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51화 (151/200)

<-- Molt -->

***

트루드의 마법 방패.

보물은 언제나 탐욕을 불러왔다.

[@Haakon : 트루드를 사냥하고 얻은 방패를 구매하고 싶소.]

내가 호텔에 도착하는 걸 보고라도 받은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날아온 메시지에 나는 한잔하자는 리아를 뒤로한 채 침실로 들어왔다.

미야프도 재소환 않은 나는 그대로 매고 있던 넥타이를 풀고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아무래도 집중력을 유지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말 보다는 문자가 감정을 덜 전달하는 법이었다.

왕궁 안에서와 달리 호콘 왕세자는 영어를 사용했고, 덕분에 문자를 주고받는데 문제는 없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한 글자씩 화면에 찍었다.

[@Awesome Banana : 제안은 고마우나 어렵습니다.]

[@Haakon : 혹 신기 등록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오?]

짐작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호콘의 물음에 스마트폰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저었다.

"후……. 이거 참. 왕세자비가 문제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잖아?"

처음 왕실의 초대에 걱정을 한 이유는 9할 이상 왕세자비의 악명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작 날 곤란하게 만드는 건 왕세자였다. 정말 사람일은 한치 앞도 모른다는 게 맞았다.

노르웨이 왕실의 정보력은 높이 살만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호콘의 말대로 난 트루드의 마법 방패를 신기로 등록할 생각이었고, 그 결정을 되돌리거나 할 일은 없었다.

[@Awesome Banana : 맞습니다.]

[@Haakon : 그럼 조율이 되겠군. 이야기를 할 시간이 있소? 좀 길어질 것 같소만.]

이야기?

확실하지는 않지만 왕세자는 내가 거절할 걸 알고 있는 듯 했다.

어차피 감당하지 못할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선선히 답장을 보냈다.

[@Awesome Banana : 들어보겠습니다.]

[@Haakon : 고맙소.]

짤막한 감사 인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호콘 왕세자의 제안이 날아왔다.

[@Haakon : 나는 우리 왕가를 곤혹스럽게 한 대적이 남긴 전리품을 가지고 싶소. 허나, 정당한 전리품의 소유주에게서 그것을 강제로 빼앗을 생각은 없소. 솔직히 말하면 지금 당장 합당한 대가를 치를 여력이 없기도 하오. 혹, 대가를 돈으로 치른다면 받을 생각이오?]

[@Awesome Banana : 돈에는 크게 연연하지 않습니다.]

[@Haakon : 그렇소이까. 하던 말을 계속하자면, 그대와 계약을 맺고 싶소. 그대는 분명 뛰어나오. 아니, 지금 이 지구상에서 가장 대단하지 않소?]

낯간지러운 칭찬이었다.

물론 운이고 어쩌고 하는 인사치레를 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내가 잘나서, 노력해서, 그리고 의지가 강해서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했다. 물론 운이 없다면 불가능했겠지만, 그렇다고 그걸 모두 운으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러기에는 그동안 내 노력이 너무 억울했다.

내가 말이 없자, 왕세자가 다시 문자를 보냈다.

[@Haakon : 그러니 그대라면 더 좋은 보물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니 난 확신하고 있소. 만약 더 좋은 보물을 얻고 트루드의 방패를 팔 생각이 들면. 그때 우리 왕가에 가장 먼저 연락을 줄 수 있겠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게다가 합리적이었다. 다만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게 치명적이었다.

나는 아무리 상대가 왕세자라도 호구 잡히긴 싫었다.

[@Awesome Banana : 돈에 대한 욕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손해 보는 걸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Haakon : 일단 관심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소.]

아니, 이 양반이?

괜히 에둘러 말했다 싶었던 나는 아예 제대로 직언을 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이런 나보다 왕세자의 손가락이 더 빠른 모양이었다.

내가 막 짤막한 문장을 썼을 때 장문의 문자가 날아왔다.

[@Haakon : 그럼 정식으로 제안하겠소. 만약 그대가 나와 협의 하에 트루드의 방패를 성장하고 신기로 쓰면. 그렇게만 해 준다면, 후일 다시 구매할 때 보물의 합당한 가격에 더해 성장과 강화에 들어간 비용 일체를 지불하겠소. 어떻소? 이만하면 벌충이 될 듯 싶은데.]

"오호……."

호콘의 자신만만한 문장처럼 흥미가 동했다. 한 마디로 내가 뽕을 뽑을 때까지 쓰고 팔면 끝이었다. 게다가 성장과 강화에 들어가는 비용까지 대준다니 나쁠 게 없었다.

물론 제값에 반드시 구매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야겠지만.

"그리고 경험치 모으는 건 어렵지 않지."

여전히 내 눈에 차지 않는 호콘의 제안에 나는 희미한 미소를 입에 걸고 손가락으로 핸드폰을 눌렀다.

[@Awesome Banana : 역으로 제안 한 가지 하겠습니다. 반드시 구매해주겠다는 계약을 작성해 주시면. 저도 사인을 하겠습니다. 하지만 경험치로 이 보물을 사고파는 건 영 내키지 않습니다.]

[@Haakon : 그럼 어떤 걸 원하시오? 혹 돈이오?]

그럴 리가.

애가 닳은 듯 바로 답하는 왕세자의 모습에 내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것도 잠시 나는 미소를 억누르며 제안을 이어갔다.

[@Awesome Banana : 가장 오래된 거래 방식이 좋을 것 같습니다.]

[@Haakon : 그것이 무엇이오?]

조급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호콘 왕자의 문자는 간결했다.

나 역시 상대를 놀릴 생각은 없었다.

빠르게 적어나간 나는 문장이 작성되기 무섭게 전송 버튼을 눌렀다.

[@Awesome Banana : 물물 교환 어떻습니까?]

내가 바라는 건 돈도 경험치도 아니었다.

신성 재료.

바로 폭군으로 전직한 내가 장착할 수 있는 무구의 재료였다.

[@Haakon : 내일 출국하는 걸로 알고 있소. 공항에서 남은 이야기를 합시다.]

호콘 왕세자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확답을 받지 못해 아쉽기는 했지만 그리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어차피 급한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었다. 지금 이 거래에서 우물을 파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왕세자였다.

승기를 쥐고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솔솔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일정보다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리아는 미야프를 데리고 여유로운 시간을 따로 보내기로 했다. 괜히 부산을 떠는 내 모습에 그녀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난 번 일도 있고 해서 그런지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홀로 공항에 들어선 나는 VIP 라운지가 아니라 공항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안내 됐다.

회의실에 들어서니 호콘 왕세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나눈 나는 왕세자의 앞에 앉았고, 그러기 무섭게 그가 종이 한 장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읽어 보시오. 미리 만들어 둔 계약서요."

계약서는 3부였다. 맨 위에는 한글로 써진 계약서가 있었다. 그 다음으로 노르웨이어, 마지막에는 영어였다.

나는 잠시 말없이 계약서를 읽어 보았다. 그리 길지 않은 계약서였기에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정도 지나니 한글과 영어로 된 계약서를 모두 읽어 볼 수 있었다.

탁.

나는 계약서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물끄러미 호콘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소?"

"왕실 체면을 위해 구매하려는 것 치고는 성장 조건이 너무 빡빡한 거 같습니다."

"새벽까지 고민했는데, 나와 생각이 다른가 보오."

숙고했음을 넌지시 알리는 왕세자의 화법이 꽤 압박으로 다가왔다. 그렇다고 실리를 포기하기는 싫었다. 그와 달리 나는 체면이 밥 먹여 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활력, 정력, 특수 효과. 전 이 세 가지를 성장시켰으면 합니다."

호콘 왕세자가 정해 놓은 성장 옵션은 활력과 특수 효과까지는 같았다. 다만 그는 3번째 성장 옵션을 방어력으로 선택했다.

내 단호함에 호콘 왕세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은 순순한 궁금증이었다.

"이유가 무엇이오? 정력보다는 방어력이 더 낫지 않소?"

이거 이 양반도 그냥 양반이었네.

당연하다 되묻는 호콘의 얼굴은 진심이었다. 그 덕분에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왕세자는 정보를 많이 가졌을지언정, 섹스 배틀에 대한 경험은 일천하다는 걸.

나는 왕세자의 부족한 경험을 대신 채워주기 위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상한 조건을 건 이유를 알았기 때문인지 자연스레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물론 정력보다 방어력이 수치가 우위를 보이긴 할 겁니다. 정력이 많다고 데미지를 덜 받는 건 아닐 테니 말입니다."

"내 말이 바로 그 뜻이오."

왕세자가 이제야 말이 좀 통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일견 동의하는 듯 잠시 기다렸다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머리로 세운 계획과 실전 사이에는 꽤 큰 괴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정력 회복 기술이 없어 뜻하지 않은 장기전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약을 먹으면 될 것 아니오?"

순간 나도 모르게 마리 앙투아네트가 떠올랐다. 말 그대로 순간일 뿐이었다.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요녀도 아니었고, 개소리도 하지 않은 왕비였으니까.

"물론 그러면 됩니다. 근데 전투 중 물약을 먹으면 당연히 공격권이 소멸됩니다. 그게 과연 효과적인지는 고민을 좀 해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환하던 왕세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어릴 적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은 그가 내 말뜻을 못 알아 들을 리가 없었다. 그는 나보다 더 지식이 많으면 많았지, 그 반대의 경우일 확률은 낮았다.

뭐, 지식이랑 지혜랑은 다르지만.

"섹스 배틀에서 공격권은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서로 한 번씩 공방을 주고받는 게임은 보통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가령, 체스라면. 의미 없는 한 수를 두시겠습니까?"

체스뿐만 아니라 바둑이나 장기의 경우 한 번의 기회를 날리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고, 왕세자도 마찬가지였다. 턱을 괸 왕세자의 미간이 잔뜩 좁혀진 게 그 증거였다.

때를 놓칠 내가 아니었다.

나는 얼른 말을 이으며 왕세자가 생각을 고쳐먹도록 유도해 보았다.

"그리고 2차 직업 기술만 해도 한 번 사용할 때마다 100이상의 정력을 소모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1천의 정력이라면 방어력을 올려서 이득 보는 피해 감소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단순히 10의 데미지를 덜 받는 것보다 20의 데미지를 주는 게 이득이라는 이야기였다.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제대로 이해한 듯 싶었던 내가 막 표정을 풀 때였다. 의외의 일격이. 아니, 반격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잘 들었소. 그대의 말이 더 합리적으로 들리오. 허나. 그렇다 해도 나는 정력보다 방어력을 성장하는 게 더 낫다고 보오."

"……한 가지 물어 봐도 됩니까?"

"그러시오."

"단순히 왕가의 자존심을 세우려는 목적입니까? 아니면……."

아니구나.

내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왕세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제야 왕세자가 고집을 꺾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력이 부족하지 않은 직업을 가지고 있나 보네.

나는 들인 노력이 아깝기는 했지만 금방 납득했다. 직접 쓸 거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방금 내가 한 말도 사실 내 위주로 한 이야기였으니까.

"그럼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해해줘서 고맙소."

"아닙니다. 그럼 이제 계약서의 공란을 채워 볼까요?"

왕세자가 내게 건넨 계약서에 판매 대금은 공란으로 되어 있었기에 한 말이었다.

내 말이 끝나길 기다린 듯 왕세자가 곧바로 손가락 한 개를 펼쳤다.

뭐지?

고개를 갸웃하며 이해하지 못다는 눈빛을 보내자,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유롭게 말문을 열었다.

"100만 경험치로 구매하겠소."

"……랭커는 아니실 텐데요."

살짝 둘러 너에게 그런 돈이 없지 않냐고 묻자, 왕세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하지만 구하려고 마음먹으면 못 구할 것도 없소. 게다가 이번 일에 대한 교훈도 있지 않소? 문제는 없을 것이오. 아, 물론 지금 당장 대금을 주는 건 어렵겠지만."

이번에는 내 고개가 끄덕여졌다. 당연했다. 나도 그만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트루드에게 크게 데인 뒤로 따로 예산을 확보한 듯 싶었다.

근데 왕세자가 직접 하려나? 도대체 직업이 뭐지?

직접 나와 단판을 지을 정도라면 분명 트루드와 비슷한 몽마가 나타나면 왕세자가 맞설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왕족이라 되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왕세자 본인의 능력이 꽤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물론 더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특이한 직업이든 뭐든. 지금의 나는 누구에게도 질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의문을 표하지 않은 채 나는 바로 협상을 시작했다.

"경험치를 확보하는 게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흐음. 다른 생각이라도 있는 것이오?"

"진짜 왕족이잖습니까. 그 황금 인맥을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언제 써먹겠습니까."

"듣고 있소. 기탄없이 말해 보시오."

왕세자가 미끼를 물었다.

"혹시 신성 재료라도 들어 보셨습니까?"

자신이 바늘을 물고 있다는 걸 모른 채 왕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꽤 근엄한 모습이었지만, 내게는 좀 다르게 보였다.

월척이구나!

실한 물고기가 바늘에 걸려 팔딱 거리는 것 같았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