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laxati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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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끝났지만 쉴 수 없었다.
나는 고생한 스태프들과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바로 리아가 거르고 거른 기자들과 비공개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내 향후 계획이나 목표에 대해 주로 물었고, 나는 솔직하게 그들에게 답했다. 내일 아침 뭘 먹일지도 모르는 게 나라고.
물론 너무 날카롭게 응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확실하지 않은 일에 대해 언급을 자제했을 뿐이었다. 다행이 눈치 빠른 기자들은 내가 답할 수 있는 보스 관련 질문으로 넘어갔고, 나는 선선히 그들이 궁금해 하는 걸 답해주었다.
그렇게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하는 행보를 보였지만…….
"꼭 초대에 응해야하나? 요즘 세상에 왕이라고 해봤자, 그냥 상징적인 존재일 뿐이잖아? 그리고 노르웨이 왕실은 정치 개입에 엄격하지 않나?"
"그건 맞는데요. 그래도 이왕이면 응하는 게 좋아요. 다 이리저리 얽혀 있는 게 유럽 왕실이거든요."
"진짜 피곤한데. 뭐 예법이니 뭐니 그런 것까지 신경 써야 할 건 아니지?"
왕실에서 보내온 고급스런 차량 뒷자리에 앉은 나는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리아에게 좀 칭얼거렸다. 솔직히 이대로 쉬고 싶었다. 세상에는 섹스 배틀보다 훨씬 힘든 일이 많았고, 그 중 방송 촬영과 기사 상대는 수위권을 차지했다.
내 피곤함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자, 리아가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날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노르웨이 국왕은 소박하기로 유명하거든요."
"나도 듣긴 들었는데. 경호원 없이 막 다니고 그런다며? 전에 인터넷에서 피자집 앞 경호원 없이 줄 서 있는 걸 본 거 같은데."
"아마 맞을 거예요. 왕세녀와 함께 서 있는. 지금 국왕인 하랄 5세도 그렇지만, 선왕인 올라프 5세도 소탈하기로 유명해요. 경호원 없이 전철도 타고, 스키도 타고. 아무튼 재미난 일화가 많아요."
그럼 뭐하냐고 자식 농사. 아니, 며느리 농사가 망했는데.
나도 노르웨이 역대 국왕들의 인품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당대의 왕세자빈이 문제였다. 최근에는 스웨덴에서 메테 마리트의 야성을 뛰어 넘으려는 신흥 강자가 나타나긴 했지만.
리아가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을 살피더니 이내 안심하라며 날 다독여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골치를 썩고 있던 발키리를 사냥해서 감사 인사를 하려고 초대한 거뿐이니까."
"국왕 생각은 알지. 걱정도 안하고."
"근데 새로운 직업에 대해서는 공개 안하실 생각이에요?"
여전히 내 얼굴이 굳어있자 리아가 괜히 화제를 돌렸다.
개차반이 있는 왕궁에 가는 게 탐탁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리아가 애쓰는 걸 모른척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의도대로 화제를 바꿨다.
"다른 건 몰라도 내 직업이나 스탯, 기술은 안 되지."
"그건 그래요. 혹시라도 누가 분석하고 그러면 안 되니. 물론 아마조네스처럼 이상한 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대외적으로야 같은 사람에게는 안 된다고. 조건이 복잡하다고 했지만, 또 모르지."
뭐, 내 스탯을 안다고 소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만.
하는 말과 달리 난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알아도 못 막는 공격력. 처음부터 이 목표를 잊지 않고 열심히 하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경험치를 막 쓰면 안 되겠네. 만렙 되면 잔여 경험치로 선공을 정하니.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또 부족한 게 생겼다.
"근데요, 고영 씨. 아니, 아니에요."
상념에 잠겨 있던 나는 쭈뼛쭈뼛 거리는 리아의 모습에 실소를 흘리고 말았다.
"그냥 물어보면 될 걸. 왜, 궁금해?"
"……네. 3차 전직하면 어떤지. 궁금하긴 해요."
"딱히 달라진 건 없어. 오히려 나빠진 게 있다면 모를까. 그리고 3차 전직이 중요한 게 아니라, 왕족으로 계급이 오른 게 중요한 거야. 추가 시스템이 그만큼 엄청나니까."
"그래도 부러워요. 전 언제 3차 전직할 지. 까마득해요."
"그 전에 랭커나 되는 게 어때?"
툭 내뱉은 내 한 마디에 리아가 볼을 부풀리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토라졌다고 강조하는 리아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이상 내 직업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내 약점을 내 입으로 말할 순 없지. 믿는 것과 조심하는 건 다르니까.
폭군.
이름만 들으면 무언가 엄청난 게 있을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엄청날 거라 생각했다. 물론 엄청난 점도 없지 않아 있었다. 기본 직업의 3차 전직 직업들의 특별한 기술을 배울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역시 페널티지. 왕족이면 뭐하나. 노예 등급밖에 못 차는데.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전직한다고 막 세상이 바뀌고 그런 건 없었다. 게다가 난 남은 기술치가 2개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기술치 한 개만 더 모아서 3차 직업 특화 기술을 배우려고 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3차 직업 기술은 다른 기술들과 달리 습득을 위한 기술치가 천차만별이었다.
내가 쓸 만하다고 배울지 말지를 고민한 기술은 보통 10개의 기술치가 필요했다. 그나마 신검 합일이라는 기술은 기술치 5개로 배울 수 있었지만, 이건 장착 무기가 검일 때만 적용이 되는 버프였다. 그렇게 하나씩 제하고 나니 배울 기술이 마땅치가 않았다.
"그래도 광전사의 광기 폭발은 배울 만한데 말이지."
사실 광기 폭발보다 암살자의 음독 관련 기술이 더 좋아 보이긴 했다. 다만 음독 부여를 배우는데 15개의 기술치가 필요한 것도 부담스러웠고, 다른 기술과 달리 배우기 위해 사전에 배울 기술들이 너무 많았다. 한 마디로 가성비가 썩 좋지 않은 기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 광기 폭발은 3차 직업 기술 중 유일한 게 사전 습득 기술이 없었다. 단지 리스크가 좀 크다는 게 문제였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기술 이름처럼 이성을 잃고 활력이 다 할 때까지 공격만 하는 광전사로 변했다.
결국 여러 상황을 따져 봤을 때 나와 좋은 궁합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특화란 말 그대로 직업의 특성을 살려주는 기술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2차 직업들은 그나마 범용성이 있었지만, 3차 직업은 그렇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기술은 내가 만들어야 하는 건가.
혼잣말을 내뱉은 내가 아쉬움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살짝 내 눈치를 살피던 리아가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응? 아……. 약간."
나도 모르게 일단 말부터 아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건 내 세팅을 들키지 않는 거지, 단순히 직업 특성을 숨기는 게 아니었다.
뒤늦게 착각을 수정하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너도 알잖아, 내 직업이 어떤지. 근데 3차 직업 기술은 썩 내게 맞는 옷이 아니네."
"그래도 기술 창제가 있잖아요? 그것들을 참조해서 노력하면 분명히 성과가 있을 거예요."
"그래. 그럼 좋겠네. 아무튼 조만간 3차 직업 기술을 정리해서 보내줄게. 그래봤자 기본 직업뿐이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왠지 리아의 목소리가 서운한 것 같았다. 아니, 서운해 하는 게 분명했다. 무어라 말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왕실에서 보낸 차가 왕궁 앞에 도착해 있었다.
***
왕궁.
보통 궁전이라 하면 중세 시대 뾰족한 성을 떠올리기 십상이었다.
노르웨이 왕궁은 그렇지 않았다.
도서관? 아니면 국회의사당?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이곳은 달랐다. 연한 아이보리색으로 칠해진 건물은 직사각형의 중앙에 기둥을 세워 놓은 것 같았다. 화려하지도 않고 고풍스럽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냥 큰 건물이었다.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왕궁 내부도 겉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화려하지 않은 품위.
건물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정말 궁전이라고 하기는 뭐하네."
"왕궁이니 뭐니 해도 결국 사람이사는 집이에요. 집은 본래 주인의 성품을 닮는 법이고요."
왕실 관리의 안내를 받으며 국왕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도 역시나 화려하지 않았다. 솔직히 약간 실망하기도 했지만, 화려하지 않은 모습 덕분에 마음이 놓이는 것도 있었다. 그래도 시청보다 덜 화려한 건 좀 그랬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응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새하얀 백발이 인상적인 하랄 5세를 기대하고 들어갔지만, 응접실 안에는 국왕이 아닌 왕세자와 그의 비가 있을 뿐이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 리아를 바라보았다. 무슨 상황인지 묻기 위해서였다. 그녀도 몰랐는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러더니 내게 손짓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왕세자를 맞이하라 일렀다.
뭐야, 이게.
한 나라의 왕을 본다는 사실에 기분이 살짝 들떴던 나는 괜히 실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실망감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물론 가식적인 미소 또한 없었다.
어느새 호콘 왕세자가 다가와 양손을 벌리며 날 맞이했다. 확실히 이 집안 가풍이 그래서인지 그다지 격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목소리가 살짝 들어 있는 것이 내가 꽤 반가운 모양이었다.
"초대에 응해주셔서 반갑다고 하십니다."
왕실 관리의 통역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꽤 어색하고 고역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불평을 하거나 돌아가는 건 불가능했다.
나는 어색하게 입실 전 들은 궁중 예법을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 뒤로 정찬이 준비되는 동안 나는 왕세자 옆에 나란히 앉아 차와 다과를 들며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 맞은편에는 리아가 그 유명한 왕세자비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물론 나와 리아 모두 관리의 통역을 통해 대화를 나누었다.
덕분에 하랄 국왕이 왜 이 자리에 나오지 못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와병 중이었다. 일국의 국왕이라고는 해도 본래 암에 걸린 적도 있고, 심장병도 가지고 있는 여든의 노인은 그저 병약한 노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과와 함께 이어진 건 감사였다.
"정말 고맙소. 그대의 위대한 용기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머리가 지끈거렸을 것이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이 마음을 전하고 싶소."
정중한 통역을 들었음에도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게 하고 싶었다. 나는 내 욕심 때문에 발키리를 사냥했지, 그들을 위해 움직인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바라는 게 있어 사냥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인사를 받을 이유 또한 없다고 생각합니다."
호콘 왕세자는 내 말에 그리 기분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인정하는 모습이었다. 그 차분한 모습에 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인품은 참 좋아 보이네. 인품은.
확실히 들었던 것과 같았다. 단지 풍문에 호콘 왕세자는 인품은 뛰어나나, 안목은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의 결혼은 여러 호사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기 때문에 이런 풍문은 쉬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 뒤로 호콘 왕세자는 계속 내게 말을 건넸다. 꽤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주제를 잘 잡았다. 의외로 보스에 대해 관심이 높은 그의 모습에 나도 점점 불편한 기분을 지울 수 있었다.
방금 관리가 통역을 하기 전까지는.
"뭐라고요?"
"왕세자께서 특이한 종속을 보여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잔뜩 얼어있는 리아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날 바라보는 건 마찬가지였다.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리아의 모습에 나는 그녀도 어찌된 상황인지 모른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지? 아니. 아니지. 여긴 이 양반 앞마당이니까.
지금껏 잘 숨겼던 미야프의 내력이 드러난 건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이곳은 전 세계에서 노르웨이 왕실의 영향력이 가장 큰 곳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녀석이라 부탁을 들어주기 힘들 것 같습니다."
굳이 어떻게 미야프가 내 종속인지 알았는지, 혹은 그것 말고도 아는 게 더 있는지. 이런 질문을 묻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거면 족하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내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호콘 왕세자가 선선히 사과를 해왔다. 그렇다고 내막을 들려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기대도 안 했기에 실망스럽지는…….
아깝네. 소문은 역시 소문인가.
솔직히 소문과 다른 왕세자의 모습에 아쉬움이 들었다. 영웅심에 취해 결혼을 했다는 평가를 받기에 슬쩍 찌르며 알아서 말할 줄 알았다. 당연히 녹녹한 왕세자가 존재할 리가 없었다.
약간의 불편함은 여전히 남았지만 그 뒤로 이어진 대화는 평이했다. 내가 거절한 것에 대해 딸아이가 궁금해 한다는 여느 딸 바보처럼 답하는 호콘의 모습에 좀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잠시 후 정찬 준비가 끝났다는 시종의 말에 왕세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내했다. 리아는 왕세자비의 안내를 받았고, 이윽고 정찬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담백한 만찬. 아니, 그냥 식당이었다.
이후 정찬은 정말 좋았다. 음식의 맛이야 당연했고, 이색적이기도 했다. 색다른 것에 대한 즐거움을 제대로 즐긴 덕분에 응접실에서 생긴 불편함도 많이 희석되어 사라졌다.
특히 열 살 남짓한 공주님 덕분에 더 그랬다.
귀여운 존재라면 인간이든 악마든 무장해제부터 하는 리아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호콘 왕세자와 왕세자비 사이에 나란히 앉은 잉리드 공주와 스베레 왕자를 보며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모두 귀엽네요."
"호호! 그런가요? 그에게도 꽤 귀여운 아이가 있다는데. 데리고 오지 그랬어요. 잔뜩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 그건."
물론 예상했던 것만큼 왕세자비의 매너가 좋지는 않았지만.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정찬은 나름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끝이 났다. 정찬이 끝난 뒤 다시 갖은 티타임에서도 좋은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졌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냥 밥만 먹을 거면 왜 오라한 거지?
그래도 일국의 차기 국왕이었다. 왕세자가 목적 없이 날 부를 리가 없었다. 분명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좀처럼 그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게 우려스러웠다.
쉽게 말하지 못할 만큼 어려운 거라는 말인데.
왕세자의 목적이 무엇이든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이런 내 우려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는 끝내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아니.
결국 드러내기는 했다.
[@Haakon : 부탁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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