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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셨다.
따스함을 넘어 따가운 햇살에 눈을 찌푸린 나는 본능적으로 손등으로 눈앞을 가렸다.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반응이었다. 평화 속에서 잠들어 있던 내 정신은 찬물에 빠진 것 같았으니까.
좀비처럼 낮은 신음을 흘리자 한층 더 눈꺼풀이 가벼워졌다. 그럼에도 난 게으름을 피웠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저으며 잠든 사이 굳은 근육을 풀었고, 두 팔을 쭉 뻗고는 이내 머리 위로 올리면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제야 게으름이 사라지는 듯 싶었다.
"으으……. 윽! 도대체 얼마나 잔거야?"
나름 열심히 스트레칭을 했지만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근육은 지난 명절 숙모에게 받아와 냉동고 한켠에 처박아 놓은 만두처럼 굳어 있었다. 이렇게 딱딱한 근육을 갑자기 움직이니 옆구리가 결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양쪽 옆구리는 사이좋게 부여잡고 나서야 나는 눈을 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 거실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확인하자 어제 있었던 일이 떠오르며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 더럽게 오래도 잤네."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여전히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나는 바지춤을 확인하는 걸 잊지 않았다.
휴우.
휘파람과 안도의 한숨 중간쯤에 존재하는 소리가 내 입에서 튀어 나왔다. 난도질당했던 고래는 무사했다. 트롤의 재생력이라도 생겼는지 흉터도 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뒤늦게 잠들기 전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퀘스트를 깬 것이 아니라 퀘스트를 깨고 받은 보상에 대해서지만.
어쨌든 방금 일어난 것치고는 머리도 가벼웠고,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양쪽 입꼬리를 잡아 당겼다.
이윽고 내 머릿속에 잠들기 전 받았던 보상이 차례대로 떠올랐다.
시작은 당연히 신성 무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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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허리띠]
+ 조각난 신성이 봉인된 무구.
+ 활력 10,000 상승.
+ 방어력 1,500 상승.
+ 항마력 1,250 상승.
+ 치명 증폭 50% 상승.
+ 치명 저항 5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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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을 뿐이었다. 아, 실제로 턱이 빠진 것 같았다. 턱관절이 딱 소리를 낸 걸 보면.
턱에 얼음송곳이 꽂힌 것처럼 아려왔지만 고통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환희가 더 컸다. 그만큼 신의 허리띠는 말도 안 되는 성능을 가지고 있었다.
"아흐, 꽤 아프네."
뒤늦게 턱을 부여잡고 고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도 내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러면 어떠랴. 그저 좋은 것을.
신성 무구의 요약된 정보를 읽자, 내 머릿속에 자세한 정보가 주입됐다. 좋은 소식보다는 나쁜 소식이라 할 정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강화 불가. 성장 불가. 뭐 어때? 하지 않아도 충분한데."
신성 무구의 가장 큰 단점은 바로 강화와 성장이 모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 대단한 장비는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었고, 그렇기에 추가적인 변화를 줄 수가 없었다. 마음 한 구석에서 아쉬움이 일어났지만, 나는 금세 고개를 저었다. 욕심이 과해도 너무 과했으니까.
호콘 왕세자에게 팔았던 트루드의 마법 방패와 비교해보면 신의 허리띠가 얼마나 뛰어난 아이템인지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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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드의 마법 방패]
+ 전사의 심장을 가진 고귀한 처녀의 방패.
+ 활력 2,500 상승.
+ 정력 1,500 상승.
+ 방어력 250 상승.
+ 항마력 350 상승.
+ 적의 타격력 1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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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일명 탱커들의 워너비 아이템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허리띠는 의외로 딜러 타입에게도 좋은 효율을 보였다. 아니, 치명 증폭과 저항을 제외하고 봐도 신의 허리띠는 정말 무식할 정도로 엄청난 수치를 보였다.
활력만 봐도 성장시킨 트루드의 마법 방패보다 2배니까.
"것보다 방어력이 미쳤네. 트루드의 방패를 강화하고 성장시켜 봤자 방어력은 600일 뿐인데."
물론 타격력 감소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다만 타격력 감소가 없어도 충분할 만큼 방어력이 높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치명 저항 감소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실실 웃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렸다. 좋은 무기. 아니, 장식을 얻었는데 그냥 보고만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이건 그림의 떡이 아니라, 내 손에 놓인 떡이었다.
재미있는 건 신성 무구는 기존의 등급 체계에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 말은 곧 왕족 무기를 직접 낄 수는 없어도, 신성 무기는 직접 낄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나는 신기창이 아닌 장착창을 열어 오랜 동반자인 퀴네의 사슬 투구를 해제하고 신의 허리띠를 장식창에 올렸다.
"퀴네 셋의 특성은 이미 내 유전자에 새겨졌으니까. 그보다 세트가 아니면 갑옷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데."
퀴네의 사슬 갑옷과 투구.
그동안 나와 함께한 이 노예 등급의 무기는 가성비가 좋았다. 아니, 단순히 좋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냥 풀업된 저글링의 가성비에 한 열 배 쯤?
이처럼 밸런스 파괴급의 가성비를 가지고 있었지만, 세트 효과가 사라지면 가성비가 팍 줄었다. 게다가 지금 내 상태에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니 슬슬 다른 무기를 구하는 걸 생각해 봐야했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생각은 생각일 뿐 현실이 될 수 없었다. 무기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는 폭군으로 전직하며 노예 등급의 장비만 착용할 수 있었다.
뭐, 신성 무구가 또 하나 있음 모르겠지만. 아니, 가능한가?
귀족 등급인 절망의 나뭇가지를 잠시 훑어보던 나는 이내 임무창으로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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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쇠장갑]
+ 신의 쇠장갑을 취하라.
+ 임무 현황 : 3/5
+ 기본 보상 : 푸른 전혼
+ 추가 보상 : 모든 기술 숙련도 한 단계 상승
+ 고유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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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개.
앞으로 신의 쇠장갑 재료 2개만 더 모으면 또 하나의 신성 무구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신성 재료를 구하는 게 전처럼 쉬울 것 같지 않다는 게 첫 번째였고, 그 다음으로는…….
"쇠장갑이 무기에 속할지, 장식에 속할지. 만들어 봐야 안다는 게 제일 크지."
신성 무구는 만들어 봐야 이게 무기인지 장식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기껏 만들었는데 장식이면 이보다 난감할 일이 없었다. 정 안되면 신기로 등록하는 수가 있겠지만, 이것 또한 성능을 확인하고 결정할 일이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또 있었다.
"신성 무구는 한 개밖에 보유할 수 없다라……. 그래도 난 다행인가?"
보스의 규칙 상 참가자는 한 개의 신성 무구만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난 아니었다. 바로 최초 제작 보너스로 얻은 칭호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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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발자취]
+ 한계를 돌파한 최초의 인물.
+ 무한한 신성 보유 가능.
+ '신성한 광기' 사용 가능.
+ 칭호 중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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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엄청난 이름을 가진 이 칭호는 이름만 엄청난 게 아니었다. 신성 무구 보유에 대한 제약을 없애 주는 것도 없애주는 거였지만, 그보다 특수한 기술과 칭호 중첩이 더 날 흥분하게 만들었다.
특히 칭호 중첩이 매력적이었다.
"칭호 중첩이 안 되면 말 그대로 계륵이지. 이걸 끼면 두 번째 신급 무기를 껴서 강해지는 게 꼭 강해진다고 볼 수 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기존에 내가 장착하고 있는 칭호 때문이었다. 선구자 또한 웬만한 왕족 장비 못지않은 뛰어난 칭호였고, 신의 발자취를 착용하게 된다면 그 성능을 포기해야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신성한 광기라는 기술은 차별성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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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광기]
+ 신성 무구 성능 100% 증폭.
+ 신성 무구 잠능 활성.
+ 24시간의 기술대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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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다른 신성 무구를 가져도 불안하지 않을 것 같았다.
비록 하루의 쿨타임이 있지만 그러면 어떠랴 싶었다. 신성한 광기의 성능은 제약이 없으면 오히려 거짓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그냥 기술 하나가 생긴 게 아니라 나만의 무기가 생긴 거라 할 수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는 아주 비밀스러운 무기를.
점점 정신 나간 놈처럼 웃으며 눈앞을 어지럽히는 창을 모두 닫았다. 그 대신 하나의 창을 열었다. 바로 새로운 업적 정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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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 도전]
+ 격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도전의 증표.
+ 주요 능력 25%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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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신성 무구를 보유하는 동안에만 가질 수 있는 업적이었다. 만약 신성 무구를 타인에게 파는 경우가 생기면 이 업적도 함께 사라진다는 의미였다.
대가리에 총 맞지 않는 이상 팔 리가 없지.
당연히 신성 무구를 팔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더 갖고 싶었다. 돈도 풍족했고 경험치도 넘쳐났다. 남들이 보면 과욕이라 욕하겠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더 강해지고 싶을 것을.
신격 도전을 활성화한 나는 보관창을 열어 푸른 전혼과 전체 숙련도 상승 아이템을 확인해 보았다. 이상했다. 푸른 전혼 상자는 있었지만, 숙련도 상승 아이템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의문을 표하는 순간 새로운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아!"
짧은 탄성이 흘러 나왔다. 보스는 나보다 똑똑했다. 녀석은 내가 백수 투하를 9성까지 올리고 보상을 쓰는 걸 바라지 않았다. 내 꼼수를 방지하기 위해 보상을 아이템화하여 지급하지 않았다. 그냥 퀘스트가 완료되는 순간 일괄적으로 내 기술의 숙련도를 올려 버렸다.
차라리 반숙의 달걀이나 주지.
작은 아쉬움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유 임무는 계속 이어질 게 분명했다. 그 중 숙련도 상승 보상을 주는 게 하나 쯤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전에 2번째 신급 퀘스트를 마칠 수도 있고.
계속 아쉬워하는 대신 나는 푸른 전혼 상자를 개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두근!
심장이 크게 울렸다. 어쩔 수 없었다. 푸른 전혼은 어떤 면에서 보면 지금까지 얻은 아이템들 중 가장 얻기 어려운 것일 수도 있으니까.
두근! 두근!
이상하게 자꾸 심장이 뛰었다. 흥분과 기대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이상함에 마음을 돌렸다. 상자 개봉을 잠시 뒤로 미루고 상자 정보부터 확인해 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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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전혼이 잠든 상자]
+ 자유로운 푸른 전혼이 담긴 상자.
+ 선택한 왕족 1단계 전혼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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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다. 왜 내 심장이 두근거렸는지.
정보창을 확인하는 순간 알게 된 사실에 나는 마음을 아예 돌렸다. 이 탐스럽다 못해 날 녹여버릴 것 같은 상자를 개봉하지 않기로.
"상자는 거래가 가능한데, 개봉하면 거래가 안 되니까."
전혼 상자는 거래가 가능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내 손에 있는 건 가능했다. 다만 일단 개봉하는 순간 이 특이한 점이 사라졌다. 전혼은 여전히 거래할 수 없는 품목이니까.
그렇기에 보류하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혼일 때보다 상자일 때 더 가치가 높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전혼 정보를 보니 내 결정이 더 단단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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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족 4단계 : 8,500(19)
+ 귀족 5단계 : 20,000(20)
+ 왕족 1단계 : 50,000(21)
+ 왕족 2단계 : 150,000(22)
+ 왕족 3단계 : 200,000(23)
+ 왕족 4단계 : 450,000(24)
+ 왕족 5단계 : 1,000,0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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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숫자는 해당 등급의 전혼이 가지고 있는 성장치였다. 뒤의 숫자는 해당 전혼의 성능 증가 비율이었고.
이 수치대로라면 귀족 4단계에서 190%의 치명 증폭 효과를 받고, 왕족 1단계에서 210%의 치명 증폭 효과를 받는다는 말이었다. 현재 내 전혼의 성장치가 1만1천이 조금 안되니 왕족 1단계 전혼에 흡수시켜봤자 성장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치명 증폭 20%를 올리자고 거래가 가능한 푸른 전혼 하나를 까는 건 너무 낭비 같았다. 차라리 이걸 팔아서 다른 아이템을 구하는 게 더 효율적이지 싶었다.
"근데 이걸 살 사람이 있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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