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25화 (12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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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이 활활 타올랐다.

화마가 유럽 전역을 휩쓸었지만, 스튜디오 안은 여전히 싸늘했다. 이게 다 리즈 때문이었다. 방송이 끝나고 내일 있을 대결을 위한 인터뷰를 진행하는 그녀는 얼음 그 자체였다.

나는 인터뷰를 기다리며 텅 빈 방청석 의자에 앉아 리아와 함께 리즈의 모습을 보며 혀를 찼다.

"어우, 진짜 마녀 같네. 괜히 팔았나?"

"하여튼 고영 씨가 가는 곳에는 언제나 사건 사고가 터지네요."

"내가 뭘? 난 당하기만 했는데?"

"누가 당해요? 사람 하나 바보로 만들어 놓았으면서? 어디 가서 그런 소리하지 마요. 괜히 욕만 먹을 테니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게 지루했는지 리아가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아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내려놓고 날 바라보았다.

"고영 씨. 고영 씨가 볼 때 내일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리즈는 4. 머신은 9,826."

"네? 그게 뭐에요? 누가 이길 것 같냐니까요? 도박사들은 리즈가 질것 같은지, 그쪽에 더 배당을 줬는데."

헛소리였다. 도박사라는 놈들이 우리나라 기상청 예보관 같았다. 이건 사기꾼이 따로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리즈를 향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을 건넸다.

"전 재산을 리즈에게 걸어. 내가 말한 숫자는 저 두 사람의 순위니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리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계단을 올라가는 리아의 엉덩이를 향해 소리쳤다.

"뭐야? 어디가!"

"배팅하러요!"

"하?"

내 주위에는 제정신인 여자가 없나보다.

결국 그날 승자 예측 인터뷰를 촬영할 때까지 나는 혼자였다. 아니, 혼자는 아니었다. 한 사람이 내 곁을 졸졸 따라 다녔다.

몇 년 안에 관작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늙은 아저씨가 있었으니까.

***

방송국 직원들은 잠도 안자나 보다.

고작 하루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24시간이 조금 넘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언가를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오직 시청률에 목매는 방송국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생방송이 끝나고 한 시간이 조금 지났을 때 세기의 섹스 배틀이라는 광고가 NPO BOSS를 통해 나갔다. 이윽고 그 방송은 온라인을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심지어 한국에도 그 소식이 들어갔을 정도로 이슈는 이슈였다.

어쨌든 랭커들 간의 결투가 잡힌 건 확실히 빅 매치라 할 수 있었다.

NPO BOSS는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다른 스튜디오에 무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무대 설치를 하는 와중 유료 방청권까지 만들며 좀비처럼 일했다. 정말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었다.

특히 다음 날 아침 리즈와 머신의 대결을 PPV로 판매한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처음엔 거짓말이라 생각했을 정도였다.

벨기에와 프랑스에 나타난 귀족 몽마를 사냥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더욱 어이없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보스 챔피언쉽? 미친 거 아냐? 아예 정규 방송으로 만든다고? 섹스 배틀을 주제로?"

"……그게 이상해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는데."

"법이 문제가 아니라. 좀 그렇지 않아? 어쨌든 섹스잖아?"

"섹스 배틀이거든요? 섹스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섹스랑 섹스 배틀이랑은 전혀 다르거든요? 임신 가능성이 0%잖아요? 그건 섹스 배틀이 유일하다고요! 당연히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이건 유희죠!"

"아. 그러세요? 개방적이라 좋으시겠네요."

내가 잔뜩 꼬인 말로 대꾸했지만 리아는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진짜 성진국은 성진국이었다. 일본이 나름 성진국의 수장이라 여겼는데, 따지고 보면 유럽이 더했다. 네덜란드가 이럴 지경인데, 유럽의 변태국인 독일은 어떨지 우려될 정도였다.

하긴. 일본은 그냥 쇼킹한 거지. 아무튼.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근데 진짜 이래도 돼? 개방적인 건 좋다 이거야. 근데 섹스잖아?"

"섹스 배틀이라니까요? 최근 섹스 배틀은 가장 안전한 섹스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어요. 심지어 에이즈에도 안 걸린대요. 한 마디로 완전무결한 섹스를 할 수 있게 됐다는 말이죠. 페널티 없이 섹스를 하려면 아이템을 사야해서 문제만. 그거야 뭐, 사냥 좀 하면 해결되니까요."

"아니, 그건 그렇고. 리즈랑 머신이 하겠대? 전 세계에 생중계 되는 걸 감수하겠대? 라이브 포르노를 찍겠대?"

"라이브 섹스 배틀이라니까요?"

리아의 고집에 나는 결국 고집을 꺾었다. 확실히 유럽에서는 섹스와 섹스 배틀을 구분 짓는 경향이 강했다. 결정적으로 임신이 불가능하기에 그런 것 같았다.

고집을 꺽은 대신은 의문을 풀기 위해 리아에게 대답을 재촉했다.

"아무튼. 하겠대?"

"네. 하겠대요. 개런티도 꽤 많이 얻었을 걸요? 두 사람한테 나쁠 게 뭐가 있어요? 덕분에 돈 많이 벌고. 그걸로 더 강해질 수도 있는데. 게다가 이번 경기의 승자는 바로 섹스 스타가 될 걸요?"

"……그러냐."

살다 살다 섹스 스타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순간 내가 너무 오래 살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런 어이없는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나도 이미 수많은 여자 선수들과 섹스 배틀을 치른 나름 프로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리아의 말대로 섹스와 섹스 배틀은 다르니까. 섹스 배틀은 어느새 게임에 더 가까워져 있었다.

"그래. 게임이지. 보스를 게임으로 인식하면 좋겠네."

"방금까지 그래놓고 이제 와서 생각이 바뀐 거예요?"

"그냥 인정한 거야. 아무튼 게임으로 받아들이면 참 재밌겠는데? 진짜로."

"왜요?"

리아가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덤덤히 리아의 물음에 답했다.

"쏘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는 전투 민족이 있거든. 그들도 좀 인생을 즐기면서 살면 해서."

리아가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조수석을 뒤로 젖힌 채 눈을 감았다.

세상의 변화가 꽤 기대 됐다.

***

노을이 땅에 내려왔다.

다행히 방송 시간이 늦지 않은 나는 리아와 함께 스튜디오로 향했다. 이미 방청객 입장이 끝났는지 스튜디오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어차피 나야 출연자였기에 상관없었지만.

리아를 대동한 채 출연자 대기실 들어온 나는 서둘러 가면을 썼다.

내 모습에 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써야 해요? 그냥 맨 얼굴도 보기 좋은데."

"써야 돼. 한국은 어떤 의미에서 아주 보수적인 나라거든. 그리고 우리나라 스타들은 꽤 힘들게 살거든."

"그건 그렇지만. 참 이상해요. 왜 화를 안내요? 사생활을 지켜주지 않는 팬은 팬이 아닌데."

리아의 의문을 풀어 주려면 하루 종일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에 대해 설명해야했다.

"내가 유명해진 다음에 길거리를 쏘다녀도 사람들이 달라붙지 않으면. 그랬다면 벌써 얼굴을 깠겠지."

진심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내가 유명세를 타도 사람들이 귀찮게 하지 않는다면 상관없었다. 다만 그럴 가능성이 없었다. 만약 내가 유명해진다면 길거리를 돌아다닐 때마다 사람들의 관심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노출될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 자유를 팔고 구속을 당하기 싫었다.

특히 득볼 게 없는 내 상황이라면 더욱 더.

"연예인들이야 돈을 얻고 자유를 포기하기라도 하지. 나는 아무것도 없잖아? 그냥 귀찮아지고, 성가실 뿐이야. 최대한 버틸 때까지는 버텨 봐야지. 그러다가 정 안 되면."

"안 되면요?"

"법으로 으름장을 놓든지. 아니면 외국으로 날라야겠지."

내 말에 리아가 또 다시 고개를 저었다.

나와 리아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뒤늦은 저녁을 대기실에서 먹을 때였다. 메인 PD가 직접 대기실로 찾아와 곧 경기가 시작한다는 걸 알렸다. 물론 대본을 슬쩍 건네며 무대에 오르기 전에 한 번 읽어 달라는 부탁이 본래 목적이었지만.

어쨌든 PD와 같이 온 음향 기사가 내 몸에 마이크를 달았다.

밥 먹다 말고 무슨 짓인지.

PD와 음향 기사는 금방 대기실을 나갔지만, 그들과 함께 입맛도 빠져나간 것 같았다.

나와 리아는 도시락 뚜껑을 덮으며 생수로 입안을 가셨다.

내가 막 대기실의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고 할 때였다.

뒷정리를 하던 리아가 지나가듯 말했다. 물론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고,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저도 VIP석에서 보고 싶은데."

"넌 안 돼."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고영 씨 때문에 저만 빠진 거잖아요? 다른 출연자들이랑 같이 온 사람은 다 VIP석에 앉아서 보는데!"

"그게 아냐. 넌 Very Important Penis가 아니잖아?"

아…….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아재 개그에 리아가 화들짝 놀라며 물러섰다. 그녀는 꼭 내가 전염병 보균자라도 되는 듯 반응했다.

"……저리가요. 떨어져! 가까이 오지 마!"

아재 개그가 무슨 탄저균도 아니고!

좀 억울했지만, 리아는 단호했다.

이윽고 내가 실망한 얼굴로 대기실을 빠져나갈 때였다.

"그래도 전 Very Important Pussy쯤은 되지 않아요? 악! 안 돼! 옮았어! 옮았다고!"

"……저리가."

의외로 전염성이 있을지도?

***

세트장에 들어선 나는 꽤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거 그때 별장이랑 비슷한데?

단순한 느낌이 아니었다. 실제로 방송국에서 꾸민 무대 세트는 제주도 별장과 비슷했다. 가운데 킹 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고, 침대를 기준으로 좌우에는 계단식으로 자리가 만들어져 있었다.

저게 VIP석인가?

어쨌든 전체적으로 무대가 좀 낮은 편이었다. 권투 시합이 아니다보니 원활한 관전을 위해 관객석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조명이 조금 어두운 편이라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봤자 아주 밝지 않은 것뿐이지만.

짧은 감상을 끝낸 나는 세트장의 한쪽에 마련된 내 자리로 향했다. 리아의 말대로 침대와 가장 가까운 관객석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딱히 모르는 사람들과 인사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고개를 돌려 방청객을 바라보았다. 금방 리아를 찾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름 앞쪽에 앉아 있었기에 찾기 어렵지 않았다.

리아도 날 보고 있었는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딱 1초 동안.

여전히 서운함이 풀리지 않았는지 리아가 그대로 고개를 홱 돌렸다.

괜히 콧잔등이 가려워진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조연출로 보이는 진행팀 남자를 불렀다.

영어를 할 줄 아는 남자에게 몇 마디 건네자, 그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빠르게 사라졌다.

잠시 후.

리아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내 옆자리에 앉았다.

"가면 조심해. 너무 흥분해서 벗겨지면. 그대로 끝나는 거야. 알겠지?"

"알았어요. 고마워요."

내 주의에도 리아는 그저 좋다고 실실 웃었다. 괜히 팔짱을 끼는 그녀의 손등을 찰싹 때리고 나서야 리아의 입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평소 모습대로 리아가 돌아왔을 때 늙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옆에 숙녀 분은 어제 함께 있던 그녀인가?"

라이언이었다.

이 아저씨도 꽤 집요하네.

"쓸데없이 남의 사생활 간섭하지 마시고. 경기나 보는 게 어때요?"

"어이쿠. 화났나? 미안하네. 늙으면 호기심만 늘어서 말이야."

"그러는 아저씨는 쭉 혼자인거 같네요?"

"늙으면 인기가 없어져서 말이야."

"그러시겠죠."

라이언이 계속 귀찮게 굴었지만 나는 그의 의도대로 끌려가지 않았다. 내가 무시하는 걸로 일관하자 라이언도 더 이상 날 귀찮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VIP들과 대화를 나누며 껄껄 웃기 시작했다.

내가 슬슬 지루함을 느낄 쯤이었다.

"이제 시작하나 봐요!"

"어, 그래."

리아가 호들갑을 떨었다.

도무지 이게 왜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이런 내 생각과 달리 VIP석에 앉은 이들은 물론이고, 유료 방청객들도 모두 흥미진진한 눈치였다.

내가 지루해하든 말든 방송국의 노력이 묻어나는 기획이 시작했다.

"어머! 경기가 한 경기가 아니었네요?"

"그러네."

고작 한 경기로 방송을 꾸미는 무책임한 기획은 없었다.

물론 놀란 점도 없지는 않았다.

"섭외 실력이 정말 좋나보네? 시간이 없었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주말이잖아요? 다음 주까지 미룰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때는 리즈가 안 된다고 했대요. 머신도 일주일은 너무 길다고."

"그냥 당장 싸우자고 했겠지. 그 머저리는."

"킥! 맞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빠르게 할 수밖에 없었대요. 워낙 이번 이벤트가 난데없이 일어났잖아요? 그래도 이정도면 성공적이……어머! 어머머!"

내 의문을 풀어주던 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침대와 근접한 관중석은 물론이고, 방청석에서도 놀란 탄성이 연이어 터졌다.

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방금 내가 본 게 맞지? 헛것 아니지?"

"……맞을 걸요. 세상에!"

헐. 미친.

지금 내 눈앞에 길쭉하고 뭉뚝한 무언가가 맹렬히 돌아가는 물건은 가짜가 아니었다.

문제는 위치였다.

항문.

핑크색 딜도가 남자의 항문에 꽂혀 있었다.

소름이 돋았다.

========== 작품 후기 ==========

오타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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