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45화 (14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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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부터 오후까지.

    반나절을 혼났다. 시차를 무시하고 날 혼내는 나 원장의 목소리가 차츰 잠기고 나서야 그녀가 혼냄의 강도를 낮췄다. 그렇게 나는 수만리의 거리를 무시한 그녀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게 기분 나쁠 법도 했지만, 나는 그리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운했다. 은연 중 걱정하고 있던 것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확인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으로 돌아갔네."

    스마트폰을 다시 충전기에 꽂고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 원장과 오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어색함이 없었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다. 다만 너무 편하다는 게 문제였다. 감정도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말이니까.

    기쁜 한편 서운한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였다.

    객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으며 곧 나타날 손님을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없는 문턱을 넘어 작은 인영이 나타났다. 그리 작지 않은 체구였지만 오늘따라 유독 작아 보이는 체구의 주인공은 바로 리아였다.

    우물쭈물한 기색을 뿌리며 고개를 숙인 채 침실 안으로 들어온 리아가 가만히 서서 내 말을 기다렸다.

    잔뜩 움츠린 리아의 모습에 마음이 불편했다.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단지 나란 놈에게도 정이 있을 뿐이었다.

    리아의 축 늘어진 어깨가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마음이 더 불편해졌지만 난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 말문을 잡고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리아니까.

    어색한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나는 말없이 무심한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고, 리아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부디 리아가 용기를 내주길 바랄 때였다.

    드디어 리아가 고개를 들어 나와 시선을 마주쳤다. 한없이 떨리는 그녀의 눈동자에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 그녀를 다독이고 싶었다.

    안 되지. 안 돼.

    참아야했다. 나는 이번 기회에 나와 리아 사이의 애매한 관계를 명확히 하고 싶었다. 그녀는 분명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날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나는 오롯이 나로서 존재했다.

    그것은 누구도 침범할 수 없었다.

    다행히 리아는 악수를 두지 않았다. 역시 그녀는 똑똑했다. 내가 곁에 두고 함께 할 만큼.

    "죄송해요. 제가 너무 제멋대로 행동했어요. 그동안 고영 씨가 너무 잘 해줘서. 편하게 해줘서. 그래서 착각했나 봐요. 정말 죄송해요."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않았다. 리아는 최대한 담백하게 사과를 했다. 목소리가 나 원장보다 더 잠겼고,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것처럼 보였다. 최소한 내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나 더욱 움츠려든 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리아를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여주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마지막으로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며 내 마음을 전했다.

    "그래. 그래."

    괜히 쓸데없는 잔소리를 내뱉지도 않았고, 과한 오지랖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말했을 뿐이었다. 대화에서 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내 목소리와 행동이 전해졌는지 내 가슴이 축축해졌다.

    나는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리아의 등을 쓸어 주었다.

    "미안해. 오히려 날 잘 안다고 여긴 네가 그래서 더 화가 났나 봐. 그러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으, 으으. 흑!"

    아, 그렇다고 우는 건 좀…….

    위로가 과했나 보다. 내 부드러운 말에 리아의 참았던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녀는 아이처럼 소리 내며 크게 울었다. 아주 크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들썩이는 리아의 몸을 따스하게 안아주는 것밖에 없었다.

    보기 좋은, 혹은 우애 좋은 남매 같은 모습이었다.

    단 한 가지 문제만 빼면.

    야! 안 돼! 아니라고! 지금은 아니라고! 아오!

    나도 눈치가 없었지만, 나보다 전기톱은 더 눈치가 없었다.

    자꾸 분위기 파악 못하고 나대는 전기톱으로 인해 나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뒤로 뺐다.

    진짜 이게 아닌데…….

    어째 일이 잘 풀린다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

    오슬로 항구가 유난히 한적했다.

    평소라면 호화로운 요트들이 줄지어 정박해 있거나 요트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북적였겠지만, 트루드가 항구와 붙어 있는 광장에 똬리를 튼 뒤로 작은 조각배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광장에 남아 있는 건 여덟 그루의 푸른 나무가 전부였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노벨 평화상의 수상 장소로 유명한 오슬로 시청은 오슬로 항구와 말 그대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었다. 트루드가 자리 잡은 광장을 사이에 두고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트루드의 영역 안에 시청 일부가 들어갔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근처에서 리아가 빌린 요트를 타고 항구로 향하며 트루드를 살피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소감을 읊었다.

    "무슨 시청이 바다 앞에 있어?"

    "상관없지 않아요? 어디에 있든. 그것보다 노르웨이 왕실에서 골치 꽤 썩겠네요."

    "거기는 다른 걸로 이미 골치를 썩고 있지 않나?"

    노르웨이 왕실은 나름 유명했다. 예전에는 좋은 뜻이었지만, 지금은 그 반대였다. 일각에선 역대 국왕이 쌓은 이미지를 다 깎아 먹고 있다고 평했을 정도였다.

    리아도 왕가가 있는 나라 출신이다 보니 모를 리가 없었다.

    "국왕의 인품이 훌륭하면 뭐해요? 자식 농사가 개판인데."

    "무슨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어? 무슨 말이 송곳 같네."

    "그런 거 없어요. 그냥 왕세자나 공주나 배우자 보는 눈이 너무 없는 게 안타까워서 그래요. 하필 이면……에휴."

    리아가 이렇게 답답해하는 모습이 꽤 신선했다. 물론 이해는 갔다. 저 멀리 동방의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나도 풍월을 들었을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니까.

    "기사로 봤는데, 진짜 그 정도야? 골드 디거라 불릴 정도로?"

    "요즘은 스웨덴에서 다크호스가 나타나긴 했지만, 아직은 이 나라 왕세자비가 최고죠. 과거가 화려한 거야 젊었을 때니 넘어간다고 쳐도. 그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잖아요?"

    "하긴. 그래도 왕세자비인데. 섹스 비디오는 좀 그렇지?"

    "그거야 어차피 과거라고 쳐도. 전용기에서 자기 비서 뺨을 때리고 욕을 하기도 했잖아요? 게다가 대놓고 법을 어기는 모습도 보여주고. 뭐, 그 덕에 공주만 덕 봤죠."

    "왕세자도 왕세자지만, 왕세자 누나의 남편도 난리였지?"

    "왕세자비가 아니었다면 그쪽도 쉽지 않았을 걸요?"

    노르웨이 왕세자와 공주의 결혼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아니, 왕세자비의 과거가 너무 엄청나서 공주 쪽은 좀 묻힌 경향도 있었다.

    나도 예전 TV프로그램에서 이걸 봤기에 잘 알고 있었다.

    "애 딸린 미혼모. 여기까지만 해도 꽤 힘든데, 실컷 약 빨면서 하는 섹스 파티에 빠진 전력이 있으니……."

    "그거뿐이에요? 마약 밀매 조직 두목이랑 동거해서 낳은 아들이잖아요? 교환학생으로 호주에선 암페타민이랑 코카인 소지로 쫓겨나고.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자국 내에서 불법인 대리모를 옹호하고. 아무리 친구라지만, 법까지 무시한 건 너무 나갔어요."

    "들어보니 지금은 쇼윈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며?"

    "아마도요. 곧 이혼할 것 같기는 해요. 요즘 들어 왕세자가 젊은 시절 치기로 기사도 놀이에 심취했다는 게 정설이니까요."

    남의 집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트루드의 권역 바로 앞에 요트가 도착했다. 리아는 얼른 선장에게 정박을 지시하곤 인부들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런 똑 부러지는 모습 때문에 리아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이윽고 요트 옆에 작은 고무보트가 내려졌다. 바로 트루드의 권역 안까지 내가 타고 들어갈 운송 수단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아무래도 랭커들 쪽에서 흘러 나간 거 같아요. 기껏 불러놓고 돌연 취소하니까. 죄송해요. 앞으로는 정말 이런 일 없도록 할게요."

    "사과는 한 번이면 족하고. 아무튼 방송국 쪽이랑 조율 좀 잘해 줘. 덕분에 그쪽도 물먹었잖아?"

    "그건 염려 마세요. 어차피 사실 관계만 확인하면 충분해요. 레이드는 침실에서 이루어지니까, 딱히 촬영할 게 별로 없잖아요? 그리고……."

    리아가 슬그머니 말 꼬리를 늘렸다. 그 이유를 모를 내가 아니었다. 사냥 전 그녀에게 받은 아이템을 벌써 까먹을 정도로 난 머리가 굳지 않았다.

    내가 리아에게 부탁 받으며 넘겨받은 아이템은 다름 아닌 심상의 구슬이었다.

    "걱정하지 마. 어차피 가지고 있으면 영상은 자동으로 저장 되잖아? 아닌가?"

    "맞아요. 그럼 이기고 돌아와요!"

    리아의 응원을 들으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답한 나는 고무보트에 달려 있는 두 개의 노를 잡고 힘껏 저었다. 굳이 인력을 쓰는 이유가 당연히 있었다. 만약 모터를 달고 편히 달리며 전투가 끝났을 때 큰 사고가 일어날 지도 몰랐다. 권역에 들어가면 그 순간 바로 전투가 벌어지니까.

    끼익, 끼익.

    노를 몇 번 저었을까.

    나는 금세 트루드의 권역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앞이 암전되며 새로운 공간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갔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앞에는 초원이 펼쳐졌다.

    광활한 초원의 중심에는 갑주를 차려 입은 여전사가 서 있었다.

    "도끼와 방패라……."

    섬뜩한 무기를 들고 있는 트루드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안이 바짝 타는 것 같았다. 현대인으로 살다보니 자연스레 저런 흉기들을 볼 일이 없었다. 유난히 서슬 퍼런 도끼날이 내 눈을 어지럽혔다.

    다행히 트루드는 몽마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트루드가 성큼성큼 걸어 내게 다가오며 손에서 힘을 풀었다.

    툭, 투둑.

    도끼와 방패를 내려놓은 트루드는 어느새 복장까지 변해 있었다. 단단한 갑주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대신 새하얀 살결이 그대로 비치는 얇은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밝은 금발을 휘날리며 걸어온 트루드가 내 앞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초원을 담은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크네.

    트루드를 마주하며 느낀 첫 감정은 크다는 것이었다. 비단 나와 비슷한 키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가슴도, 엉덩이도 컸다. 심지어 눈과 코도 크기는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쫙 벌어진 어깨는 진짜 깡패가 따로 없었다.

    내가 트루드를 훑어보는 사이 트루드도 날 훑어보았다.

    그렇게 서로를 탐색하기를 찰나.

    트루드가 유독 새빨간 입술을 움직였다.

    "쓸 만하구나."

    "……하?"

    기가 찬 헛웃음이 튀어 나왔다. 당연했다. 나도 자존심이 있었다.

    결코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한 마디에 내 입꼬리가 한쪽으로 자라났다.

    내가 조소 짓는 걸 빤히 바라보던 트루드도 나와 똑같이 한쪽 입꼬리를 잡아끌었다. 마치 재미있다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내 기분은 더욱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처음부터 어려운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아, 이거 진짜."

    열 받네.

    말 그대로 열이 좀 받았다. 그 덕분인지 더 이상 긴장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씩 흥분됐다.

    나는 슬쩍 원기 충만한 전기톱을 보고는 다시 트루드의 얼굴을 보며 살짝 턱을 치켜세웠다.

    "시작 안 하나?"

    "해야지. 건투를 빌지."

    "그래. 빌게 해줄게."

    개처럼 말이야.

    내가 뒷말을 삼켰을 때였다.

    트루드가 빛살처럼 빠른 속도로 손을 휘둘렀다. 덕분에 어어 하는 사이 내 몸이 바닥에 닿았다.

    아, 기승위.

    순식간에 날 바닥에 눕히고 내 위로 올라타는 트루드를 보며 뒤늦게 아마조네스가 얻은 정보가 떠올랐다.

    체위가 고정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진짜 못 바꾸나?

    거기에 김아연이 물어 왔던 정보까지 더해지니 살짝 긴장이 되기는 했다.

    그때 내 긴장을 사르륵 녹여주는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들렸다.

    "아빠? 왜 누워있어?"

    미야프였다.

    나는 처음으로 미야프를 사냥에 대동했다. 이 녀석의 기술 주머니를 탈탈 털지 않으면 아무래도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린 애를 데리고 온 게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몽마다, 저건 몽마다. 몽마다. 식충이……. 몽마다.

    스스로 되뇌이며 마음을 다잡은 나는 미야프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트루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대의 종속인가?"

    뭐라도 대답하기 애매했다. 그냥 종속이라고 하자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렇다고 내 딸이라고 하자니 그것도 마음에 걸렸다.

    결국 트루드의 물음을 무시하고 그 대신 미야프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알지?"

    "응. 근데 아빠. 나 배고파……. 배고파요. 닭 주세요. 밥 주세요. 맘마 주세요."

    "이기면 오늘. 아니, 내일까지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줄게. 놀든 먹든 맘대로 해도 돼."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어. 진짜."

    "으히히! 으히으힛!"

    미야프가 약간의 사태 파악을 못한 채 혼자 덩실덩실 뛰며 좋아했다.

    그때 분위기를 짓밟는 서늘한 목소리가 내 귀를 파고들었다.

    "지루하군. 시작하지."

    왠지 토라진 느낌을 주는 트루드의 목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내 전기톱이 그녀의 속살에 파묻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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