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54화 (1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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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위가 한풀 꺾였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옴에도 나는 여전히 뜨거웠다. 아리엘 사냥 이후 바로 귀국한 뒤로 쉴 새 없이 사냥에 매진했다. 경험치를 얻기 위해서도, 아이템을 얻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물론 목적 없이 사냥만 한 건 아니었다.

    한적한 동해 바닷가에 나타난 평민 몽마인 질척한 어부를 막 쓸어버린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털썩 모래사장에 주저앉았다. 거칠게 숨을 고르는 내 얼굴에는 쉬지 않고 사냥한 탓에 곳곳에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슬며시 눈을 감은 나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내용을 보며 입매를 부드럽게 풀었다.

    "한 달 같은 10일을 보낸 효과가 있네."

    고작 10일이었다. 한 달도, 일 년도 아닌 10일. 이 길지 않은 시간동안 얼마나 많은 몽마를 사냥했는지 몰랐다.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사냥한 나는 하나씩 오른 기술 숙련도를 보며 흡족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텅 빈 사냥터에 홀로 앉아 쉬던 내 숨소리가 안정을 찾아갔다. 더 이상 거친 숨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자,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가 고프네."

    짤막한 한 마디를 남기고 바닷가를 떠난 나는 성수기가 끝나 한적한 펜션에 도착했다. 고작 백여 명 남짓 될까 싶은 주민이 있는 동네에도 꽤 현대식 펜션이 있다는 게 봐도 봐도 신기했다.

    가벼운 감상을 뒤로한 나는 사흘 간 빌린 펜션의 1층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놀러나간 리아와 미야프가 돌아오지 않았는지 펜션 안은 조용했다. 이 기분 좋은 조용함은 내가 씻고 나왔을 때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한적함에 취한 나는 펜션을 나와 마당에 있는 벤치에 등을 눕혔다. 가슴에 공손이 올린 양손가락이 자기들 멋대로 춤을 추는 걸 보니 내가 기분이 좋긴 한 것 같았다.

    사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바로 오늘 자정 끝난 5회차 자유 임무 때문이었다. 나는 이미 우승한 지난 달 자유 임무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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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회차 자유 임무]

    + 푸른 음격을 가진 몽마의 공격에 버텨라.

    + 임무 현황 : 2/1

    + 기본 보상 : 모든 기술 숙련도 1단계 상승

    + 우승 보상 : 반숙의 달걀

    + 자유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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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생각해 봐도 너무 멍청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있었다.

    우승하면 뭐하냐고. 그래봤자 배짱이 밖에 되지 않았는데.

    하나의 기술 숙련도 3을 올려주는 우승 보상뿐만 아니라 기본으로 주어지는 보상도 나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책했다. 나는 오늘만 살지 않기 때문이었다.

    미래.

    아무리 우리네 인생사가 한 치 앞도 모른다지만, 자유 임무는 우리의 인생이 아니었다.

    나는 이번 달 자유 임무를 띄우며 혀를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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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회차 자유 임무]

    + 푸른 음격을 가진 몽마를 절정에 오르게 하라.

    + 임무 현황 : 0/1

    + 기본 보상 : 반숙의 달걀

    + 우승 보상 : 시큼한 사탕

    + 자유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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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효.

    몽마의 공격에 버티면, 그 다음은 사냥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덕분에 남은 왕족 몽마는 태백산을 배회하는 구미호밖에 없었다.

    내가 트루드와 아리엘을 사냥함으로써 제 발등은 찍은 격이었다.

    물론 구미호를 사냥하면 이번 달 임무도 우승할 게 분명했다. 단지 그게 문제였다. 왕족 몽마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자유 임무 보상은 매력적이었다.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자유 임무를 중심으로 사냥 계획을 수립했고, 그 결과 평민 이상의 형편이 괜찮은 참가자들은 태백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괜히 늦장을 부렸다가는 이번 달 자유임무를 공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다급히 날아온 참가자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름달 근처에 숙소를 잡고 내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아…….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이야."

    두 마리의 왕족 몽마를 사냥했을 때만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여름달을 바로 사냥할 생각을 했었다. 물론 뒤늦게 다음 달 자유 임무를 예측하며 그만두었지만.

    "그래도 가야겠지. 기다리든 말든 상관은 없지만, 어차피 사냥해야 할 거니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가 할 일을 되뇌었다. 상황이 어떻든 분위기가 어떻든. 내게 중요한 건 이번 달 자유 임무도 우승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의 이목은 NPO BOSS에서 내 인터뷰를 방송한 뒤로 더 할 나위 없이 높아진 상태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머지않아 내 정체가 알려진 가능성이 높았다.

    뭐, 사람들이 얼마나 끈질긴지 알게 된 좋은 시간이었지.

    "그리고 우리나라 네티즌 수사대가 얼마나 대단한지도."

    CSI가 따로 없었다. 나는 지능범이었고, 그들은 과학 수사관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직은 지능범이 한 발 앞서고 있었다. 다만 그 시간이 머지않았을 뿐이었다. 그 증거로 내 국적이 들통 났다.

    내가 꾸준히 보스를 즐기다보면…….

    "결국 들통 나겠지. 그래도 요즘 사람들 인식이 꽤 많이 변했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유교적 색체가 강한 우리나라에서도 보스에 대해서 쉬쉬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이제 보스를 하나의 스포츠 종목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물론 나이든 노인들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원래 나이가 들수록 보수화되는 경향이 있기에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사회 분위기가 보스에 너그럽다 보니 슬슬 프로게이머라 칭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프로게이머는 무슨. 그냥 섹스 배틀러지. 뭐, 아직 그 정도로 개방적이지는 않으니까."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참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그래서 좋았다. 그래서 놀라웠다. 그래서 재미있었다.

    자연스레 변한 세상을 돌아본 나는 여전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태백산으로 떠나야 했기에 조금이라도 더 쉬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머리로 보스 앱을 견 채 다시 한 번 이달의 자유 임무를 확인해 보았다.

    [시큼한 사탕]

    눈을 감은 채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번 우승 보상은 그동안 거의 잊고 있던 아이템이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은 이름이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기술치 초기화.

    내가 그토록 바라던 걸 이루어 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더욱 우승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재미있는 건 지난 열흘간 사냥에 매진한 덕분에 금화 2개가 모였다는 점이었다.

    기껏 금화 20개를 만드니까 임무로 딱 나오네.

    좀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 상황이 어떻든 문제될 건 없었다. 중요한 건 내가 우승을 차지하여 이 기술치 초기화 아이템을 얻느냐 마느냐 일 뿐이었다.

    의지를 다지는 것도 잠시 내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저번 달 아리엘 사냥으로 얻은 아이템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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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어 여왕의 상징]

    + 고귀하지만 혼란스러운 바다 정령의 근원.

    + 마법력 5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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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리엘의 눈물]

    + 절정의 환희가 깃든 아리엘의 마음.

    + 마법력 25% 상승.

    + 적의 항마력 1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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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철 여왕의 상징과 좀 달랐다. 적의 방어력을 깎는 특수 옵션이 없는 대신 인어 여왕의 상징은 마법력을 무식하게 올려주었다. 진짜 말 그대로 무식하게.

    아리엘의 눈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귀걸이에 속하는 이것도 장식이 주제에 무기처럼 막대한 마법력을 올려주었다. 게다가 강철 여왕의 상징과 유사한 옵션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것만해도 엄청난 물건이라는 게 확실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아리엘의 눈물과 인어 여왕의 상징은 세트 아이템이었다.

    두 아이템을 모두 착용할 경우 마법력 25%가 추가로 붙었다. 거기에 5%의 항마력 감소까지 더해졌다.

    "무슨 아이템 2개에 마법력 100%에 항마력 깎기가 15%라니. 이거 너무 사기 아냐?"

    만약 마법력이 아니라 타격력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이 황금 계륵은 마법력이었고, 그것은 나와 상극의 아이템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아이템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내가 쓸 수 없는 아이템이 이렇게 좋다보니 팔 수가 없었다. 괜히 팔았다가 내 발등을 찍는 일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팔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차라리 상징 추출을 포기할 것 하는 후회가 들었다. 상징 추출을 포기하면 고유 특성을 가진 상징이 아니라 오래된 황금 봉인석으로 보상이 대체되었다.

    그 당시에는 확률에 목숨 걸기보다는 그냥 내가 쓰지 못해도 잘 팔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마법력을 선택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게 실수였다. 그때 봉인석을 선택했더라면 이렇게 매일 고민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사실 누구라도 상황이 이렇게 꼬일 줄 예측하는 건 어려웠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징과 장식이 세트 아이템일 지 미리 알아낼 방법은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엄청난 성능을 가졌을 거라고 예측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운이 없었다. 아니, 운이 좋았다. 다만 나를 위한 행운이 아니라 남을 위한 행운이 내게 찾아왔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내 이마에 주름이 사라질 날이 없는 건 당연했다.

    "후우……. 진짜 골치 아프네."

    이걸 어떻게든 처리해야겠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여전히 답이 보이지 않자, 나는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짜증스러운 얼굴로 눈을 떴다.

    혼자 주변을 돌아다니며 씩씩 거리자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았다. 이럴 때마다 내 협소한 인간관계가 싫었다. 믿을 수 있는 동료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씁쓸함도 잠시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대로 눈을 감은 나는 내가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꺼냈다. 바로 아리엘을 사냥하며 얻은 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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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인한 폭군]

    + 푸른 권위를 무너트린 고독한 패자의 증표.

    + 치명 증폭 25% 상승.

    + 반려 등록 시 효과 반감.

    + 특수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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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 번의 공격 만에 왕족 몽마를 보낸 덕분에 생긴 업적은 첫 인상만큼은 강렬했다.

    더 이상 조합이 불가능한 특수 업적이란 걸 증명하듯 효과 하나는 끝내주었다. 물론 좋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내 직업 특성인지, 아니면 내 성격이 그래서인지. 이 망할 업적은 파티 사냥을 불허했다.

    이쯤 되니 그냥 내 팔자가 그런가 싶었다.

    "생각해보니 진짜 마가 낀 것 같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숙련도 올리기 위한 여정만 해도 그랬다. 본래 계획은 지금처럼 무차별적인 사냥이 아니었다. 그보다 활력이 높은 일명 피돼지를 찾아서 집중 공략하려고 했다.

    그런데 내 기준에 피돼지는 있을 수 없었다. 리아가 그 점을 지적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차선을 택했다. 그것이 전국 일주를 하며 몽마란 몽마는 싸그리 잡아 홍콩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어쨌든 효과는 있었지만, 꽤 힘은 여정임에는 분명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본래는 랭커들을 살살 꼬드겨 버스를 태우려고 했다. 일명 3차 전직 버스. 왕족 몽마를 사냥해야 전직하는 건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에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것도 초장부터 틀어졌다. 이유야 간단했다. 랭커들의 레벨이 정체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 지난 지금도 2위는 40레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나마 5위권 랭커들이 열심히 했는지 2위인 타란툴라를 매섭게 뒤쫓고 있었다.

    물론 그래봤자 40레벨은 40레벨이었다. 49레벨이 되어야지 전직 퀘스트를 받았다. 아무래도 이런 버스 드라이버 오퍼레이션은 꽤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이처럼 내가 생각하는 것 마다 허탕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었다. 내가 저주 받았나 하는.

    "여기서 뭐해요? 불러도 대답도 않고."

    "불렀는데! 불렀는데! 나쁜 아빠! 아빠 나뻐!"

    우울한 생각이 들기 무섭게 뾰족한 목소리가 날 깨웠다. 리아와 미야프였다. 언제 왔는지 나란히 앞치마를 한 채 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피식.

    저주는 무슨 저주. 그냥 재수 좀 없었던 거지.

    쓸데없는 생각이 금세 날아갔다.

    "저녁 준비 다 했어요. 얼른 가요. 미야프 배고파요."

    "맞어! 나 배고파. 배고파요. 꼬르륵. 밥 먹어야 해요. 안 그럼 아야 해요."

    "그래. 가자."

    솔솔 얼큰한 매운탕 냄새가 고민이 사라진 자리를 메웠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지, 뭐.

    인생 별 거 있나?

    우울해 할 필요가 없었다.

    굴곡이 있으니 인생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나는 태백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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