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23화 (12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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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방송을 앞둔 세트장이 분주했다.

    중앙에는 사회자가 앉을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에서나 볼법한 의자 양 옆에는 푹신한 개인용 소파 비슷한 게 자리했다. 3개씩 마주보고 놓여 있는 의자 중 하나에 내 이름이. 아니, 내 닉네임이 쓰여 있었다.

    [Awesome Banana]

    나는 가면을 쓴 채 세트장 밖에서 그걸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리아. 근데 진짜 영어로 해도 돼?"

    "상관없어요. 사회자가 여러 나라 말을 하니까. 알아서 통역할 거예요."

    "그래도 여기 네덜란드 방송국이잖아?"

    "괜찮아요. 타겟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이 아니니까."

    NPO BOSS가 유럽 전체를 공격적으로 공략하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리아의 확답에 나는 부담감을 지웠다.

    지우기는 개뿔. 더 부담되네. 어떡하지?

    부담감을 지워질 리가 없었다. 오늘 출연하기로 한 방송은 생방송이었다. 괜히 정체를 숨기겠다고 선뜻 방송 출연을 약속했던 게 뒤늦게 후회가 됐다.

    내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리아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키득거렸다.

    나는 속편하게 웃고 있는 리아를 보며 괜히 시비를 걸었다.

    "좋냐? 난 죽겠는데. 그렇게 좋냐?"

    "그럼요! 고. 아니, 바나나 씨가 이렇게 긴장하는 걸 처음 보는 걸요?"

    "아이고. 그러셔요?"

    "그렇게 긴장되면 저도 같이 나갈까요?"

    "됐네요."

    확실히 리아와 함께하면 긴장이 덜하겠지만, 그랬다가는 주객이 전도될 게 뻔했다. 리아가 방송에 나오면 결국 내 정체를 밝힐 단서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녀와 내가 한국에서 함께 지내는 걸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으니까.

    내 심장이 콩딱콩딱 뛰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그때 리아가 슬쩍 내 귀에 입을 대고 속삭였다.

    "저 여자에요. 마녀 세트를 낙찰 받은 주인공이."

    "응? 누구?"

    "저기 저 금발이요. 늘씬한 모델 같은."

    "오. 저 여자가 그렇게 돈이 많아?"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낙찰 받은 건 확실해요. 같이 있던 FD가 확인했대요. 아마 돈이 많은가 봐요."

    "7만이 넘는 경험치를 지를 정도의 능력자라. 재밌겠는데?"

    리아와 대화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긴장감이 옅어졌다. 아니, 내 흥미를 끄는 존재가 나타나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이유가 뭐든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런웨이를 활보하는 모델 같은 여자를 계속 주시했다.

    이윽고 나머지 4명의 출연자들이 세트장에 나타났다. 이미 MC를 맡은 여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대본을 숙지하고 있었다. 나도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다녀올게."

    "힘내요! 실수하지 말고요!"

    "알았어. 너나 화면에 안 나오게 조심해."

    리아의 응원을 받으며 무대 위로 오른 나는 내 자리를 향해 무심히 걸어갔다. 내 자리는 사회자와 인접한 오른쪽 자리였다. 반대쪽에는 내가 유심히 관찰하던 모델 같은 여자가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그때 맞은편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살짝 목례하며 인사를 건넸고, 여자도 씽긋 웃으며 미소로 답했다.

    아직 방송을 시작하지 않았기에 사회자인 욜란테가 나서서 출연자들끼리 가벼운 인사를 나누도록 유도했다.

    "이제 5분정도 남았네요. 다들 긴장되시죠? 일단 서로 통성명이나 할까요? 전 요즘 죽 쑤고 있는 축구 선수의 와이프에요. 그래도 전에는 좀 잘했는데. 나이에는 장사가 없더라고요."

    자학 개그를 선보이는 욜란테의 말에 모두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나도 그녀의 남편이 누군지 알 정도로 유명하다면 유명했다. 그게 우리나라 축구 선수와 엮여서 그랬지만.

    금세 분위기를 주무른 욜란테가 자연스레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쪽은 어썸 바나나 씨. 얼마나 끝내주는 바나나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지만. 남편이 불쌍하니까 좀 참을 게요."

    나를 시작으로 욜란테는 참가자들의 닉네임을 소개했다. 내 옆에는 라이언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남자였고, 내가 앉은 줄의 끝에는 머신이라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반대쪽 끝에는 벨리라는 여자였고, 그녀 옆에는 로즈라는 별명을 쓰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시계 방향 순서로 출연자들을 소개하는 욜란테가 마지막으로 리즈라는 별명의 여자를 소개했다.

    "여기 계신 이분이 그 재벌 의혹을 받고 있는 리즈 씨에요."

    "반가워요."

    "어머, 그게 끝인가요?"

    "네."

    "이런. 오늘 방송이 참 험난하겠네요. 아무튼 잘 부탁해요. 모두들."

    과장된 말투로 말을 마친 욜란테의 표정이 이내 달라졌다. 가벼운 옆집 아줌마 같은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자신감 넘치는 회사 오너처럼 변했다. 그것은 곧 촬영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었다.

    이윽고 여러 대의 카메라가 돌아가며 세트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찍기 시작했다.

    PD의 신호를 받았는지 욜란테가 맞은 편 메인 카메라를 보며 오프닝의 포문을 열었다.

    "어젯밤 옥션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는 지금. 여러분들의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 특별한 손님을 모셨습니다. 바로 어제 경매에 참여한 참가자분들인데요."

    또박또박한 어조로 빠르게 멘트를 시작하는 욜란테는 확실히 경력이 많은 사회자다웠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아까 그건 리허설이었구나.

    오프닝 멘트를 끝낸 욜란테가 방금 전 했던 것처럼 출연자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방금 전 괜히 오지랖을 편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긴장하지 않도록 출연자들을 어르고 달래면서 해야 할 일을 똑 부러지게 해내고 있었다.

    방금 전과 똑같은 상황에 출연자들은 딱히 긴장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한층 부드러운 진행이 가능했다.

    리즈를 끝으로 출연자 소개를 끝낸 욜란테가 어제 있었던 경매 장면의 하이라이트를 모아 놓은 자료 화면으로 넘어갔다. 그제야 출연자 사이에서 참았던 숨소리가 흘러 나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욜란테가 출연자들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긴장을 풀어 주려 노력했다.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하고 싶은 말을 편하게 해요. 방송 사고 나도 시말서를 쓰는 건 우리가 아니라, 저기 저 PD 양반이니까."

    "큭!"

    "풉!"

    나도 소리 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효과를 보았다.

    욜란테는 다시 한 번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 놓고는 능숙하게 자료 화면에서 넘어오는 카메라를 바라보았다.

    "보셨나요? 정말 놀랍지 않나요? 전 정말 놀랐습니다. 이런 뛰어난 장비를 볼 줄은. 아니, 있을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거든요. 사실 몇 가지는 저도 경매에 뛰어 들고 싶었지만. 참아야했어요. 남편이 요즘 벌이가 시원찮아서."

    어깨를 으쓱이며 너스레를 떠는 욜란테의 모습에 다시 한 번 스튜디오에 웃음이 터졌다. 그녀의 말이 엄살이라는 건 모두 알고 있었다. 그녀의 벌이가 남편인 축구 선수보다 더 많다는 건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프로그램을 이끌던 욜란테가 드디어 출연자들과 인터뷰를 시작했다. 인터뷰보다는 토크쇼에 가까웠지만.

    "그럼 어제 하루 시청자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물어본 질문을 해야겠네요. 그 질문의 대상은 바로……어썸 바나나 씨네요!"

    "저요?"

    "네. 너요."

    장난스런 욜란테의 대답에 또 다시 웃음이 터졌다.

    나도 딱히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저 재능의 한 종류를 목격한 게 즐거웠다. 동시에 놀랍기도 했다.

    욜란테의 모습을 보며 느낀 감상을 뒤로하며 나는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며 답했다.

    "네. 무엇이든 물어 보세요."

    "애인은 있나요?"

    "네?"

    "무엇이든 물어 보라면서요?"

    ……재능은 개뿔.

    그냥 이 여자도 이상한 여자가 틀림없었다.

    어쨌든 방송. 그것도 생방송이었기에 나는 대답을 해야 했다. 물론 제대로 답할 생각은 없었다.

    "너무 많아서 일일이 언급하기는 좀 그런데. 그냥 넘어가 줄래요?"

    "어머? 그건 너무 자신만만한 대답 아닌가요? 상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야. 어쩔 수 없죠."

    "아깝네요. 초짜들은 이럴 때 술술 답하는데. 역시 랭커는 랭커인가 봐요?"

    이번에는 답하지 않았다.

    확실히 욜란테는 노련했고, 살살 내 대답을 유도했다.

    아쉽게도 나름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욜란테가 살짝 시무룩한 얼굴로 너스레를 떨고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자, 그럼 진짜 물어보겠습니다."

    "네."

    "마녀 세트는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얻은 건가요? 역시 궁금한 건 이거였네요. 대답해 줄 수 있나요?"

    "어려울 거 없죠. 독일에서 얻었습니다. 함부르크 근처였는데, 그곳에 숲속의 마녀라는 귀족 몽마가 있었습니다."

    "있었다라. 과거형이네요? 지금은 없다는 건가요?"

    욜란테가 타이밍 좋게 끼어들며 내 대답을 유도했다.

    덕분에 나는 더욱 편하게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네. 귀족 몽마는 단일 개체입니다. 똑같은 종류가 리젠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평민 이하 몽마들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공산품이고. 귀족 이상 몽마는 장인이 만들어내는 명품이다. 이렇게 보면 되나요?"

    "정확하네요. 확실히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이참에 전문 배틀러로 전직하는 게 어때요?"

    "에이, 남편이 싫어한다니까요. 아니. 진지하게 고민해봐야겠네요. 함부르크에 있었다고 하니까. 이이는 도대체 뭐했는지 모르겠네요."

    또 다시 자기 남편을 가지고 농담을 던지는 욜란테의 대답에 스튜디오 분위기가 더 없이 가벼워졌다.

    내 답변이 끝나자 욜란테는 내 옆에 앉아 있는 라이언에게 네티즌들의 질문을 물었고, 그 다음은 머신이었다. 당연히 여자들에게도 차례로 질문을 던졌다.

    그렇게 네티즌들의 호기심을 풀어주는 시간이 끝났다.

    이제는 시청자들의 호기심을 더해주는 시간이었다.

    "랭커들에게는 모두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인 여섯 분의 랭커에게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해 볼까요? 어썸 바나나 씨?"

    아씨.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오늘 방송 내내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욜란테였다. 물론 단순한 호기심에 입각한 것이지만 그래도 유부녀에게 관심을 받는 건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질문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저 랭커 아닙니다."

    오리발을 내밀었다.

    물론 누구도 믿지 않았다.

    욜란테가 피식 웃으며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그러 시답니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심지어 나도 믿지 않았지만, 나는 끝까지 오리발을 내밀었다. 괜히 욜란테에게 대답했다가 내 고유 기술이 털릴 수도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나와 달리 맨 끝에 앉은 머신은 당당했다. 그는 나를 대신해서 욜란테의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랭커 중에 저렇게 자신 없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군. 대신 답하겠습니다. 맞습니다. 고유 기술이 있습니다. 나도 상대 방어력을 무시하는 공격 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머? 방어력을 무시한다고요?"

    "자그마치 공격력 250%짜리 기술입니다. 아직까지 이 기술을 버티는 상대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신감 폭발한 머신이 쓸데없이 자기 약점을 공개했다. 물론 고유 기술은 개인의 특성을 살린 강점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이 공개되는 순간 파훼될 가능성이 높아졌고, 그것은 곧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머저리네, 저거.

    보디빌더 같은 머신의 머릿속에서 근육으로 가득찬 것 같았다.

    더 골 때리는 일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머신의 자랑질에 욜란테가 호들갑을 떨며 반응하자, 몇몇 출연자들이 알아서 자기 고유 기술에 대한 정보를 밝혔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슬쩍 욜란테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이로써 이번 방송의 승자는 욜란테였다.

    영악한 여자네.

    물론 나와 라이언은 자신의 고유 기술을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여자들 중에도 리즈가 이런 행렬에 동참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약점 공개 시간이 끝나고, 다음으로 랭킹 공개 시작이 찾아왔다.

    욜란테의 관심이 다시 내게 돌아온 건 당연한 결과였다.

    "어썸 바나나 씨. 나름 결투장에서 유명한 어썸 바나나 씨지만. 당신의 랭킹은 공개된 적이 없네요? 그리고 리즈 씨도요. 어? 머신 씨도 랭킹을 공개한 적이 없으시네요? 다들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출연자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내게 쏠렸다. 은연 중 관심을 받다보니 그런 것 같았다.

    이거 난감하네.

    또 다시 목이 간지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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