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21화 (12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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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번째 경매가 성황리에 끝나고 두 번째 경매가 이어졌다.

    비록 내가 출품한 아이템은 아니었지만, 평민 등급 치고는 꽤 좋은 남성용 무기였다. 그래봤자 쓸 수 없는 무기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당연히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것보다 다른 이유 때문에 나는 경매 자체에 관심을 끊어 버렸다. 호들갑떠는 와중에도 미야프의 입에 고기를 찢어 넣어주는 리아까지 무시한 채.

    나는 새로 받은 임무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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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직업]

    + 제왕의 위엄을 꺾고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라.

    + 임무 현황 : 파종

    + 기본 보상 : 전용 직업

    + 전체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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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임무와 달랐다. 최소한 앞선 두 번의 전직 퀘스트는 전직 방법이 상세하지는 않아도 대략적으로 적혀 있었다. 시험의 관에 들어 전투 승리를 하거나, 상위 몽마를 사냥하는 방식처럼 간략하게나마 가야 할 곳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었다.

    반면 최후의 직업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내가 가야 할 길조차 스스로 찾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임무 현황부터 직관적인 숫자가 아니라 모호한 문자로 기입되어 있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생각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동안 경험을 통해 대략적인 방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제왕의 위엄을 꺾으라는 건 왕족을 사냥하라는 건가? 근데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라는 건 도대체 뭐지?

    일단 왕족 몽마를 사냥하라는 건 틀림없을 것 같았다. 다만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라는 말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것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고민해 봤지만 문제를 풀 수 없게 되자, 나는 일단 편하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왕족부터 잡지 뭐. 자격을 증명하는 건 나중에 생각하고. 근데 왕족 몽마가 있기는 한가?

    복잡한 머리에게 휴식을 주려고 했지만 쉬지 않았다.

    첩첩산중.

    하나의 고개를 넘으니 또 하나의 고개가 나온 격이었다. 아니, 새로 나온 고개는 고개가 아니라 산이었다. 태산을 마주한 기분에 가슴이 더욱 답답했다.

    "……도대체 어쩌라는 거야? 나보고 어쩌라고!"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만 짜증을 부리고 말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두 눈을 뜬 내 모습이 어떨지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마 악귀처럼 얼굴이 일그러졌을 게 분명했다.

    그 증거로 나름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미야프와 리아가 흠칫 몸을 떨며 내 눈치를 살폈다.

    에효. 쟤들이 무슨 죄라고.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얼굴을 풀고 손을 흔들며 되도록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아무것도 아냐. 놀래켜서 미안."

    나름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잔뜩 얼어붙은 분위기는 풀리지 않았다.

    리아가 무릎에 앉히고 있던 미야프를 바닥에 내려 높은 채 내게 다가왔다. 미야프도 눈치가 있는지 삐약 거리지 않았다. 이내 내 곁으로 다가온 리아가 내가 소파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걸치며 내 손을 잡았다.

    "일단 앉아요. 무슨 일이에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겼어요?"

    나는 리아가 이끄는 대로 자리에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새로운 퀘스트가 나왔는데. 근데 좀 짜증난 퀘스트라서. 그래서 그랬던 거야."

    "도대체 얼마나 짜증나기에……?"

    "내가 아까 전에 빌려준 속옷을 다시 빼앗은 느낌? 그것도 아무 이유 없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한 느낌?"

    "아……. 대충 짐작은 가네요. 고영 씨가 이걸 뺏어 가면 진짜. 정말 엄청 화날 거 같아요."

    내 반쯤 농담 섞인 설명에 리아가 자신의 가슴을 양 손으로 움켜쥐며 답했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튀어 나왔다. 나와 함께 지내면서 리아도 참 많이 변한 것 같았다.

    덕분에 분위기가 상당히 풀어졌다. 그 증거로 내 눈치를 살살 살피던 미야프가 다시 촵촵 소리를 내며 고기를 이빨로 잘근잘근 씹어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괜히 짜증을 부렸던 게 미안해졌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곤 여전히 의문을 뿌리는 리아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말을 이었다.

    "진짜 심각한 일 아냐. 내가 퀘스트 보여 줄까?"

    "네. 보여주세요. 도대체 어떤 퀘스트길래 고영 씨가 그랬는지 한 번 보고 싶네요."

    "……그래. 봐라. 봐. 하여튼 뜬금없는 건 여전하네."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리아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내 휴대폰을 넘겼다. 물론 넘기기 전에 휴대폰에 있는 보스 앱을 실행하고, 임무창을 띄워 놓는 걸 잊지 않았다.

    리아는 내 휴대폰을 넘겨받기 무섭게 고개를 숙이며 화면을 확인했다.

    이윽고 리아가 다시 내게 휴대폰을 넘기며 긴 탄식을 터트렸다.

    "아……. 화날만하네요. 맨땅에 헤딩하라는 거잖아요, 이거?"

    "맞아. 그냥 백지 한 장 던져 주고, 답을 적으라는 시험이지. 물론 풀어야 할 문제를 가린 채로."

    "와. 진짜 너무하네. 이거 좀 갑질 아니에요?"

    리아가 이렇게 화내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도 보스 플레이어였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녀도 내가 받은 전직 퀘스트를 해야 할 때가 올 것이기에 남일처럼 여길 수가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보스 앱을 끈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나도 모르겠다. 그냥 해보는데 까지는 해 봐야지. 그나저나 왕족 몽마가 있긴 있나?"

    "……없을 걸요. 귀족 몽마도 얼마 없었잖아요? 겨우 알아내면 고영 씨가 날아가서 사냥했으니. 귀족 몽마를 본 사람보다 못 본 사람이 더 많을 걸요?"

    괜히 코끝이 간지러웠다.

    리아의 말대로 나는 그녀를 통해 귀족 몽마가 나타났다는 걸 알게 되면 바로 움직였다. 그렇게 한 달 가까운 시간을 보낸 결과 120마리가 넘는 귀족 몽마를 사냥할 수 있었다. 참고로 귀족 몽마는 한 번 사냥하면 리젠 되지 않았다.

    뭐, 새로 생기는 걸 리젠으로 보면 리젠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보니…….

    지난 한 달을 생각하다가 보니 자연스레 전리품까지 생각이 이어졌다.

    내 얼굴이 다시 와락 일그러졌다.

    "그럼 드랍률 진짜 거지같네. 120마리를 잡았는데 완템은 고작 7개 밖에 안 나왔잖아?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것 까진 없죠. 사실 표본이 없잖아요? 200마리 겨우 넘는 챔피언을 고영 씨가 절반 이상 잡아 버렸는데. 물론 알려지지 않은 챔피언도 있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심했어요."

    "심하기는. 적자생존. 이런 말 못 들어 봤어? 그나마 강화제라도 나오지 않았으면 진짜 어떡할 뻔 했냐."

    내가 중보스라 부르는 귀족 몽마는 정말 가뭄에 콩 나는 듯이 제대로 된 아이템을 줬다. 그렇게 얻은 3개의 상징과 4개의 아이템은 지금 경매가 한창이었다. 그 중 4개의 장비는 모두 세트 아이템이라는 게 좀 재미있다면 재미있었지만.

    아. 근데 나 지금 경매 중이었지?

    순간 아차 싶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나는 걱정스런 눈으로 리아를 보며 물었다.

    "근데 리아. 경매 어디까지 진행 된 거야? 아직 내 차례는 안 왔나?"

    "음. 이제 2번 더 하면 고영 씨 상징이 나올 걸요? 설마 까먹고 있었어요?"

    "……퀘스트가 너무 지랄 같아서 깜빡했네."

    "고영 씨!"

    아따, 목청 한 번 우렁차네.

    쩌렁쩌렁한 리아의 고함에 나도 나였지만, 미야프가 크게 놀랐다.

    입에 반쯤 소시지를 집어넣은 미야프가 놀란 눈으로 리아를 바라보며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미얍! 먁! 미얍! 먁!"

    "어머! 이를 어째!"

    "허리 숙이게 해서 물 먹여. 그럼 없어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얼른 딸꾹질을 하는 미야프에게 달려간 리아가 날카로운 눈빛을 뿌리며 내 입을 막아 버렸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다시 경매에 집중했다.

    그 사이 리아는 미야프의 입에서 소시지를 빼내려고 했다. 물론 미야프가 먹을 걸 순순히 내놓을 리가 없었다.

    "미야프! 안 돼요! 일단 물 마시고! 그러면 줄게. 응? 응? 미야프야. 응? 제발!"

    "미약! 먑! 미약! 캑, 캑캑!"

    결국 소시지에 욕심 부리던 미야프가 사래가 걸린 듯 기침을 하고 말았다.

    리아는 그때는 놓치지 않고 미야프의 입에서 떨어지는 소시지를 손으로 받았다. 미야프의 눈동자가 소시지를 쫓아가는 데 참…….

    "쟤도 답답하네. 그냥 좀 이따가 먹으면 되지. 왜 저런다냐."

    "조용히 좀 해요!"

    "아아. 입 다물고 있을게."

    괜히 얄미운 한 마디를 했다가 싸늘한 눈초리를 또 받고 말았다.

    그나저나 결혼은 안한 걸로 아는데. 조카가 있나?

    리아는 아이를 돌보는 일에 참으로 능숙했다. 그녀는 여전히 다 먹지 못한 소시지에 미련을 보이는 미야프를 살살 어르고 달랬다. 동시에 소시지를 받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미야프의 허리가 자연스레 숙여지게 만들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리아는 생수병을 따서 미야프의 입에 물리며 협상을 했다.

    "이거 마시면 언니가 내일 더 맛있는 거 사줄게. 응? 어머. 그래. 잘 마시네? 어머. 정말 잘하네, 우리 미야프."

    미야프의 식탐을 적절히 이용한 덕분에 거실은 다시 평화를 되찾을 수 있었다.

    리아가 애쓰는 동안 경매는 이어졌고, 나는 내 차례가 오자 사전에 의논한대로 움직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늦은 밤이 됐다.

    리아가 사온 모든 음식을 남김없이 먹어치운 미야프가 길쭉한 소파에 누워 치마를 까고 배를 쓸었다. 리아는 경매 진행 상황을 잠시 확인하더니 이내 시간이 있음을 알고 미야프를 안아 들었다. 이내 그녀가 2층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미야프를 침대에 재운 리아가 부엌에 들려 간단한 안줏거리를 만들어서 거실로 돌아왔다.

    나는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한 리아에게 조금 미지근해진 맥주병을 꺼내 주어며 칭찬해 주었다.

    "고생했어. 그냥 기자 때려치고 미야프 보모로 취직하는 게 어때? 내가 월급 많이 줄게."

    "치. 됐거든요. 근데 미야프는 다시 테이밍 못해요? 허수마비는 많잖아요?"

    "그거 참가자 당 한 번씩만 되나 봐. 내가 다시 하려고 하니 안 되더라고. 그렇게 얻고 싶으면 열심히 렙업 하는 수밖에 없지 싶은데?"

    내 대답에 리아가 금세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런 질문을 한 게 처음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동안 미야프 같은 종속을 얻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비록 성과는 없었지만.

    실망한 리아가 벌컥벌컥 온갖 종류의 술을 비우는 사이 경매는 점점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내가 올린 물건은 꽤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구강 삽입 공격력을 25%나 올려주는 상징은 4만3천에 팔리며 내 미간을 찌푸리게 만들었지만, 마법력을 30%나 올려주는 상징이 6만9천에 팔리며 내 미간의 주름을 없애 주었다.

    마지막으로 사냥꾼의 활과 활골무 세트가 7만4천에 팔리며 경매가 끝났다.

    [현재 보관 경험 : 331,021]

    비록 레벨업은 한 단계밖에 하지 못했지만, 얻은 경험치는 정말 엄청났다. 아니, 엄청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다시 한 번 개인보다 집단의 힘이 얼마나 거대한지 깨달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정도였다. 그만큼 33만5천이라는 경험치는 대단했다.

    말이 33만5천이지 이 경험치면 0렙짜리가 단숨에 43렙으로 될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양이었다.

    뭐, 그 집단의 노력을 소수가 돈으로 샀겠지만.

    물론 좋은 의미만 있는 건 아니었다. 부의 힘을 통해 개인의 노력을 돈으로 구매한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최소한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된다면 조금이나마 낙수 효과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힘이 실리지 않을까 싶었다.

    리아도 이런 내 생각과 같은 모양이었다.

    "진짜 대단하네요. 물론 다수의 경험치를 돈으로 사서 모아 놓은 것 밖에 안 되겠지만. 그래도 빠르게 평균 레벨이 오르는 거 같아요."

    "그러게. 지금 평균 레벨이 몇일까?"

    "음. 한 25는 되지 않을까요? 상위권은 30이 넘은 거 같고. 편차가 좀 있지만 그래도 꽤 높아졌네요."

    꽤가 아니라 정말 엄청 높아졌다.

    머지않아 2차 전직자도 나올 게 분명했다. 아니, 이미 나왔을 수도 있었다.

    "랭커들은 어때? 귀족 몽마를 사냥하는 걸 보면 혹시 모르지 않을까?"

    "그건 아니에요. 고영 씨처럼 혼자 사냥하는 사람은 정말 거의 없잖아요? 저야 고영 씨 덕분에 독고다이의 길로 들었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티 사냥을 할 걸요? 랭커도 혼자 사냥하는 이들보다 파티 사냥하는 이들이 더 많은 거 같고요."

    "그런가. 아무튼 열심히 사냥해. 너도 만인전에 좀 들어야지."

    "나도 장난 아니거든요?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시간만 있었으면 진짜 깜짝 놀랄걸요?"

    나름 의욕을 북돋으려고 한 말이었지만, 리아는 자신을 놀리는 말로 받아들인 얼굴이었다.

    난데없이 성질을 부리는 리아의 모습에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왜 저는 거야?

    여전히 여자는 밀레니엄 난제보다 어려운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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