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ither Twelve -->
***
비가 그쳤다.
질척거렸던 대지는 다시 말랐고, 더욱 단단해진 대지 위로 손님이 왔다.
사라졌던 허수마비였다.
전 세계적으로 허수마비가 사라지며 생겼던 혼란과 원망이 나흘 만에 말끔히 사라졌다. 덕분에 나름 마음고생을 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다시 나타난 허수마비의 숫자가 한층 더 늘어난 탓이었다.
며칠 원성을 샀지만 더 나아진 상황에 내게 쏟아지던 원망이 그렇게 끊겼다.
나도 신경을 쓰기는 했나 보네.
귀국도 미룬 채 암스테르담에 숙소를 마련하고 몽마를 사냥하던 나는 왠지 걸음이 더 가벼워진 것 같았다. 핸들을 잡고 있던 리아도 내 심경의 변화를 느꼈는지 조심스러운 입장을 철회하고 가볍게 말을 읊었을 정도였다.
"다행이네요. 조금이라도 더 늦었으면 폭동이 일어날 지도 몰랐는데."
"에이, 폭동까지 일어났을라고. 그래도 다행인 건 맞지. 덕분에 너희 방송국이 역풍을 맞을 뻔 했잖아?"
"정말 큰일 나는 줄 알았어요. 서버가 몇 번이나 터졌는지. 난리도 아니었으니까요. 근데, 그것보다 비기 만들기는 잘돼가요?"
"……아니."
내 얼굴에 다시 먹구름이 어렸다.
그도 그럴 것이 고난과 도전을 완료하고 받은 고급 비급서는 단순한 스킬북이 아니었다. 이 비급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내가 스스로 기술을 창제해야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지난 며칠 동안 끙끙 앓은 걸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쉬며 조수석에 몸을 기대자 괜히 말을 꺼낸 리아가 미안함에 말을 아꼈다.
조용해진 차 안에서 나는 담담히 지금 상태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능력의 책으로 얻은 능력치 10개는 그냥 체력에 때려 박았으니까. 그건 됐고. 그나저나 이 빌어먹을 비급서는 어떡하지?
고난과 노력.
짤막한 고유 비급서에 적힌 설명은 이게 전부였다. 히든 퀘스트의 이름과 같은 설명에 한동안 가늠을 하지 못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어느 정도 감을 잡기는 했다. 아마 내가 가장 바라는 기술을 떠올리라는 말 같았다.
그래서 어쩌라고.
물론 나름 열심히 머릿속으로 내가 바라는 기술을 그려 보았다. 헛수고였다. 정말 화려한 기술이나, 아주 단순한 기술이나. 수많은 기술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아도 고유 비급서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내 상상력을 바닥까지 끄집어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성과가 없자 슬슬 맥이 풀리며 반쯤 포기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도대체 어쩌라는 건지.
가슴은 답답했고, 머리는 복잡했다.
온몸이 꼬인 실타래처럼 변할 무렵.
오늘은 사냥감이 있는 덴하그에 도착했다.
암스테르담에서 남서쪽으로 50여 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이 행정의 중심지는 헤이그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더 익숙한 행정의 도시였다. 네덜란드의 백작이었던 윌리엄 2세가 사냥터를 궁전으로 확장하기로 결정하며 만들어진 이 도시는 말 그대로 백작의 사냥터라는 뜻이었다.
지금은 현대적인 고층 빌딩으로 가득했지만, 도시 곳곳에 역사가 깃들어 있었다. 단적인 예로 기사의 전당이라는 뜻의 리데르잘이 현재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을 정도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보니 헤이그에 나타나는 귀족 몽마는 말 그대로 귀족이었다.
내가 오늘 사냥할 귀족 몽마는 네덜란드의 명소를 실물의 25분의 1로 축소하여 재현한 헤이그 최대 관광 명소인 마두로담에 있었다. 정확히는 마두로담의 입구였다. 마치 파도로 지붕을 만든 것 같은 유리 건물과 초록 풀로 뒤덮인 사각 물 위에 놓인 등대가 인상적이었다.
아직 소인국에 들어가기 직전이다 보니 그리 어색하지 않은 마두로담 입구 너른 공터에 하늘하늘한 드레스를 입은 고풍스러운 여인이 배회하고 있었다.
[배회하는 백작부인]
이미 몇몇 희생자를 만든 덕에 알려진 이 귀족 몽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마두로담의 매출을 짓밟고 있었다. 아무래도 공격성이 강한 선공형 몽마다보니 벌어진 일이었다.
나와 리아는 나란히 차에서 내려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몽마를 보며 서로 소감을 흘렸다.
"아쉽네."
"무슨 색기가……. 저건 백작부인이 아니라, 그냥 매춘부인데요?"
하여튼 미야프가 옆에 있다고 말 가려서 하긴.
창녀라는 단어 대신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리아의 모습에 헛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실제로 공격성이 강한 몽마는 정욕의 화신이라 할 수 있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주억거릴 때 리아가 날 바라보며 물었다.
"근데 뭐가 아쉬워요? 하급이라지만, 그래도 랭커도 실패했을 정도로 강한 몹인데."
"아깝지. 무명이잖아. 유명이어야 나오는 템이 좋은데."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욕심 많은 내 모습에 리아가 고소를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따로 고유한 이름이 있는 몽마가 더 질 좋은 아이템을 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게다가 일명 네이밍 몬스터라 부르는 녀석들은 은근히 주머니가 두둑한 편이었다.
감상은 감상이었다.
나는 슬쩍 리아와 미야프를 보곤 눈짓으로 말했다.
사고치지 말고 자리를 지키라고.
내 눈빛을 알아들었는지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곤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세요. 전 미야프랑 어디 좀 다녀올게요."
"어딜?"
"여기가 원래 애들 놀이터잖아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건 다 있어요. 장난감이든, 먹을 거든."
그래. 리얼 공주님 만들기 빠순이지, 넌.
휙휙 성의 없이 손을 저은 나는 뚜벅뚜벅 걸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몽마를 향해 다가갔다. 간간히 주변을 지나가던 사람들이 내게 호기심을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름 작은 가면은 물론이고 스카프까지 풀 세팅했으니까.
몽마의 인식 범위 안에 들어서기 무섭게 몽마가 뜨거운 눈빛을 뿌리며 내게 달려들었다. 종종 걸음으로 달리는 것 치곤 정말 빠른 속도였다.
나는 내게 달려오는 몽마를 피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내 손과 몽마의 손이 맞닿으며 결투가 시작됐다.
바로 내 꿈속 침실에서.
결과는 뭐…….
[맹약의 조건을 모두 만족합니다.]
['배회하는 백작부인'이 맹약을 거절합니다.]
['배회하는 백작부인'과 맹약에 실패합니다.]
예상과 달랐다.
미야프의 친밀도가 충성이 됨에 따라 동화를 너무 아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한동안 잊고 지냈던 몽마 길들이기였다.
딱히 소지량을 늘리는 기술을 배운 게 아니기에 내가 가질 수 있는 맹약의 반지는 최대 10개였다. 평범한 맹약 조건을 만족하고 10개의 맹약의 반지를 사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거 느낌이 좋지 않은데, 히발.
오랜만에 히말라야를 찾을 정도로 불안감이 내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이런 촉은 틀리지 않았다.
그 뒤로 헤이그에 있는 배회하는 백작부인들을 찾아갔다. 물론 정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50번의 구애를 한 결과.
['배회하는 백작부인'과 맹약에 성공합니다.]
['배회하는 백작부인의 가락지 1개'를 획득합니다.]
"휴……. 진짜 이건 할 짓이 아니야."
50개의 맹약의 반지를 탈탈 털리고 나서야 한 마리를 테이밍 할 수 있었다.
역시 물량 앞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리아가 자꾸 날 힐끔거렸다.
이유야 간단했다. 그녀는 내가 오늘 획득한 배회하는 백작부인의 상징과 가락지에 영혼을 뺏긴 상태였다. 미야프가 배고프다고 징징 거려도 눈길한 번 안 줄 정도로 그녀는 크게 욕심을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대놓고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다.
소심하긴.
나는 의외로 소심한 리아의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며 오늘 얻은 성과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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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회하는 백작부인의 상징]
+ 문란한 귀족의 노련함.
+ 조이기 공격 피해 25% 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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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회하는 백작부인의 가락지]
+ 치명 공격 피해 10% 증가.
+ '치마 휘두르기' 사용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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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회하는 백작부인의 상징은 내가 지니고 있는 발정난 파수꾼과 거의 비슷했다. 대충 여자 버전으로 바꾼 것 같았다. 다만 물리 공격에만 효과가 있는 파수꾼과 달리 백작부인은 물리와 마법 공격 모두 적용되는 게 달랐다. 굳이 내게 필요 없는 아이템임에도 내가 아쉬워했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이었다.
종속도 마찬가지였다. 상징만큼은 아니었지만, 치명 공격 피해를 늘려주는 건 확실히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게다가 3턴 동안 치명 공격에 면역되는 기술을 내킬 때 사용할 수 있는 건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물론 하루에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흠……. 대박이긴 한데. 팔 순 없겠네."
"어머? 왜요? 왜 못 파는데요?"
내 혼잣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리아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녀의 뻔히 보이는 행동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얌체보다는 좀 순진한 아이 같았다.
나는 부드럽게 리아를 한 번 바라보곤 다시 정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상징은 상관없는데. 종속은 아니지. 이거 팔았다가 괜히 내 발등을 찍으면 어떡하라고? 괜히 욕심 부리다 피보느니. 그냥 묵혀 두는 게 나아."
치명 공격력을 극대화한 내게 치명 면역을 가져오는 치마 휘두르기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기술이었다. 만약 내 적이 이 기술을 사용한다면 치가 떨릴 것 같았다. 아니, 치를 떨든 말든 승패를 좌우할 수 있었다.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아니 됐다.
리아도 내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도 싫겠어요. 내가 판 걸로 날 찌르면."
"근데 너도 슬슬 만인전에 소속될 때가 되지 않았나? 요즘 꽤 열심히 사냥하는 것 같던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고영 씨를 따라 하기는 했는데. 좀 차이가 커요. 그나마 전혼이 있어서 다행이지. 아참. 근데 고영 씨는 도대체 초반에 어떻게 키운 거예요? 전 매 전투가 살얼음 판 같은데. 진짜 가끔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때가 있다니까요?"
"뭐 어떻게 키워. 그냥 들이 댄 거지. 아무튼 업적을 노려야 될 거야. 근데 이건 조언을 해주기도 뭐하네. 남자랑 여자랑 공통되는 업적이 거의 없으니까."
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한 말처럼 남자와 여자는 다른 점이 많았다. 조금 과장해서 남녀 사이에 공통점이라고는 주요 능력이 전부라고 할 정도였다.
보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금세 호텔 근처에 다다랐다. 호텔 입구까지 한 블록을 남겨 놓았을 때였다. 리아가 기어코 자기 욕심을 버리고 입을 열었다.
"아, 고영 씨. 욜란테가 연락 좀 달라는데요?"
"욜란테가?"
"네. 이번 경매 때 올린 거 없나 묻는 눈치였어요."
"PD는 뭐하고? MC가 섭외를 하는데?"
좀 어이가 없어 날카로운 목소리로 반문하자, 리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을 보냈다.
"고영 씨. 메인 PD 이름은 알아요?"
"……아니. 들은 건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나네."
"이름도 모르는데, 연락처를 알겠어요? 나한테 연락하거나 욜란테를 통하거나. 둘 중 하나잖아요."
"그랬나?"
갑자기 목이 간지러웠다. 그러고 보니 나는 리아를 통해 어썸 바나나가 움직일 길을 만들었다. 이건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너무 귀찮은데. 그리고 아직 모르는 사람이랑 대화하는 건 좀 어색하고.
어썸 바나나로서 대중 앞에 나설 때는 그나마 괜찮았다. 다만, 박고영으로서 누군가 앞에 서는 건 여전히 쉽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 원장과 한동안 서먹서먹하다보니 자연스레 내 정신이 퇴보한 것 같기도 했다.
대화를 해봐야하나…….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나 원장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이번에 귀국하면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껄끄럽다고 무조건 피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내가 잠시 말이 없이 리아가 괜히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리아를 향해 조금은 힘이 빠진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잘 됐네. 근데 매달 할 것처럼 하더니 오랜만에 하나 봐?"
"……벌써 4회차거든요. 그동안 폭망해서 그렇지."
"그러냐?"
다시 목이 따끔했다.
그렇다고 민망하거나 부끄럽지 않았다. 원래 신경 쓸 게 많은 사람은 부족한 게 많은 사람이니까. 나야 남들이 차려준 밥상을 날름 먹으면 충분했다.
"아무튼 종속은 패스하고. 상징 몇 개 올린다고 해. 마침 요 며칠 운이 좋았으니까. 아, 이건 패스하고."
"어떤 거요? 설마 백작부인이요?"
"어. 원래 상징은 비효율적인 게 좋아. 좀 아이러니 하지만."
"그건 그렇지만……. 알겠어요. 그렇게 전할게요."
담담히 대답하는 것 같았지만 리아의 얼굴은 확실히 들떠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를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순순히 줄 순 없지.
음흉한 속내를 숨기며 나는 괜히 화제를 돌리며 리아를 실망시켰다.
"근데 그거 효과는 어때?"
"네? 뭐……아. 이거요?"
내 물음에 순간 이해를 하지 못했던 리아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요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풍만해진 가슴을 양손으로 받치며 날 바라보았다. 지난 세 달간 그녀의 가슴은 확실히 대격변을 겪었다.
나는 새하얀 셔츠로 힘겹게 감싸고 있는 리아의 가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커진 거 아냐?"
"아니거든요? 브라를 해서 그렇지, 그렇게 안 크거든요?"
"사이즈가 어떻게 되는데?"
"음……. 한국 사이즈로 하면."
"하면?"
"C컵?"
미친.
순간 무슨 빈유에 한 맺힌 여자인 줄 알았다. 아니. 한 맺힌 게 맞나? 아무튼.
나는 어느새 호텔 입구에 도착했음에도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못 한 채 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충분해. 아무튼 경매에 붙여도 되겠다."
"안 돼요!"
"충분하다니까. 그만하면 됐어. 너무 크면 남자들이 징그러워하는 거 몰라? 적당한 게 좋아. 적당한 게."
"알고 싶지 않거든요?"
단호한 리아의 얼굴에 나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상징과 종속. 아니면 속옷. 둘 다 가질 순 없단다."
짐짓 연극 톤으로 말하는 내 모습에 리아가 조금도 웃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벽돌처럼 딱딱했다. 고뇌에 휩싸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애꿎은 자기 입술을 깨무는 것밖에 없었다.
무슨 악마의 시련을 겪는 사람 같네.
리아를 고뇌 속으로 밀어 넣은 나는 무심히 차를 내려 호텔로 들어갔다.
여전히 리아는 꼼짝을 하지 못했다.
내게도. 스스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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