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75화 (17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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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성전.

    서로의 캐릭터를 육성하고 거대한 전장에서 맞붙어 승패를 가리는 것.

    한때 유행했던 게임의 꽃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공명심의 끝판왕 같은 시스템이 보스에게도 있었다.

    바로 영지 쟁탈전이었다.

    이 시스템은 참가자의 보유 영지 규모에 따라 3단계로 분류됐다.

    궁(宮), 성(城), 국(國).

    가장 작은 규모인 궁급의 경우 24시간의 준비 시간이 주어졌다. 다음 등급인 성급의 경우 72시간이, 마지막으로 국급의 경우 168시간이 주어졌다. 하루와 사흘, 그리고 이레였다.

    이 시간 동안 영지의 주인은 방어를 위한 병력을 끌어 모으거나 전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있기는 한데. 이거 끌어 모아봤자 아닌가?"

    빠르게 주입되는 정보를 확인한 나는 남궁의 옥문 앞에 주저앉으며 그리 쓸모없다는 듯 말했다.

    반면 미야프를 품에 안은 채 내 맞은편에 앉은 나 원장은 다른 생각인 듯 보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단호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마치 숙제를 잘못 제출한 학생을 혼내는 선생처럼.

    "그게 아니지! 시간을 왜 줬겠어? 혼자 싸우지 말라는 거잖아. 그럼 적도 혼자 오는 게 아닐 거라는 생각은 안 드니?"

    들지. 근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나 원장의 말대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다만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이라 욕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몽마가 얼마든 쳐들어와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보스의 마지막 설명이 끝나기 전까지는.

    나는 와락 인상을 찡그린 채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미친!"

    "박고영! 너 애 앞에서 말조심 안 할래?"

    뜬금없이 욕을 먹은 나 원장이 미야프의 귀를 손바닥으로 막으며 소리쳤다. 하여튼 오지랖은. 누가 보면 미야프가 그녀의 딸인 줄 알겠다.

    나는 여전히 얼굴을 펴지 못한 채 나 원장을 향해 내가 들은 설명을 들려주었다.

    "나 쌤. 이거 방식이 좀 지랄 같은데?"

    "또, 또! 너 자꾸 험한 말 쓸 거야?"

    "아 쫌! 진짜 지랄 같다고! 섹스 배틀만 하는 게 아니라, 디펜스라니까!"

    짜증어린 일갈에 나 원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이다. 그래. 나도 이해는 갔다. 정말 거지같은 방식이었으니까.

    보스의 영지 쟁탈전의 기본 골자는 간단했다. 영주가 지정한 영지 내의 장소에 수문장을 세우고, 영지 쟁탈전 종료 시간까지 버티면 승리하는 식이었다. 반대로 영주가 지정한 수문장이 영지 쟁탈전이 치러지는 24시간 안에 절정에 오르면 영주의 패배였다.

    영지 쟁탈전이란 이름 그대로 패배한 영주는 해당 영지를 잃어 버렸다. 다만 한 달 안에 재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는 했다. 물론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게임에서는 수성측이 공성측보다 유리했다. 비단 게임만 그런 게 아니라 현실도 마찬가지였다.

    "근데 왜 이 자식만 이 지랄이냐고!"

    "……힘내."

    짜증이 폭발한 나를 나 원장이 위로했다. 위로가 될 리가 없었다. 정말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보스는 첫 영지 쟁탈전을 단순한 영지 쟁탈전으로 보지 않았다. 이 녀석은 첫 경험을 일종의 시험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영지를 강화할 수 있는 영지 관리 체계를 첫 방어 이후에나 사용할 수 있었다.

    그게 문제였다.

    나는 허탈한 얼굴로 기본 수문장의 정보를 열어 보았다.

    --------------------

    [신출내기]

    --------------------

    + 활력 : 1,000

    + 방어력 : 100

    + 항마력 : 100

    + 회피율 : 100

    + 치명 저항 : -

    --------------------

    어이가 없었다.

    그나마 노예급의 몽마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아니, 그래봤자 천민급 밖에 되지 않으니. 그냥 있으나 마나한 존재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숨을 푹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답이 없겠는데. 관리 시스템도 없으니 이걸로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데."

    "차라리 버티는 게 나을 지도."

    나 원장에게도 보여주었기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하루의 시간이 있잖아? 사람들을 막 끌어 모으면 어찌어찌 되지 않을까?"

    "그래야겠지. 일단 고사리 손도 빌려야겠으니까. 그나마 여기에 상주하는 애들을 가디언으로 쓸 수 있으니 다행인가."

    다행은 개뿔.

    남궁의 병사들 중 가장 고참인 도리가 평민 몽마에 불과했다. 그냥 머릿수만 채운다고 생각하는 편이 더 나았다. 백과사전에 따르면 후일 경험치로 병사들을 강화하거나 영지 내부의 지형을 유리하게 바꿀 수 있겠지만, 그것 첫 공성을 무사히 성공하고 난 뒤의 일이었다.

    이거 고민거리만 자꾸 늘어나네.

    첫 영지 쟁탈전을 무사히 마쳐도 문제였다. 왕궁의 규모를 늘려 성급으로 만드는 것과 병사들을 강화하는 것. 이 두 가지 방향에서 어느 쪽으로 선택할 지 고민을 해야 했다.

    효율을 따져야겠지. 경험치가 쭉쭉 빠져나갈 테니.

    "아니. 그건 그냥 막고 다음에 생각하자."

    "응? 무슨 말이야?"

    "그냥. 아니. 그냥은 아니고. 이번에 막아도 다음에 또 치러야잖아? 그래서 등급을 올려서 쟁탈전 텀을 늘릴까. 아니면 그냥 애들을 강화할까. 어떤 게 나을지 모르겠어 가지고."

    "무슨 소리야? 당연히 애들을 강화해야지! 규모가 더 커지면 더 큰 적이 들어올 거 아냐? 그때 가서 머릿수로 지면 어떡하려고?"

    땅!

    역시 나 원장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나보다 시야가 넓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나 원장의 의견을 받은 기색을 드러냈다.

    "오케이. 나 쌤. 내가 월급 많이 줄게. 내 참모 해라."

    "킥! 참모는 무슨. 됐네요. 나도 돈 좀 모았거든? 병원도 잘 정리했고. 아무튼 무리하지 마. 그러다 탈날라."

    "응. 아무튼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지금 당장 막는 게 문제인데……. 나 쌤. 혹시 아는 사람 좀 있어?"

    은근한 기대를 가지고 물었지만 나 원장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나도 나지만 나 원장도 인관 관계가 꽤 좁았다.

    "네 말대로라면 알몸으로 싸워야 한다며?"

    "응? 어. 근데 침실 전투처럼 동시에 싸우진 못할 거야. 단체 전투라고 하기는 하는데. 세세하게 들어가면 일 대 일로 싸우는 거니까. 물론 버프를 걸어주거나 힐 주고 하는 건 상관없고. 흠. 이러면 원거리 딜러가 꽤 값어치가 올라가겠는데?"

    앞으로 플레이어들의 성향이 어떻게 될지 감이 잡혔다. 레이드 때와 달리 영지 쟁탈전은 난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직접 상대에게 삽입을 해서 타격을 주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효율이 떨어졌고, 그보다는 좀 떨어져서 특별한 기술로 공격하는 이들의 효율이 더 나았다.

    최소한 붙어도 삽입보다는 손장난치는 애들이 더 낫겠어.

    언뜻 삽입 계열 딜러들의 가치가 떨어지는 소리 같았지만, 나는 상관없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가치가 떨어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는 내 능력이 상상을 초월했으니까.

    내가 또 딴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또 이런다. 또. 사람 앞에 두고 이러면 안 됐다고 했지? 실례라고."

    "……잔소리는."

    "어허! 혼난다?"

    "아아, 알았어. 일단 나가자. 여기서 연락하기는 좀 불편하니까."

    "응. 나도 좀 알아볼게. 그리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 원장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미안한 얼굴을 했다. 아무래도 부끄러움 때문에 도와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사실 부끄럽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미 얼굴을 팔린 이상 내 알몸은 인증한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래도 나 원장 앞에서 알몸으로 있기는 좀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오래전 태초의 인류처럼 되어 가고 있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현대를 살고 있었다.

    점점 옷을 벗고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현대인이었다. 당연히 부끄러운 감정은 줄어들었다. 게다가 정조 관념 또한 꽤 극적으로 변하는 과도기에 접어 든 상태였다. 그랬기에 리아와 선호의 만남이 나만 고리타분하게 여기게 만들었지만.

    뭐, 시간이 지나면 나도 창피해하지 않겠지.

    나는 피식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 원장의 이마를 탁 때렸다.

    "아얏! 야!"

    "됐어. 별 걸 다 미안해하네. 나야 이제 버린 몸이지만. 나 쌤은 아니잖아? 나도 나 쌤 알몸을 딴 놈들이 보는 건 싫어."

    "치. 그래도 아는 사람들한테 연락은 해 볼게. 근데 랭커가 없어서……."

    "자자, 됐고. 일단 나가자. 나 슬슬 머리가 어질어질한 거 같아."

    "어머? 많이 피곤해? 어디 봐. 어디……. 야!"

    괜히 장난질을 쳤다가 등짝을 맞았다.

    나 원장의 손은 여전히 매웠다.

    엄청 쓰리네, 이거.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며 옥문을 열었다.

    이젠 돌아가서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내숭.

    여자들의 내숭이 얼마나 대단한지 처절하게 느낀 시간이었다.

    남궁에서 나온 뒤 나는 그동안 나름 쌓은 인맥을 모두 동원했다. 남궁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다. 아니, 아예 없지는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여자들의 부끄러움이 문제였다.

    여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았다.

    "고영 씨가 있는 건 괜찮은데. 다른 남자들 앞에서 알몸으로 섹스 배틀을 하는 건 좀 그래요."

    "그냥 우리들끼리 하면 안 돼요?"

    "너 미쳤니? 나 탑 아나운서거든? 내 알몸을 재수 없는 남정네들에게 보이라고? 진짜 돌았지? 그치?"

    마지막은 김아연의 말이었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솔직히 김아연까지 이렇게 부끄러워할 줄은 몰랐으니까.

    특히 날 어처구니없게 만든 건 리아였다.

    "죄송해요, 고영 씨. 선호가 싫어하는 눈치라 서요. 고영 씨가 형이라서 말은 못하고 있는데……. 그래도 일전에 말한 계약 문제는 제가 책임지고 처리할 게요. 정말 죄송해요."

    이럴 때를 위해 키웠던 리아의 말에 뒷골이 당겼다. 이 호구 같은 선호 새끼가 날 호구로 만들려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동생인데…….

    "동생은 개뿔. 망할 새끼. 기껏 키워줬더니 뭐? 제수씨의 알몸을 보고 싶어? 이 새꺄! 내가 니……. 어휴!"

    다행히 맞은편에서 미야프랑 쎄쎄쎄 하고 있던 나 원장의 눈치에 마지막 말을 삼킬 수 있었다. 그래도 열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를 부리기는 싫었다. 그저 속으로 삼키며 나중을 도모했다. 선호의 명치를 떠올리며.

    벌떡 일어나 다시 앉는 내 모습에 나 원장이 빙그레 웃으며 날 달랬다.

    "너무 화내지 마. 그래도 대견하네 우리 고영이?"

    "거기까지만 하지, 나 쌤? 이젠 아주 대놓고 누나 행세야?"

    "내가 누나 맞거든?"

    "어이고. 그래요? 나이 많아서 좋겠……악! 야! 이 폭력배야!"

    "말조심!"

    "말 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거 같은데."

    괜히 덤볐다가 쿠션에 쳐 맞은 나는 꼬리를 말았다. 물론 완전 말지는 않았지만.

    나 원장도 뒤늦게 호들갑을 떨며 미야프에게 따라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응! 근데 언니! 언니도 이케이케 할 줄 알아?"

    아이고 두야.

    누가 몽마 아니랄 까봐 미야프는 벌떡 일어나더니 양 허리에 손을 올렸다. 기겁한 나는 얼른 부엌으로 달려갔다. 이럴 때는 그냥 저 녀석의 입을 막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냉동고를 여는 순간 미야프는 내 예상대로 굳어 버렸다. 오로지 두 눈을 내게 꽂은 채로. 이윽고 통으로 된 아이스크림이 나오자 입을 벌리며 혀를 날름 거렸다.

    나는 식탁 위에 아이스크림과 작은 스푼을 놓고 미야프를 향해 손짓했다.

    "오늘 착하게 지냈으니까. 와서 먹어."

    "아빠 최고!"

    다행히 미야프의 괴상한 짓을 막은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거실로 돌아갔다. 나 원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고, 나는 그녀의 옆에 앉으며 괜히 시비를. 아니, 나름의 애정표현을 했다.

    "나 쌤. 나 쌤은 어때? 누가 좀 도와준대?"

    "……미안."

    "에효. 어쩔 수 없지."

    "근데 아까 통화하는 거 들어보니, 외국 랭커들을 소개시켜 준다고 하지 않았어?"

    리아랑 영어로 통화했지만 나 원장도 수재였다. 의사인 그녀가 영어를 모를 리가 없었다. 게다가 혼자 외국으로 여행을 다녔으니 영어 말고도 다른 외국어를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걔들은 믿을 수 없지. 나한테 좋은 기억도 없을 테고."

    그리고 라이언 영감은 너무 음흉해 보이거든. 어차피 남자는 데리고 못가기도 하니까. 잘 됐지 뭐.

    나 원장도 내 입장을 알기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 대신 지금 상황을 물었고, 나는 한숨을 섞어가며 답했다.

    "아는 동생들이 친구들이랑 같이 와서 31명이고. 도움 좀 주고받았던 사모님이 14명 정도. 아, 나 쌤도 알지? 김아연. 걔가 친한 애들 데리고 와서 32명."

    "그럼 총 74명이네?"

    "그렇지. 남궁에 있는 기본 병력까지 하면 100명은 넘겠네. 뭐, 걔들은 그냥 들러리라 봐야겠지만."

    내 씁쓸한 말에도 불구하고 나 원장이 놀란 눈으로 탄성을 터트렸다.

    그것도 잠시 나 원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흘겨보았다.

    "너……. 언제 이렇게 바람둥이가 된 거야?"

    움찔.

    은근히 가시가 돋친 원장의 한 마디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순진한 고영아 안녕.

    괜히 죄를 지은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뻔뻔해 지기로 결심했다.

    고개를 돌려 태연한 얼굴로 나 원장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노력한 거지. 나 쌤도 알잖아? 나 20대를 어떻게 보냈는지."

    "……그건 그래. 아무튼 축하 해."

    "이왕 축하해줄 거면 영혼을 좀 갈아 넣어 주면 안 될까……. 악! 아악! 아퍼! 아프다고!"

    "흥! 누가 맞을 짓을 하래!"

    괜히 입방정을 떨어 매를 벌긴 했지만.

    어쨌든 편안한 마음으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시험의 날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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