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41화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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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닷새.

    세 여왕과 함께 등장했던 혼란이 걷힐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처음 꽤 많은 피해자. 아니, 패배자를 양산했던 여왕들은 이내 저마다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이 잡은 자리를 중심으로 반경 500여 미터 정도가 여왕의 권역으로 변했다. 약 3킬로미터의 둘레의 울타리가 그렇게 도심과 산, 항구에 만들어졌다.

    이런 여왕들의 행보에 사람들은 우려를 나타냈다. 그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꽤 논리적이고 계산적이었다. 한 사람이 50센티미터를 차지한다고 칠 때 계산을 해보면 여왕들은 동시에 3천명의 참가자를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처음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합당한 생각이었다. 여왕들의 권역에 진입하는 순간 결투를 시작하니, 권역의 둘레를 가지고 계산하는 건 합리적이라 할 수 있었다.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이 가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 사람들은 여왕 사냥을 포기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는 아니지."

    나뿐만 아니라 랭커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왕족 사냥이 가져다 줄 보상을 욕심냈다. 분명 위험한 일이었지만,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성장하기 어렵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

    거기에 NPO BOSS에서 아마조네스에게 넘겨받은 세 여왕의 정보를 공개하며 랭커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한국, 덴마크, 노르웨이.

    이 세 나라에 수많은 랭커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거실에 홀로 앉아 실시간으로 쏟아지는 뉴스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에효. 그래도 우리나라에 나타난 건 내가 잡으면 좋겠는데. 영 상성이 아니라 좀 그러네."

    사실 별 거 아닌 이유였다. 최소한 구미호는 내가 잡고 싶었다. 딱히 나라의 자존심도 아니었고, 내 자존심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저 내가 사는 나라에 나타난 건 왠지 내 것 같다는 싱거운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조금은 치기어린 생각이었지만,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나는 프린터로 출력해 놓은 여왕 여우와 여왕 인어의 정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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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 여우 여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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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204,500

    + 정력 : 7,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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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1,025

    + 마법력 :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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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675

    + 항마력 :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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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472

    + 회피율 : 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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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34

    + 치명 증폭 : 300

    + 치명 저항 :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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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위 : 후배

    + 종족 : 악마

    + 속성 : 암

    + 성향 : 중립

    + 계급 :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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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검사.

    흔히 구미호라 칭하는 여름달은 전천후였다. 약점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높은 치명 증폭과 회피율은 보는 순간 고개가 저어질 정도로 암담했다. 심지어 활력도 높았다. 진짜 답이 없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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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왕 인어 아리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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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161,100

    + 정력 : 9,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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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165

    + 마법력 :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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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310

    + 항마력 :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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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402

    + 회피율 : 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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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27

    + 치명 증폭 : 100

    + 치명 저항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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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체위 : 측면

    + 종족 : 인간

    + 속성 : 수

    + 성향 : 피학

    + 계급 :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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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마 아리엘은 양반이었다. 세 여왕 중 활력이 가장 낮았고, 방어력은 트루드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물론 마법사 타입이다 보니 지력 관련 수치가 어마 무시했지만.

    언뜻 보면 아리엘이 가장 약해 보일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는 아리엘이 가장 까다로웠다.

    "상성이 너무 안 좋네. 구미호도 구미호지만, 인어공주도 무슨……."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여름달이나 아리엘이나 모두 마법력이 높았다. 게다가 명중과 회피도 트루드의 두 배정도였다. 근력 기반인 내게 이보다 까다로운 몽마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며 종이를 맞은 편 탁자 위로 던졌다.

    "트루드를 잡으면 좀 가능성이 보이려나."

    지금으로써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3차 전직뿐이었다. 물론 반반이었다. 전직을 한다고 해도 혼자로 이 지랄 같은 몽마를 잡는 건 어려워 보였다.

    나름 이런 날을 대비하여 리아를 키웠지만,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아직 리아는 제대로 크지도 못한 상태였고, 지적능력이 충분한 몽마는 약한 상대를 먼저 노리는 경향이 있었다. 당연히 나보다도 레벨이 높을 몽마이니 한 번이라도 공격을 버티지 못하면 파티를 하나 마나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보스의 참가자가 된 이후로 이렇게 막막했던 적이 있나 싶었다. 도저히 내 머리로는 어떻게 할 수 없어 보였다. 아니, 다른 랭커들과 함께 달려들어도 여왕 사냥이 가능할 지 의문이었다.

    그래도 힘들겠지.

    정말 유기적으로 수천의 참가자가 동시에 싸운다면 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문제는 다양한 참가자들을 어우르고 결집할 구심점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랭커들이 누구의 지시를 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혹여나 지휘가 된다고 해도. 지휘 방법이 없잖아?"

    가장 문제는 이것이었다.

    전투 중 의사 전달을 할 방법이 없었다. 파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각자의 공간에서 여왕과 싸워야했다. 당연히 의사소통은 단절됐다. 그나마 일 대 다의 구도가 가능해서 희망은 있었지만.

    언제 가져왔는지 홀짝홀짝 마시던 캔 맥주가 동이 났다. 살짝 취기가 오르자, 꾹꾹 누르고 있던 화도 같이 올랐다. 역시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인 것 같았다.

    머리가 지끈거린 나는 어떻게든 이 갑갑한 기분을 풀고 싶었다.

    "하아……. 진짜 시원하게 한 번 싸봤으면. 그럼 개운할 것 같은데."

    딱히 취미랄 게 없다보니 기분을 풀 방법이 없었다.

    근데 기껏 고자에서 벗어났더니. 이젠 지루인건가?

    진짜 저주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사정을 못해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불능이었을 때보다 먼저 사정을 한 경험이 있었다. 비록 한 번은 기억이 나지 않았고, 다른 한 번은 기억을 하기 싫었지만.

    그때 문득 한 가지 스트레스 해소법이 떠올랐다.

    바로 뽑기였다.

    "도박에는 취미가 없지만. 어차피 동화도 많고. 전혼은……. 멀었으니까."

    왜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냥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게 갑자기 하고 싶었다. 아니, 그냥 뭐든 하고 싶었다는 게 맞았다.

    미야프가 진화해서 더 이상 동화의 압박을 받지 않았다. 물론 전혼 사냥을 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었다. 비록 다음 단계를 위해서는 4천이 넘는 성장치가 더 필요했지만, 300개면 얼추 가능하지 싶었다.

    그까짓 10퍼?

    다만 효율이 걸렸다. 300개의 동화를 사용해서 치명 증폭 10%를 더 올리는 게 과연 효율적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올린 성장치만큼 더 올려야 겨우 10%가 늘어나는 건 충분히 의욕을 꺾을 만 했다.

    그러니 남은 동화 사용법은 뽑기 밖에 없었다.

    "아주 거덜내주마."

    두 눈을 희번덕이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 오랜만에 보는 문방구의 모습이 나타났다.

    뚜벅뚜벅 걸어 유리로 된 진열장 앞에 서기 무섭게 오랜만에 보는 마하스가 박수를 쳐가며 날 맞이했다.

    "어머! 어머! 어머머!"

    "뽑기판."

    "정말 너무 오랜만에 오셨네요? 좀 자주 오시지. 그래도 단골인데, 너무 뜸한 거 아니에요?"

    단골 같은 소리 하네.

    나는 처음 뽑기 기능이 추가 됐을 때 한 번 해보고 그 뒤로 시선을 준 적이 없었다.

    "됐고. 뽑기판."

    "치. 쌀쌀맞긴. 여깄어요. 그 전에 알려드릴 게 있어요. 하도 손님이 안와서 망할 거 같아서 가격을……엉?"

    이미 백과사전을 통해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하는 마하스의 말에 귀를 기울일 내가 아니었다.

    나는 단숨에 뽑기를 시작했고, 마하스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것도 잠시 마하스가 탄성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아, 그분께서 이래서 심심할 거라고 하셨구나. 그래도 들어요. 심심하니까. 어쨌든 가격은 금화 1개에서 동화 1개로 낮췄어요. 물론 환전도 가능하답니다! 아차, 근데 이걸 알아둬야 해요. 가격을 낮춘 만큼 확률도 낮아졌다는 걸!"

    진짜 말 많네.

    나는 마하스가 뭐라 그러든 무시한 채 무자비하게 뽑기를 뽑았다. 뽑기를 한 개 뽑는 순간 동화 한 개가 자동으로 사라지니 편했다. 물론 내 무시무시한 속도에 마하스가 깜짝 놀랐지만.

    무슨 뽑기와 원수라도 진 놈처럼 무자비하게 뽑기를 이어가니, 마하스가 얼떨떨한 얼굴로 변했다.

    "와. 와! 진짜 오랜만에 호구……가 아니라 손님이 왔네요. 그래요! 뽑아요! 개싸가지 머리털 뽑듯이!"

    마하스의 요상한 응원을 한 귀로 흘리며 뽑기를 계속 뽑다보니 어느덧 100개를 훌쩍 넘고 150개도 넘어 버렸다. 절반의 총알 썼지만,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다.

    물약, 잡템, 물약, 꽝.

    마하스가 호구라 한 게 괜한 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물리기도 싫었다. 어차피 경험치는 많았고, 동화가 필요하면 또 사면 됐다.

    게다가 은근히 스트레스가 풀린단 말이지.

    종이 뽑기를 한 장씩 뽑을 때마다 왠지 가슴이 시원해졌다. 묘한 중독성이 있었지만,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 이정도 투자는 괜찮지 싶었다.

    망하기야 하겠어?

    가벼운 마음으로 200개를 돌파했다.

    더 이상 마음이 가볍지 않았다.

    재수 없으면 망할지도…….

    그나마 다행이라면 150개가 넘어가는 순간부터 꽝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득템도 없었다. 그저 물약이 쌓여가는 속도가 빨라졌을 뿐.

    그런데 물약은 10개밖에 못 드는데?

    "걱정하지 마시란 말씀! 자동으로 창고로 배달해주는 친절한 서비스! 마하스 뽑기점!"

    약간 모자란 것 같은 마하스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잽싸게 답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뽑기를 이어갔다. 처음 300개를 모조리 쓸 생각을 했으니 그대로 밀고나갈 작정이었다.

    얼추 250개를 넘게 뽑았을 때였다.

    빵빠레가 내 머릿속에서 울렸다.

    "어머! 3등이에요! 3등! 축하축하요!"

    ['낮과 밤의 악몽 1개'를 획득합니다.]

    재료 아이템이었다.

    피식 웃은 나는 남은 50여개의 동화를 쓰기 위해 다시 뽑기 시작했다.

    한 개, 두 개, 세 개.

    그리고 아홉 개.

    "어머! 어머! 2등이에요! 2등!"

    ['유혹의 황금 향로 1개'를 획득합니다.]

    이건 또 뭐지?

    아이템 이름을 읽는 순간 소비템이라는 걸 알게 된 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뽑고 또 뽑자, 어느덧 처음 생각했던 300개에 다가갔다.

    이윽고 마지막 300번 째 뽑기를 뽑는 순간이었다.

    "세상에! 운수대통! 특등! 특등이에요!"

    ['이오비의 수정 목걸이 1개'를 획득합니다.]

    마하스가 들든 목소리로 축하해주었지만,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한 번 만나봐야겠네.

    더 이상 찌질하게 굴지 않기로 결심한 나는 마하스의 축하 인사와 단골에게 주는 서비스를 받으며 걸음을 돌렸다.

    내가 막 문구점을 나서려고 할 때였다.

    지금껏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마하스의 진중한 목소리가 들렸다.

    "존재하는 것에는 모두 이유가 있어요. 그걸 잊지 말아요, 단골손님."

    잠시 걸음을 멈췄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구점을 나섰다.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더 이상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

    도박은 대박이었다.

    참 역설적인 말이지만 틀림없었다. 나는 고작 300개의 동화로 꽤 쓸 만한 물건을 얻었다. 게다가 내가 얻은 건 아이템만이 아니었다.

    가장 큰 소득은 따로 있었다.

    문방구를 나오며 눈을 뜬 나는 가장 큰 소득을 보기 전에 자잘한 뽑기 보상을 확인해 보았다. 술 취한 채 나 원장을 보러 갈 순 없었다. 흑역사는 지금도 충분했다.

    술도 깰 겸 기분도 전환할 겸 뽑기로 받은 상품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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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스의 선물상자]

    + 자주 찾아주세요! 손님!

    + 마하스도 모르는 게 들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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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한데,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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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과 밤의 악몽]

    + 절망의 나뭇가지의 파편.

    + 특수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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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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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혹의 황금 향로]

    + 왕족 몽마 소환.

    + 사용 후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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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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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오비의 수정 목걸이]

    + 후작 영애 이오비의 15번째 생일 선물.

    + 모든 피해 2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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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헐! 대박!

    우울함? 답답함? 먹먹함?

    그런 감정 따위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역시 난 속물이었다.

    "으흐흐흐흐……."

    조금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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