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98화 (9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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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내 입안에 있었던 찻물이 소강석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너무 놀라 사래가 들린 와중에도 내가 사과를 할 정도로 소강석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큭! 캑! 크흠! 정말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다짜고짜 말한 제 탓이 큽니다. 이걸로 닦으시죠."

    자기 얼굴이 엉망이 된 와중에도 소강석은 내게 먼저 냅킨을 건넸다. 내가 입가를 닦고 나서야 그가 자신의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어떤 면에서는 참 대단한 남자였다.

    잠시 대화가 끊겼지만 그 덕분에 분위기를 전환할 수 있었다.

    찻물 대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마신 나는 따끔한 목을 만지며 다시 확인해 보았다. 내가 환청을 들었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나보고 섹스 배틀을 해달라는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무례한 부탁인 줄 알지만……."

    "아뇨. 무례하고 나발이고. 싫습니다. 난 그런 취향이 아닙니다. 게이든 레즈든. 당사자들이 좋다는데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 전 아닙니다. 전 싫습니다."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 내 얼굴은 더 없이 차가워졌다. 당연했다. 아무리 내 생식기가 정상이 아니라도 취향은 확고했다. 난 남자보다 여자가 훨씬 더 좋았다.

    칼 같은 거절에 소강석이 움찔하고 있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내 취향을 강조했다.

    "저 여자라면 환장합니다. 전생에 총각 귀신이었는지 아주 미칩니다, 미쳐요. 그러니 방금 부탁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아니, 저기……."

    "아, 물론 소 실장님의 취향은 존중합니다."

    "저도 여자가 좋습니다."

    "하지만……. 네?"

    "저도 박 사장님처럼 여자라면 환장하는 놈입니다. 게이가 아닙니다."

    어. 이게 아닌데.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잠시 멍한 눈으로 소강석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늦게 내가 오해했음을 깨달은 소강석이 허탈한 웃음을 흘리고 말했다.

    "이거 박 사장님이 크게 오해하셨나 봅니다. 섹스 배틀은 제가 아니라 제가 모시는 분. 아니, 그러니까."

    "아아, 잠시만요. 그러니까 방금 제가 오해했다는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게이가 아닙니다.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습니다."

    "……아, 예."

    단호한 소강석의 대답에 목이 간지러웠다. 아무래도 내가 실수한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큰 실수를.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날 빤히 바라보던 소강석이 여전히 감정 없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박 사장님께 좀 무례한 부탁을 하는 건 맞습니다."

    "무례한 부탁이라뇨?"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소강석이 살짝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이내 그가 모종의 결심을 한듯 결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모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께는 여러 자식들이 있습니다. 제가 도련님과 아가씨로 모시는."

    "그래요?"

    "예. 회장님께서 손을 잡아 주시지 않았다면, 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겁니다."

    정확하게 그 회장이라는 사람과 어떤 인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은혜를 입었고, 갚기 위해 뭐든지 하겠다는 의지는 느껴졌다.

    "그리고 회장님의 막내 아가씨께서 부탁을 해왔습니다. 사람을 구해달라고."

    "그 아가씨라는 여자의 취향이 나랍니까?"

    "아닙니다."

    응? 또 헛다리야?

    연이어 오해를 하게 되자, 오히려 담담했다.

    나는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고, 소강석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시 말을 이었다.

    "회장님과 비슷한 위치에 계신 분들의 자제들이 만든 모임이 있습니다. 도련님들이 만든 모임도 있고, 아가씨들이 만든 모임도 있습니다. 그 중 아가씨께서 만든 모임이 이번 주말에 있습니다."

    "일요일이라고 해도 이제 3일 남았는데요?"

    "예.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박 사장님께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아니. 다 좋은데요. 근데 도대체 무슨 모임인데 섹스 배틀을 해야 한답니까?"

    대충 어떤 사정이 있다는 건 알겠지만, 그 사정과 섹스 배틀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답답한 얼굴로 그냥 다 말하라는 눈으로 바라보자, 소강석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봤자 그가 가진 패는 하나뿐이었다. 이내 자신이 가진 패를 꺼내 놓는 소강석이었다.

    "사교 모임이 있습니다. 외부에 알려진 모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모임도 있습니다. 그 중 이번 모임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모임입니다."

    "그러니까 그 모임이 뭐냐구요."

    "……섹스 파티입니다."

    봉인이 풀린 소강석의 이야기는 간단했다. 재벌가의 사모님들이 즐기고 있는 이 사교모임은 그녀들이 만든 게 아니었다. 클럽 다이아몬드의 창시자는 의외로 그녀들의 부친들이었다.

    이 나라의 이너서클은 한국전쟁 이후 혼맥으로 이어져 있었다. 당연히 정략결혼이었다. 그 대상은 군사 정부 시절에는 당시 권력을 가진 정치가였고, 민주 정부 이후에는 주로 공고한 위치를 다진 다른 재력가였다.

    혼맥으로 높디높은 철옹성을 지었지만, 정략결혼이 늘 그렇듯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그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바로 클럽 다이아몬드였다.

    "일종의 쾌락을 배출하는 쓰레기통이네요. 결혼은 하면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라고 만든."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다 다른 법입니다. 돈이 많든 없든, 힘이 강하든 약하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뭐, 화류계에 오래 있으니 수많은 인간 군상들을 겪었겠죠. 탓할 생각도 없고, 혐오할 생각도 없습니다."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곳에는 두 가지가 없습니다. 로비와 이름.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 그것이 클럽의 존재 할 수 있는 근본이니 말입니다."

    소강석의 변명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난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굴 납치해서 강간하는 게 아니면 무슨 상관이야.

    "강제성만 없으면 뭘 하든 내가 신경 쓸 게 아니죠. 그런데 나보고 거길 가서 사모님들 장난감이 되라는 말입니까?"

    문제는 이거였다. 조금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클럽의 참가자가 되는 순간 상황은 달라졌다. 나는 누군가의 장난감이 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성적 장난감이라면 더욱 더.

    역시 난 좀 삐뚤어진 놈이야.

    내 탐탁지 않은 기색에 소강석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자신을 낮추면서까지 이렇게 날 설득하려는지 모르겠다.

    "아닙니다. 고영 씨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물론 장난감……. 맞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모임은 그런 게 아닙니다. 막내 아가씨가 곤란한 상황에 놓이셔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그냥 속 시원하게 말하는 게 어때요? 그게 날 것 같은데."

    "후우……. 막내 아가씨와 사이가 안 좋은 분이 모임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과 자주 충돌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모임 안에서든, 맡고 있는 회사 일이든. 어디서든 말입니다."

    소강석이 자포자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내 표정에는 호기심이 피어났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도 하는 짓은 다 똑같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치한 감정싸움을 들은 나는 비웃음이 흘러나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누가 더 강한지 내기를 했다고요? 그 내기가 섹스 배틀이고?"

    "예, 그렇습니다. 서로 자신들이 지정한 사람과 섹스 배틀을 해서 누가 더 뛰어난지 가리자는 내기를 했습니다. 그것도 모임 안에서 공개적으로 말입니다."

    "아주 개쪽을 주려고 작정했나 봅니다? 섹스 배틀로 절정에 오르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후우."

    소강석이 내 비꼼에 무거운 한숨으로 답했다.

    "그런데 소 실장님은 그쪽 아가씨가 질것 같아서 날 추천하는 겁니까?"

    "예. 사실 아가씨뿐만 아니라 다른 가문의 자제분들도 섹스 배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레벨이 높아질수록 피부가 고와진다는 말에 경험치를 돈을 주고 샀을 뿐입니다. 게다가 하필 아가씨의 상대가……."

    "상대가 누군데요?"

    "이쪽 업계에서 유명한 놈입니다. 여자를 후리는 대는 타고난 놈입니다. 그런 놈이 레벨까지 높다고 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그런 놈이랑 아가씨랑 섹스 배틀이라지만 섹스를 하겠다니 마음이 상한 거 같은데요?"

    움찔.

    내가 장침을 소강석에게 찔렀나 보다. 그의 얼굴이 더 없이 딱딱했다. 자존심 싸움은 그의 아가씨만 하는 게 아니었다.

    어느 정도 상황은 이해한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가게 에이스라는 여자. 다혜라고 했던가요? 그 여자를 한 방에 보내는 걸 봤으니. 아마 내가 레벨이 높다는 건 알 테고. 그러면 아가씨와 내기한 다른 아가씨를 순식간에 보낼 게 분명하고. 덕분에 소 실장님의 아가씨는 더러운 놈과 전투를 오래할 필요가 없고. 그런 겁니까?"

    "……박 사장님이 먼저 나서주시면 아가씨께서 쓰레기 같은 놈에게 몸을 허락할 필요는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굳이 좁은 무대에서 네 사람이 뒤엉키지 않아도 될 테니 말입니다."

    아이고, 이 아저씨야. 당신 충심은 알겠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지.

    혀를 차지 않을 수 없었다. 소강석의 성격이야 우직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너무 아가씨라는 사람을 순수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봐요, 소 실장님. 사교 클럽이니 뭐니 해도. 결국 난교 파티잖아요? 그런데 출입하는 아가씨가 무슨 요조숙녀겠어요?"

    "……방금 말씀은 못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이제 보니 그냥 꽉 막힌 사람이었다. 소강석이라는 남자는.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애초에 설득이 불가능한 사람을 설득하는 취미는 없었다. 그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있었다.

    "좋아요. 그럼 내가 그쪽 아가씨가 쪽팔리는 일이 없도록 해주면. 내가 얻는 건 뭡니까?"

    "아가씨께서도 따로 사례를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제가 따로 준비한 게 있습니다."

    소강석이 내 앞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밀었다. 그의 휴대폰은 보스 앱이 실행된 상태였다.

    "호오! 동화 주머니 10개라. 이걸 다 어떻게 구했어요?"

    "애들 빛을 없애주는 조건으로 받았습니다. 물량 대부분은 회장님께 올렸지만, 이것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부족하면 더 마련해 보겠습니다."

    나도 꽤 부자였지만 눈앞의 소강석이나 그가 모시고 있는 회장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돈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힘이었고, 그 힘은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손쉽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 장소랑 시간. 문자로 남겨요. 소 실장님이 그렇게 걱정하는 아가씨가 추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대신 귀찮은 일은 막아줘야 합니다. 그쪽 아가씨 대신 추한 꼴을 당하는 아가씨도 꽤 힘이 있는 가족을 두고 있지 않겠어요?"

    "염려 마십시오. 귀찮은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럼 믿고 갑니다. 아, 밥은 잘 먹었어요."

    내가 정자를 내려가는 동안 굽어진 소강석의 허리는 펴지지 않았다.

    ***

    소강석에게 약한 척을 했지만 사실 아무리 재벌이라도 합법적인 방법으로 날 괴롭힐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건물주들과 달리 나는 은행 융자를 끼지 않았다. 세금을 더 내더라도 누군가에게 빚지고 사는 게 싫은 탓이었다. 물론 그들이 악독한 마음을 먹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때는 나도 삼촌의 힘과 리아의 인맥까지 동원하면 어느 정도 방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보지에 다이아몬드 두른 애들은 어떻게 노나 한 번 보고 싶기도 하고."

    "고영 씨. 뭐라고 했어요? 나 아직 한국말 잘 못해요."

    "잘이 아니라 아예 못하잖아?"

    비록 경험치를 얻을 수는 없지만, 그냥 집에 있는 건 너무 심심했다. 그냥 축 늘어져 있는 것보다는 보스의 힘을 빌려서라도 벌떡 선 엑스칼리버를 보고 있는 게 나았다. 겸사겸사 아이템 노가다도 할 겸 나는 리아와 함께 응원 단원을 사냥하러 나왔다.

    내 뒤를 쫄래쫄래 따라오며 캐묻는 리아를 향해 면박을 주었지만, 그녀는 이정도 면박에 기가 죽지 않았다.

    "근데 언제 줄 거야? 이거 먹튀하는 건 아니지?"

    "내일이면. 아니, 3시간 뒤면 드릴 수 있어요. 점점 사람들이 동화를 안 팔려고 해서 늦어졌어요. 요즘 유럽에서는 보스가 신드롬이에요. SNS로 몽마 사냥한 걸 인증하는 게 유행이라나?"

    "퍼거슨은 현자였어. 도대체 왜 그러지? 안 쪽팔리나? 아니면 모자이크를 해서 올리나?"

    "당연히 모자이크해서 올리죠."

    "하긴. 아무리 그래도 공개된 곳에 가슴이랑 성기를 노출하는 건 아니지."

    리아의 대답에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동양보다 서양 쪽이 성에 대해 개방적이라지만, 그건 상대적일 뿐이었다. 사람에 따라, 혹은 집안에 따라 성에 대해 관대하거나 보수적인 법이었다.

    다만 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오해했음을 시사했다.

    "어? 아닌데요. 물론 가슴이랑 성기를 모자이크하는 사람도 있지만……."

    "안하는 사람도 많다는 말이야?"

    "아뇨. 그게 아니라요. 그냥 얼굴만 모자이크하고 그대로 올리는 사람도 꽤 많거든요."

    "하……."

    진짜 세상은 넓고 또라이는 많았다.

    떠들다보니 어느새 대학교 교정에 들어섰다. 나는 리아에게 망보라 부탁하고 바로 사냥을 시작했다. 여전히 미야프를 대동하는 건 꺼림칙해서 집에 두고 왔지만.

    워낙 데미지가 높다보니 말 그대로 원샷원킬이었다.

    순식간에 한 마리를 사냥한 내가 바로 다음 사냥감을 절정으로 보내버렸을 때였다.

    [업적 '몽마 사냥꾼'을 획득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떡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날 내가 받은 떡은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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