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ive -->
***
태백산 사태를 일으킨 지 벌써 한 달이 다되어 갔다.
꽤 오랫동안 잠수를 탔음에도 여론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이제 내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우리나라 안에서도, 혹은 밖에서도.
사람들이 나에 대한 질시와 경탄을 보내고 있었지만 내 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묵묵히 사냥을 했고, 숙련도를 올렸다. 최대한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으려 더 사냥에 집중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렇게 묵묵히 사냥한 결실이 점점 열매를 맺어갔다.
['농염한 규수'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부드러운 비단 저고리 아래로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몽마가 자지러지며 사라졌다. 오랜만에 보는 귀족 몽마였다. 경험치와 아이템을 주지 않았지만.
[업적 '만마 정복'을 획득합니다.]
잘 익은 열매를 따는 데는 상관이 없었다.
"후……."
침실에서 빠져 나온 나는 꼼짝을 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황금 절구가 새로운 업적을 만들어 주었다.
[조합에 성공합니다.]
[업적 '난폭한 폭군'을 획득합니다.]
역시 직업이랑 연관이 있나?
업적명이 살짝 신경이 쓰였다. 물론 문제될 건 없었다. 나는 조합을 통해 얻은 특수 칭호를 슬쩍 확인하고 바로 활성화하여 그 효과를 받았다.
악마 종족에게 100%의 피해 추가.
백마, 천마, 만마 정복의 세 업적을 다 합해도 60%밖에 되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거의 두 배나 늘어난 수치였다.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일까.
별장으로 돌아가는 내 걸음 걸이는 더 없이 가벼웠다.
장기 렌트한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왔지만 날 반겨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호와 리아가 사냥을 마칠 시간은 아직 멀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한 달 동안 같이 지내서 그런지 두 사람 사이가 더욱 좋아진 상태였다.
그래서 걱정이었다.
"나도 내가 보수적이란 걸 알 지만. 그렇게 생겨 먹은 걸 어쩌라고."
우울한 생각이 들기 무섭게 나는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말에도 힘이 있듯이 생각에도 힘이 있었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정신을 차리고 별장 안으로 들어왔지만 난 여전히 우울했다.
버릇처럼 주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맥주 팩을 꺼내든 나는 벽난로 옆에 있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될 것 같은데 진짜. 왜 안 되지?"
기술 창제가 원인이었다. 여름달을 사냥하며 영감을 얻은 나는 금방 새로운 기술을 만들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며칠만 고민하고 정말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이레가 흐르고, 보름이 흐르고, 한 달을 채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기술 창제의 마지막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재채기가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들었는데, 재채기가 쏙 들어갔을 때의 그 느낌이었다. 한 마디로 짜증이 났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괜히 조급함을 참지 못하고 기술 창제를 시도했다가 허무하게 경험치만 날렸다. 그 뒤로도 매회 1만 경험치나 지불해야하는 구체화를 간간히 하며 가끔 도박 중독자의 모습까지 보이고 말았다. 다행히 리아와 선호가 말리지 않았다면, 렙따를 했을 지도 몰랐다.
"9만의 경험치면 성장 한 번을 시키고도 남을 돈인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허공으로 사라진 경험치가 돌아올 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점점 사냥으로 경험치를 얻는 게 요원했다. 정말 미친 듯이 사냥했지만, 가면 갈수록 드랍률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선호를 지원해주고 남은 것들만 팔다보니 영 신통치가 않았다.
"그래도 하루에 1만씩 번 셈이잖아? 나쁘지 않……을 리가."
남들은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내게 하루 1만의 경험치는 진짜 말도 안 되는 실적이었다. 처음 보스가 공개됐을 때도 그 정도는 벌었다. 이러니 사람들이 앓는 소리는 하는 듯 싶었다.
20레벨 때나, 50레벨 때나. 평민 때나, 왕족 때나.
사냥을 통해 벌어들이는 경험치는 차이가 나지 않았다.
사실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는 노가다보다 결투가 좋았다. 남들이 힘겹게 얻은 경험치를 뺏는 것과 다름없지만. 어쨌든 더 효율적이라는 것에는 변화가 없었다.
지금 내 상황이 결투를 못하게 막았을 뿐.
"……결투를 했다가는 난리가 나겠지. 아직도 내 얼굴 한 번 보려고 난리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직접 결투가 아닌 침실 결투의 경우 나는 얼굴을 가릴 수 없었다. 결투장 닉네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곧 결투를 하며 날 알아보는 사람과 섹스 배틀을 해야 한다는 말과 같았다.
"어색해 죽을지도……."
물론 계속 결투를 피할 수는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만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날 알아보는 사람과 알몸으로 육체의 대화를 나누는 게 아직 어색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지 싶었다.
***
9월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오늘은 휴가이자 특훈을 하는 날이었다.
나는 리아가 준비한 한 눈에도 비싸 보이는 요트에 올랐다. 선호도 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요트는 멋들어졌다. 게다가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도 함께였다.
"……역시 오빤 대단해."
"언니. 남자는 확실히 아랫도리가 좋아야 하나 봐. 장난 아냐. 저기 김아연도 있어!"
손님이 아니라 손님들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소연이와 현아는 어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녀들다운 모습이었지만, 사고 칠까 조마조마 하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인연을 맺은 이들을 모두 초대했다. 그만큼 요트가 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이 요트를 구한 건 리아도, 나도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물 한 채의 가격과 맞먹는 이 화려한 요트의 주인이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오더니 자연스럽게 안겨왔다.
"오랜만이에요. 고영 씨. 그동안 너무 적적했던 거 알아요?"
"오랜만입니다. 지현 씨."
재계 서열 7위에 직계인 모지현이 바로 이 화려한 요트의 주인공이었다.
본래 모지현에게 연락을 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재벌가의 직계와 너무 얽히는 건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생각을 바꾼 이유는 하나였다.
조용히 처리할 곳이 망망대해뿐이니까.
외국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는 건 어려웠다. 물론 아프리카의 오지에 가서 황금 향로를 사용할 수도 있었다. 다만 그것은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아무리 오지라도 사람일은 모르는 법이었다. 얼마나 될지 모르는 몽마의 권역을 일일이 단속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가장 조용하면서 은밀하게 왕족 몽마를 해치울 수 있는 장소는 바다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최소한 바다 위라면 난데없는 난입은 없을 테니까. 게다가 의외로 바다는 교통정리가 잘되는 편이었다.
물론 여전히 문제는 남았다. 아무 어선을 타고 바다로 나갈 순 없었다.
그때 등장한 게 모지현이었다. 그녀는 개인 요트를 가지고 있었고, 다른 배들이 근처에 오지 않도록 할 영향력도 있었다.
오늘의 물주가 포옹을 풀며 살짝 눈을 흘겼다.
"서운했어요. 진짜에요."
"미안합니다."
"여전히 재미없는 남자네요. 거기만 빼면."
모지현이 슬쩍 내 아래를 훔쳐보며 말했다.
여전히 변함없는 모지현의 모습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런데 회원 분들이 많이 바쁜가 보네요? 별로 오지 않은 걸 보니."
"그럴 리가요. 문제없을 분들만 모신 거예요. 고영 씨가 부담스러워 할까봐. 많이 신경 썼어요."
"고맙습니다."
조강혜가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됐다. 모지현은 나를 보기 위해서 이 자리를 만든 게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보다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할 목적도 있어 보였다.
뭐 어때?
상관은 없었다. 나는 그저 안전하게 바다에서 왕족 몽마를 소환해 사냥하면 그뿐이었다. 내가 안면이 있는 이들이 요트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기에 다른 건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런 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모지현과 나누는 사이 요트 후미에 홀로 있는 김아연이 보였다. 그녀는 꽤 위축된 모습이었다.
쟤가 저런 면이 다 있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나름 방송국 생활을 한 김아연이 모지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또한 모지현의 영향력도 나보다 잘 알 것이 분명했다.
나는 모지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동떨어져 있는 김아연을 향해 다가갔다. 김아연이 뒤늦게 날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지만, 최대한 참아 보았다.
"여기서 혼자 뭐해?"
"……이런 자리라면 안 왔을 거야."
"왜? 여름달 사냥 못해서 이번 자유 임무 허탕 칠 것 같다며?"
"그래도 이런 자리는! 어휴. 미치겠네, 진짜.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모 사장님이랑은 어떻게 알고?"
"뭘 어떻게 알아. 그냥 아는 거지. 아무튼 정박하면 바로 시작할 테니까. 알아서 해. 아무래도 챙길 녀석들이 있거든."
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김아연도 내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나와 김아연의 눈에 여자들에게 둘러 싸여 어쩔 줄 몰라 하는 선호가 잡혔다.
김아연이 처음으로 웃음을 띠며 물었다.
"저 호구 같은 남자는 누구야?"
"미안하다. 내 동생이 호구 같아서."
"동생? 성이 다르잖아? 아, 고종이야? 아님 외가?"
"됐고. 너 답지 않게 왤케 쫄아 있어. 그래도 알아두면 좋은 사람들이니까. 알아서 잘 해 봐."
내 회피성 짙은 대답에 김아연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날 흘겨보았다.
"알아두면 좋겠지. 근데 너무 부담되잖아? 재벌가 며느리도 아니고. 다 직계잖아?"
"그래서 쫄려?"
"……그래. 쫄린다. 왜! 넌 부담스럽지도 않아? 아니면, 저 여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들인지 몰라? 후계는 못돼도 다들 알짜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야. 어후, 살 떨려서 진짜."
물론 잘 알지. 왜 모르겠어? 20 대 1의 전설을 함께한 사인데.
"아무튼 좀 있음 시작할 테니, 인맥을 넓히든 아님 그냥 있든. 네 마음대로 해."
김아연의 대답을 듣지도 않은 채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내실에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타날 것이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여자가 바쁘게 서류를 들쳐보고 있었다.
나는 하얀 비키니를 입은 채 정신없이 일하는 여자의 옆에 앉으며 친근하게 물었다.
"여기까지 와서 일하는 거예요?"
"어? 고영 씨. 언제 왔어요?"
"방금요. 그나저나 잘 지냈어요?"
"그럼요. 잘 지냈죠. 그러니 이런 VIP 파티에 초대를 받았겠죠?"
활짝 웃어 보이는 모습이 아름다운 이 여자는 바로 예 팀장이었다. 본래 내 담담이었지만 갑자기 그만두고 사라진 여자였다.
이혼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그 뒤로 예소영의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이직을 했다는 놀라운 이야기. 게다가 사이가 틀어진 남편과 이혼을 했다는 것까지.
나는 괜히 내 잘못이 있는 것 같아 미안했다. 그렇다고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건 오히려 이 강한 여자를 무시하는 행동이라 생각했다.
"이직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지현 씨 비서가 됐을 줄은 몰랐어요."
"운이 좋았어요, 정말. 예전 회사 사장님이 추천해 주셨거든요."
"그래요? 잘됐네요."
말을 더 이어야 했는데, 그만 끝맺고 말았다.
당연히 분위기가 어색해지며 나와 예소영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결국 어색함을 참지 못한 예소영이 서류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보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이만 나가요. 다들 기다리시겠어요."
"그래요."
모른 척 넘어가 주었다. 나도 어색한 만큼 예소영도 어색할 테니까. 인연이 있다면 언제고 다시 이야기 할 거라 생각했다.
내실에서 나온 예소영은 바로 김아연과 즐겁게 대화하고 있는 모지현을 향해 걸어갔다.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 사이 사람들이 추위도 잊은 채 가벼운 차림으로 변해 있었다. 그만큼 분위기가 달아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활활 타오르는 분위기의 중심에는 소영이와 현아가 있었다.
"고영 오빠요? 좀 이상했죠. 처음은."
"맞아. 나도 언니한테 이야기 듣고 미친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실 미친 놈 맞지. 무슨 스폰서를 하겠다면서 애무만 해달라고 하니. 좀 꺼림칙하기는 했어."
저기 저 정신 나간 것들이 지금 뭐라는 겨?
뒤늦게 앙큼한 두 여자의 폭로에 화들짝 놀란 나는 얼른 그 큼에 끼어들었다.
"자자, 다들 준비하세요. 혹시 면죄부 없으면 챙겨 넣으시고. 바로 시작할 테니까."
물론 통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왕족 사냥보다 내 옛날이야기에 더 흥미를 드러냈다. 괜히 신난 소연이가 나불거렸고, 현아가 추임새를 넣었다. 심지어 리아와 선호까지 흥미로운 눈빛으로 두 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취향이 꽤 독특했어요. 자꾸……."
"자꾸?"
"똥구멍을 핥아 달랬거든요."
……젠장.
더 이상 소연이가 떠들게 두었다가는 내 이미지가 박살 날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아니 됐다.
나는 내 이미지가 박살나기 전에 소연이를 박살내기로 결심했다.
"혀로 콕콕 찔러 달라는데.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요?"
"맞아. 난 자꾸 불알을 빨아 달라고 해서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다니까?"
"그치? 난 그쪽 취향인 줄 알고 얼마나 놀랬는데."
"어머! 어머어머!"
내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연이와 현아가 더욱 더 날 궁지로 밀어 넣었다.
그 즉시 두 눈을 감았다. 내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서.
['유혹의 황금 향로'를 사용합니다.]
[왕족 몽마 '남궁 태후'를 소환합니다.]
더 이상 낭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대가 나를 깨운 존재인가?"
그 대신 중성적인 묵직한 목소리가 나타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