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104화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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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황스러움에 파묻힌 그때 날 구원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니? 고영 씨한테 꼬리치니?"

    날이 바짝 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모지현이었다. 그녀는 가운만 걸친 채 미니바로 걸어오며 서슬 퍼런 눈빛을 뿌리고 있었다.

    저게 본모습이겠지.

    모지현의 등장으로 인해 나는 마음을 추스를 소중한 시간을 벌었다.

    금세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나는 모지현에게 반대쪽 자리를 권하며 말을 돌렸다.

    "어서 와요. 일찍 일어났네요?"

    "처음이 아니잖아요. 그래도 정말 너무 좋았어요, 고영 씨."

    혹한의 한기를 뿜어내던 모지현의 눈가에 사르르 봄이 내렸다. 그녀는 살살 눈웃음치며 내 곁에 앉더니 이내 친한 척 몸을 기댔다.

    은근한 스킨십에 잠시 움찔했지만 나는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모지현에게 어깨를 내어주는 것으로 나는 조강혜의 끔찍한 구애를 회피할 수 있었다.

    물론 완전히 회피한 것 같지는 않지만.

    조강혜가 간신히 화를 참은 얼굴로 날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었다.

    "고영 씨. 전 정말이에요. 그리고 쟤처럼 한 번 갔다 오지도 않았어요. 아이도 없고요."

    의미심장한 조강혜의 말이 터지기 무섭게 내 어깨에 작은 지진이 일어났다. 조강혜의 의도대로 모지현이 크게 동요하는 듯 했다.

    나는 분노에 몸을 떠는 모지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그녀를 안정시켰다.

    같잖은 수작에 넘어갈 정도로 내가 멍청해 보였나?

    조강혜는 나름 자신의 장점을 어필한다고 한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그저 못된 심보의 놀부 마누라처럼 보일 뿐이었다.

    차갑게 식은 내 눈빛을 뒤늦게 확인한 조강혜가 움찔 하는 게 보였다.

    내 입꼬리가 더욱 바짝 올라갔다.

    "조강혜 씨. 스스로 너무 추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나라면 너무 쪽팔릴 것 같은데."

    담담하게 내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조강혜의 얼굴에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균열이 일어났다. 반대로 내 어깨에서 일어났던 지진은 자취를 감추었다.

    조강혜가 무어라 변명을 하고 싶은지 내 허벅지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저기요. 오해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했든 안했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사자가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그게 중요할 뿐이죠. 지현 씨? 나 좀 데려다 줄래요?"

    "아……. 벌써 가시게요? 좀 더 놀다가 가셔도 되는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지현이 따라 일어서며 아쉬운 기색을 비췄다. 그녀뿐만 아니라 조강혜도 덩달아 일어나더니 애달픈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 히발. 결투가 무슨 히로뽕도 아니고. 왜 이래?

    이유를 알 수 없어 답답했지만, 그걸 대놓고 물어볼 수는 또 없는 노릇이었다.

    여전히 조강혜가 떠나가는 님을 바라보는 얼굴로 날 졸졸 따라왔지만, 나는 더 이상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별장을 나섰다.

    일단 부담스러운 조강혜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아니, 떠나지 못했다.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나를 대려다 줄 모지현은 알몸에 가운만 입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전투는 전투였고, 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눈치 빠른 모지현이 슬쩍 나를 달래는 척 나를 다시 별장 안으로 이끌었다.

    "고영 씨. 그래도 좀 쉬었다 가요. 고영 씨도 피곤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술 마셨다면서요?"

    "……알았으니까, 이 팔 좀 놓고."

    "왜요? 난 좋기만 한데."

    내 팔에 달라붙은 모지현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날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슬쩍 가운을 풀더니 맨살에 내 팔을 문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진짜 알다가도 모를 게 여자라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별장 안에 들어서자, 조강혜가 말 그대로 달려 왔다.

    내 앞까지 달려온 조강혜의 눈에는 그렁그렁 습기가 차 있었다.

    왜 이러는지 꼭 알아야겠네. 이거 이러다 큰 사고가 날지도…….

    고작 결투 한 번에 성격이 변한 조강혜의 모습은 여전히 날 찝찝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다른 여자들과 결투해도 이런 결과가 나온다면 나는 걸어 다니는 페로몬이 될 지도 몰랐다. 아직도 남들의 시선을 기피하는 나였기에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됐다.

    나보다 조금 늦게 조강혜의 상태를 파악한 모지현이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너 지금 우니? 천하의 조강혜가 울어?"

    "……안 그럴게요. 다신 안 그럴게요. 네?"

    아놔.

    이쯤 되면 모른척하기도 애매했다.

    상황이 복잡할 때는 의외로 정공법이 효과적이었다. 결코 귀찮아서 이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조강혜 씨. 아무래도 결투 후유증 같은 게 있나 봅니다. 사실 말이 안 되잖아요? 그쪽도 알고 있죠?"

    "아니에요!"

    "맞아요. 여기 지현 씨도 처음에 이상했어요. 결투를 치르고 나니 갑자기 말을 공손히 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은근히 스킨십을 유도하며 추파를 던졌고요."

    "추파라니. 너무해요!"

    담담하게 조강혜의 상태를 설명할 때 모지현이 새침한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어깨를 으쓱하는 걸로 모지현의 작은 분노를 잠재운 나는 조강혜의 격량에 휩싸인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조강혜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보스가 나타났을 때 사람들이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 그리고 지금 조강혜 씨가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이유. 모두 같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아……. 그럴 법 한데요? 저도 고영 씨에게 처음 죽을 뻔했을 때. 그때 정신을 차리자마자 고영 씨가 그렇게 듬직해 보일 수가 없었어요."

    말을 하다 보니 의문이 점점 해소되는 것 같았다.

    소연이랑 현아를 보낼 때는 솔직히 지금처럼 무지막지한 데미지를 준 건 아니었으니까.

    왜 오늘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에 대한 의문까지 풀게 되자 나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 이유는 바로 내 옆에 있었다.

    나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나와 조강혜를 번갈아 보던 모지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지현 씨. 처음이랑 지금이랑. 좀 다르죠?"

    "네? 아뇨. 처음도 좋았고, 아까도 좋았어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아니 그거 말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날 봤을 때 느낌? 감정 같은 거요."

    "아아!"

    모지현의 놀란 얼굴만으로도 대답으로는 충분했다.

    나는 점차 눈물이 말라가는 조강혜를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린 채 단언했다.

    "지금이야 여파가 좀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없어 질 겁니다."

    물론 뻥을 좀 섞었다. 나라고 이걸 확신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런 생각은 조강혜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아니면요. 아니면 어떡할 건데요?"

    "아니면 아닌 거지! 어디서 억지야!"

    차마 내가 하지 못한 말을 모지현이 대신 조강혜에게 쏘아 붙였다.

    그렇다고 조강혜가 지금 무작정 억지를 부린다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녀의 눈빛에 떠오른 불안감은 진짜였다. 아마 자신의 감정이 타인에 의해 강제된다는 게 겁나는 것 같았다.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조강혜가 또박또박 한 마디씩 내뱉었다.

    "다시 해요. 나랑 한 번 더 해요. 결투든 뭐든!"

    "예?"

    "쟤는 한 번 더 하니까 나아졌다면서요! 나랑 한 번 더 해요! 당장!"

    조강혜가 거칠게 입고 있던 가운을 활짝 열며 소리치고는 간절한 눈빛으로 날 계속 바라보았다.

    나는 말없이 조강혜를 바라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물론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강혜의 제안을 받아 들였다.

    경험치를 주겠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었다.

    ***

    나는 지금 축구를 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 축구는 아니었다. 전후반을 치르는 건 같았지만, 90분을 미친 듯이 달리지는 않았다. 또한 11명씩 팀을 이루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스트라이커였고, 회원들은 골키퍼였다.

    1명의 스트라이커와 19명의 골키퍼의 전반전 경기는 19 대 0이라는 결과로 끝났다. 나름 골키퍼들이 분전했지만 워낙 실력 차이가 컸기에 어쩔 수 없었다.

    이어진 후반전도 마찬가지였다.

    조강혜의 부탁과 애원 사이의 그 무언가를 들어주기 위해 막 결투를 시작할 때 한두 명씩 회원들이 일어났고, 조강혜를 보냈을 때 그녀들은 골키퍼 장갑 대신 가운을 벗으며 내게 도전을 해 왔다.

    아주 애정어리다 못해 폭발한 눈빛으로.

    결국 나는 모지현을 제외한 19명의 회원들을 또 다시 상대해야했다.

    뭐, 결과는 똑같았지만.

    최종 스코어 38 대 0으로 일방적인 승리였다.

    또 다시 클럽 다이아몬드의 회원들을 홍콩으로 보내버린 나는 무대 앞 소파에 앉아 있는 모지현의 곁으로 가서 앉았다.

    내가 앉기 무섭게 모지현이 몸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이 처음으로 귀엽다고 생각했다.

    "지현 씨는. 더 안 해요?"

    "……못해요."

    "못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네. 못해요. 만약 더 했다가는……. 제 몸이 녹아 버릴 것 같아요. 다음에. 정말 다음에 해요. 아니, 해 주세요."

    확실히 아까 전 조강혜와 다른 태도였다. 모지현은 나를 향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애정까지는 아니었다. 그것도 섹스 배틀에 한해서 만들어진 호감일 뿐이었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조강혜 씨처럼 미저리 같지 않아서."

    "풋! 진짜 말도 안 되는 거 알아요? 걔 자존심은 진짜 엄청 센데."

    "어쩌겠어요. 이놈이 워낙 잘나서 그런 걸."

    내가 엑스칼리버를 손으로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자, 모지현이 크게 웃으며 내 어깨를 살짝 때렸다.

    약간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는 스킨십이었지만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당연히 실실 웃는 이유가 있었다. 전후반을 모두 마친 덕분에 나는 레벨을 하나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내 레벨은 38이었다.

    "근데 여기 회원 분들 다 돈이 썩어 나요? 무슨 경험치를 그렇게 많이 쌓아 놨어요?"

    "네? 아아. 별 수 없잖아요. 레벨 20만 되도 피부가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데. 다들 눈에 불을 키고 올렸죠, 뭐. 저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피부 좋아진 거 잘 모르겠는데. 여자랑 남자랑 다른가?"

    "다를 걸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레벨 올리기가 좀 더 쉬운 편이라고 보고 받은 거 같은데. 게다가 여자들은 신체 단련 스킬이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전신 성형 스킬?"

    올. 그건 몰랐네.

    내가 놀란 눈으로 모지현을 바라보자, 그녀가 눈치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별 거 아니에요. 상점에도 파는 장비로도 가슴이나 엉덩이 사이즈를 키울 수는 있는데. 그것보다는 스킬을 배우는 게 더 나은 정도라고 생각하면 돼요. 한 마디로 라인이 좀 산다고 해야 하나?"

    "아……. 남자들도 있어요. 작은 고추, 작고 매운 고추. 큰 고추. 크고 매운 고추. 크고 아름다운 매운 고추."

    "푸흡! 후아, 진짜 보스 개발자 얼굴을 보고 싶네요. 아, 본적이 있긴 있네요. 전에 오픈할 때. 아무튼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작은 가슴, 작고 예쁜 가슴. 이런 식으로요."

    "근데 이건 계급이랑 가성비를 보면 영 아니잖아요? 평민쯤 돼야 큰 고추를 장착할 수 있는데. 외형은 모르겠지만, 성능은 좀 아닌 거 같은데."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다들 미용 스킬을 배우는 거죠. 여자의 가장 큰 무기는 외모니까요."

    확실히 신체 미용은 여자가 유리해 보였다. 남자들은 장식란에 상점표 고추를 장착하는 게 전부였다. 물론 나는 내 고추가 작았어도 장식창을 이걸로 허비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효율이 떨어졌으니까.

    단적인 예로 평민이 돼야 낄 수 있는 큰 고추는 타격력 3을 올려주었다. 아이템 설명을 보면 성기 길이는 3Cm를 올려주고. 고작 이걸 위해서 장비라고는 무기와 장식 뿐인데, 그 중 하나를 허비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내게는 한 계급 이하의 물품을 써야하는 제한이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두런두런 모지현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의외로 남성 참가자와 여성 참가자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름 유익한 시간이었다. 실제로 도움이 될 지는 미지수였지만.

    어쨌든 나는 모지현에게 얼른 승급하라는 말을 하며 나름 어장에 신경을 썼다.

    "……무슨 가두리 양식장도 아니고."

    "네? 무슨 말이에요, 고영 씨?"

    "아네요. 아무튼 승급하면 훨씬 재밌을 거예요. 강력 추천합니다."

    "승급하고 경험치를 더 많이 뺏어가려고 그러는 거죠?"

    "맞습니다."

    "호호! 하여튼……. 얄미운데, 얄밉지가 않아요. 고영 씨는. 알겠어요. 경험치를 무럭무럭 먹을 테니 제대로 빨대 꽂아 주세요."

    "굵직한 빨대를 최대한 깊숙이 꽂겠습니다."

    은근슬쩍 야한 분위기를 유도했지만 모지현은 정말 나와 더 이상 결투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최소한 오늘은.

    마침 그때 직원이 다가와 식사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왔다.

    나와 모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널찍한 식탁에 앉아 호화로운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식사를 끝내고는 제대로 샤워를 했고, 옷도 갖춰 입었다. 그것은 모지현도 마찬가지였다.

    귀가 준비를 끝내고 나와 모지현이 함께 1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조강혜와 다른 회원들이 가운만 입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살짝 긴장한 눈으로 조강혜를 바라보았다. 이내 긴장이 풀렸다. 그녀는 더 이상 비이성적인 감정이 터진 일종의 오르가즘 중독 상태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추태를 보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인연은 오래 이어졌으면 좋겠어요. 그래 줄 거죠?"

    "좋은 인연이라면. 물론입니다."

    '  더 이상 대화는 없었다. 조강혜뿐만 아니라 첫 패배 직후 보였던 다른 회원들의 이상한 감정도 많이 옅어져 있었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며 내 마음은 더욱 가벼워졌다.

    물론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회원들과 찐하게 인사를 끝낸 나는 더 없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별장을 나섰다.

    가벼운 일탈이었지만, 꽤 많은 것을 얻은 하루였다.

    아주 많은 것을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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