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64화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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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5,500.

    36레벨 10번, 25레벨 8번, 34레벨 20번, 30레벨 3번.

    총 41번의 결투에서 모두 승리하고 나서야 음란마굴에서 탈출 할 수 있었다.

    얼마나 욕구불만에 시달렸는지 좀비들은 하나 같이 지독했다. 눈이 뒤집힌 좀비 떼를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결투 부작용을 유도해야했다. 감정이야 어차피 다음날이면 사라질 테니까.

    독한 마음을 먹은 덕분에 열 두 좀비를 실신시키는데 성공한 나는 그대로 쇼생크. 아니, 별장을 탈출했다.

    자정이 넘어도 한참 넘은 시각이 돼서야 숙소에 돌아온 나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남궁 태후를 사냥하고 얻은 템을 확인해야했지만 너무 귀찮았고 피곤했다.

    다음날 점심때가 지나서야 일어났을 정도니 무리하기는 무리한 모양이었다.

    "사냥 갔나?"

    대충 토스트를 만들어 먹을 때 선호와 리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걱정이 들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남은 토스트를 입으로 밀어 넣었다.

    둘 다 성인인데. 알아서 하겠지.

    더 이상 타인의 감정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정말 세상도 많이 변했고, 나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씻지도 않고 배부터 채운 나는 식빵 한 줄을 아작 내고 나서야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받은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반신욕으로 피곤을 푼 나는 샤워를 끝내고 거실 소파에 편히 기댔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온갖 문자로 가득했다. 심지어 부재 중 전화까지.

    귀찮기는 했지만 그래도 호구. 아니, 물주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기로 했다. 몇몇 극성 회원들은 렙따를 감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기부해 주었으니까.

    예상보다 대화가 길어졌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처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사람과 대화하는 게 어렵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나름의 인맥 관리를 하고 나서야 드디어 어제 얻은 보상을 확인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아, 맞다."

    여유가 찾아오기 무섭게 한 가지 까먹고 있던 게 떠올랐다. 바로 6회차 자유 임무였다. 나는 얼른 기록창을 열었다.

    우승했구나.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다시 여유롭게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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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의 인장]

    + 남궁의 주인 증표.

    + 사용 시 왕궁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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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 비고의 열쇠]

    + 남궁의 비고 출입 증표

    + 사용 시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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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궁 태후의 상징]

    + 남해 용궁 지배자의 유지.

    + 타격력 45% 상승.

    + 치명 증폭 1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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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혈입성]

    + 완벽한 왕격 파쇄.

    + 모든 피해 1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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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개의 물품과 1개의 업적이 주르륵 펼쳐졌다.

    4개의 아이템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바로 남궁 태후의 상징을 제단에 올렸다. 발정난 파수꾼의 상징을 파괴할 때 잠시 망설이기는 했지만, 말 그대로 찰나에 불과했다. 얼핏 제단을 임대해서 무사히 발정난 파수꾼의 상징을 교체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었다. 나는 내가 1의 손해를 보고 남들이 2의 손해를 보면 손해가 아니라 생각했다. 오히려 이건 이득이었다. 굳이 꽤 유용한 상징을 남들에게 파는 것보다는 차라리 없애는 게 더 나았다.

    남들이 알면 탐욕스럽다 손가락질 하겠지만.

    나는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상징창을 닫은 나는 다시 한 번 남은 세 아이템을 무심히 살펴보았다.

    남궁 태후의 상징이 다른 왕족 상징보다 나아서 그럴까.

    다른 아이템은 영 마음에 차지 않았다.

    "업적은 좋아. 근데 궁전이라니."

    비고 열쇠는 그나마 가슴을 두근거리게 할 정도의 가치가 보였다.

    침실 개조 아이템의 일종인 남궁의 인장은 아니었다. 이건 실속이 없었다. 침실이 화려하다고 해서 내 공격력이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이걸 팔려고 해도 뭐 어떤 건지 알아야 팔지. 돌겠네……."

    남궁의 인장을 팔려고 해도 마땅치가 않았다. 남궁의 인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추가되는 왕궁이 어떤 모습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황에 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에이, 씨. 그냥 써? 말어?

    잠시 갈등이 피어났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당장 급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허영심 가득한 호구가 있을 수도 있었다.

    남궁의 인장은 사용을 보류했지만, 남궁 비고의 열쇠는 달랐다.

    나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남궁 비고의 열쇠는 사용했다.

    ['남궁 비고의 열쇠' 사용에 실패합니다.]

    "어? 뭐라고?"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어찌된 일인지 느껴졌다. 백과사전에 새로운 정보가 기입된 것이다. 비록 내게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잠시 머릿속을 파고드는 정보를 가만히 앉아 들었다.

    이윽고.

    "하아……. 그러니까. 비고 열쇠를 쓰려면, 남궁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럼 그렇지. 웬일로 사고 없나 했다.

    피식, 피식.

    누군가 저주하는 것 같은 내 운명에 실소가 나왔다. 실제로 마가 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회피하기에는 내 삶이 너무 싸구려처럼 느껴졌으니까.

    오히려 이렇게 되니 마음이 편했다.

    나는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남궁의 인장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세상이 변했다.

    ***

    남궁.

    남쪽 바다의 궁전은 단아했다.

    거대한 반구형 물방울 속에 있는 바다 속 궁전은 신비로웠다. 마치 바다 속에 투명한 유리로 된 잠수함을 타고 들어온 것 같았다. 실제인지 허상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다양하고 낯선 물고기들이 궁전 주변을 헤엄치는 게 동화 속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그 거대한 물방울의 중심에 궁전이 있었다.

    새하얀 산호로 지어진 3층의 궁전은 화려했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궁전 전경과 꽤 상반된 느낌이었다. 은은한 빛을 반짝이는 게 보석들로 만들어 놓은 듯한 착각을 유도했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계단마저 산호들이었다. 처음에는 발이 베일까 걱정했는데, 생각과 달리 너무도 푹신푹신했다. 확실히 현실에 있는 게 아니었다.

    알록달록한 조개들로 장식된 거대한 문이 내가 앞에 서기 무섭게 저절로 열렸다. 분명 물 속인 게 분명한데도 언뜻 살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잔잔한 봄바람을 느끼며 궁전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

    아리엘 못지않은 아름다운 인어가 내 앞까지 허공을 헤엄쳐 다가왔다. 나는 인어의 다리. 아니, 지느러미에 눈을 떼지 못했다. 진짜 인어였다.

    내 앞까지 헤엄쳐 온 인어가 이내 상체를 세우며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남궁의 새로운 주인님께 인사드려요."

    "……그래."

    "안내를 해 드릴게요. 저를 따라 오셔요."

    나는 놀람을 추스르지 못한 채 궁전 곳곳을 둘러보았다. 겉에서 볼 때와 달리 궁전 1층은 정말 넓었다. 실제 왕궁이 이럴까 싶을 정도였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응접실은 물론이고, 연회를 위한 광장까지. 음식을 만들고 세탁을 하는 곳을 제외한 모든 시설이 존재했다.

    재미있는 건 이 3층짜리 궁전에 계단이 없다는 점이었다. 궁의 중앙에 뻥 뚫려 있는 원형 물기둥이 계단을 대신했다. 물줄기에 하늘을 나는 경험은 꽤 즐거웠다.

    손님을 위한 1층과 달리 2층은 궁전을 가꾸는 하인들의 공간이었다. 눈앞의 이름 모를 인어의 말에 따르면 대신이라고 했지만, 내가 볼 때는 그냥 메이드였다. 그것도 꺌꺌거리며 자기들끼리 노느라 정신없는 하녀들이었다.

    슬슬 놀람을 추스르며 2층 구경을 마친 나는 다시 물기둥에 떠밀려 3층으로 올랐다.

    "이곳은 오직 용왕님만 오실 수 있는 곳이어요."

    용왕? 나보고 용왕이라고?

    하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본래 이곳의 주인이 태후였으니, 오히려 황제라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

    쓸데없는 생각에 실소를 흘린 나는 제대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밖에서 볼 때는 사각 뿔 형태였는데, 실제로 들어와 보니 층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넓어졌다. 확실히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형태가 맞았다.

    그런데…….

    "그냥 공터잖아? 물론 축구장만 하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없네?"

    "아! 궁주님은 생각만 하시면 되어요. 그럼 이 녀석이 알아서 일을 할 거예요."

    이 녀석?

    날 안내해 준 인어의 말이 요상했다. 건물에게 이 녀석이라. 말이 되지 않았다. 아니, 말이 될 수도 있었다.

    인어가 미쳤거나, 건물이 살아있거나.

    나는 어느 것이 맞는지 알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언젠가 기사에서 보았던 유명한 호텔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와아……. 뭍에는 이렇게 화려한 곳이 있사와요?"

    깊은 탄성을 터트리는 인어의 목소리에 나는 슬며시 눈을 떴다.

    그 순간 내 입이 쩍 벌어졌다.

    내 눈앞에 머릿속에 그렸던 호텔의 옥상 수영장 모습이 그대로 연출되어 있었다. 심지어 주변에 있는 다른 고층 빌딩들까지도 자리하니, 내가 상상했던 곳으로 순간 이동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박이다!

    놀람은 곧 웃음으로 변했다.

    이런 걸 팔려고 했다니. 내가 미쳤지. 이거 완전 꿈의 궁전이네.

    현실의 공간을 복사해 올 수 있는 신묘한 힘을 가진 남궁은 그 어떤 것보다 큰 값어치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짜릿한 희열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한쪽 테이블 위에 누워 꼬리를 팔딱거리며 갖가지 음식을 먹는 인어가 보였다. 단순한 공간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는 음식까지 복사해 오는 것 같았다.

    "용왕님! 이거 정말 맛있사와요! 입에서 사르르 녹아 없어져요! 마법의 음식이어요!"

    그냥 아이스크림인데. 아, 이탈리아에서 파는 그건가?

    초콜릿 젤라토를 스푼으로 한 입 떠먹을 때마다 인어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물론 꼬리를 팔딱거렸고. 그 모습이 꽤 귀엽게 보였다.

    나는 테이블로 걸어가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제야 인어가 슬쩍 내 눈치를 봤다. 나는 손을 저으며 그냥 먹으라 말해주고 나도 한 입 떠먹어 보았다.

    "진짜 젤라토네. 하하……."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물론 꿈속의 공간이니 실제로 배가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밖에서 먹어야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지. 그러니 더 대박이지. 여긴 살찌지 않는다는 말이잖아?

    두 눈이 번쩍 뜨인 나는 초콜릿에서 바닐라로 넘어가는 인어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묻는다는 게 자꾸 까먹었다.

    "그런데 너 이름이 뭐야?"

    "아……. 옛날에는 이름이 있었어와요. 하지만 새로운 주인님을 모시면 새로운 이름을 받아야 해요. 용왕님께서 지어주지 않으시면 이름을 입에 올릴 수가 업사와요."

    그건 좀 그러네.

    한 마디로 주인이 바뀌었으니 노예 이름도 다 바꿔야 한다는 말이었다.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이름을 왜 바꿔? 그냥 예전 이름을 써도 돼. 아니, 그냥 써. 명령이야."

    "네! 알겠사와요! 전 남쪽 바다 인어들의 맏이, 도리라고 하옵니다. 새로운 남궁의 주인님을 뵈어서 영광이와요."

    도리? 뭐, 나쁘지 않네.

    나는 귀찮고 부담되는 일을 덜었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걸 물었다.

    "그런데 도리야. 여기에 누굴 초대할 수 있어? 그러니까. 뭍에 있는 사람들 말이야."

    "물론이와요. 용왕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라도 초대하실 수 있사와요."

    방법은 모르나 보네. 뭐, 된다는 게 중요하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야 찾아보면 나올 것 같았다. 아니, 이미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침실창을 열면 있겠지. 아, 이젠 궁전창인가. 아무튼.

    내가 잠시 딴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도리가 딸기 젤라토로 넘어가며 슬쩍 물었다.

    "그런데 용왕님. 용궁의 이름은 어찌 하시겠사와요?"

    "응? 용궁 이름이라니? 그냥 남궁 아니야?"

    "아니와요. 전대 용후님께서는 서역의 이름을 따와서 씨팔라스라고 부르셨사와요. 혁신을 꾀하시겠다며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이셨사와요."

    "……무슨 팔?"

    "씨팔라스라 부르셨사와요."

    설마 씨 팰러스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아닐거야. 아닐……. 맞나 보네.

    순진무구한 얼굴로 탁상 행정이 만들어낸 것 같은 요상한 이름을 내뱉은 도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새로운 용궁 이름을 알렸다.

    "그냥 남궁이라고 해. 같잖은 영어 쓰지 말고. 알았지?"

    "네! 알겠사와요! 제가 아이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사와요! 맡겨만 주시와요!"

    "그래. 아, 근데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저기 보이시는 옥문을 열고 나가시면 되사와요."

    딸기맛 젤라토가 묻은 도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그녀의 말대로 옥으로 된 문이 보였다. 공간을 복사해 왔음에도 그 옥문만은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나는 일단 나갔다 들어올 생각으로 옥문으로 걸어가며 도리에게 선심을 쓰듯 말했다.

    "그럼 난 나중에 다시 올게. 아, 그거는 가지고 가서 먹어도 돼."

    "감사하와요! 감사하와요!"

    도리가 감격한 눈빛을 품에 젤라토 컵을. 아니, 박스를 낑낑 거리며 집어 들었다. 식탐만 놓고 보면 그녀도 미야프 못지않은 것 같았다.

    금세 옥문 앞에 다다른 나는 도리를 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나중에 보자."

    "다녀오사와요! 신 고도리. 용왕님의 명령을 성실히 수행하겠사와요!"

    멈칫!

    무슨 도리라고?

    그러고 보니 낑낑거리며 젤라토가 가득 담긴 박스를 들어 올리는 도리의 등이 언뜻 푸르스름해 보이는 것 같았다.

    ……설마 고등어 새끼였냐.

    전대 용후의 네이밍 센스가 심히 걱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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