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24화 (12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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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만인전의 순위는 공개되지 않았다.

    만인전에 소속된 이들은 자기 자신의 순위밖에 알 수 없었고, 전체적의 순위는 비공개로 되어 있었다.

    물론 소위 랭커라는 이들이 자신의 소식창에 자기 랭킹을 공개하는 일이 유행하는 중이었고, 그것을 토대로 사설 순위표를 매기는 사이트가 늘어났다.

    당연히 구멍이 숭숭 뚫린 순위표가 정확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내가 결투장을 휩쓴 일이 더해지며 한 가지 추측성 이야기가 대중들 사이에 떠돌았다.

    랭킹 1위는 어썸 바나나라는 게 그 소문의 정체였다.

    지금 날 바라보는 사람들은 은연 중 순위를 밝히라고 압박하고 있었다. 아니, 욜란테는 아예 대놓고 물어 보았다.

    "에이, 이런 건 나랑 안 맞아요. 그냥 대놓고 물어 볼게요. 어썸 바나나. 당신 랭킹 몇 위에요? 1위 맞아요? 맞죠? 그쵸?"

    "이거 결혼도 하신 분이 너무 들이대는 거 아닙니까?"

    "어머?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고요? 어림도 없어요!"

    이 여자 끈질기네.

    나름 능구렁이가 되려고 했지만 보기 좋게 실패했다.

    에이, 어차피 다들 짐작하는 걸 숨겨서 뭐해?

    어차피 어썸 바나나는 너무 유명인이었다. 비록 정체가 알려진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행적이 낱낱이 파헤쳐진 상태였다. 남들이 모두 어썸 바나나가 랭킹 1위라 여기는 상황인데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어봤자 통할리가 없었다.

    결국 나는 자백하기로 결정했다.

    "정말 끈질기네요. 욜란테.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만인전의 수장입니다."

    "오호! 이거 특종인데요?"

    욜란테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좋아했다. 그녀가 바라던 가장 좋은 그림이 그려진 듯 보였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자들도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여러 감정을 보냈다.

    물론 모든 출연자가 다 같은 생각인 건 아니었다.

    가장 말석에 앉아 있던 머신이 이죽거리며 날 노려보았다.

    "웃기는군!"

    제법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방송 사고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긴장감이 고조되는 효과가 있었다. 출연자들 간의 자존심 싸움은 언제나 재미있는 흥밋거리를 만들어내는 법이니까.

    욜란테는 노련했다. 그녀가 이 흥밋거리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녀는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것처럼 나서는 것과 동시에 은근히 나와 머신을 부추겼다.

    "이거 점점 흥미진진한데요? 그럼 머신 씨는 지금 어썸 바나나 씨. 아, 너무 기네요. 그냥 바나나 씨라 부를 게요. 아무튼 바나나 씨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욜란테에게 돌려 묻는 건 없었다. 직설적인 그녀의 물음에 스튜디오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나와 머신을 제외한 출연자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변했다.

    여러 출연자들의 시선을 받자, 머신이 더욱 이죽거렸다.

    "당연하지. 랭킹 1위라고? 저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음? 그냥 바나나 씨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요? 아무 이유도 없이 주장만 펼치는 건 썩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데요?"

    욜란테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며 더욱 기름을 부었다.

    머신은 돌아가는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 채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자신감이 넘쳤다.

    "공개된 하이 랭커들은 거의 백만장자라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나? 저 삐쩍 골은 아시아 놈을 보라고. 침대 위에서 비명이나 지르지 않으면 다행이지. 안 그래? 저 놈은 그저 초반에 결투장에서 꼼수로 명성을 좀 얻은 걸 가지고 뻐기는 사기꾼에 불과해."

    아, 이게 열폭이라는 거구나.

    나는 열등감으로 똘똘 뭉친 머신의 말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난 작지 않았다. 오히려 큰 편에 속했다.

    물론 머신의 우락부락한 몸집과 비교하면 내가 좀 왜소해 보이기는 했다. 다만 그건 머신의 덩치가 너무 큰 거지, 내가 작은 게 아니었다.

    저거랑 비교하면 네덜란드 남자들도 다 난쟁이게?

    욜란테가 나와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나나 씨도 작은 체구가 아닌데요? 바나나 씨가 작다면 우리 남편은 뭐가 돼요? 딱 봐도 우리 남편보다 더 커 보이는데."

    적절히 농담을 섞어 되묻는 욜란테의 말에 자칫 살얼음판이 될 뻔 했던 스튜디오 분위기가 다시 풀어졌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욜란테의 뛰어난 임기응변은 뛰어났지만, 머신의 눈치는 바닥이었다. 머신이 두툼한 볼을 씰룩거리며 입을 열었다.

    "랭커라면 자랑스러워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저 계집에 같은 녀석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인증을 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뭐가 찔리니까 인증하지 않은 게 당연한 거 아냐?"

    막무가내처럼 보이는 머신이었지만 단순 무식한 남자는 아닌가 보다. 그는 슬쩍 나를 비겁한 놈으로 몰아갔다. 누구도 강요한 적이 없는 랭킹 인증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몇몇 출연자들은 이 안하무인의 말에 설득 당했는지 날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아, 진짜 나대는 건 내 취향이 아닌데.

    나대는 것도 싫었지만, 의심을 받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가면을 쓰고 있기에 내 랭킹을 공개해도 문제될 건 없었다. 혹시 몰라 리아를 카메라 밖에 두었으니까. 단 한 가지 마음에 안 드는 거라고는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떠밀리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내가 잠시 타이밍을 재고 있을 때 머신이 입 밖으로 비웃음을 뿌렸다. 자기 위주로 생각하다보니 내가 궁지에 몰렸다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계집에 같이 곱상하게 생겨서 자신감이 없는 건가? 그냥 지금이라도 거짓말을 했다고 하는 게 어때? 남자라면 잘못을 인정하라고. 그럼 결투를 걸지 않을 테니까. 아니면 랭킹을 공개 하던가? 만약 네가 랭커라면 이 자리에서 무릎 꿇고 사과를 하지."

    과했다.

    너무 나가도 너무 나갔다. 이건 단순히 방송의 재미를 위한 쇼가 아니었다. 망신을 넘어 모욕을 주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정도로 내 자존심은 싸구려가 아니었다.

    모욕적인 머신의 언사에 놀란 욜란테가 어떻게 수습해야 할 지 감을 찾지 못했다. 다른 출연자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카메라 안에 있는 사람 중 당황하지 않은 사람은 오직 머신뿐이었다.

    아니.

    한 명이 더 있었다.

    나는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천천히 머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적대감이 가득한 머신의 눈빛이 보였다. 도대체 왜 제 살을 깎아 먹으려는지 모르겠다.

    자유 임무라도 뺏겼나? 그게 나라는 걸 모를 텐데?

    적대감의 이유를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이유가 아니었다.

    나는 한 대 맞았으면 두 대를 패줘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었다.

    머신의 눈을 직시하며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약간 권태로운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와 머신에게 쏘아졌다.

    "음. 태어나서 곱상하게 생겼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요. 놀랍기도 하고요. 어떻게 가면으로 가려진 내 얼굴이 곱상하게 생겼다는 걸 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초능력자인가요? 비전 아이? 뭐, 이런 거?"

    "푸흡!"

    나도 모르게 좀 비꽜네.

    내 숨은 장기가 발휘되자 욜란테는 물론이고 다른 출연자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머신을 제외하고. 머신은 더욱 목덜미를 붉히며 잘게 몸을 떨었다. 아마 좀 열이 받은 것 같았다.

    고작 이거에?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이 새꺄.

    나는 머신의 얼굴이 터지나 안 터지나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고릴라처럼 우람한 머신의 몸이 부럽지는 않네요. 아? 왜냐구요? 다들 그거 알아요? 고릴라의 생식기는 요만하다는 거?"

    내가 새끼손가락을 보이며 말을 끝맺자 스튜디오 안에 웃음 폭탄이 터졌다.

    모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여전히 머신을 빼고. 그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정수리에 주전자를 올리면 김을 뿜어 낼 것만 같아 보일 정도였다.

    슬슬 게임을 마무리 할까?

    머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 양손으로 입을 막고 어떻게든 웃음을 참으려 노력하는 욜란테를 바라보며 윙크를 날렸다.

    "아무튼 취향은 존중합니다. 얼마나 취향이 확고하면 날 곱상하게 보겠어요. 다 그런 거죠. 이해해요. 그래도 난 여자가 더 좋아요. 머신 씨의 취향은 모르겠지만."

    "끄으……. 끅! 큽! 파흡! 후아……!"

    이야, 이 여자 진짜 대단하네.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지만 억지로 웃음을 참아내는 욜란테가 대단해 보였다.

    간신히 터지는 웃음을 가라앉힌 욜란테가 눈물을 찔끔 흘리며 중재를 하려 했다.

    "크흡! 흠흠. 아, 죄송합니다. 후아! 자, 바나나 씨의 생각은 이렇다는데. 머신 씨 생각은……물어 보지 않아도 괜찮겠네요."

    머신에게 시선을 돌려 진행을 계속하려던 욜란테가 말을 돌렸다. 지금 머신은 터지기 일보직전의 화약고와 다름없었다. 아무래도 곧 터질 것 같았다.

    이빨을 가는 소리가 스튜디오를 가로지른 그때 머신이 자리에서 일어나 날 향해 삿대질을 날렸다.

    "남자라서 운 좋은지 알아라. 계집애였으면 죽여 버렸을 테니까."

    스스로 게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한 말이라지만, 그래도 좀 선을 넘은 머신의 말이었다.

    정도를 넘어선 머신의 일갈에 스튜디오 안 공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내가 아무리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로 넘어가도 차가워진 공기는 풀리지 않았다.

    그때 차가워진 공기를 더욱 얼어붙게 만드는 목소리가 터졌다.

    지금까지 별반 나서지 않았던 리즈가 자기 자기로 돌아가는 머신의 뒤통수에 아이스 애로우를 날렸다.

    "방금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머저리."

    머신이 우둑 걸음을 멈췄다.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려 리즈를 바라보았다. 리즈는 여전히 다리를 꼰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을 뿐이었다.

    아쉽지만 머신은 더 이상 흥분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까불지 마라. 고작 장비하나 새로 샀다고 세상이 달라 보이나 보지? 개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으면 적당히 하는 게 좋아."

    리즈가 내 마녀 세트를 산 걸 비꼬는 머신의 모습에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저거 덩칫값 좀 하지. 왜 날 걸고 넘어져?

    머신은 자신이 꽤 위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리즈에게는 그 모습이 오히려 갖잖게 보였나 보다.

    리즈가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

    "사내새끼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혓바닥은 조잘대라고 있는 게 아냐. 자신 있으면 덤벼. 상대해 줄 테니까. 설마 입만 살아서 나불대는 족속인가?"'

    "오오……!"

    "어머! 어머머! 여러분! 특종이에요!"

    상황이 요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리즈는 도발 따위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처음부터 선전포고를 날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머신이 잠시 움찔했다. 머신의 망설임에 리즈가 더욱 조소를 머금었다. 뒤늦게 리즈의 비웃음을 발견한 머신이 또 다시 이를 갈았다.

    이 좋은 걸 그냥 넘길 욜란테가 아니었다. 그녀는 리즈와 머신 사이의 신경전을 발견하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정면으로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이거 흥미진진합니다! 아예 매치를 잡죠! 우리 모두 성인이잖아요? 무슨 말로 싸워요? 결투라는 좋은 시스템이 있는데? 어때요. 두 분 다 생각 있어요? 있으면 제가 책임지고 판을 깔아 드릴게요. 패자는 아예 얼굴을 까고 개망신을 당하는……큼, 큼! 아니. 망신을 당하는 걸로!"

    욜란테가 아예 불난 집에 유조차를 밀어 넣었다.

    이윽고 책임 PD의 허락이 떨어지자 욜란테가 더욱 리즈와 머신을 부추겼다. 심지어 출연자들도 불 구경 다음으로 재미있는 싸움 구경을 위해 나섰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리즈와 머신의 신경전 덕분에 갑자기 관심에서 밀려난 나는 피식 웃으며 소파에 등을 묻었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슬쩍 머리를 들이 밀며 물었다.

    "내게만 말해 보게. 자네가 랭킹 1위 맞지?"

    "이 아저씨가 어디서 생사람을 잡으려고. 그나저나 아저씨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흰색으로 염색한 거 같지는 않은데."

    "나이가 뭐가 중요하겠나. 아무튼 이것도 인연인데, 잘 부탁하네."

    "남자들끼리 잘 부탁해서 뭐합니까. 나 그쪽 취향 아니라니까요."

    "하하. 알겠네. 알겠어. 아무튼 랭킹 1위와 친해져서 나야 나쁠 게 없지 않은가?"

    능글맞은 아저씨. 아니, 할배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늙은 생강은 역시 매운 것 같았다.

    내가 라이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리즈와 머신의 설전을 더욱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이거 자존심 싸움이 됐군."

    "이미 뒤로 빼기는 늦었죠. 가면은 자신에게 보이지 않으니까."

    "그렇지. 남들의 시선보다 자기 자존심이 무너지겠지. 이유야 어떻든 재미있겠어. 저 여자도 꽤 강해 보이는데 말이야."

    라이언의 말에 나도 동의했다.

    내 눈에 머신은 하룻강아지였다.

    반면 리즈는 범이었다.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9,826."

    "뭐라고 했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재미있겠다고요. 아무튼 욜란테가 큰일 하네요."

    "하하! 그렇지. 저 사회자가 아주 대단하지."

    대화를 나누다보니 라이언의 나이가 많다는 게 확실히 느껴졌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야 점잖은 사람 같았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금 쾌활한 아저씨였다.

    어쨌든 나는 다시 눈을 감은 채 만인전의 수장이 가지고 있는 권한을 사용해 보았다.

    [4위 : 리즈]

    [9,826위 : 머신]

    유일하게 랭커들의 공식적인 순위표를 가지고 있는 나는 고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언더독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지만. 글쎄…….

    범에게 잡아먹힐 하룻강아지의 운명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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