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88화 (8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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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탁탁, 탁탁탁.

    꿈속을 헤매는 중 칼이 도마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참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규칙적이고 발랄한 소리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아. 아침이구나.

    숙면을 취한 것처럼 몸이 개운했다.

    그것도 잠시 나는 흠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 정확히는 오늘 새벽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 한숨이 곧 무거워졌다.

    탁탁, 탁탁탁.

    아. 꿈이 아니구나.

    내가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누군가 내 부엌을 쓰고 있었다. 그 누군가는 어젯밤 절정에 보낸 예 팀장이 확실했다.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침대에 앉아 있을 때였다.

    똑똑.

    "고영 씨. 일어났어요?"

    "아, 예. 방금 깼엑! 큼! 깼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다 보니 삑싸리가 나고 말았다. 졸라 쪽팔렸다. 엄한 이불을 마구잡이로 걷어차고 싶을 정도였다.

    억지로 웃음을 참는 예 팀장의 숨소리가 들렸다.

    아오!

    머리를 부여잡았지만 그런다고 이미 저지른 일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웠다. 비단 방금 낸 삑싸리뿐만 아니라 다른 일도.

    "그럼 씻고 나와요. 식사 준비 끝냈어요. 벌써 점심이에요."

    "금방 나갈게요."

    문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가 끝났다. 부엌으로 돌아가는 예 팀장의 발소리가 옅게 들렸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나도 모르겠다. 이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나를 좋아하는 사람.

    이 두 사람 중에 누굴 선택해야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몸을 씻는 것뿐이었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잠시 미뤄도 괜찮지 싶었다.

    최대한 빠르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나왔을 때 구수한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오랜만에 느끼는 애정 어린 음식 내음에 걸음이 빨라졌다.

    곧 식탁 위에 차려진 거한 한 상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쌀밥에 된장찌개가 체스 판의 킹과 퀸처럼 놓여 있었다. 그 앞의 원형 방진을 짠 매콤한 겉절이와 쌉싸름한 나물 무침이 입맛을 돋웠다. 특히 중앙까지 진격한 갈비찜은 판을 휘젓는 나이트 같았다.

    9첩 반상이 부럽지 않은 거한 상차림에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예 팀장을 바라보았다.

    "……이걸 다 한 거예요? 그냥 대충 먹어도 되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장 좀 봐왔어요. 시장할 텐데 어서 들어요."

    "잘 먹을게요. 집밥은 정말 오랜만이네."

    "급하게 하느라고 숙성을 제대로 못했어요. 그래도 먹어요. 보니까 매일 사먹는 거 같은데. 자, 여기."

    예 팀장이 나이트 옆에 있는 비숍. 아니, 고등어구이를 한 점 뜯어서 내 밥 위에 올려 주었다.

    거 참, 젓가락질도 예쁘게 잘하네.

    나는 말없이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미친 듯이 밥을 해치웠다. 마치 일생일대의 대적을 마주한 사람처럼. 그만큼 예 팀장의 요리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국도 들어요. 그러다 사래 걸려요. 아니면 물이라도 좀 마시고."

    식사가 끝날 때까지 예 팀장은 날 자상하게 챙겼다. 덕분에 그녀의 밥공기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 팀장의 말대로 물로 입안을 가신 나는 그녀가 내게 했던 것처럼 고등어구이를 한 점 젓가락으로 집어 그녀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소영 씨도 좀 먹어요. 그러다 굶어 죽겠네. 굶는 것보다는 차라리 체하는 게 나아요. 자, 어서."

    "……잘 먹을게요."

    응? 뭐지, 이 반응은.

    예 팀장의 반응이 좀 이상했다. 아니, 과하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그녀의 눈에 언뜻 회한이 느껴지는 게 심상치 않아 보였다.

    내 눈빛을 느꼈는지 예 팀장이 얼른 크게 밥을 퍼서 입안에 넣었다.

    꼭꼭 잘 씹어 먹네.

    작은 소리도 내지 않고 야무지게 씹어 먹은 예 팀장이 이내 밥을 다시 한 숟갈 크게 뜨면서 말했다.

    "장을 좀 봐서 넣어 놨어요. 반찬도 좀 해놨고. 귀찮더라도 밥만 해서 먹어요. 매일 사먹으면 몸에 안 좋아요."

    "그건 그런데. 쉽지 않네요. 혼자 산지 오래돼서 그냥 사먹는 게 버릇이 됐거든요."

    "알아요. 귀찮고 어색한 거. 그래도 노력은 해봐요. 안 그러면 정말 몸 상해요."

    차분히 나를 달래는 예 팀장의 화법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진심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걱정을 가볍게 대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뒤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예 팀장은 식사를 끝냈다. 다행히 어색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 않은 것인지, 피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잠자리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시간이 흘렀다.

    다과와 차를 즐기고 나서야 예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너무 늦었네요."

    "……괜찮겠어요?"

    "뭐가요?"

    대문까지 예 팀장을 바래다주며 나도 모르게 참았던 물음이 튀어 나왔다. 예 팀장은 씽긋 웃으며 오히려 반문했다. 그녀의 모습에 내 말문이 막혔다.

    내 반응이 재미있었는지 예 팀장이 꺄르르 웃었다. 참 편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이렇게 편한 웃음을 흘린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한참을 웃고 난 예 팀장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이젠 가슴이 답답하지 않으니까. 아니, 오히려 시원해요. 정말 너무 시원해요."

    "예?"

    순간 예 팀장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잠시 멍하니 서 있을 때 예 팀장이 내 볼에 입술을 맞췄다.

    쪽.

    "그럼 다음에 봐요, 고영 씨."

    예 팀장의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녀는 이내 도망치듯 사라졌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예 팀장의 속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 아이가 없어서 가슴이 답답하다고……. 설마!"

    분명 어제 술을 마실 때 예 팀장은 아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했었다. 마음 줄 곳이 없다보니 너무 외롭다고 했었다. 그녀는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아이를 가지고 싶어 했었다.

    그랬던 예 팀장이 더 이상 아이를 바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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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락한 조강지처]

    + 반려가 있는 참가자에게 주는 피해 10% 상승.

    + 결투 징벌 20%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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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이 업적이 생겼는지 알 것 같았다.

    전혀 기쁘지 않았다.

    ……조금도.

    ***

    예 팀장과 있었던 일이 애매하게 끝났다.

    조금 찝찝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보냈다.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해 후회해 봤자 변하는 건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비록 서로의 감정을 확실하게 매듭짓지는 않았지만, 크게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예 팀장은 시원시원했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혼을 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구속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일단 그것으로 충분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 팀장에 대한 문제. 아니, 고민을 잠시 접은 나는 오랜만에 인터넷을 뒤졌다. 리아와 만난 뒤로 그녀가 나를 대신해 정보를 수집했지만, 좀 신통치 않은 면이 많았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았다.

    그 때문에 내가 직접 정보를 뒤져보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은 딱 2시간 만에 사라졌다.

    스마트폰을 소파에 던져 놓은 채 나는 그대로 목을 젖혔다.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야?"

    이제 인터넷에서 제대로 된 보스 관련 글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물론 드문드문 글이 올라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 글들이 삭제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니 이게 무슨 포르노야? 너무 하잖아!"

    정부에서는 보스와 관련된 모든 걸 음란물로 취급했다. 당연히 일반 인터넷 게시판에 올릴 수 없게 됐다. 아무래도 강압적인 공문을 보낸 듯 싶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사이트 관리자에 의해 글이 삭제될 리가 없었다.

    내가 답답해하고 있을 때 리아가 찾아왔다.

    오늘도 큼지막한 배낭을 메고 나타난 리아가 내 이야기를 들으며 크게 웃으며 자세한 상황을 알려주었다.

    "한국 정부도 어쩔 수 없었을 걸요?"

    "어쩔 수 없다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그냥 글이잖아? 야설도 아니고. 그냥 보스에 대한 이야긴데. 그것도 마음대로 나누지 못한 단 말이야?"

    "그게 아니라. 동기화 때문에 그래요."

    "동기화?"

    잠시 흥분했던 내 눈에 의아함이 차올랐다.

    이윽고 리아가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음란물 유포. 아니, 유포 정도가 아니라 거래가 되고 있어요. 암암리에. 특히 한국은 공유 천국이잖아요? 난리도 아니었죠. 현행법에 저촉되는 거면 음란물 제작으로 잡아넣었겠지만, 그건 좀 너무 나갔고. 그래서 일단 막고 보는 걸 거예요. 법이 없으니까."

    "……지랄이네."

    "맞아요. 지랄 같죠. 하지만 한국만 그런 게 아니에요. 바로 옆 중국도 일단 보스를 제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어요. 혼란보다는 그게 낫다는 의미겠죠. 무차별적으로 음란물을. 그것도 제한 없이 생산해서 배포한다면, 그것 자체로도 문제니까요."

    동기화가 문제의 시작이었고, 보스 앱이 방아쇠였다.

    나는 해본 적이 없어서 몰랐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와 같지 않았다. 그들은 보스 앱을 통해 자유롭게 자신이 저장한 섹스 배틀 영상을 교환하거나 교류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요 며칠 그렇게 전투 영상을 보스 앱으로 공유하다가 범죄가 발생해서 더 골치 아플 걸요?"

    "범죄? 인터넷도 안 쓰고 공유하는 게 가능하다며? 근데 무슨 문제가 나?"

    "얼굴이 나오는 영상도 있거든요. 얼굴이 나오면……."

    "신상이 털리지. 특히 우리나라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지금 상황도 이해가 됐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없애는 걸로 답하는 게 현 정부였으니까.

    리아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걸로 협박을 하거나 하는 등의 일이 있었어요. 물론 실수한 사람 잘못도 없지 않지만."

    "무슨 개소리야. 식칼 만드는 기계가 무슨 죄야? 식칼 들고 미친 짓하는 게 문제지."

    "아무튼 그렇게 됐어요. 뭐, 이 조치가 오래갈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미 인류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는 쪽에 무게가 실렸으니까요."

    "엿 같은 전쟁을 해도 보스는 못 막을 테니까. 아무튼 알겠어. 그냥 지나가는 일이네. 골치 아픈 태풍 같은 거."

    내 적절한 비유에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서 그녀가 한 가지 새로운 소식을 알렸다.

    "아마 곧 방침이 정해질 거예요. 이미 전 세계를 관통하는 하나의 메가 이슈가 됐으니까요. 이번 사태 덕분에 한국도 더 적극적으로 이슈화가 됐잖아요?"

    나는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그냥 손을 저었다. 이미 논리가 없는 행정에는 신물이 난 상태였다.

    내가 심드렁한 얼굴로 관심을 끊자, 리아가 또 혼자 키득거렸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봐도 눈앞의 저 여자도 정상은 아닌 듯 싶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소파에 누우려고 할 때 리아가 물었다.

    "오늘도 대학교에 갈 생각이에요?"

    "그럼? 다른 건 다 고만고만하잖아. 결정적으로 숫자가 너무 적어. 이동 거리도 낭비가 심하고."

    "하긴……. 좀 답답하시겠어요."

    "그것보다는 사람들의 시선이 귀찮지. 덕분에 야생(Night Animal) 동물이 된 기분이니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빌어먹을 아재 개그.

    나도 모르게 나이 먹을 티를 내고 말았다. 그래도 영어로 대화해서 다행이었다.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원래 불리할 때는 말을 바꾸는 게 최고였다. 이 나라 정치인들이 여전히 잘 먹고 잘 자는 게 그 증거였다.

    "아아, 아무것도 아냐. 근데 정보는 좀 없어?"

    "……있긴 있어요."

    "근데?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렇게 미안한 얼굴인데?"

    "그게 몽마인데, 몽마가 아니에요."

    "자세히 좀 말해봐. 내 머리는 그렇게 똑똑하지 않으니까."

    내 핀잔에 리아가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혀를 날름 내밀었다. 역시 나이에 비해 참 순수한 여자였다. 특히 뇌가.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독특한 개체가 나타났어요. 남성체는 허수아비고, 여성체는 허수어미라는 이름인데."

    "하……."

    순간 기가 찬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리아가 머리를 긁적이며 애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름은 그렇고요. 근데 누구도 사냥하지 못하고 있어요. 일각에서는 사냥을 위한 개체가 아니라 수련을 위한 개체라고. 꼭……."

    "수련용 몬스터라는 말이네."

    "네. 동시에 여러 사람과 전투가 가능한 것도 이상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데미지를 줘도 꿈쩍도 안하는 게. 아무래도 섹스 배틀에 적응하라고 만든 몽마 같다고 해요."

    "반격은 안하나 봐?"

    "아뇨. 하기는 해요. 그 데미지가 1이라서 그렇지만."

    리아와의 대화를 통해 대충 상황이 그러졌다.

    내 입술이 묘하게 휘어졌다.

    "재밌는데?"

    흥미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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