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27화 (127/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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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즈의 폭탄선언에 모두의 시선이 내 몸에 꽂혔다.

    내가 만만한가?

    물론 리즈의 눈빛에서 날 경시하는 눈빛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날 잔뜩 경계하고 있었다.

    순수한 호승심.

    찰나 간 눈빛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느낄 정도였다.

    그 정도로 리즈의 눈빛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두근거리는 심장 고둥을 즐길 때였다.

    "자존심이라……. 참 유치하지만, 참 중요한 것이지."

    "그렇죠."

    "특히 남자라면. 사내라면 더욱 버리지 못하는 것이지."

    "그렇죠."

    "자네의 자존심은 얼마나 중요한가?"

    라이언의 마지막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흥분과 흥미가 공존하는 시선들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담담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VIP석으로 올라온 욜란테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 밀었다.

    "어썸 바나나 선수! 리즈 선수의 요청을 받아들이실 건가요?"

    욜란테는 가타부타 첨언하지 않았다. 이미 분위기는 더 없이 뜨거웠다. 물론 살짝 선수라는 호칭을 쓰며 새로운 문화를 이끌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걸 잊지도 않았다.

    무거운 정적이 잠시 흐르며 분위기가 흥분의 정상에 올랐다.

    사람들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나서야 내 입에서 딱딱 끊어진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깨끗이 몸을 씻는다면. 받아들이죠. 그 도전."

    내 말이 끝나는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바닥이 울렸다.

    나는 그저 싸움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유치한 자존심 싸움이라 하더라도.

    ***

    "담담 PD만 노났네요."

    폭탄을 대포로 받아치고 대기실로 들어서기 무섭게 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결투 경기를 준비할 게 없는 나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앉은 옆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별 수 없지. 너네 부장한테 전해. 뒤늦은 사이닝 보너스라고. 그리고 서 있지 말고 여기 와서 앉아."

    리아는 이 와중에도 농담을 던지는 내 행동에 실소를 터트리더니 내 말대로 쪼르르 걸어와 방금까지 내가 두드린 자리에 앉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말은 참 잘 듣네.

    언제나 내 의견을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주는 리아의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야프가 네가 하는 걸 반만. 아니, 반의반만이라도 닮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미야프 착해요."

    "거짓말하네."

    "진짜에요. 미야프 얼마나 착한데요. 그 정도로 귀여우면 그냥 착한 거예요."

    "그래. 착하다. 착해. 그렇게 착해서 주인 지갑을 탈탈 털어가 놓고 아직도 친밀도가 그 모양이지. 아니, 솔직히 관심이라면 좀 살가운 면이 있어야하는 거 아냐?"

    "새침해서 그래요. 아무튼 미야프 착해요. 얼마나 잘 먹는데요!"

    말을 말자.

    미야프 빠순이와 미야프 이야기를 하는 것부터가 잘못됐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내 모습에 리아가 다시 억울한 얼굴로 미야프가 착하다고 소리쳤다. 무슨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보다 더했다. 이러다 미야프가 종교를 만들겠다고 미약미약 거리면 가장 먼저 신도가 될 것 같았다.

    자고로 광신도는 그냥 무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여전히 미야프의 장점을 억지로 쥐어짜는 리아가 더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전에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거 일단 저지르긴 했는데. 카메라 앞에서 벗어야 한다니 좀 그러네."

    "왜요? 그냥 경기잖아요?"

    "너나 그렇게 생각하지. 우리나라. 아니,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나라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할 걸? 근데 이거 모자이크는 하냐?"

    "생방송인데 모자이크를 어떻게 해요?"

    리아는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얼굴로 쌜룩거리며 내 마지막 희망을 짓밟아 버렸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나로서도 당혹스러웠다.

    "그럼 내 전기톱이 그대로 나간다고?"

    "……PD가 준 거 안 읽었죠?"

    "어. 미안."

    "에효……. 출연 계약서에도 적혀 있었잖아요? 출연자들의 국적을 고려해서 카메라 각도를 좁힌다고. 여성 참가자들의 가슴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음부나 항문은 나오지 않게 하겠다고. 그리고 고영 씨 신분을 가리기 위해 특별히 비밀 서약서까지 써 놓고선!"

    그랬나?

    솔직히 내게 계약은 지루한 보충 수업 같았다. 당연히 집중할리가 없었다. 대충 보안 각서까지 쓴 걸 알기는 했지만, 자세한 사항은 한 귀도 듣지도 않았다.

    머쓱해진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가면을 벗었다.

    "아우. 근데 이거 좀 갑갑하네. 자국 났지?"

    "네. 났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요? 그냥 참아요."

    이거 귀신이네.

    내가 슬쩍 불평을 하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리아가 낼름 선수를 쳐 버렸다.

    결국 할 말을 잃은 나는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많이 늘었어. 아주."

    "그동안 꽤 시달렸으니까요. 하여튼 고영 씨도 아이 같은 면이 있다는 거 알아요?"

    "내가 좀 순수하지."

    "순수한 게 아닌 거 같은데……. 아무튼 왜 선선히 수락한 거예요? 굳이 도발을 받아줄 필요는 없잖아요?"

    리아가 아예 몸을 틀어 날 바라보며 물었다.

    장난기 없는 리아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뭐라 해도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날 걱정하는 건 사실이었다.

    "남자니까. 여기서 뒤로 빼면 내가 뭐가 돼? 어차피 어썸 바나나잖아? 박고영이 아니라."

    "그래도요. 음성 변조는 안하잖아요? 그러다가 정체를 들키면 어떡하려구요?"

    "그래봤자 내 아는 사람들이나 눈치 채겠지."

    차마 나와 친한 사람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자니 좀 서글펐다. 분명 예전에는 극세사 인간관계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생각이 조금씩 변하는 것 같았다.

    역시 이번에도 찰떡 같이 알아들은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고영 씨는 딱히 친한 사람이 없으니까."

    "어허? 날 뭘로 보고! 나도 친한 사람 많거든?"

    "네네. 그런 걸로 해요. 아무튼 솔직히 말해 봐요. 왜 승낙한 거예요?"

    순간 나는 멍한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이거 점쟁이야?

    진짜 리아의 눈치가 나날이 진일보하는 것 같았다. 내가 조금도 보이지 않은 속내를 어떻게 알아챘는지 궁금했을 정도였다.

    날 빤히 바라보며 어서 자백하라는 리아의 눈빛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냥 경험치를 주겠다잖아? 그런데 왜 마다해?"

    "……역시나. 리즈란 여자가 그렇게 레벨이 높아요?"

    "배팅 안 했어? 어제 날 버리고 돈 걸러 가 놓고선."

    "아, 맞다! 4위! 4위라고 했죠? 그거 진짜였어요? 전 그냥 막 내뱉는 건 줄 알았는데."

    이거 날 뭘로 봤던 거야?

    내가 대답을 대신하여 게슴츠레한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움찔하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대답을 피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모양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행동은 그 자체로 단호한 대답이었다.

    "내가 그렇게 신용 없는 남자였나?"

    "솔직히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죠. 저도 꽤 많이 속았는데."

    와. 속 좁은 여자.

    리아는 예전에 정보를 좀 늦게 준 걸 아직까지 가슴에 담아 놓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기서 괜히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알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짜 속에 있는 말을 내뱉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속이는 건가?

    사실 아직 리아에게 모든 속내를 말한 건 아니었다. 나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리즈의 결투를 승낙한 게 아니었다.

    우선 리즈의 정확한 레벨을 알고 싶었다. 그동안 전투 기록이 있다 보니 이미 경험치 테이블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승리하고 얻는 경험치의 양을 통해 리즈의 레벨을 유추하는 건 식은 죽 먹기와 다름없었다.

    다른 이유로는 나와 근접한 참가자의 실력이 궁금한 것도 있었고, 승리를 통해 마음 한 구석 남아 있는 찝찝함을 지우고도 싶었다. 게다가 혹시 운 좋게 업적이나 칭호를 얻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러 이유는 가장 큰 건 찝찝함을 지우는 거지만.

    "그냥 딴 게 아냐. 내가 장비를 판 게 잘한 결정인지. 그걸 알고 싶었어. 다행히 왕족 몽마가 있다는 걸 알게 돼서 더 좋은 장비가 나올 건 맞지만. 그래도 괜히 날 따라잡을 계기를 제공해 준 게 아닌가 싶네."

    "치. 솔직하게 말해요. 그냥 기어 오를까봐 미리 밟아 버리겠다는 거 아니에요?"

    "뭐, 아니라고는 못하겠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것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내게 보스는 새로운 희망을 준 게임이었다.

    게임.

    이 즐거운 놀이는 온전히 즐기기만 할 정도로 나는 순수하지 않았다.

    싸우고 싶었다.

    이기고 싶었다.

    그리고 최고가 되고 싶었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었을 때처럼 무시당하는 일을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유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약해지고 싶지 않으니까. 더 이상은.

    ***

    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솔직한 내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리즈는 내 조건을 따르기 위해 온몸을 구석구석 씻었다.

    꽤 긴 시간이 지났지만 스튜디오 안의 공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아니, 처음보다 더 뜨거워져 있었다. 담당 PD가 세기의 대결이라고 설레발치는 게 단순한 설레발은 아닌 것처럼.

    욜란테의 들뜬 호명을 받으며 무대 위에 오르자 여기가 끝이라 생각했던 분위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리즈까지 무대에 오르며 나와 그녀가 나란히 서자 환호와 비명이 폭포처럼 끊임없이 떨어졌다.

    귀청 떨어지겠네.

    가슴 떨릴 상황이라면 상황이었지만 나는 그냥 그랬다. 그저 풀 샷에 같이 들어오는 모습을 잡히지 않기 위해 먼저 무대로 돌아와 VIP석에 앉아 있는 리아를 슬쩍 보고는, 그녀의 옆에 앉은 라이언과 살짝 눈인사를 나누었다. 그러고 보면 저 할배도 참 주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타산지석을 몸소 실천하는 사이 욜란테의 장황한 소개가 끝나고 인터뷰가 시작됐다.

    첫 시작은 아무래도 도전자에게 먼저 돌아갔다.

    나름 파격적인 방송을 시도하는 것과 달리 욜란테의 멘트는 좀 진부했다.

    "갑작스럽게 또 한 번의 결투를 치르게 됐는데요. 리즈 선수. 정말 자신이 있나요? 방금 전 결투를 치뤄서 활력이나 체력 소비가 있을 텐데요."

    "식전주 한 잔 마셨다고 정찬을 즐기지 못할 리가 없잖아요? 물론 식전주가 영 맛이 없었지만."

    나름 재치 있는 리즈의 대꾸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졌다.

    재치가 있는 건 욜란테도 리즈 못지않았다.

    "네. 저라도 그런 식전주는 그리 마시고 싶지 않네요. 그런데 모두 궁금해 하는 걸 묻지 않을 수 없겠네요. 리즈 선수. 왜 가만히 있는 어썸 바나나 선수. 그냥 바나나 선수라 할 게요. 좀 기네요. 아무튼 바나나 선수를 자극한 이유가 뭔가요?"

    "이유라……. 간단합니다. 여기 있는 남자들 중 가장 강한 남자니까요. 그래서 싸우고 싶었어요."

    "생각보다 단순하다면 단순한 이유네요? 그럼 이제는 뭐가 하고 싶은가요?"

    바보가 아닌 이상 리즈의 속셈을 모를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욜란테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는 알면서도 모른 척 물었다. 그래야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욜란테가 바라는 대로 이내 리즈가 야릇한 쾌감이 묻은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이기고 싶습니다. 강한 남자를 깔고 앉아 울부짖게 하고 싶네요. 내게 깔려 울부짖는 남자들의 신음 소리는 그 어떤 음악보다 즐거운 음악이거든요. 적어도 내게는."

    "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저도 우리 남편을 깔고 앉아 울부짖게 하고 싶지만. 그이는 자꾸 날 엎드리게 해요. 너무하죠?"

    조금 수위가 높아진 농담을 던진 욜란테는 그 뒤로 몇 가지 질문을 날리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풀어 주었다.

    두 여자의 만담 같은 인터뷰를 지켜보던 나는 괜히 위기감이 들었다. 그만큼 그녀들의 인터뷰는 재미있었다.

    이거 나도 좀 세게 나가야겠는데?

    단순한 관심을 받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일단 뭐라고 해도 지금 나는 데뷔전을 치르는 챔피언이었다. 당연히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주인공은 한 명으로 충분하니까.

    때마침 욜란테가 리즈와 사전 인터뷰를 끝내고 내게 마이크를 돌렸다.

    "리즈 선수가 이렇게 자신만만한데. 어썸 바나나 선수는 어떤가요? 이길 자신이 있나요?"

    "없어요."

    "네? 지금 제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요? 정말 자신이 없으세요?"

    내 짤막한 대답에 욜란테 놀랐고, 리즈도 놀랐다. 심지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관객의 얼굴에 경악과 실망이 맺혔다. 소심한 내 대답에 방청객들이 실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야유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적잖이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딱히 당황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는 욜란테가 크게 당황한 듯 입을 쩍 벌린 채 금붕어를 따라하고 있었다. 리즈도 놀랐는지 토끼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다시 한 번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히자, 나는 남겨 놓았던 말을 그들에게 던졌다.

    "쌀 자신이."

    나름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위엄 돋는 남자의 일화를 따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워낙 야유가 크다보니 내 목소리가 묻혀 버렸다. 게다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방청객들은 그냥 변명을 한다고 여겼는지 더욱 큰 야유를 던졌다.

    ……어? 이게 아닌데.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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