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84화 (84/200)
  • <-- Divorce Blue -->

    ***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 말은 곧 내 생활이 규칙적으로 돌아갔다는 의미였다. 매일 반복되는 생활 패턴이 조금은 지루했지만, 나는 묵묵히 매일 50마리의 응원 단장과 응원 부단장을 절정으로 보냈다.

    결국 사냥을 재개한 지 사흘 째 되는 날 서울 소재 대학교에서 더 이상 응원 단원을 볼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처음 응원 단원을 사냥했던 대학교에 응원 단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로 리젠이었다. 덕분에 응원 단원의 리젠 시간이 3일이라는 걸 알았고, 동시에 루틴이 끊기는 불상사는 불어지지 않았다.

    물론 기현상에 취재하려는 사람들이 늦은 밤에도 나타났지만, 리아 덕분에 큰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기자 코스프레.

    리아의 신분은 확실했고, 나는 그녀의 인턴인 척 했다. 겉으로 어떻게 비춰지는 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내 정체를 들키지 않으며 사냥할 수 있다는 사실만 내게 중요했다.

    그렇게 4일째 사냥이 끝났고, 내가 사냥한 응원 단장은 200마리에 달했다.

    "그리고 난 33레벨을 찍었지. 흐흐흐!"

    기자인 척 하기 위해 조금 일찍 사냥을 시작하다 보니 자정 전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리아는 정보를 알아보겠다며 돌아갔고, 나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능력창을 계속 확인했다. 지금 내게 능력창은 자린고비의 굴비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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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격 :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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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력 : 100 + 15

    + 지력 : 0 + 15

    + 체력 : 0 + 15

    + 속도 : 75 + 15

    + 정확 : 0 + 15

    + 행운 : 0 + 15

    + 잔여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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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도 75.

    보면 볼수록 웃음이 나왔다. 어쩔 수 없었다. 50을 찍었을 때 공격 횟수가 1회 추가됐듯이, 75를 찍으며 공격 횟수가 또 한 번 1회가 추가 됐다. 그 말은 곧 이제 나는 평타를 넣을 때 최소 3번의 데미지를 넣을 수 있다는 말이었다.

    "더블 어택이 터지면 4번. 버프 없어도 충분하지. 게다가……."

    새어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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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2,792/2,792

    + 정력 : 720/720

    + 경험 : 12,620/1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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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258

    + 마법력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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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38

    + 항마력 :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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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149

    + 회피율 : 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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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61

    + 치명 증폭 : 125%

    + 치명 저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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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라간 수치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오직 한 가지. 현재 경험치 현황만이 보였다.

    980.

    34레벨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1천도 되지 않는 경험치는 내일이면 충분히 올리고도 남았다. 31레벨인 응원 단원과 겨우 2레벨 차이밖에 나지 않았기에 한동안 경험치 페널티는 없었다. 이보다 쉬운 일은 없어 보였다.

    "뭐, 슬슬 다른 사냥감을 찾아보긴 해야겠지만. 근데 마땅한 게 없단 말이지."

    5레벨이상 격차도 머지않은 상태였기에 나는 물론이고 리아까지 들들 볶아가며 다음 사냥감을 뒤지고 있었다. 내 활활 타오르는 의지와 반대로 마땅한 사냥감은 보이지 않았다. 물론 레벨이 더 높은 몽마들도 있긴 했지만, 그 숫자가 조금 적었다. 아니, 조금 많이.

    "점점 숫자가 줄어들면 안 되는데. 못해도 20마리는 돼야 업 속도가 유지될 텐데. 골치 아프네."

    400짜리 몽마를 15마리 잡는 것과 300짜리 몽마를 25마리 잡는 것.

    두 가지 상황에서 내가 선택하는 건 당연히 후자였다. 더욱이 응원 단원은 하루에 2탐을 뛸 수 있었다. 리젠 시간이 슬슬 골치 아팠지만 아직 버틸 만 했다.

    한 가지 문제만 제외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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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위 획득]

    + 귀족 등급 이상 몽마 2마리를 격퇴하라.

    + 임무 현황 : 1/2

    + 기본 보상 : 3,000 경험, 은화 3개.

    + 추가 보상 : 백은 절구, 신성한 하사품.

    + 전체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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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격이 30단계에 오르는 순간 발생한 임무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진짜 미치겠네. 귀족이 돼봤자 득 될 게 없는데."

    바라지도 않은 승급 퀘스트가 내 미간에 깊은 골을 만들었다. 마땅치 않았다. 괜히 승급했다가는 레벨업 속도가 더 느려질 것 같았다. 아니, 느려질 게 확실했다.

    "귀족 계급이 되면 자기보다 레벨이 낮은 몽마에게 경험치를 얻을 수 없는데. 어떡하지?"

    더 짜증나는 건 임무 현황이었다. 임무를 받은 뒤로 귀족 등급의 몽마를 사냥한 적이 없었지만 1개가 올라가 있었다. 검은 채찍을 사냥했던 것에 대한 소급 적용이었다.

    빌어먹게도 승급 퀘스트는 지금까지 내가 취한 행동을 모두 취합하여 적용했다. 그 때문에 검은 채찍을 사냥했던 전례가 카운트되고 말았다. 나로서는 더욱 마땅치 않은 상황이었다.

    "아오! 모르겠다. 진짜. 그냥 될 대로 되겠지."

    어쨌든 승급은 해야 했다. 청동 절구에 이어 백은 절구가 나왔다는 건 새로운 시스템이 있다는 암시였다. 눈앞의 콩고물에 집착한 나머지 떡을 못 먹는 일은 없어야했다.

    "다만 그 전에 레벨 좀 더 올리는 게 낫겠지?"

    물론 지금 당장 승급 퀘스트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전직 퀘스트도 아닌 승급 퀘스트에 목맬 필요까지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저 지금의 루틴을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게다가 지금 당장 귀족 등급의 몽마를 사냥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리아가 나름 조사를 하고 있지만, 몽마들의 신분까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애초에 참가자와 몽마의 계급 체계는 큰 차이가 있었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욕실로 들어간 나는 잠시 후 시원한 얼굴로 나왔다.

    슬슬 잘 준비를 해야겠지만, 딱히 잠이 오지 않았다. 고작 며칠 늦게 잤다고 버릇이 든 모양이었다. 물론 다시 시간을 당기긴 했지만.

    "오랜만에 게임 한 판 할까?"

    보스의 등장 이후 까맣게 잊고 있던 게임이 생각났다. 아쉽지만 내키지 않았다. 아니, 흥미 자체가 동하지 않았다. 나는 이미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할 게 없다는 생각에 소파에서 일어나 막 침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딩동!

    "……이 밤중에 누구야?"

    살짝 짜증난 목소리로 중얼거린 나는 인터폰을 향해 걸어갔다. 작은 화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다만 익숙한 얼굴은 익숙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며 날 당황시켰다.

    "예 팀장님?"

    날 당황시킨 사람은 다름 아닌 예 팀장이었다. 그녀는 발그스름한 얼굴로 대문에 달린 초인종을 마구잡이로 눌렀다. 언뜻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보였다.

    한 마디로 예 팀장이 잔뜩 취한 채 들이닥친 상황이었다.

    어쨌든 나름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대문까지 나가 그녀를 맞이했다.

    그 순간 후회했다.

    "예 팀장님? 왜 이렇게 취했어요?"

    "어! 고영 씨!"

    무슨 씨? 지금 내 이름을 부른 거야?

    확실히 평소 단정하고 예의바른 예 팀장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녀는 헤픈 웃음과 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내게 팔을 뻗었다.

    이 여자가 왜 이래?

    나도 모르게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취한 행동이었다. 그 행동 덕분에 나는 무사했다.

    다만 예 팀장은 무사하지 못했다.

    쿵!

    두 팔로 허공을 허우적거린 예 팀장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녀의 이마와 대문이 충돌하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보는 내가 괜히 신음을 흘릴 정도로 아파 보였다.

    "악!"

    "예 팀장님!"

    뒤늦게 예 팀장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때는 이미 예 팀장이 기절한 뒤였다.

    어떡하라고…….

    난감한 상황에도 내 머리가 알아서 움직였다. 예 팀장의 얼굴에 귀를 대보니 가느다란 그녀의 호흡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크게 다친 건 아닌 듯 보였다.

    일단 안심한 나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예 팀장을 안아 들었다. 이대로 밖에 술 취한 여자를 둘 수는 없었다. 아직 봄이지만 밤에는 날이 싸늘했다.

    게다가 아는 여잔데.

    축 늘어진 여자는 생각보다 무거웠다. 아니, 많이 무거웠다. 그냥 괜히 쌀 한 가마니 같다는 말이 나도는 게 아니었다.

    "끙!"

    굵은 신음 소리와 함께 예 팀장을 업은 나는 대문을 발로 차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

    쓰러진 예 팀장을 일단 소파에 누였다.

    조용히 잠든 예 팀장의 얼굴을 살펴보니 이마가 살짝 부었을 뿐 큰 외상은 없어 보였다. 혹시나 싶어 손과 발까지 확인해 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비록 내가 의사는 아니었지만 지금 예 팀장의 상태를 진단하는 건 가능했다.

    다량의 알콜 섭취에 의한 필름 끊김.

    예 팀장은 그냥 술에 취해 잠든 것뿐이었다.

    "다행이긴 한데. 어떻게 한다?"

    문제는 나였다. 흑심 따위는 들지 않았다. 예 팀장은 친하게 지내는 쪽이었고, 그녀는 이미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유부녀였다. 요 근래 미친 듯이 섹스를 한다지만, 그건 일종의 사냥에 불과했다.

    상황이야 어떻든지 예 팀장의 상태를 파악한 나는 우선 그녀의 외투부터 벗겼다. 양발도 벗겨서 편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양말을 신고 있지 않았다. 차마 스타킹을 벗길 수는 없었기에 나는 외투만 벗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 있는 얼음을 꺼내 얼음물을 만들었다. 차가운 얼음물에 돌돌만 수건을 적셨다. 그렇게 적신 수건으로 예 팀장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딱 거기까지였다.

    애초에 나는 누굴 간호해본 경험이 없었다. 간호는 고사하고 술 취한 사람을 돌 본 적도 없었다. 당연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TV에서 본 몇몇 장면이 전부였다.

    대충 예 팀장의 얼굴을 닦아 준 지 30분이 지났다.

    그 동안 나는 24시간 약국에 다녀왔다. 숙취 해소를 위한 약을 사왔지만, 먹일 수가 없었다. 예 팀장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먹이긴 먹어야. 아니. 그 전에 예 팀장 집에 연락해야 되지 않나? 그나저나 이 여자가 왜 우리 집을 찾아왔지?"

    솔직히 예 팀장과 관계는 공적인 관계가 전부였다. 내 담당이 된 그녀는 나름 친분을 쌓으려고 나름 노력을 했었다. 자주 찾아와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었고, 정말 아주 가끔 술도 한 잔 한 적이 있기는 있었다.

    다만 그 이상 진척은 없었다.

    애초에 예 팀장은 그 당시에 애인이 있었고, 나는 그때 고자였다. 당연히 무슨 일이 생기래야 생길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보다 더 방어적인 내 성격은 타인의 관심을 기피했다.

    "나 쌤 만나고 사람 됐지. 정말."

    나 원장을 만나기 전에는 정말 우울함 그 자체였다. 다행히 지금에 와서는 많이 개선됐다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예 팀장의 노력은 통하지 않았다. 당연히 지금까지 그때 관계가 이어져 왔고, 나와 예 팀장은 정기 보고 때가 아니면 거의 볼일이 없었다.

    "그런데 왜 왔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디 근처에서 술 마시다가 취해서 왔나 보지."'

    결국 나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그러기에는 슬슬 피곤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런 돌발 상황이 내 뇌를 피곤하게 만든 것 같았다.

    그때 나를 더욱 피곤케 하는 일이 벌어졌다.

    "으으, 으……. 머리야."

    예 팀장이 정신을 차렸다. 눈살을 찌푸리며 손등으로 눈을 가리는 걸 보니 눈이 부신 것 같았다.

    나는 얼른 냉장고로 달려가 시원한 생수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여전히 예 팀장은 반쯤 정신줄을 놓고 있었고, 나는 생수병의 뚜껑을 따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가 본능적으로 생수병을 받으며 입으로 가져갔다.

    누워있던 자세로 물을 마시려는 예 팀장의 모습에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른 그녀의 손목을 낚아챈 나는 땀에 젖은 등을 받히고 그녀의 몸을 일으켜 주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그녀였지만, 다행히 내 손길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예 팀장을 소파에 앉힌 나는 그제야 손목을 놓았다.

    "이것도 좀 먹어요. 술 깨는 약이에요."

    "아흐……."

    예 팀장은 고분고분 내가 건네는 약을 잘도 받아먹었다. 아직 여기가 어딘지 인식하지 못한 것 같지만 괜찮았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내 평화를 돌려줄 테니까.

    내 예상대로 예 팀장이 점점 정신을 차렸다. 생수 한 통을 말끔히 비운 그녀가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새까만 눈동자가 이내 내 눈과 마주쳤다.

    그 순간 예 팀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으. 이제 살겠……꺄아악!"

    "예 팀장님! 사람들 깨요! 밤이에요, 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는 예 팀장의 어깨를 손으로 잡았지만, 그녀가 흠칫 놀라는 모습에 다시 놓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예 팀장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어떡해! 어떡해!"

    예 팀장이 소파 구석에 얼굴을 파묻으며 주먹으로 쿠션을 때렸다. 스스로 자책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미 늦었어요, 예 팀장.

    한 번 작성된 흑역사는 결코 지워지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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