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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ss-90화 (9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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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은 흘러 자정이 지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냥에 나섰다. 챙이 긴 모자를 푹 눌러쓰고 오밤중에 선글라스까지 쓰며 캠퍼스를 돌아다녔음에도 딱히 의심의 눈길을 받지는 않았다. 이건 아무리 부정해도 내 곁을 따라 다니는 리아 때문인 게 확실했다.

    이러고 혼자 돌아다니면 그냥 범죄자겠지만…….

    마지막 몽마를 사냥하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돌려 보았다. 스마트폰을 열심히 두드리는 리아의 얼굴이 훤히 잘도 보였다. 나라도 예쁘장한 백인 여자와 걸어가는 남자를 보면 그냥 부럽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을 것 같았다.

    뭐, 내 취향이랑은 좀 다르지만.

    나름 확고한 심미관을 다시 한 번 확인할 때 리아가 발이 꼬이며 몸을 휘청거렸다. 만세를 부르짖는 자세로 넘어뜨리는 그녀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다행히 그녀의 무릎이 아스팔트 바닥에 갈리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화들짝 놀란 리아가 가슴에 손을 모은 채 나를 올려다보았다.

    "고, 고마워요."

    "얼른 일어나. 아무리 밤이라지만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잖아?"

    심드렁한 내 말투에 리아가 목덜미를 붉혔다. 그녀는 서둘러 스스로 일어서며 옷매무새를 단정히 다듬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큰 사고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연히 나는 무뚝뚝한 얼굴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제 한 마리만 더 잡으면 오늘 사냥은 끝이었다. 나도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 전 일 때문인지 리아의 입술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올 뿐이었다. 다행히 더 이상 휴대폰에 신경을 뺏겨 위험한 상황을 자처하는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조심해. 괜히 자빠져서 꼴사나운 꼴 보이지 말고."

    "……네. 그런데 고영 씨. 또 레벨 올랐죠?"

    갑작스런 리아의 질문에 다시 걸음을 멈췄다. 두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오히려 그녀가 시선을 피했다.

    거 참. 신기하네.

    리아란 여자는 신기했다. 어떨 때보면 눈치를 똥구멍으로 처먹은 것 같았지만, 또 어떨 때 보면 눈치가 기가 막혔다. 이런 아이러니한 그녀의 눈치는 정말 종잡을 수 없었다.

    "맞아. 왜?"

    어차피 내 레벨을 숨길 수도 없고, 필요도 없었다. 물론 대외적으로 알려지며 가십거리가 되는 건 여전히 싫었다. 다만 계약 관계로 묶인 리아에게 알려주는 정도는 괜찮았다.

    내 담담한 대답에 용기를 얻었는지 리아가 다시 날 바라보았다.

    "그럼 이제 35레벨인 거죠? 그쵸?"

    "어."

    "저기 그럼 혹시요. 혹시 무슨 퀘스트 같은 거 안 떴어요?"

    이건 또 무슨 소리?

    리아의 뜬금없는 질문에 고개가 모로 돌아갔다. 진짜 뜬금없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하는 질문인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뭔 소리야? 퀘스트라니?"

    "아……. 아니구나."

    내 의아한 반응에 리아가 풀죽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는 리아의 행동에 괜히 짜증이 났다. 아니, 답답했다. 나도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었다.

    "그냥 말하지? 뭐야.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래?"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전에 1차 전직에 대해 말씀해 주셨잖아요? 그때 20레벨에 하는 거라고."

    "그랬지."

    "그래서 저희들도 나름 분석을 해봤거든요. 그랬더니 1차 전직이 20레벨이면, 2차 전직은 35레벨이나, 40레벨 둘 중에 하나일 확률이 높다고. 스킬 숫자랑 스킬 포인트를 보면 그렇다고 했거든요."

    리아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동의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냥 일리가 있다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럴 수도 있겠는데?

    물론 가능성에 불과했다.

    리아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크게 실망한 게 아니라 조금 아쉬워한 얼굴이었다. 솔직히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보다 내게는 새로운 몽마에 대한 정보가 더 필요했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은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됐어. 언젠가 알게 되겠지. 근데 1차 전직한 사람들은 아직도 없나?"

    "……네. 일단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없어요."

    "이거야 원. 이래서는 업하는 게 너무 빡시겠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몽마가 없으면 결투로 어떻게 커버하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내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

    + 음격 : 35

    --------------------

    + 근력 : 100 + 15

    + 지력 : 0 + 15

    + 체력 : 0 + 15

    + 속도 : 85 + 15

    + 정확 : 0 + 15

    + 행운 : 0 + 15

    + 잔여 : 0

    --------------------

    15.

    이제 15개의 능력치를 속도에 추가하면 처음 목표했던 것을 달성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다만 목적지 앞에 너무도 높은 언덕이 있었다. 경험치 페널티라는 이름의 언덕이.

    그나마 귀족으로 승급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만약 귀족으로 승급했다면 나는 31레벨에서 멈춰 있을 게 확실했다. 귀족이 되면 내 레벨보다 낮은 몽마에게서 경험치를 얻지 못하니까.

    "후우……."

    자꾸 한숨이 나왔다.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 생각 없이 사냥하는 건 거시적인 관심으로 볼 때 딱히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남들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서는. 아니, 지금 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 무언가는 아마 새로운 몽마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내 한숨 소리에 리아가 움찔하는 게 느껴졌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가 준 정보는 썩 내 기대치를 만족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희망적인 소식은 있어요. 한국에 새로운 몽마가 나타났으니까요. 아마 나름 고렙이라는 플레이어들이 나타날 거예요."

    "그 전에 내가 세계 일주를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지. 어차피 다 추측이잖아?"

    기어들어갔던 리아의 목소리가 내 의미심장한 말에 크게 반응했다.

    "안돼요! 만약 고영 씨가 관문 몽마를 사냥하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최악의 경우 승급이 막힐 수도……."

    "알아. 나도 생각이란 걸 하니까. 그냥 답답해서 해본 소리야."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분명 무슨 변화가 있을 거예요. 고영 씨가 만든 변화와 다른 사람들이 만든 변화가 합쳐져야, 더 큰 변화가 올 거예요. 분명히!"

    처음 리아에게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솔직히 혹했다. 진짜 그녀의. 아니, 그녀의 회사가 취합한 정보를 분석한 대로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다만 레벨의 정체기가 눈앞에 보이자 나도 모르게 조급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얼굴에 비친 조급한 기색을 읽었는지 리아가 빠르게 말을 더했다.

    "진짜라니까요. 고영 씨가 한국에 나타나는 몽마를 한 단계 끌어 올렸잖아요?"

    "그랬지."

    "그런데 북한은 아니에요. 그 말이 뭐겠어요?"

    "보스가 나라. 즉, 국가별로 영역을 나눠서 관리한다는 것."

    "맞아요. 분명 국가를 하나의 서버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아요. 해당 서버를 업데이트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이 있겠죠. 검은 채찍 같은 관문 몽마를 절정으로 보내는 것 같은."

    "아아. 됐어. 했던 이야기 또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걱정하지 마. 당신이 준 자료에 보니 관문 몽마들이 다 25레벨 이하드만?"

    "네? 아!"

    진지하게 날 설득하려 들던 리아의 표정이 순간 확 풀렸다. 내 말뜻은 바로 이해한 덕분이었다.

    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괜히 쑥스러운 척 몸을 꼬았다.

    "에이, 사람 무안하게. 진작 말해주시지."

    "아까 내 레벨 말해줬잖아. 그럼 거기까지 생각했어야지."

    "그러네요. 기껏해야 25레벨. 아니, 그냥 20레벨이죠, 뭐. 섬나라 미개한 애들처럼 막 들이대서 몽마 레벨을 올려준 게 아니면. 그래도 고영 씨한테는 소용없겠지만요."

    "소용없지. 잡아도 경험치를 1도 못 얻으니까."

    "그렇죠."

    레벨이 너무 높다는 게 내 행동을 제약하는 족쇄로 작용했다. 경험치도 얻지 못하는데 굳이 비행기 값을 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정신 나간 개발자가 플레이어 평준화를 위해 이런 상황을 만든 게 아니면 좋겠는데.

    최악의 상황을 떠올리기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 됐다. 결코.

    약해진 생각을 털어낸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이윽고 운동장에 들어섰다.

    그곳 중앙에 바로 마지막 사냥감이 있었다.

    [응원 부단장]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미 9마리나 사냥한 상태였다. 게다가 속옷을 입고 있지 않다보니 어떤 면에서 응원 단원보다 더 상대하기 쉬웠다.

    그래도 혹시 모르게 나는 전투 전에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

    + 활력 : 2,417/2,840

    + 정력 : 742/742

    + 경험 : 2,130/14,400

    --------------------

    + 타격력 : 326

    + 마법력 : 25

    --------------------

    + 방어력 : 40

    + 항마력 : 40

    --------------------

    + 명중률 : 151

    + 회피율 : 151

    --------------------

    + 치명도 : 61

    + 치명 증폭 : 125%

    + 치명 저항 : -

    --------------------

    꽤 많은 활력이 비었다. 물론 사냥을 오래하면 어쩔 수 없이 활력이 떨어지는 면이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선공을 취하고 막타를 치는 걸로 모든 사냥이 끝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이때 회전은 종료된 게 아닌 거롤 취급됐다. 그러니 활력 회복으로 활력을 채울 수 없었다. 간혹 바로 전 회전에서 몽마가 공격을 실패하는 경우가 아니면 조금씩 내 활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활력을 확인한 뒤 경험치를 확인할 때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것도 잠시 다시 표정을 수습했다. 어찌됐건 36레벨까지는 하루 1렙업이 가능했다.

    "내일 이후에는 필경이 2배 넘게 늘어나는 꼴이겠지만."

    연이어 나쁜 소식이었지만, 다행히 마지막은 좋은 소식이었다.

    타격력이 무려 68이나 증가했다. 퍼센트로 따지면 26%가 넘는 수치였다. 다만 두 가지 의문이 있었다.

    "삽입 공격력이랑 타격력이랑 무슨 차인지. 애매하네. 그리고 30%가 아니라 26%인 것도 좀 마음에 안 들고."

    시스템 적인 측면이었기에 내가 불만을 표한다고 변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궁금했다. 궁금한 걸 풀어야했고.

    내가 잠시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고 있을 때 바로 옆에서 해답이 나왔다.

    "그거 원래 그래요. 보스는 증가(%)에 대해서 소극적이거든요. 추가 스탯은 제외하고 순수 스탯만 뻥튀기 해줘요."

    "아아. 그럼 말이 되네. 15%짜리가 있으니, 그건 제외하면. 얼추 맞겠네."

    "그리고 공격 상승을 의미하는 아이템은 일단 상태창에 적용하더라구요. 대신 전투에서는 좀 달라지지만."

    "그래? 종족 증뎀이나 이런 건 상태창에 안 나오지만, 공격력이나 타격력 같은 건 일단 뜬다?"

    "네. 대신 전투에서는 해당될 때만. 그러니까 조건이 맞을 때만 실제로 적용되고. 그래요."

    의외로 똑부러지는 리아의 대답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똑똑하네?"

    "에이, 뭘 이정도로. 그리고 저 나름 똑똑하거든요?"

    "아아, 그러세요. 그러시겠죠."

    "진짜거든요!"

    "알았어. 왜 그렇게 정색을 해? 그냥 농담인 걸 가지고."

    내 짓궂은 말장난에 리아가 울상을 지었다. 그녀의 반응이 재밌었던 나는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다녀올게. 망 좀 잘 보고 있어."

    "망볼게 뭐가 있어요? 그냥 톡 건들면, 툭 끝나는데. 밤에 잘 보이지도 않고."

    "아무튼 갔다 올게."

    괜한 심술을 부리는 리아를 뒤로한 채 나는 운동장 한 가운데로 걸어갔다. 다행히 응원 단원을 사냥한 지 며칠이 지나며 사람들의 흥미는 다른 쪽에 쏠려 있었다. 그 덕분인지 오늘따라 캠퍼스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더욱 안심한 나는 거의 달리다 시피 움직였다.

    이윽고 응원 부단장과 접촉할 수 있었다. 그 방법이 예전과 좀 달랐다. 멀뚱히 서 있는 부단장의 가슴을 와락 움켜쥐었다.

    물컹!

    "하여튼 몽마라 그런가. 감촉하나 끝내주네."

    약간 변태스러웠지만, 이제 와서 바꿀 생각은 없었다.

    은근히 중독성 강하네, 이거.

    흑인만 해도 살결이 아기피부처럼 부드러웠다. 같은 인간이라지만 인종에 따라 피부 촉감이 천차만별인데, 인간을 유혹하기 위한 정욕의 화신인 몽마는 더하면 더했지 덜할 리가 없었다.

    마약과도 같은 몽마의 가슴을 쥐는 순간 나는 내 전용 침실로 이동했다.

    잠시 후 이변 없이 승리를 취할 수 있었다.

    단 한 가지만 제외하면 모두 내가 예상한 대로였다.

    [전체 임무 '단장님! 쟤가 우리 보냈어요!'를 생성합니다.]

    250마리의 응원 단원과 10마리의 응원 부단장의 원한이 담긴 임무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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