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meless Princ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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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명.
영지 쟁탈전을 시작하기 전 남궁에 있던 참가자들의 숫자다. 나를 포함하여 75명이었던 방어 병력이 절반 밑으로 뚝 떨어졌다. 이름 없는 공주의 손짓 한 방에 서른 명이 넘게 무력화된 탓이다.
단숨에 활력이 모두 깎인 패잔병들은 모두 현실로 돌아갔다. 서른이 넘는 공백에 전열을 유지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다급한 마음에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모두 사용해 공기의 벽을 만들었지만 미봉책에 불과했다.
전열이 무너진 이상 다른 방법은 없었다.
"모두 후퇴! 3층으로 가! 뛰어!"
얼마나 다급했는지 반말이 튀어 나왔다. 그럼에도 난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쓰지 못할만큼 당황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몰랐다.
이름 없는 공주의 광역기에 큰 충격을 받은 여자들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그래도 몇몇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이들은 금세 놀람을 추스르며 정신을 차렸다.
그 중 단연 돋보이는 건 김아연이었다.
"뭐해! 뛰어! 3층으로 가! 3층!"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체력 100을 찍은 김아연 다운 모습이었다. 그녀의 뾰족한 외침에 넋놓고 있던 여자들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내 2층으로 오르는 출입구들 사이에 있는 3층 입구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목청이 터져라 외치는 김아연의 모습을 잠시 보고는 이내 모지현 일행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쪽이 더 피해가 컸기 때문이다. 심지어 소연이와 현아도 광역 공격에 휘말려 리타이어한 상황이었다.
얼른 뛰어간 나는 간신히 체력 계열이나 방어 기술을 사용하고 있던 여자들을 직접 일으키며 모지현을 향해 소리쳤다. 물론 마지막 남은 격리 기술 아이템을 쓰면서.
"지현 씨! 수습은 올라가서 해요!"
시간이 없다는 걸 모지현도 알았는지 그녀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바로 회원들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실전 경험이 부족할 뿐 능력 자체는 가장 뛰어난 이들이 클럽 다이아몬드 회원들이었다. 게다가 나름 각자의 영역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는 강한 여자들이었다.
그렇게 추가 피해 없이 모두 3층으로 대피할 수 있었다.
모두 3층 입구 주변에 널부러져 숨을 헐떡이고 있을 때 모지현이 회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는 이내 내게 다가왔다.
"약간이지만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예요. 고영 씨가 사용한 거랑 비슷한 기술을 가진 회원들이 있거든요. 물론 계속 지속할 순 없겠지만."
"고맙습니다."
잠시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게 어디냐 싶었다.
모지현에게 진심을 담아 인사한 나는 고개를 돌려 인상을 쓴 채 목을 쓰다듬고 있는 김아연을 바라보았다. 마침 날 바라보던 김아연과 시선이 마주첬다. 그녀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없이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나와 모지현 앞에 걸어온 김아연은 모지현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날 바라보며 물었다.
"어떡게 할 거야?"
"버텨 봐야지."
"그런데 쟤들은 동원하지 않을 생각이야? 그래도 총알 받이로 쓰면……."
김아연이 3층의 깊숙한 쪽에 있는 남궁 병사들을 가리키며 넌지시 의견을 밝혔다.
나는 김아연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본 수문장인 신출내기를 풀러싸고 있는 반인반어가 보였다. 도리처럼 상체가 인간인 녀석들도 있었고, 하체가 인간인 녀석들도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도리가 비장한 눈빛을 뿌리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든 맡겨만 달라는 눈치였다.
피식.
실소를 흘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여전히 인어들을 쓰고 싶어 하는 김아연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그래봤자 몇 초나 벌겠냐. 그보다는 수문장을 보호하는 게 나아. 어차피 몸으로 때우는 건 매한가지니까."
"그것도 그런데. 우리 애들이 좀……."
"아! 잠깐만."
김아연이 쭈뼛쭈뼛하게 말하는 순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게 떠올랐다. 바로 회복 물약이었다. 소지량을 늘려주는 기술을 익히지 않은 이상 물약 계열은 최대 10개밖에 보유할 수 없었다.
지금 쯤이면 다 썼겠지.
나는 얼른 3층에 있는 창고로 향했다. 비고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었지만, 쓸데없이 경험치를 낭비할 순 없었기에 그냥 금고 하나만 덩그라이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창고로써 역할은 제대로하니 문제될 건 없었다.
그동안 만 단위가 넘는 몽마를 사냥하며 얻은 온갖 회복 아이템이 가득했다. 나는 최대한 챙긴 뒤 일단 얼음으로 입구를 막고 있는 클럽 다이아몬드 회원들에게 다가갔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그녀들에게 회복 물약을 한가득 안겨준 나는 다시 창고로 돌아갔다.
그렇게 왔다 갔다하며 물약 셔틀이 된 내가 다시 숨을 헐떡일 때 쯤이었다.
"고영 씨!"
"뚤릴 것 같아! 얼른 와!"
다급한 모지현과 김아연의 외침이 날아들었다.
다시 한 번 체력의 한계를 느끼며 입구로 달려간 나는 천도 씨앗을 제외한 모든 회복 물약 아이템을 날 위해 땀을 흘리는 여자들에게 건넸다. 특히 모지현과 김아연에게는 몇개 남지 않은 천도 열매까지 넘겼을 정도였다. 말 그대로 탈탈 털었다.
쪽! 쭈읍!
"고마워요, 잘 쓸게요. 고영 씨."
"역시 갑부! 이런 걸 가지고 있었단 말이야?"
처음보는 아이템에 크게 놀란 그녀들이 이내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 볼에 입술 자국을 남기고 떨어졌다. 살짝 키스를 한 모지현과 달리 김아연은 좀 끈적끈적했지만.
어쨌든 준비가 끝났다.
파항! 파스스…….
"뚤렸어요!"
"자리잡아! 긴장풀지 말고! 지원조는 뒤로 멀찍이 떨어져! 괜히 붙어 있지 마!"
클럽 다이아몬드 회원의 외침에 김아연이 재깍 반응했다. 그녀의 시기적절한 오더에 모지현이 날 보며 씽긋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원형으로 된 방진에 한쪽으로 걸어갔다.
모두 날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뭉클했다. 다만 그보다 더 크게 일어난 감정이 있었다. 바로 분노였다.
젠장!
사실 전투가 시작 된 이후로 나는 계속 되뇌었다. 남성체 몽마든 뭐든 남궁을 지키려면 싸워야한다고. 그런데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수십, 수백, 수천번을 되뇌었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힘내요!"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간절하게 외치는 게 전부였다.
"항, 항! 학! 하악!"
"아흑! 더, 더 강해졌어!"
"아아아앙……!"
물론 전투가 시작된 터라 들려운 건 신음 뿐이었지만.
그 사이 나는 후방 지원조에게 합류해서 그녀들과 함께 활력 치료나 버프를 사용했다. 누가 활력이 떨어지고 버프가 떨어졌는지 알 수 없었기에 여전히 효율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파란 물약을 모두 여자들에게 준 터라 활력 치료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들 중 유일하게 활력 치료가 10성인 나였으니까.
"3마리 이상 막고 있는 분들께 제가 힐을 할 게요."
"그럼 전 쓰리썸."
"난 노멀."
척하면 척이었다.
나는 그 짧은 시간만에 전우애가 쌓인 지원조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고는 다시 전장에 집중했다. 물론 치료를 해주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언제 나타나 또 이상한 기술을 쓸지 모르는 이름 없는 공주의 위치가 신경쓰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이름 없는 공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녀의 남은 세 친위대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더 불안감이 쌓였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착 가라앉은 눈으로 전장을 지켜보았다. 정예만 남아서 그런지 전황은 확실히 나쁘지 않았다. 한 명의 낙오자도 나오지 않은 반면, 이름 없는 공주의 병사들은 빠르게 그 숫자가 줄어 들고 있었다.
3층까지 밀렸지만 이대로라면 큰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럴리가 없지.
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내 운은 내가 잘 알았다.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 생각하며 더욱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장은 꽤 고착화된 상태였다.
2층의 입구보다 1.5배는 더 넓은 3층 입구였지만, 입구가 하나다보니 막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입구 주변을 둘러친 여자들의 모습이 마치 우물 주변을 두르고 있는 돌담 같아 보였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여자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몽마들의 진입을 막아냈다.
비록 모지현과 김아연의 일행이 어우러지지는 않았지만.
서로 창피함을 내려 놓은 여자들이라도 어색함이 없을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3층 입구와 수문장 사이에 위치한 내 기준으로 좌우로 대치한 것처럼 자리가 잡혔다. 내가 6시면, 모지현은 3시였고 김아연은 9시였다.
그때 최전방에서 다섯 몽마를 상대하던 김아연이 언제 봤는지 12시에 일어난 균열을 눈치채고 소리쳤다.
"자꾸 빠져 나가잖아! 12시 언니! 잡아! 그냥 머리끄댕이라도 잡아요!"
그걸 또 언제 봤대?
말투가 좀 그랬을 뿐 김아연의 오더는 날카로웠다. 그녀의 말대로 12시 방향의 전열이 살짝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래봤자 몽마 한 마리가 빠져나가는 것도 버거워 보였지만, 되도록 가두고 패는 게 나은 건 맞았다.
김아연의 적극성에 모지현도 영향을 받은 듯 보였다.
"자자! 오늘 아니면 우리가 언제 또 이런 실전을 치러요? 다들 그간 쌓인거 제대로 풀어 봐요!"
김아연과 달리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지현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그것도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역시 경쟁을 붙이면 결과 하나는 최고네.
차마 옆에 있는 여자들 때문에 입밖으로 낼 수는 없었지만, 내 솔직한 마음이었다. 은연 중 경쟁이 붙은 모지현과 김아연 일행들은 본인들의 한계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온몸에 묻은 몽마들의 타액과 그녀들 스스로 흘린 애액이 뒤섞이자, 묘한 색기가 피어난 것이다.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강렬한 색정은 성투의 흥분도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다 보니 살짝 전열이 흐트러져도 몽마들은 그 틈을 비집고 뛰쳐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여자들에게 더욱 더 달려 들며 본능대로 움직였다. 이러한 몽마들의 본능은 결국 명령이 먹히지 않는 걸로 이어졌다.
퇴폐의 끝이네, 끝. 어우야.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내 입이 마를 정도였다. 나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축였지만, 한 번 매마른 입술은 여전히 매마른 상태였다. 심지어 내 옆에서 지원을 하고 있던 여자들도 마른침을 삼키며 얼굴이 상기된 게 보였다.
온몸이 근질근질한 그때였다.
몽마들이 색기로 된 진에 함몰되어 버린 탓에 뜻하지 않은 균열이 일어났다. 너무 적극적으로 몽마들이 여자들에게 달려든 탓이었다. 공간적 한계게 부딪히자 자연스레 방진이 벌어지며 틈이 생겨 버렸다.
딱히 걱정은 들지 않았다. 그래봤자 몽마들은 본능에 취해 있었으니까. 실제로 바로 옆으로 빠져나가 공간을 벌릴 수도 있었지만, 색기에 취한 몽마들은 다시 여자들의 품을 파고 들며 불끈 솟은 물건을 흔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괜히 잘 돌아가는 상황에 참견하기보다는 내가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당연한 말이었지만 상황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기본적인 실력 차이가 있다지만, 그래도 간간히 한 명씩 몽마에게 쓰러지는 이들이 생겼다. 시기적절하게 활력 치료를 해주지 못한 탓이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 옆에서 언제라도 몽마들의 틈에 뛰어 들고 싶어하는 여자들이었다. 그녀들도 여자였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섹스 판타지에 참을성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는 지경이었다.
나는 지원조의 여자들이 이성을 잃기 전에 입을 열었다.
"참아요. 나중에 내가 대신 풀어줄테니까."
"……약속했어요."
"아흐! 미치겠는데, 진짜!"
다리를 배배꼬며 어쩔 줄 몰라하던 여자들이 내 말에 조금 안정된 듯 싶었다. 공수표를 막 날리다가 파산. 아니, 파정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일단 막고 봐야지.
끈적끈적한 지원조 여자들의 눈빛에 살짝 몸을 떤 나는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그때 내 미간이 좁혀졌다.
"쯧! 11시! 뚫렸습니다!"
짧게 혀를 찬 나는 기어코 방진을 뚫은. 아니, 방진에서 튕겨져 나간 몽마를 보며 소리쳤다. 다만 내가 지시를 한다고 어찌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여자들은 공간적 한계까지 몽마를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별일 없겠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방금 소리친 것도 큰 기대를 가지고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별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살짝 욕심을 부렸을 뿐.
"다들 집중해요! 괜찮으니까! 아주 끝내 줍니다!"
혹시 내가 한 말 때문에 더 균열이 생길까 우려한 나는 뒤늦게 소리치며 여자들을 안정시키려고 노력했다. 다행히 뒤늦진 않았다. 여자들은 조금 더 들뜬 신음으로 답했고, 그 사이 남성체 몽마들의 숫자가 빠르게 줄고 있었다.
여전히 한 마리가 뒤로 빠져나간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생각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허……. 기어코 다 잡았네요."
"그러게요. 칫. 부럽다."
"나도 공격 계열로 갈아 탈까? 이거 너무 심심한데."
"금화 20개였지? 나도 고민해 봐야겠다. 아흐. 살떨려."
이제 섹진에는 서른 명도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걱정은 들지 않았다. 남은 남성체 몽마의 숫자는 그보다 더 적었으니까.
그렇게 내가 서서이 마음을 놓은 그때였다.
설마했던 별 일이 벌어졌다.
"저, 저기 봐요! 저기!"
다급한 지원조 여자의 말에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전투 중 튕겨 나갔던 몽마가 있던 곳이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더 이상 몽마가 있지 않았다. 아니, 몽마는 몽마였다. 아직도 여유를 잃지 않은 하늘하늘한 치마를 끌고 있는 여성체 몽마가.
이름 없는 선녀가 피로 물든 바닥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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