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69화 (16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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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1월도 며칠 남지 않았을 때 유럽이 들끓었다.

    [노르웨이 왕세자 부부 파경!]

    [호콘 왕세자, "실수를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최악의 악녀'라는 불명예, 이제는 스웨덴 왕가가?]

    [이혼 발표 후 지지율이 상승하는 노르웨이 왕가!]

    [너무 조용한 그녀. '골드 디거'의 입을 잠근 자물쇠는?]

    호콘 왕세자는 내가 건넨 호의를 적절하게 이용했다. 비록 젊었을 적 치기로 행한 일이 자충수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정무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큰 잡음이라고 할 것이 없는 것과 노르웨이 국민들의 지지가 그 증거였다.

    오늘 할당량을 마치고 귀가한 나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으로 방금 터진 호콘 왕세자의 이혼 발표 기사를 차근차근 읽어 보았다. 말없이 몇 페이지를 넘기며 다양한 기사를 읽어 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얼마나 의아했는지 내 고개가 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영상을 그냥 협상용으로만 썼나 보네? 의외로 끈질긴 여자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남궁의 비밀.

    내가 호콘 왕세자에게 남궁에서 일어난 일이 담긴 영상을 보낸 건 꽤 큰 출혈을 감수한 행동이었다. 물질적인 출혈은 아니었다. 단지 남궁의 영상 녹화 기능이 외부에 알려지면 조금 곤란할 수도 있었다.

    "김아연이 알면 날 죽일지도……."

    방송에 나온다고 공인이라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유명인인 건 틀림없었다. 이런 유명한 여자들의 알몸과 섹스 배틀 영상이 내 손안에 있다는 건 꼭 좋은 소식이라 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결투 신청 0순위인 내 위치가 흔들릴 테니까.

    소파의 윗부분에 목을 걸친 채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던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거 진짜 섹스 비디오의 본산이네. 그것도 블루레이급이라니."

    이런 상황이다 보니 호콘 왕세자의 행동이 꽤 좋게 다가온 건 당연했다. 남궁에 대한 이야기가 외부로 흘러나가지 않은 이상 나는 여전히 컬렉션을 늘릴 수 있었고, 또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들의 경험치를 쪽쪽 빨아 먹을 수 있었다.

    즐거운 상상을 하며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여전히 리아가 몽마에 관한 정보를 정리해서 보내주기는 했지만, 언제까지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홀로서기를 결심했으니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해볼 생각이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제대로 된 정보 수집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나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다시 핸드폰을 손에서 놓았다. 작은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지근거렸다. 다시 한 번 정보 수집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게 소득이라면 소득이었다.

    "그래도 보름 동안 꽤 잘했으니까. 차차 나아지겠지."

    지난 보름 동안 혼자 지낸 걸 돌이켜보며 되도록 작게 미소 지었다.

    생각해보면 참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아니, 변했다. 예전과 달리 이제는 사람들을 만나는 게 어렵지 않았고, 가끔 집에서 쉴 때는 좀이 쑤시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꽤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게다가 성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모로 꽤 성장한 것 같아 뿌듯했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멈칫.

    막 소파에서 엉덩이를 뗐을 때 내 몸이 굳어 버렸다. 좋지 않은 문제가 생겨서 그런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난데없이 날아온 희소식에 나는 두 눈만 깜빡거리며 잘게 몸을 떨었다.

    [신성 무구 '신의 허리띠'의 제작을 완료합니다.]

    [고유 임무 '신의 허리띠'의 내용을 변경합니다.]

    [파생 임무 '신의 허리띠 구출'을 생성합니다.]

    신의 허리띠.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물건이기에 날 이렇게 애타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보름 전 호콘 왕세자에게 받은 재료 덕분에 신의 허리띠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모두 모을 수 있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신의 허리띠는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신성한 용광로에 다섯 가지 신성 재료를 녹인 지 보름이 지난 지금이 돼서야 신의 허리띠 제작이 끝났다.

    크게 일어난 전율에 몸을 떨며 감격에 젖은 것도 잠시였다.

    "……근데 왜 퀘스트가 안 끝나지?"

    다시 소파에 앉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 나는 지금 당면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지?

    문뜩 불안감이 내 눈에 스쳤다. 신의 허리띠를 완성했지만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퀘스트가 나타나며 날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은 나는 흥분을 누르며 여전히 잘게 떨고 있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이윽고 휴대폰 화면에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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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허리띠 구출]

    + 완성한 신의 허리띠를 구출하라.

    + 임무 현황 : 0/100

    + 기본 보상 : 신의 허리띠

    + 파생 임무

    --------------------

    새로 생긴 임무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내 입이 살짝 벌어지며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아……."

    그제야 뒤늦게 고유 임무인 신의 허리띠가 변경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얼른 신의 허리띠 퀘스트 정보를 다시 띄워 보았다.

    임무 현황이 바뀐 게 눈에 들어오자 나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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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허리띠]

    + 신의 허리띠를 취하라.

    + 임무 현황 : 0/1

    + 기본 보상 : 푸른 전혼

    + 추가 보상 : 모든 기술 숙련도 한 단계 상승

    + 고유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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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변한 건 아니었다. 단지 재료를 카운트 하던 것에서 무구를 카운트 하는 것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게 문제지.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신의 허리띠 퀘스트는 보상으로 신의 허리띠를 주지 않았다.

    "……이래서 템을 보상으로 주는 게 아니었구나. 젠장!"

    나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튀어 나왔다. 보스에 대한 원망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이었다. 물론 자책은 오래가지 않았다. 혼자 성 내봤자 변하는 건 없을 테니까.

    의미 없는 자책을 지운 나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새로 생긴 서브 퀘스트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걸 어떻게 해야 할 지 감이 오지 않았다.

    내가 난감한 상황에 빠진 그때였다.

    "아, 백과사전."

    내게는 백과사전이 있었다.

    상황이 변할 때마다 새로운 정보를 적어주는 가이드 같은 백과사전을 손으로 누르자 여러 이미지가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깨닫는 데에는 몇 장의 그림이면 충분했다.

    가만히 앉아 매뉴얼을 모두 읽은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내 내 입에서 입가에 어린 미소와 비슷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에휴. 진짜 변태도 이런 상변태가 없네. 뭐냐고, 이게."

    골 때리다 못해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것 같았다.

    한숨짓는 것도 잠시 나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피할 길은 없었다. 쟁취하기 위해서는 싸워야했다.

    마음을 굳힌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내 머릿속에 작은 창이 하나 생겼다.

    [도전]

    그래. 도전하자.

    결정하기 무섭게 중력이 사라진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흠칫 놀라며 눈을 떠 보았지만, 눈앞은 여전히 깜깜했다.

    파핫!

    다행히 어둠은 금세 사라졌다. 아니,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제주도 별장 같네."

    일전에 내가 지냈던 별장이 아니라 모지현의 별장 같았다. 조명이 꺼진 무대 중앙 한 곳에 하나의 조명이 비추는 모습.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모습이 딱 그랬다.

    한 가지만 제외하면.

    나는 어둠에 휩싸인 평평한 바닥을 걸었다. 거침없이 걸어가면서도 내 두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아주 투명한 커다란 얼음이 내 눈을 가득 채웠다.

    크다.

    처음 얼음 바위를 본 순간 느낌 감정이었다. 진짜 컸다. 학원차로 주로 쓰이는 봉고차보다도 조금 더 커 보였다.

    그리고 차가웠다.

    "으으! 이거 냉동 창고에 들어온 거 같네."

    양팔을 감싸며 몸을 떨었다. 가뜩이나 요상한 공간으로 날아오며 알몸이 되어서 그런지 더 추운 것 같았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기에 나는 억지로 이를 악물며 걸음을 옮겼다.

    근데 너무 춥다.

    "으으으……."

    솜털이 바짝 섰을 정도였다. 눈앞의 거대한 얼음 바위는 사방으로 냉기를 뿌리고 또 뿌렸다. 한 겨울 덕장에 걸린 황태가 된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눈앞의 거대한 얼음 바위가 바로 내가 깨야 할 최종 보스였다. 그리고 나는 막보를 무찌를 용사였다. 기어코 얼음 바위 앞에 다다르고 나서야 내 다리가 멈췄다.

    그 순간 차가워도 너무 차가운 한기가 내 뼛속을 파고들었다.

    "크흡!"

    숨을 들이 마시자 목구멍이 얼어붙는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아침에 일어나 소변을 볼 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한동안 더욱 강해진 추위에 몸을 떨고 나니 어느 정도 얼음 바위가 내뿜는 한기에 익숙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익숙해지기는 개뿔! 그냥 온몸이 마비된 것 같네.

    숨 쉬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었다.

    팔뚝을 비비며 추위에 대항하던 나는 서서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턱이 당길 때까지 머리를 젖히고 나서야 얼음 바위의 머리가 보였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파리의 손처럼 비비고 있던 내 양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걸 어떻게 하라고. 진짜."

    답이 없다는 게 이런 상황일까.

    그저 막막했다.

    축 가라앉은 기분에 자연스레 내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의기소침한 모습도 잠시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기껏 만들었는데. 저 꼴이라니."

    거대한 얼음 바위. 아니, 빙산에 갇혀 있는 물건은 바로 신의 허리띠였다. 고고한 학처럼 은은한 백광을 뿌리고 있는 신성 무구는 어서 날 보고 구해 달라 소리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신성한 용광로에서 녹인 것이 왜 저 꼴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틀림없는 신의 허리띠였다.

    사실 신의 허리띠 구출을 완료하는 건 간단했다.

    [자지로 얼음을 깨라!]

    그냥 내 전기톱으로 눈앞의 얼음 바위를 깨부수고 그 안에 있는 신의 허리띠를 잡으면 끝났다. 간단명료한 방식이었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 그냥 미친 짓일 뿐이었다.

    그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게 문제였다.

    다시 고개를 뒤로 젖혀 무지막지하게 큰 얼음 바위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했다. 얼음의 크기도 까마득했고, 이걸 내 하물로 쑤셔야 한다는 것도 까마득했다. 그냥 눈앞이 까마득하며 지구 반대편까지 뚫린 싱크 홀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아……."

    진짜 미치겠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아무리 내 하물이 튼실하더라도 이건 아니었다. 애초에 이정도 얼음 바위면 그냥 그 자체로 흉기였다.

    흉기에 내 물건을 들이 박아야 한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러다 좆 부러지는 건 아니겠지? 으으!"

    문득 인터넷에 돌아다니던 영상 하나가 생각났다. 굉장한 여자의 요분질에 남자의 거기가 부러지는 처참한 영상. 기승위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려준 그 영상 속 남자의 고통이 곧 내게도 펼쳐질 것만 같았다.

    아, 안 되는데.

    그래도 피할 수 없었다. 기껏 만들어 놓고 여기서 포기하는 건 더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눈앞의 신성 무구를 가지고 싶었다.

    "후우……. 그래. 하자. 꿈이잖아? 꿈. 꿈인데……. 아, 씨. 어떡하지?"

    마음을 다잡으려고 해도 자꾸 마음이 요리조리 도망쳤다.

    얼마를 망설였을까.

    드디어 나도 모르겠는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자. 해야 한다. 해야 하는데…….

    "에이, 히말라야. 나도 모르겠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양손을 뻗어 묵직한 얼음 바위의 무게를 느껴보았다. 슬쩍 밀어 보았지만 여전히 꿈쩍도 하지 않았다. 괜히 더 암담한 기분만 들 뿐이었다.

    차라리 맨손으로 언 땅을 파라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미친 짓도 정도가 있었다. 이건, 이건…….

    "자해하는 취미는 없는데 말이지."

    우울한 기분은 머지않아 사라졌다. 한탄을 한다고 현실이 바뀌지 않으니까. 게다가 계속 망설이다가는 얼어 죽을 것 같았다.

    제대로 초점을 잡지 못하던 내 눈빛이 단호하게 변했다. 언뜻 비장한 기운까지 비치는 것 같았다. 그만큼 얼음에 반사되어 보이는 내 눈빛은 결연했다.

    손바닥이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느껴지는 그 순간.

    나는 온 힘을 다해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콰앙……!

    "……컥!"

    해머로 철근을 두드리는 소리가 터졌다. 동시에 책상 모서리에 거기가 박힌 고통이 느껴졌다. 숨이 턱 막히며 허리가 새우처럼 굽어졌다.

    아, 씨발. 좆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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