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94화 (94/200)

<-- Scarecrow -->

리아의 말 대로였다.

내가 허수마비 앞에 서는 순간 어둠 속에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핫이슈는 핫이슈인가 보네. 아주 타 죽겠어."

"고영 씨. 전 바로 준비할게요.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금방이라도 달려들 기세에요."

잔뜩 꼬인 내 말에도 불구하고 리아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주변을 살피던 그녀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예상보다 상황을 낙관한 것 같았다.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통화를 나누던 리아가 날 바라보며 소리쳤다.

"10분! 10분 뒤에 떠날 거예요!"

"아아, 알았어. 그 정도면 충분해."

리아와 달리 난 그리 긴장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간을 오래 끌 생각은 없었다. 그냥 한 번 어떤 건지 확인하는 차원에 불과했다.

이미 걸어오며 나름의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나는 거침없이 멀뚱히 서 있는 허수마비에게 다가갔다. 내가 손을 뻗어 투박한 허수마비의 가슴을 만지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휘이잉!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이내 허수마비의 몸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본능적으로 손등으로 눈을 가린 나는 차츰 빛이 사그라지는 걸 느끼며 손을 내렸다.

그 순간 내 입이 벌어졌다.

"아……."

어느새 허수마비가 허수어미로 변해 있었다. 모형 인형 같았던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내 눈앞에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몸의 비녀가 서 있을 뿐이었다.

이래서 허수어미라 그랬구나.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감이 왔다.

물론 놀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보다 호기심이 앞섰다.

"그럼 실례."

진짜 사람처럼 변한 허수어미를 바닥에 눕힌 나는 바로 공격할 수 없었다. 허수어미는 나보다 음격이 높았고, 선공은 허수어미의 몫이었다. 그래봤자 데미지 1짜리 공격이었지만.

허무어미의 공격이 끝나고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평타를 날렸다.

퍽, 퍽퍽!

['허수마비'에게 446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허수마비'에게 1,354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허수마비'에게 1,149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보스의 판정을 들으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수마비는 이름 그대로 허수아비였다. 내 타격력보다 더 높은 피해를 받는다는 건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냥 껍데기인가? 공격력도 1. 방어력도 1. 다 1인가 보네. 거기에 악마형인가? 추가 데미지가 이렇게 붙은 걸 보면 그런 거 같은데."

한 번의 공격으로 꽤 많은 정보를 얻은 나는 또 다시 1의 피해를 받는 것으로 공격권을 회수했다.

공격권을 회수하는 순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알 수 있었다.

"……걸어 다니는 물약이네. 회복 스킬이 있으면."

허수마비는 데미지가 1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 말은 곧 허수마비와의 연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참가자의 활력이나 정력이 회복된다는 걸 의미했다.

뭐, 활력 회복 스킬이나 정력 회복 스킬이 있어야겠지만.

어쨌든 참가자 입장에서는 좋다고 할 수 있었다. 특히 지력 기반 참가자들은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정력은 활력보다 회복하는데 2배의 시간이 더 필요했고, 그것은 곧 사냥 속도를 줄이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 놈이랑 스파링을 뛰면 그냥 활력이고 정력이고 쑥쑥 차겠네."

실제로 보조 기술을 사용하며 턴을 넘기다보니 어느새 내 활력이 가득 찼다. 정력 회복 스킬이 없어서 정력은 오히려 감소했지만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허수마비는 개발자가 우리보고 더 열심히 사냥하라는 신호임에 틀림없었다.

전투도 언제든 마음대로 끝낼 수 있으니 정말 최고의 선물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한 가지 문제가 존재했다. 바로 인간의 부끄러움이었다.

옷을 입기 시작하면서부터 창피하다는 감정을 느낀 인간은 이렇게 공개된 장소에 서성이는 허수마비와 연습을 할 리가 없었다.

"뭐,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들 보다 쪽팔리다고 접는 사람이 더 많겠지."

개발자는 역시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의 감정을 모르니 이런 실수를 한 게 분명했다. 우리나라의 탁상 행성이 우주에 퍼진 것 같았다.

혼자 떠들면서도 나는 잘도 공격했다. 버프까지 더해져서 그런지 꽤 높은 데미지가 나왔다.

['허수마비'에게 511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허수마비'에게 12159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허수마비'에게 1337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허수마비'에게 1442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분명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데미지였지만, 허수마비의 피통도 지금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컸다.

여전히 무표정한 허수마비가 공격권을 회수하자마자 사용했다. 공격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기술이었다.

우우웅!

뭐지, 이거?

내 미간에 골이 파였다. 딱 봐도 회복 스킬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따듯한 느낌을 옥빛에 감싸였던 허수마비의 안색이 더욱 하얗게 변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공격해 보았다. 아직 버프 효과가 있었기에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큰 피해를 주었다.

더블 어택까지 터지며 총 5번에 걸쳐서 7천에 달하는 피해를 줬지만, 허수마비는 쓰러지지 않았다.

"진짜 피통이 얼마야?"

어이없어하는 내 목소리를 뒤로하고 허수마비는 다시 기술을 사용해 활력을 회복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확신이 들었다. 방금 회복 기술은 모든 활력을 회복하는 일종의 필살기가 틀림없었다.

지금 나로서는 허수마비를 절정에 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아니야. 방법이 있을 텐데, 방법이……."

"고영 씨! 일로 와요! 어서요!"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며 고집을 부리고 있을 때 리아의 다급한 외침이 귀에 꽂혔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썅!"

쌍욕이 튀어 나왔다. 처음 멀찍이 떨어져 발광 우비를 입고 있던 나를 찍던 사람들이 경보 선수처럼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내 개인 신상이 위험했다.

뭐, 우리나라에서 개인 신상 정보는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지만.

어차피 고민을 집에 가서 해도 됐기에 나는 리아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허수마비는 전투 강제성이 없기에 도중에 그냥 도망쳐도 상관없었다. 문득 다른 몽마들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도 잠시 제대로 된 의문이 들었다.

"……저긴 한강이잖아? 설마 물에 빠지자는 건 아니겠지?"

다행히 내 얼토당토않은 생각은 멋들어지게 빗나갔다.

리아의 곁에 다가갔을 때 유려한 곡선으로 쭉 뻗은 보트 한 대가 나를 반겼다.

"얼른 타요!"

"너 좀 쩐다. 진짜로."

"얼른요! 빨리 좀 타라구요!"

내 빈약한 상상력과 달리 리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했다.

카메라를 든 좀비 떼를 피하는데 필요한 건 소형 보트 한 대면 충분했다.

***

오랜만에 조용한 아침이었다.

리아는 혹시 새로운 몽마가 나타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와 달리 나는 그냥 소파에 누워 어젯밤 생각하다 말았던 것을 이어나갔다.

잘 익은 바나나 한 개를 까먹으며 TV를 보던 나는 새로운 문제를 깨닫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아, 젠장. 그럼 이젠 동렙만 침실로 끌고 갈 수 있는 거네? 아니지. 잠깐만."

지금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침실 꾸미기였다.

한 마디로 내 경험치를 침실에 처발라 침실의 기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비단 기능뿐만 아니라 외향도 가능했다. 단칸방에 불과한 지금 내 전투 침실도 경험치를 바르면 아방궁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만렙 필경으로도 모자라겠지만."

어쨌든 침실은 개조가 가능했다. 지금까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작은 기대를 앉고 보스 앱을 실행한 나는 처음으로 침실 탭을 클릭해 보았다.

"겉모습이 뭐가 중요해?"

개조 비용을 보는 순간 나는 미련을 버렸다. 귀족이 되어 평민 때보다 더 다양한 개조가 가능한 것 같아 보였지만 끌리지 않았다. 다양하고 화려해진 만큼 가격이 올라 있었다.

"무슨 쪼만한 티테이블 하나 놓는데 1만이야?"

분명 끌리는 것도 존재했다. 침실에서 공격력을 올려주는 마법진도 있었고, 생명력을 올려주는 조명도 있었다.

다 부질없었다.

내게 필요한 건 오직 나보다 높은 레벨을 가진 몽마를 침실로 끌어 들일 수 있는 방법이 전부였다.

아쉽지만 보스가 정한 규칙을 뛰어넘는 가구는 없었다.

입맛을 다신 나는 이왕 보스 앱을 실행한 김에 어제 미처 확인 못했던 걸 확인해 보았다.

시작은 백은 절구였다.

--------------------

[백은 절구]

+ 주요 기능 : 업적 조합.

+ 조합 재료 : 장착 물품을 제외한 모든 물품.

+ 귀족 등급까지 조합 및 생산 가능.

--------------------

"업적이라니."

의외의 한 방이었다. 솔직히 업적을 조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조합은 일단 아이템만 가능하다는 고정 관념 때문이었다.

뒤늦게 생각해 보니 보스는 업적도 일종의 아이템으로 취급했다. 그 증거가 바로 증표를 통해 업적을 활성화하는 방식이었다. 만약 아이템이 아니었다면 굳이 참가자가 활성을 할 필요도 없었고, 업적에 따른 증표를 지급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청동 절구를 통해 절구. 아니, 조합 시스템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한 상태였기에 살짝 회가 동했다.

"비슷한 종류. 혹은 연관성. 비슷한 옵션이나, 아니면 획득 조건인데."

턱을 쓰는 시간이 길어졌다. 무언가 잡힐 듯 말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안타깝지만 확 이거다 하고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다음을 기약하기도 싫었다.

나는 업적창을 둘러보며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업적을 모두 확인해 보았다.

---------------------

+ [여신 겁탈]

+ [최초의 동정]

+ [회심의 일격]

+ [역심의 일격]

+ [퇴근 거부]

+ [철야 작업]

+ [흑편 절단]

+ [백마 정복]

--------------------

지금까지 내가 달성한 업적은 모두 8개였다. 이 중 흑편 절단과 백마 정복은 정식 서비스 이후 얻은 거였고, 나머지는 모두 튜토리얼에서 획득한 업적이었다.

"일단 여신 겁탈이랑, 흑편 절단. 백마 정복은 빼야겠네. 연관성이 쥐똥만큼도 없으니까."

3개의 업적을 뺀 뒤에 남은 5개를 훑어보았다.

여전히 연관성이 떨어지는 게 남아 있었다.

최초의 동정까지 조합 대상에서 제외하니 견적이 딱 나왔다.

"회심의 일격이랑 역심의 일격. 그리고 퇴근 거부랑 철야 작업. 얻은 방식도 비슷하고, 효과도 같은 종류고. 흐음……."

청돌 절구처럼 동일 상징 3개가 필요하다는 제한이 없었다. 그 말은 곧 2개만 있어도 조합이 가능하다는 의미였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실패.

문제는 조합이 실패할 경우였다. 물론 성공하면 이보다 좋을 수 없겠지만, 실패하면 받는 피해가 꽤 컸다. 회심의 일격의 치명도 10이야 없어도 괜찮지만, 역심의 일격의 치명 증폭 25는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게다가 퇴근 거부와 철야 작업의 상태 이상 내성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 다 없다면. 그럼 어떻게 될까?"

한 번 생각해 보았다.

만약 두 개. 아니, 내 개의 칭호가 없어진다면? 그러면 내가 사냥하는데 얼마나 방해를 받을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생각보다 크게 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아, 그러고 보니 업적이 하나 더 있었지?"

예상치 못한 귀족 승급으로 인해 깜빡 잊고 있었다. 이게 다 보스의 안내 방식이 더 함축적으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결코 내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었다.

스스로 자위하며 업적창의 하단을 보았다. 그곳에는 증표 형태로 남아 있는 하나의 업적이 있었다.

곰의 괴력.

이름부터 마초적인 업적의 정보를 띄워 보았다.

--------------------

[곰의 괴력]

+ 극한의 근력을 가진 최초의 귀족.

+ 타격력 25% 증가.

--------------------

"올!"

칭호가 아니라 업적이었다. 그것만 해도 가치가 높아지는데, 옵션까지 끝내줬다. 물론 퍼센트로 증가하는 것보다 플러스로 상승하는 게 더 효율적이었지만.

"무슨 상관이야. 공짜 버픈데. 대박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는 망설임을 지웠다. 곰의 괴력을 그대로 장착했고, 동시에 4개의 업적을 증표로 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4개의 업적을 조합하다 날려도 전보다 난 더 강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전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이윽고 백은 절구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그대로 회심의 일격과 역심의 일격을 절구에 넣고 빻아 버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직접 빻은 건 아니었다. 앱을 통해 빻는 이미지가 부드럽게 이어졌다.

화면의 절굿공이가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그때였다.

[조합에 성공합니다.]

[업적 '반란의 수괴'를 획득합니다.]

아싸!

설상가상이라는 말이 있었다.

아쉽게도 지금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 대신 다른 말이 적용되고 있었다.

[조합에 성공합니다.]

[업적 '괴물 신입'을 획득합니다.]

금상첨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