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08화 (108/200)
  • <-- Pink Mike -->

    믿을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나는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핑크 마이크는 아니었다. 그녀는 나와 달랐다. 그녀의 반듯한 입술이 벌어지며 청량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처음 인사를 나눌 때와는 또 다른 목소리였다.

    "대단하네요. 정말……. 이런 경우는 상상하지 못했었는데."

    진심으로 놀람이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나는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솔직히 누군가 스탯 칭호를 가졌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19레벨이면 하나의 스탯을 100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지. 최소한 한 달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내가 놀란 건 다른 게 아니었다.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답답한 의문도 잠시 나는 금세 나름의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사냥을 한 겁니까? 아니지. 사냥을 하지 않고 레벨을 올릴 수도 있으니까. 뭐, 가능은 하겠네요."

    생각해보니 눈앞의 여자도 돈이 많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상자나 궤짝 물품을 현금으로 구매해 물품 상점에 파는 방식으로 경험치를 얻는 게 가능했다. 요 전날 클럽 다이아몬드의 회원처럼.

    그런데 클럽 회원들은 체력을 찍지 않은 이유가 있나? 그것도 스무 명 모두.

    하나의 의문을 해소하니 또 하나의 의문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하자, 핑크 마이크가 날 풀어주며 물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요? 꼭 평생 혼자 산 사람처럼."

    뜨끔.

    하여튼 여자들의 눈치는 기가 막혔다. 핑크 마이크도 마찬가지였고, 그녀는 내 성장 배경을 지나가듯 유추했다.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보다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게 버릇이 된 내 모습을 보고 짐작했겠지만, 그래도 놀라운 건 놀라운 거였다.

    물론 핑크 마이크의 추측을 진지하게 받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헐떡이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 있는 핑크 마이크 옆에 나란히 누우며 말을 돌렸다.

    "놀라워서 그랬습니다. 이렇게 활력 많은 사람은 처음이라서."

    "당신도 이상한 기술을 가진 거 같은데요? 아니면 절정에 올라서 그런가? 아무튼 그쪽이 시원하게 눌러줘서 상징이 깨졌어요. 나름 비싸게 주고 산 건데."

    아, 그건 좀 미안하네.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헐벗은 선녀의 상징을 내릴 생각은 없었다. 상징을 내릴 때 파괴하지 않고 가능했다면 또 몰라도.

    내가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자, 핑크 마이크가 내 가슴을 배고 얼굴을 들이 밀었다.

    "뭐예요? 왜 아무 말이 없어요?"

    "원래 죄지은 놈은 말이 없는 법입니다."

    툭 던진 한 마디에 핑크 마이크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더니 이내 그녀의 눈빛이 개구지게 변했다.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됐다.

    핑크 마이크가 뒤통수로 손을 가져가더니 그대로 가면을 풀어 버렸다.

    스르륵……. 툭.

    천천히 공기 저항을 만끽하며 분홍 가면이 떨어졌다.

    단아한 인상의 미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조금 어두운 침실에서도 그녀의 얼굴은 흐려지지 않았다. 그 정도로 아름다운. 아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놀람에 벌어진 눈으로 육감적인 몸매와 상반되는 얼굴을 가진 핑크 마이크의 이름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김아연 아나운서?"

    "그쪽도 죄지은 거 아니면 그것 좀 벗는 게 어때요?"

    "하하……."

    재기발랄한 김아연의 투정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정말 유명한 아나운서였다. 아니, 단순한 아나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스타였다.

    김아연은 단순한 엄친딸이라 스타가 된 게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우리나라 최고 대학을 나왔고, 집안 배경도 좋았다. 게다가 학생 때부터 유명했을 정도로 미모도 뛰어났다. 심지어 성격까지 좋으니 그녀의 동료나 동기들은 그녀를 반칙왕이라 부를 정도였다.

    재원 중의 재원.

    분명 능력과 미소를 두루 갖춘 뛰어난 여성이었지만, 이런 점들이 김아연을 스타로 만든 건 아니었다.

    알 수 없는 매력.

    김아연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고, 우연히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현한 뒤 그 매력이 폭발해 버렸다. 나름 시청률이 높았던 그 프로그램 덕분에 그녀의 매력이 전 국민에게 알려진 건 당연했다. 완벽함과 편안함을 동시에 가진 아이러니컬한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은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국민 며느리가 됐는데. 그런데……섹스 배틀이라고?

    방구석에 처박혀 10여년을 혼자 옹알거렸던 나도 알 정도로 유명한 여자가. 아니, 현대 여성의 표본이자 미래라 일컬어졌던 여자가. 그런 여자가 내 옆에 알몸으로 누워있다는 사실에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이런 내 심정을 귀신처럼 알았는지 김아연이 살짝 토라진 얼굴로 내 가슴을 꼬집었다.

    "윽!"

    "뭐예요? 그 표정은? 설마 내가 처녀가 아니라 그래요?"

    "……하아."

    언제나 미디어와 현실 사이에는 큰 괴리감이 존재했다. 그 괴리감이 이번에는 내게 큰 실망감을 주었다. 나름 동경했던 여자의 솔직한 모습은 꼭 좋지만은 않았다.

    실망감도 잠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당신 처녀 맞잖아요? 그것보다 좀 놀랍고, 한편으로는 실망스럽고. 그러네요. 나름 멋진 여자라 생각했는데."

    "어머? 멋진 여자는 섹스도 하지 말아야 해요?"

    "멋진 여자는 섹스를 해도 되지만, 이렇게 섹스 배틀을 하는 건 아니죠. 게다가 집안이 좋기는 하지만, 돈이 많은 집안은 아니고. 결국 얼마나 열심히 사냥을 했을지 생각하면. 좀 그러네요. 미안해요. 나도 좀 그런가 봐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도 내가 이기적인 다른 남자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았기에 담담히 말했다. 무슨 말을 가져다 붙여도 실망한 건 사실이니까.

    김아연은 화내지 않았다. 그녀는 오히려 웃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게 고스란히 들어날 정도로 환하게 웃더니 이내 내 가슴에서 가장 약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차라리 대놓고 말해주니 좋네요. 사실 그동안 사람들의 시선이 좀 거북할 때도 있었거든요. 나는 이래야한다. 마치 내가 생각하는 대로 넌 살아야한다. 그게 좀 싫었는데……."

    "저기, 김아연 씨. 심각한 이야기를 할 때 남의 젖꼭지를 가지고 노는 거 아닙니다."

    "풉! 뭐라구요?"

    반쯤 진심이었지만 김아연은 완전 농담으로 받았다. 그녀는 볼을 부풀리더니 이내 내 젖꼭지를 야무지게 꼬집었다.

    얼마나 야무지게 꼬집었는지 나도 모르게 악다구니를 쓰고 말았다. 진짜 너무 아팠다. 진짜로.

    "아악! 야!"

    "왜!"

    "아으……."

    다행히 내 젖꼭지가 떨어져 나간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멀쩡하지도 않았다. 얼마나 매섭게 꼬집었는지 내 젖꼭지가 잔뜩 흥분한 여자의 꼭지처럼 변해 있었다.

    너무 아파서 차마 쓰다듬지도 못한 나는 그저 손바닥을 살짝 오므린 채 꼭지 위를 덮으며 김아연을 노려보았다.

    "이거 심상의 구슬로 녹화해서 팔수도 있어요."

    "……저기. 어썸 바나나 씨. 문맹이에요?"

    내 장난기 다분한 협박에 김아연이 어이없단 얼굴로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갑자기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하……. 저기요. 결투 조건에 사용 금지 물품에 심상의 구슬도 추가 했거든요?"

    그랬나?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이 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결투 승낙만 했을 뿐 조건 따위는 귀찮아서 읽어 보질 않았으니까.

    머쓱해진 나는 또 다시 화제를 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나저나 왜 벗은 거예요?"

    "왜 벗긴요. 하려구 벗었지."

    "옷 말고. 가면 말이에요. 굳이 벗을 필요가 없었잖아요?"

    "바나나 씨. 꼭 그렇게 내 입으로 듣고 싶은 거예요? 그 이유를? 알면서 그러는 거 꽤 고약한 취미 같은데."

    "김치찌개를 좋아하지만, 김치국은 별로 안 좋아해……미안합니다."

    조금 화난 얼굴로 날 보는 김아연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농담을 내뱉고 말았다. 그것도 하필 30대가 됐다는 걸 증명하는 농담을.

    재빨리 사과를 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다시 담을 순 없었다.

    다행히 나름 방송국 밥을 몇 년 먹은 김아연은 이런 유지한 아재 농담에 큰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쪽으로 내게 화를 냈다.

    "이런 아저씨에게 처음으로 절정을 선물 받다니. 내 신세도 좀 처량하네요."

    "아저씨라뇨? 내가 어딜 봐서!"

    "그쪽 말 하는 거 보면 견적 딱 나오거든요? 꼭 우리 보도 부장 같은 거 알아요?"

    "보도 부장이라니! 나 그렇게 나이 안 먹었어요."

    "어머? 그래요? 그럼 어떡해요? 벌써부터 그러면."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김아연의 모습에 나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말싸움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럴 때는 져주는 게 좋았다.

    져주는 거니까. 절대 진 게 아냐.

    "아아, 미안해요. 너무하네, 진짜. 사람 무안하게."

    "킥! 나야 말로 말이 심했어요. 그냥 친해지고 싶어서 농담했다고 생각해줘요. 내 처녀를 가져간 남자는 아니지만, 내 첫 경험을 가져간 남자는 맞으니까."

    "……그냥 가면을 쓰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에이, 왜 그래요. 친해지려는 사람한테. 그리고 친구하고 싶은 사람에게 만들어진 이미지로 대할 순 없잖아요? 그건 가짜인데."

    실망어린 내 말에 김아연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 치며 능청을 떨었다. 단순한 능청이 아니었다. 그녀의 고민이 합죽된 말이었다.

    꽤 스트레스를 받나 보네.

    물론 김아연의 말 속에 숨어 있는 그녀의 고심을 읽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근데 친구라니. 나 그렇게 개방된 사람 아닙니다. 오빠라면 모를까."

    "무슨 소리에요? 그런 친구를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럼 무슨 친구요? 친구면 친구지."

    나는 김아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꾸 이상한 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래서 얼굴 예쁜 건 3개월밖에 안 간다고 하는 듯 싶었다.

    김아연이 뭐 이런 순둥이가 다 있나 싶은 얼굴로 단정한 입술을 열었다.

    "섹스 프렌드. 나랑 섹파 안 할래요?"

    국민 며느리는 개뿔.

    김아연은 잔악무도했다. 그녀는 더 없이 단아한 얼굴로 내게 남은 마지막 이미지까지 개박살 내 버렸다. 그렇지만…….

    "콜."

    거부하지는 않았다.

    김아연이 더 없이 환한 얼굴로 내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키스도 드럽게 잘하네.

    팔방미인은 뭐든 잘하는 것 같았다.

    섹스도, 키스도.

    "으으으……!"

    심지어 그녀는 애무도 잘했다.

    ***

    현란한 손짓에 내 몸이 더없이 뜨거워졌다.

    녹아내린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을 때 김아연이 호텔을 떠났다. 그녀는 매일 생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였고, 나는 그냥 백수일 뿐이었다. 아쉽지만 그녀는 직업에 대한 책임 의식이 성적 욕망보다 강했다.

    "섹스든, 배틀이든. 뭐든 다 좋으니까. 연락 씹지 마요!"

    한 마디를 남기고 김아연이 떠난 뒤 나는 한동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전투 기록을 통해 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실 웃으면서.

    "국민 며느리의 섹파라. 뭐, 부작용이 없는 거 같으니까."

    어쨌든 혼자 남은 나는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고 호텔을 나섰다. 샤워를 막 끝내고 나왔을 때 다른 대전이 잡혔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게 아니라도 호텔 방에 혼자 있고 싶지는 않았겠지만.

    새로 잡힌 결투 장소로 향하며 나도 모르게 김아연에 대해 생각했다. 아무래도 너무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꽤 신기한 고유 기술이란 말이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김아연의 고유 기술은 정말 신기했다. 자기 활력의 일부를 소비하여 그보다 더 큰 피해를 주는 기술은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정력이 아니라 활력을 사용하여 기술을 발동시킨다는 게 놀라웠다.

    이런 독특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보니 김아연은 체력에 올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반려를 맺는 게 아니라면 사냥이 불가능했다. 몽마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몽마에게 피해를 주어야하니까.

    확실히 신기한 기술이었지만 나는 딱히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내가 더 강하니까.

    김아연보다 내가 더 강하기에 부러울 리가 없었다. 강자는 약자를 부러워하지 않았다. 약자가 강자를 부러워하는 건 몰라도.

    어느새 약속 장소에 도착했지만 보스 앱이 알람을 울리지 않았다. 그 말은 곧 아직 결투 상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오늘 얻은 업적은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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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녀의 절정]

    + 평생 절정에 오르지 못한 참가자에게 주는 피해 10% 상승.

    + 결투 징벌 2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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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득 예 팀장이 생각났다. 그 뒤로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기는 했지만,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날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나?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다보니 솔직히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를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러기에는 그녀가 처한 상황이 조금 복잡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애써 예 팀장에 대한 생각을 지우며 나는 다른 업적도 확인해 보았다.

    백전 백승, 이백전 이백승.

    백전 백승은 결투 승리 100회를 하는 순간 얻은 업적이고, 이백전 이백은은 200회를 달성하는 순간 얻은 업적이었다. 한 번도 결투에서 지지 않고 승리 조건을 만족하면 얻게 되는 두 업적은 인간형에게 10%와 20%의 데미지를 더 주는 효과가 있었다.

    일전의 연결되는 업적처럼 조합이 가능할 것 같았지만, 왠지 이 두 개로를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 강했다.

    300전까지는 함 기다려 봐야겠지. 이것도, 저것도. 모두.

    막 업적창을 닫았을 때였다.

    보스 앱이 반짝였다.

    ['치명의 반지'가 팔렸습니다.]

    ['동화 40개'를 획득합니다.]

    매매창에 올려놓고 잊고 있었던 반지가 팔렸다.

    "후우……. 진짜 조그마한 거 먹여 살리다가 허리가 휘겠네. 휘겠어."

    미야프의 먹이 값을 버는 게 쉽지 않았다.

    그 녀석은 돈 먹는 하마였다. 아니, 하마보다 더했다.

    미야프는 탐욕스런 아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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