾸리고 안정을 찾은 비운의 왕세손이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세상은 넓고 생각은 다양하니까.

튀어 나오는 말은 영 탐탁지 않은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래서. 그 허황된 자존심을 지키려면 왕실을 떠받드는 국민들이 해야 한다. 이 말입니까?"

윌리엄 왕세손이 삐딱한 내 말투에 눈을 뜨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멈추고는 착잡한 기색을 드러냈다.

"솔직히 말하면 체면 때문입니다. 몽마들이 과거의 역사를 불러오는 존재라는 거. 아니, 훔쳐와 탈을 만들어 쓴다는 거.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왕족 몽마는 위험한 존재입니다. 이번에야 관광지로 쓰이는 곳에 나타나서 다행일 뿐이니 말입니다."

왕족 몽마.

확실히 자신만의 영지를 가지고 있는 몽마들의 등장은 안정을 바라는 인간의 입장에서 불안정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고, 사고를 막자니 불안감을 조성하는 꼴이 됐다.

결국 가장 좋은 방법은 왕족 몽마를 스스로 퇴치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었다. 그 힘이라 여기며 나름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들이 한 방에 나가떨어져 병원에 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대충 상황을 이해한 나는 거의 다 녹인 긴장을 지워 버릴 수 있었다.

"애들은 키워야겠고. 몽마로 잡아야겠고. 그런데 다른 놈이 잡는 건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무작정 막자니 세계 여론이 신경 쓰이고?"

마지막 말에 윌리엄 왕세손이 움찔하는 게 보였다.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몽마 사냥 법이었다.

몽마는 국적, 인종,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사냥할 수 있다.

어차피 몽마 사냥을 규제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 굳이 쓸데없는 제재를 가해 보스를 깊숙이 받아들인 사람들을 자극하는 건 어리석었다. 그러다 보니 각국 정부들은 암묵적으로 몽마 사냥에 차별을 두지 않기로 의견을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뭐, 간혹 귀족 몽마를 자국민들에게 돌리는 건 없지 않았지만. 그거야 눈감아 줄 수 있는 문제고.

하지만 왕족 몽마는 수작을 부릴 수 없었다. 이미 모든 플레이어의 시선이 홀로 남은 머리 없는 여왕에게 쏠려 있는 상태다. 지금 왕궁을 통제하는 것도 영국 왕실 입장에서는 꽤 부담스러운 행동일 정도였다.

안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했겠지만. 글쎄다. 욕 좀 먹겠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발에 땀. 아니, 불나도록 뛰어다닐 영국 외무부 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들뿐만 아니라 각국에 파견한 외교관들도 난리가 아닐 터였다. 어쩌겠는가. 아직도 영국은 스스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 여기는 것을.

어쨌든 이것만은 분명했다. 영국 왕실은 자존심을 지키며 실리도 챙기고 싶어 했다. 그들은 자력으로 왕족 몽마를 퇴치할 수 있는 힘을 갈구하고 있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이번에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그러니까. 나보고 쩔을 해 달라?"

윌리엄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화가 난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 꽤 당황스러운 듯 싶었다.

정체 없이 표류하는 검은 조각배가 윌리엄의 눈동자에 나타났다.

***

이레가 흘렀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처럼 기하학적인 효과를 의도한 프리비 정원(Privy Garden)의 뒤로 템즈 강이 흐르는 게 보였다. 초목이 만개할 여름이다 보니 더욱 활기가 넘쳐 보였다. 정원의 중앙의 분수가 그 운치를 더해주는 모습을 보니 모하게 마음이 설렜다.

단 한 가지.

분수 근처를 배회하는 머리 없는 왕비를 제외하면 말이다.

"옥에 티네. 옥에 티. 그나저나 진짜 으리으리하네. 어우 야."

정원의 끝에 선 나는 정말 놀랐다. 사진으로 볼 때와 직접 볼 때가 얼마나 다른 지 확실히 깨달았다. 이래서 관광을 다니나 싶었지만…….

오케이. 저장 완료. 나중에 복사해서 둘러 봐야겠다.

나는 여전히 어디 쏘다니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유유자적한 나와 달리 내 뒤에 나란히 2열로 서 있는 서른여섯 명의 여자들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바로 블러디 헬 길드원들이었다. 당연히 그 중 길드 마스터인 젠장 맞을 여자도 있었다.

"어썸 바나나. 정말 가능해? 아무리 너라도……."

"그럼 빠지던가? 난 상관없어. 어차피 당신네들이랑 계약한 게 아니잖아?"

나름 고운 얼굴의 푸른 눈을 가진 블러디 헬이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한 마디 쌍욕을 해도 시원치 않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다시 뒤로 물러났다.

역시 실력 행사가 답이었어.

영국에서도 알아주는 또라……. 아니, 왈가닥들이 이렇게 고분고분 한 이유. 그것은 바로 내게 덤볐다가 된통 당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서른 여섯 명의 길드원들 모두를 말이다.

실력에서 밀리니 아무리 과격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꼬리를 말 수밖에 없었다. 괜히 더 말해봤자 자기 꼴만 우스워 지니니까.

"얼른 끝내고 가자. 다들 내가 말한 대로 준비한 거 맞지?"

"맞아. 진짜 괜찮겠어? 우리가 지원을……."

"지원은 무슨. 그냥 광역기 맞고 뻗지만 않으면 돼. 괜히 덤비겠다고 세팅 바꾸지 마. 무조건 생존이 우선이니까."

단숨에 블러디 헬 길드를 함락시킨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들의 장비 세팅을 바꾸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존력이 꽤 늘어난 그녀들이었지만, 나름 알아주던 공격력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로 인해 그녀들은 데미지 딜링 자체가 어렵게 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여자들이 계속 걱정을 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나는 다른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항마력 몇이야?"

"……600정도. 활력은 가장 낮은 단원이 3천 8백이야."

"에효……. 아슬아슬 하겠는데."

머리 없는 왕비에게 들이댔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진 그녀들이었지만, 그래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른여섯 개의 전투 기록을 분석한 결과 몽마의 마법력을 유추할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첫 광역 공격의 데미지였지만.

"600이면 너무 아슬아슬 하지 않아? 딱 평균이잖아."

"그렇긴 한데. 더 올리고 싶어도 올릴 구석이 없어. 아무리 그래도 상징을 막 깨버릴 순 없으니까."

쩝. 그건 그렇지.

왕족이 되지 못한 이상 상징을 교체하려면 기존의 상징을 깨야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들의 항마력을 높이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오히려 600이나 만들었다는 게 대단할 지경이었다.

"아무튼 원킬 당하면 나도 몰라. 내 책임 아냐. 알지?"

"알아. 계약서 나도 읽었잖아?"

계약서에는 1회전을 버티는 걸 전제로 작성했다. 당연히 그녀들이 1회전도 버티지 못한다면 내 의무는 사라졌다.

어차피 저 녀석 왕족 만들려고 이짓하는 건데. 상관없겠지.

자연스레 마음을 편히 먹은 나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가자고. 싸대기 맞으러."

"출발! 다들 조심해!"

"예! 마스터!"

나는 그대로 머리 없는 왕비가 장악하고 있는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눈앞이 번쩍이며 오래된 첨탑에 자리한 낡은 방이 나타났다.

철썩!

더러운 물세례와 함께.

"망할 것들! 꼴도 보기 싫다! 꺼져라!"

표독스런 노성과 함께 얼굴에 차가운 물 싸대기가 떨어졌다.

아침 드라마도 아니고…….

그리 아프다는 느낌은 없었지만 기분이 더러웠다. 태어나 누구에게 싸대기를 맞은 적이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아, 있기는 하구나. 어쨌든 싸대기는 싸대기니까.

축축한 얼굴을 맨손으로 벅벅 문지르고 있을 때 보스가 판정을 내렸다.

['머리 없는 왕비'에게 2,669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상태 이상 '기절'을 방어합니다.]

광역 공격은 꽤 아팠다. 내 항마력이 1,310인걸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게다가 상태 이상까지 거는 걸 보니 처음부터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격권이 돌아왔지만 나는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약간의 시간을 가져야했다. 지금 내 눈에는 몽마와 나 밖에 없는 것 같았지만, 몽마는 동시 다발적으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쯤하면 부활하려면 다 했겠지?

몇 분이 지났을까.

이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부활을 하는 것은 블러디 헬에게만 국한된 일이었다. 이번 계약의 가장 중요한 사항은 그녀의 왕족 전직이었으니까.

더러운 감옥 같은 방안을 둘러보며 시간을 보낸 나는 삐걱거리는 나무 침대 위에서 표독스럽게 날 노려보는 몽마를 바라보았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머리가 있었다. 분명 정원을 차지한 몽마는 머리가 없었는데 말이다.

아직 처형당하기 전이라 그런가?

어차피 크게 신경 쓸 건 아니었다.

나는 계약을 이행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윌리엄이 구해주겠다고 한 추출 재료를 손에 넣기 위해서.

"아악! 놔라! 놓으란 말이다!"

"지랄하네."

가관이었다. 머리 없는 왕비는 입으로는 놓으라면서 손으로는 옷을 찢었다. 참 언행일치가 안 되는 몽마였다.

덕분에 편이 자세를 잡을 수 있게 된 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나신의 몽마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그대로 깔아뭉갰다.

푸욱!

"아악! 아아악!"

무기를 바꾼 탓에 나는 예전처럼 열 번 넘게 박음질을 하지 않아도 됐다. 딱 일곱 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필요치 않았다.

내가 오욕칠정을 깨부수는 좆. 아니, 검법을 펼쳤다. 일곱 초식으로 된 검법은 금방 끝났다.

['머리 없는 왕비'에게 33,233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첫 번째 초식은 평타가 들어갔다. 실망하기에는 평타마저도 엄청났다.

다행히 두 번째, 세 번째 초식은 모두 치명타가 터졌다.

['머리 없는 왕비'에게 416,274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머리 없는 왕비'에게 563,158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상한가와 하한가를 오고가는 치명타 데미지는 자릿수가 달랐다. 하긴, 백수 투하를 쓰지 않아도 치명 증폭은 800%가 넘었다. 한 마디로 9배 이상의 데미지 증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머리 없는 왕비'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싱겁네."

언제부터였을까.

왕족 몽마를 사냥하는데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했고, 실망했다. 의욕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강해질 필요가 있을까?

현실로 돌아오며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다.

"으하하하하! 왕족! 왕족이다! 3차 전직을 했어! 썅! 다 죽여 버리겠어!"

……아무래도 더 강해져야겠다.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으니까.

조울증이 의심되는 블러디 헬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여섯 번.

그때마다 한 달씩 흘러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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