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55화 (1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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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시나.

    태백산 입구는 난리도 아니었다. 아직 계절이 오지 않아 녹음을 간직한 태백산과 달리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머리카락은 알록달록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흑단처럼 검은 머릿결이 절반을 차지했지만.

    "여기가 이태원인가?"

    "정말 많네요. 고영 씨가 대놓고 공약을 걸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작 하루인데. 아니, 하루도 안됐잖아요?"

    미야프의 손을 하나씩 잡으며 차에서 내린 나와 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엄청난 인파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람 많아! 내가 먹은 피자 토핑보다 훨씬 많아!"

    물론 미야프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그리고 네가 처먹은 피자가 더 많단다.

    "저번 달부터 몰려들었으니까. 소식 듣고 찾아왔겠지."

    '그렇겠네요. 그래도 이 도시에 있는 경찰이 다 여기 있는……. 어머! 군인도 있어요!"

    "어. 보여."

    경찰 인력으로 부족해 근처 군부대에 요청을 한 모양이었다. 정말 이쪽 동네 말로 개락이었다.

    적잖이 놀랐던 리아가 이내 얼굴을 굳히며 목소리를 낮췄다.

    "정말 괜찮겠어요? 이 정도 사람이면……."

    "내 정체가 드러나겠지."

    "그럴 확률이 높아요. 그동안 열심히 숨겼잖아요? 그런데 왜……?"

    왜긴. 어차피 까발려질 것 같으니까 그런 거지.

    이미 내 국적이 탄로 난 상태였다. 어썸 바나나가 한국인이라 알려진 이상 내 정체가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남에게 억지로 내 신상 정보가 까발려지는 것보다는 그냥 내 손으로 가면을 벗는 게 나았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개 같은 알권리.

    기자들의 고리타분한 면죄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 풍토도 짜증났다. 더욱 화가 나는 건 나 혼자 힘으로 이런 잘못된 점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 체념해야했다.

    "몸부림치는 건 싫으니까."

    "네?"

    "아냐. 좀 예상 밖이라서. 이렇게 많을 줄 몰랐는데."

    "그만큼 자유임무에 목매는 사람들이 많은가 봐요. 그런데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어요?"

    "후회는 무슨."

    이미 어젯밤 삼촌과 이야기를 끝내 놓았다. 내가 사냥을 끝낸 뒤 삼촌의 로펌이 알아서 내 대변인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위해 꽤 많은 돈을 주고 삼촌네 로펌을 고용해야했지만.

    그래도 삼촌이 걱정 말라고 하니 마음이 놓이네.

    갑작스러운 내 커밍아웃에도 삼촌은 놀라지도, 묻지도 않았다. 그저 알겠다며 날 안심시킬 뿐이었다. 오히려 삼촌이 먼저 자기네 로펌을 통해 도와주겠다고 해서 말리기 위해 고생 좀 해야 했다.

    국내에서 알아주는 로펌이니. 아니, 누구보다 믿고 있는 삼촌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보다 다른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 눈앞에서 활짝 웃고 있는…….

    "형! 고영이 형!"

    "하아……."

    선호가 문제였다.

    내 머리가 지멋대로 돌아가더니 이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선호를 향해 고정됐다.

    "너 뭐냐. 개학 아냐?"

    "응? 괜찮아. 그것보다 형! 서운하다? 넌지시 알려 줄 수도 있었잖아?"

    "뭐라고? 내가 그 소문의 랭커라고?"

    "에이, 뭐 어때. 나쁜 짓하는 것도 아니고."

    비꼬아도 비꼬아지지 않는 선호는 눈치 없이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시시덕거렸다.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선호에게 응징을 가했다.

    퍽!

    "아악!"

    "정신 차려라, 이 새끼야. 고등학교 선생이라는 놈이 지금 뭐하는 거야? 너 여기 온 거 삼촌은. 아니, 숙모는 알고 계시냐?"

    내 무자비한 손바닥에 뒤통수를 헌납한 선호가 잠시 중심을 일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녀석은 금세 자세를 바로하고 쓰린 뒤통수를 문지르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이 자식 그냥 온 거 아냐?

    불현듯 찾아온 불안감에 나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선호에게 물어 보았다.

    "……너 설마. 학교 쨌냐?"

    "역시. 형은 날 너무……아악!"

    "이 미친 새꺄! 니가 고딩이야? 선생이 학교를 째? 돌았냐? 아님 돌아가고 싶냐? 내가 돌아가게 해줘?"

    이 대책 없는 놈은 변하지 않았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뒷일을 생각 안하는 건 여전했다. 정말 답이 없다 못해 답안지를 씹어 먹을 놈이었다.

    갑작스런 내 폭언에 놀라 리아와 미야프가 뒤로 물러섰지만, 이미 뻗힌 혈압은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는 아예 딴 곳을 보며 딴청을 피우는 선호의 엉덩이에 발차기를 날리며 답답한 심정을 풀어보려 했다. 물론 풀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선호는 더욱 더 능청을 떨며 내게 달라붙었다.

    "에이, 형. 그러는 거 아냐. 형도 남자잖아? 근데 이 동생 마음을 몰라준단 말이야? 형이? 형이?"

    "형이 뭐? 이 미친놈아. 월차라도 쓰던가! 가득이나 동료 선생들이 너 싫어한다며? 그런데 대책 없이 일을 벌이면 어뜩하냐고!"

    "상관없어. 어차피 조만간 관둘 생각이었거든."

    "……뭐?"

    땅!

    순간 뒷골이 당겼다.

    그제야 나는 사람들이 혈압이 오르면 왜 뒷목을 잡는 지 알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 했다. 다행히 내 이성이 아직 남아 있나 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걸 느끼며 나는 선호의 귀를 잡고 그대로 주차장 밖에 임시로 대 놓은 차로 향했다.

    "악! 형! 귀! 귀!"

    "닥치고 따라와!"

    등 뒤에서 리아와 미야프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정도가 흘렀다.

    선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연신 한숨을 쉬었고,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 시선을 피했다.

    한참동안 눈을 감고 선호의 상황을 되새겨본 나는 그제야 눈을 뜨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선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만두면 뭐 해서 먹고 살려고?"

    계획이 없으면 뒤진다는 내 눈빛에도 불구하고 선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반짝이며 날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진 않은 모양이었다.

    선호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프로 섹스 배틀러! 형. 그래서 말인데, 나 좀 쩔해주면 안 될……악!"

    아니다. 이 새끼는 나이를 똥꾸멍으로 먹은 게 확실했다.

    간신히 남겨 놓은 이성이 사라진 나는 그대로 선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놀란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지원 나온 경찰관이 찾아올 때까지 선호를 두들겨 팼다.

    내가 전생에 나라라도 팔아먹었나 싶었다.

    ***

    단호한 한 마디가 내 입에서 나왔다.

    "안 돼."

    "아아, 형. 나 형만 믿고 있었다니까? 응? 한 달이 안 되면, 보름. 아니, 일주일! 응? 혀어엉!"

    줄기차게 쳐 맞고도 선호는 내게 달라붙어 애교를 부렸다. 어릴 때부터 활달한 녀석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가 보다.

    그럼에도 난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없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선호였다. 삼촌과 숙모의 아들이고, 그래도 내 동생인 선영이의 동생이었다. 소중한 이 녀석을 백수 한량의 길로 끌어 들일 수는 없었다.

    그건 삼촌한테 할 짓이 아니지.

    이미 난 예전에 삼촌의 바람을 선호 때문에 꺾은 적이 있었다. 나름 명망 있는 법조인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 교사가 되고 싶다는데 반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때 나는 삼촌과 숙모를 설득하며 선호의 꿈을 지켜주려 노력한 적이 있었다.

    그런 내 모습이 기특했는지, 아니면 내 노력이 통했는지. 어느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삼촌과 숙모는 선호의 뜻을 존중해 주었다. 물론 그날 일 덕분에 원래 좋지 않았던 선영이와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지만.

    지금까지 그날 일을 후회한 적은 없었다. 선호가 자기 입으로 꿈이라고 했던 교사라는 직업을 버릴 거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러니 내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수가 없었다.

    "너 진짜 나랑 인연 끊고 싶냐? 너 그때 뭐라고 했어? 아이들이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좋은 등대가 되고 싶다고. 그래서 삭막한 법조인보다는 따듯한 선생이 되고 싶다고. 너 그때 울면서 그랬다."

    "올! 역시 형은 머리가 좋아. 거의 10년 전 일인데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다 기억하네?"

    "개소리하지 말고. 난 그때 선영이 대신 널 선택했다. 그런데 뭐? 이제 와서. 아니, 선생이 된 지 일 년 조금 넘어 놓고, 뭐? 뭐가 되고 싶다고?"

    말을 하다 보니 자꾸 열이 났다. 아, 진짜 저 망할 놈의 주둥이를 실로 꿰매고 싶었다.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선호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답했다.

    "진짜 형이 내 은인이야. 근데 있잖아, 고영이 형. 근데……."

    "말 해. 도대체 왜 이러는데. 그 이유라도 좀 알자."

    그제야 선호의 얼굴에 그늘이 보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됐다고 울먹이던 녀석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이윽고 솔직한 선호의 고민이 찢어진 입술 사이로 흘러 나왔다.

    "현실이랑 이상 사이에 너무 큰 괴리가 있더라고."

    "……무슨 일. 있냐?"

    축 늘어진 목소리는 현호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 녀석은 혼이 날 때도 웃는 녀석이었다. 그렇게 밝아서 주변에 함께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힘을 가진 좋은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울함을 뿌리니,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윽고 선호가 눈을 감은 채 파르르 입술을 떨었다.

    도대체 왜……?

    무슨 일일까. 선호가 이렇게 울음을 참으려하는 바탕에 무엇이 있을까. 고작 1년 만에 이 녀석을 이렇게 만든 게 무얼까.

    너무 의외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나를 대신하여 선호가 매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주 힘들게, 한 마디 씩.

    "형. 교단은 없더라. 그냥 공무원이야. 돈 받고 수능에 나오는 단어만 가르치는. 기계밖에 없어."

    언젠가 들었던 것 같다. 학교 선생보다 학원 선생을 더 무서워한다는 이야기를. 언뜻 느껴지는 선호의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느껴졌다.

    "학생은 없더라. 수험생만 있어. 그러니 선생도 없지. 그냥 강사만 있을 뿐."

    "선호야……."

    "형. 애들이랑 친하게 지내려고 해봤다? 그래도 난 선생이 되고 싶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친하게 단톡방을 만들어서 자주 이야기해도,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주려고 노력해도, 괴롭힘을 당하지 않도록 달래고 타일러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소용이 없더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 누구보다 선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선호의 겉모습만 알고 있었다. 어떤 고민을 하는지,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내 문제에 정신이 팔려서.

    물론 핑계거리는 많았다. 그저 핑계거리는.

    나는 이빨 자국이 깊게 난 입술을 떼고 선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됐어. 진작 말하지 그랬냐. 도와주지는 못해도 술 한 잔 사줄 수는 있는데. 고생했다. 고생했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축 늘어트린 녀석을 다독여 줬을 뿐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문득 눈앞의 덩치 큰 녀석이 어릴 적부터 겁이 많았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구나.

    그제야 선호가 왜 지금껏 혼자 속을 앓았는지 알 것 같았다. 녀석은 이미 부모님과 누나를 실망시킨 전례가 있었다. 그런데 또 다시 가족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게 분명했다.

    모질지 못한 새끼.

    속으로 현호를 헐뜯으면서도 난 부드럽게 녀석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내 손길에 서러움이 터진 선호가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혀엉. 나 너무 힘들어. 가슴이 터질 거 같아. 나 어떡해?"

    "됐어, 인마. 남자 새끼가 질질 짜긴. 됐어. 다 꺼지라 그래."

    "나도 행복해지고 싶은데, 애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데……."

    하아.

    마음이 여려도 너무 여린 선호였다. 시꺼멓게 속이 탄 녀석의 모습을 보니 괜히 화가 났다. 선호가 아닌 나 스스로에게.

    내가 힘을 때 가장 오래 옆에 있어준 건 다름 아닌 지금 내 앞에서 울고 있는 선호였다.

    나는 말없이 선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최소한 내게 의지하는 이 녀석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선영이가 아예 날 원수로 여긴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미안하다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삼촌네 가족이 바다에 빠지면 선영이를 가장 나중에 구할 테니까.

    다짐을 마친 나는 선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물었다.

    "섹스 배틀러. 아, 오글거리네. 아무튼 랭커가 되면 행복할 거 같아?"

    "……모르겠어."

    "그럼. 선생질을 계속하면 어떨 거 같아?"

    "싫어. 선생들끼리 파벌을 나누는 것도 싫고. 뒤에서 누굴 욕하는 것도 싫어."

    나는 단호함이 느껴지는 선호의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의 목소리에서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굳이 뭐가 그렇게 힘드냐고 묻지는 않았다.

    잠시 내가 말이 없자, 선호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면. 불행하지는 않을 거 같아."

    "그래. 그거면 됐다."

    그걸로 충분했다. 다른 말은 쓸데없는 치장일 뿐이었다. 중요한 건 스스로 하고자하는 것일 테니까.

    최소한 착하기만 한 호구 놈 하나 키워줄 능력은 있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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