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93화 (93/200)
  • <-- Scarecrow -->

    ***

    보스가 준 불씨는 희망이었다.

    나는 옷을 챙겨 입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보스가 남긴 불씨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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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직업]

    + 굴복시킨 몽마를 통해 실력을 증명하라.

    + 임무 현황 : 혐오/관심

    + 기본 보상 : 전용 직업

    + 전체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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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

    무거운 신음이 흘렀다. 난감함을 넘어 당혹스러웠다.

    여전히 알몸인 채로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이내 잘게 떨리는 손으로 보스 앱을 실행시켰다. 지금 상황에서 집중력을 발휘해 머릿속으로 창을 띄우는 건 불가능했다.

    금세 핸드폰에 작은 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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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무늬 다람쥐]

    + 친밀도 : 혐오

    + 낮은 확률로 '행운의 꼬리' 발동.

    + 회피 15 상승.

    + 16단계 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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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당혹스러워한 이유가 밝혀졌다.

    전에 한 번 도토리를 먹였음에도 불구하고 줄무늬 다람쥐는 나를 싫어했다. 아니, 싫어하는 걸 넘어 혐오하고 있었다. 빌어먹게도 이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젠장. 어떡하지?"

    막막하다 못해 눈앞이 깜깜했다. 물론 펫의 친밀도를 높이는 방법을 모르지 않았다. 몽마든 애완동물이든 일단 길들였다면 친해지는 방법이야 똑 같았다.

    배불리 먹이고, 즐겁게 놀아주고.

    딱 두 가지만 신경 쓰면 됐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두 가지를 신경 쓰지 못했다.

    가슴이 답답했다.

    "신경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있나! 친밀도를 높이려면, 그러려면! 하아!"

    몽마를 소환해야했다.

    일단 먹이든 놀든 무얼 하려면 몽마를 소환해야했다. 실제로 백과사전에도 그렇게 나와 있었다. 몽마는 오래 주인과 함께할수록 더욱 친밀해 진다고.

    "어쩔 수 없지. 집에서라도 소환해 놓고 지내야겠네."

    포기는 빨랐다. 괜한 오기를 부리지도 않았다. 어차피 내가 성질낸다고 들어줄 보스가 아니었다.

    비록 사냥할 때 소환하는 게 가장 친밀도를 빠르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이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남들의 시선에 민감한 내 성격이 못 버텼다. 그럴 바에는 그냥 전직을 미루는 게 나았다.

    어차피 전직하면 뭐해? 잡을 게 있어야지.

    고개를 저으며 애써 자위한 나는 종속창을 닫고 능력창을 열었다. 레벨업을 했으니 스탯을 분배할 생각이었다. 물론 투자할 능력은 당연히 속도였다.

    속도에 능력치 5개를 투자하고 보니 어느새 속도가 90이나 됐다.

    근력 100, 속도 90.

    깔끔한 수치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능력치를 투자한 다음 나는 보상을 확인해 보았다. 어쨌든 지금 기분 좋은 소식은 연속으로 퀘스트를 해결하며 받은 보상이 전부였다.

    기분 전환의 첫 시작은 칭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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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험가]

    + 최초의 귀족 관문 몽마 사냥.

    + 타격력 50 상승.

    + 마법력 5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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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외마디 탄성이 터졌다. 그만큼 좋은 옵션이 붙어 있었다. 지금까지 칭호를 바꿀 생각이 없었던 내 마음이 크게 동할 정도였다.

    마음이 동했으니, 한 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지금까지 쭉 끼고 있던 성체 파괴자를 내리고, 탐험가를 칭호창에 올려 보았다.

    칭호를 바꿨으니 이제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아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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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2,670/2,670

    + 정력 : 685/685

    + 경험 : 90/1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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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376

    + 마법력 :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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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41

    + 항마력 :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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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152

    + 회피율 :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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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61

    + 치명 증폭 : 125%

    + 치명 저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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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에는 탄성이 흐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 미간이 찌푸려졌다.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다시 칭호를 성체 파괴자로 돌려놓고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내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잠시 후 나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미간의 주름을 지웠다.

    "뻥튀기 옵션은 죄다 뻥이 심하네."

    활력 20%와 정력 10%의 칭호 효과가 사라졌지만, 내 활력은 194밖에 줄지 않았다. 정력은 더 볼 것도 없었다. 이는 하얀 독수리의 영혼이 추가시켜주는 2,700의 활력은 칭호 효과에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이었다.

    "튜토리얼은 진짜 튜토리얼일 뿐이네. 진짜."

    순간 헛웃음이 흘렀다. 과대광고에 속아 지름신이 내린 느낌과 비슷했다. 그렇다고 속이 쓰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번에 얻은 칭호가 아니라면 타격력 25를 올리는 탐험가를 껴야했다. 25와 50은 꽤 주는 의미가 달랐다. 만약 그 전에 이 사실을 알았더라도 칭호를 바꿨을 것 같지는 않았다.

    "아……. 그보다 드디어 반지를 낄 수 있겠네."

    치명의 반지.

    꽤 오래전에 얻은 이 반지는 평민 등급이었다. 직업 제한으로 인해 1단계 낮은 아이템밖에 낄 수 없는 나는 이제야 장착 조건을 달성한 셈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찾아온 보람을 그냥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얼른 치명의 반지를 장착한 나는 뿌듯한 얼굴로 상태창을 확인했다.

    "타격 376에 치명 71이라. 좋네. 좋아. 14,710의 경험치를 더 올려야 레벨업 할 수 있다는 것만 빼면."

    꿀꿀했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기분이 풀리니 자연스레 주변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잔디 위를 나뒹굴고 있는 내 바지가 보였다.

    아, 맞다.

    뒤늦게 내가 알몸이라는 걸 깨닫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었다. 보상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그보다 오밤중에 변태로 몰리는 일은 없는 게 더 중요했다.

    다행히 새벽이라 인적이 없었다.

    한 사람만 빼면.

    "고영 씨! 괜찮아요?"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온 리아가 헉헉 거리며 물었다. 얼마나 전력을 다해 달려왔는지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게다가 무릎을 굽힌 채 손으로 집고 서 있는 모습이 꽤 힘들어 보였다.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녀의 곁으로 걸어갔다.

    "괜찮……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몸은 멀쩡해."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아, 괜찮아. 멀쩡해."

    정신적인 충격만 빼면.

    뒷말을 생략한 덕분에 리아가 더 이상 걱정스런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나도 굳이 짜증나는 상황을 떠올리기 싫었기에 화제를 전환하며 걸음을 옮겼다.

    "애가 좀 특이한 기술을 써서 그렇지. 딱히 위험한 건 없었어."

    "그래서 중간에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막 이상한 거머리가 고영 씨 몸에 달라붙어서 피를 빨아 먹는 것 같았어요."

    그건 좀 아니지 않나?

    리아의 어처구니없는 비유에 내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어이없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오늘따라 칠푼이 코스프레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냥 말문을 닫아 버렸다.

    물론 리아는 아니었다. 그녀는 내 옆에 바짝 달라붙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세히 좀 말해주세요. 정확히 어떤 기술이었어요? 얼마나 대단한 기술이길래 고영 씨가 그렇게 꼼짝도 못한 거예요?"

    "꼼짝 못하긴 누가 꼼짝도 못해?"

    나름 유도신문을 하려는 모양이었지만, 리아의 의도가 너무 눈에 뻔히 보였다.

    문제는 내 자존심이었다. 은근히 내 자존심을 자극하는 리아의 행동은 성공적이었다. 물론 그녀의 당돌한 행동 덕분에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조금 깎였지만.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가 싱글거리며 더욱 공격적으로 물어왔다.

    "그러지 말고 좀 알려주세요. 네? 진짜 뭐였어요? 뭐였길래 꼼짝 못하게 한 거예요?"

    "꼼짝도 못한 게 아니라니까. 그냥 특이한 기술을 쓰더라고. 그러니까……."

    하는 짓이 좀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귀엽게 느껴졌다. 나름 열심히 사는 리아의 모습에 너무 튕길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나와 리아. 아니, 그녀의 방송국과 맺은 계약 내용 중에도 정보 공유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

    두런두런 응원 단장에 대한 정보를 풀며 걷다보니 어느덧 학교 밖이었다.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기에 나는 걸음을 멈춘 채 리아를 돌아보며 물었다.

    "오늘은 뭐 준비한 거 없어? 그냥 택시를 불러야하나?"

    "그럴 리가요? 이렇게 좋은 소스도 주셨는데. 제가 모실게요!"

    "모시는 건 좋은데. 굳이 팔짱을 껴야 해?"

    "그냥 좀 가주면 안 돼요?"

    내 심드렁한 표정에 리아가 씰룩했지만, 팔짱을 풀거나 하지는 않았다.

    리아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근데 리아. 뭐 하나 물어 봐도 돼?"

    "네? 물론이죠. 뭐가 궁금한데요?"

    "있잖아. 여자들은 팔짱을 끼면 자기 가슴이 남자 팔에 닿는 걸 모르나?"

    "킥!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당연히 느끼죠. 제 가슴이 벌에 쏘인 게 아니라면. 아니, 쏘여도 느낄 걸요? 마취해도 만지면 만지는구나. 하는 것처럼요."

    "그러니까 날 꼬시려고 이런다??"

    "……고영 씨. 진짜 못 된 사람인 거 알아요?"

    직설적인 내 물음에 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녀의 한심하다는 눈빛에 난 그저 어깨를 으쓱거리는 걸로 답할 뿐이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어색해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쌀쌀해졌을 뿐.

    ***

    봄이었지만 한강의 새벽바람은 차가웠다.

    택시에서 내린 나와 리아는 본능처럼 팔짱을 꼈다.

    서로의 팔이 아니라 자기 팔로.

    "좀 춥다. 그치?"

    "조금이 아니라 많이요. 으으. 추운 건 싫은데."

    "네덜란드 사람이 추운 걸 싫어해?"

    고정 관념으로 내뱉은 말에는 논리가 없었다.

    당연히 리아가 씰룩한 얼굴로 쨍하고 되받아쳤다.

    "북극에 사는 이누이트들도 추운 걸 좋아하지는 않죠."

    "아, 그건 그러네."

    논리만 없는 게 아니라 고집도 없었다.

    나는 선선히 리아의 말에 동의하며 걸음을 옮겼고, 리아는 내 행동에 피식 웃으며 걸음을 맞췄다.

    "근데 고영 씨. 조금 피곤해 보이는데, 오늘은 그만하는 게 어때요?"

    "피곤하긴 한데. 그래도 이왕 왔으니 한 번 확인하고 가야지. 난 피곤한 것보다 궁금한 걸 더 못 참거든."

    내 대답에 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캠핑장 중앙에 서 있는 허수아비. 안, 허수어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그녀를 따라 새로운 몽마를 살펴보았다. 그 순간 내 고개가 갸웃거렸다.

    "딱히 특이한 건 모르겠는데."

    "다행히 사람들이 없네요. 기자들은……좀 있지만."

    몽마에 집중한 나와 달리 리아는 그 주변 상황에 집중했나 보다.

    리아의 마땅찮은 기색이 묻어나는 말에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기자들이 있어?"

    "네. 저기 벤치에도 있고. 차에도 있고. 그리고 텐트에 있는 사람도 기자일 확률이 높아요."

    "골치 아프게 됐네."

    리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진짜 그런 것 같았다.

    자연스레 내 얼굴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채 익지 않은 감을 씹은 느낌이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가 쉴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리아가 품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내 얼굴로 들이 밀었다.

    "쓰세요."

    "웬 복면?"

    "복면 쓰고. 선글라스라스에 모자까지 쓰면 정체는 들키지 않을 거예요. 아! 그리고 이걸로 갈아입고요."

    리아가 내민 건 한 가지가 아니었다. 왼손으로 복면을 내밀고 있었고, 반대쪽에는…….

    "……우비?"

    "헐리웃 스타들이 애용하는 스카프는 제 권한으로 구매할 수가 없거든요. 너무 비싸서. 꺅!"

    리아가 아쉽다는 듯 말하다 말고 귀여운 비명을 질렀다. 나 때문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힌트를 얻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잡아 버렸다.

    놀란 눈을 하고 날 바라보는 리아의 얼굴을 내 코앞으로 가져온 나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런 게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아니. 아니지.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다. 잘했어, 리아."

    "아, 아. 네. 그럼 구입 루트를 알아 볼 게요.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지만. 아니. 그보다 그거 10만 달러가 넘을 걸요? 엄청 비싼 걸로 아는데……."

    "괜찮아. 이래봬도 내가 돈 많은 백수거든."

    리아의 걱정에 나는 자랑스럽게 답했다.

    그 순간 리아의 표정이 싹 변했다.

    나는 리아의 얼굴에 적힌 글자. 아니, 표정을 읽으며 낮게 물었다.

    "뭐야. 그 표정은? 지금 나보고 재수 없다고 한 거야?"

    "네. 솔직히 좀. 좀 많이 재수 없었어요. 방금."

    "……너도 좀 많이 솔직하네."

    이번에는 리아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게 답했다. 의외의 일격에 당한 내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아 내리더니 이내 다시 쇼핑백을 내밀었다.

    "일단 이거 받아요. 어차피 당분간 이렇게 다녀야 할 걸요? 그거 주문해도 시간이 꽤 걸린 텐데. 진짜 살 거예요? 그때 가서 정체가 드러날지도 모르는데?"

    "쓸모없어지면 그냥 중고로 팔지 뭐. 아무튼 좀 알아 봐줘."

    "네, 그럴게요. 아! 조심해요! 그거 다 LED란 말이에요!"

    "응?"

    리아의 주의에 놀란 나는 우비를 자세히 확인해 보았다. 진짜 그녀의 말 대로였다. 우비에는 작은 LED가 붙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우비에 왜 LED를 붙여야하는지 이해를 못하고 있을 때였다.

    "고영 씨가 그거 입고 전투를 시작하면, 제가 스위치로 켤 거예요. 그럼 밝은 빛이 나와서 사진을 찍어도 소용이 없어요. 대신 고영 씨는 눈이 부실 테니 선글라스를 써도 되고요. 어차피 허수마비는 옷을 입고도 싸울 수 있으니까요."

    "아……."

    리아의 똑 부러지는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잠시 나는 머쓱한 얼굴로 리아를 바라보았다.

    "저기 리아. 그러니까……."

    "그냥 알아만 볼게요. 구매하는 건 차근차근 결정하셔도 돼요."

    역시 리아는 똑똑했다. 그녀의 들쑥날쑥한 눈치가 이번에는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렇다고 윙크는 하지 마요. 남자가 무슨. 으으! 싫어."

    "……어, 그래. 그럼 갔다 올게."

    "같이 가요. 이거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거든요."

    리아가 축 늘어진 내 어깨를 두드려주며 함께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나는 멀뚱히 서 있는 허수마비 앞에 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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