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82화 (82/200)

<-- To the Blue -->

***

VIP룸이 조용했다.

볼일을 끝낸 박고영은 소강석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떠났다. 당연히 그와 함께 왔던 두 여자도 함께였다. 룸 안에는 여전히 절정의 쾌감에 파묻힌 다혜라는 여자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다혜가 테이블 위에서 간헐적인 경련을 보이고 있을 때였다.

VIP룸의 문이 열리며 두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 남자는 박고영을 배웅했던 소강석이었지만, 다른 한 남자는 처음 보는 남자였다. 룸 안으로 들어선 두 남자는 알몸의 다혜를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처음 보는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남자의 옆에 서 있던 소강석은 그의 분위기가 변한 걸 알아차렸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확인하셨습니까?

"……맞군요. 그런데 이……걸. 이런 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뭡니까?"

남자의 목소리에는 언뜻 분노의 기색이 맺혀 있었다.

소강석은 당황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이었다.

"상무님은 오랫동안 우리 가게의 주요 고객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단골이신데 불량품을 사는 일은 없어야지요."

"불량품이라……. 정말 그것뿐입니까? 보안실에서 영상으로 부족해서 직접 확인까지 시켜놓고서?"

"그것뿐입니다. 물론 직원들에게 보여줄 본보기가 필요한 것도 맞습니다. 다만 에이스는 아닙니다. 우리 가게는 언제나 에이스가 있으니 말입니다."

소강석의 목소리에서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남자는 소강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결국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렸다.

그때 소강석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저희 업소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현욱 상무님."

정현욱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룸을 빠져나갔다. 아마 그가 다시 이 가게를 찾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소강석도 그것을 알고 마지막 인사를 한 것이었다.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무언가 얻은 날이 이렇게 지나갔다.

***

시시한 결투를 끝내고 두 여자와 헤어졌다.

사냥을 위해 떠나는 두 여자를 배웅하고 리아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신촌의 한 대학교 앞에 도착했지만, 리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미안함이 가득한 그녀의 메시지를 읽은 나는 근처 카페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요즘 너무 커피를 마시는 거 같네."

말은 그래놓고선 또 다시 커피를 주문했다. 전문 바리스타가 내려주는 커피의 향에 버틸 수가 없었다.

진하고 깊은 커피의 향을 즐기며 여느 사람들처럼 스마트 좀비로 변했다. 정신 사나운 아침 일과 덕분에 전혼 사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과는 내 근면성실함과 일치하지 않았다.

"쩝, 이거 며칠 째 빨갱이만 나오네. 그래도 늑대는 10단계가 됐네."

3일 연속 천민 등급의 전혼이 걸렸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늑대는 무럭무럭 자랐다. 단지, 계급을 뛰어 넘기 위해서는 3배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10단계짜리 늑대 3개라. 뭐, 언젠가는 만들어지겠지."

당장 필요한 게 아닌 일종의 보험이다 보니 크게 실망스럽거나 마음이 급하지는 않았다.

전혼 사냥이 끝나자 할 게 없었다. 검은 채찍 때 받은 보상은 이미 분배를 끝낸 상태였다. 능력의 책으로 얻은 5개의 능력치는 모두 어질에 박았고, 기술치는 일단 보관하기로 결정했다.

딱히 할 게 없어지자 금세 지루해졌다.

몽마나 검색해 볼까?

내가 막 보스 앱을 통해 몽마를 검색하려고 할 때였다.

카페 안으로 리아가 헐떡이며 들어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상태로 나타난 그녀는 리포트에 밀린 대학생처럼 정체불명의 서류철을 잔뜩 들고 있었다. 이내 그녀가 나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다가와 내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많이 기다렸어요?"

"한 15분?"

"아, 네."

"근데 왜 보자고 한 거야? 원래 미팅은 오늘 밤 아니었나?"

"사냥하실 생각이죠?"

심드렁한 내 대꾸에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리아가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차피 그녀에게 숨길 필요는 없었다. 이제 그녀는 일종의 내 방파제였다.

리아가 소리 없는 내 대답에 배시시 웃으며 들고 온 서류철을 건넸다.

고개를 갸웃하며 푸른 색 서류철을 받아본 나는 여전히 리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뭔데?

내 눈빛을 읽은 리아가 잠시 주변을 살피더니 목소리를 살짝 낮추며 말했다.

"새로운 정보에요. 몽마에 관한. 오늘 자정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시죠?"

"응?"

장난기가 묻어나는 리아의 대꾸에 나는 서류철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깔끔하게 정리된 보고서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간간히 고개를 끄덕였다.

새하얀 종이 위에 적혀 있는 건 다름 아닌 새로 나타난 몽마에 관한 정보였다.

모든 정보를 다 읽은 나는 언제 주문했는지 시원한 아이스티를 마시고 있는 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갑자기 나타난 거야?"

"큼! 네. 근데 신기한 건 대한민국에서만 이런 현상이 일어났어요. 회사에도 알아봤는데, 다른 나라는 평소랑 같대요. 여기만. 이 나라만 달라졌어요. 이유는……."

"검은 채찍이군."

"아마도요."

짐작이 확신으로 변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어차피 사냥하면 그뿐이었다.

나는 서류철을 리아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내가 부탁한 자료는?"

"그건 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챔피언들의 숫자가 많아도 너무 많아서……."

리아의 대답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핑계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전 세계 대도시가 한두 개도 아니고,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 자료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러다 세계 일주는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네? 왜요? 새로운 몽마도 나타났잖아요?"

"경험치가 영 아니야. 레벨이 높다고 경험치가 높은 건 아니니까. 아니, 페널티가 더 높아진다고 해야 되나?"

"흠."

탐탁지 않은 내 목소리에 리아가 팔짱을 끼며 장고에 빠졌다. 물론 나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한 가지 의아한 건 있었다.

이 여자는 어제 일이 기억 안나나? 왜 아무 말도 안하지?

좀 신기하고, 의아했다. 리아는 결투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딱히 무슨 속내가 있어 보이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냥 쿨한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었기에 나는 바로 다음 행동으로 넘어갔다. 그 행동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목표가 나온 이상 움직여야했다.

"어? 벌써 가시게요?"

"그래야지."

담담한 내 대답에 리아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내가 읽었던 푸른 서류철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이거 필요 없으세요?"

"필요 없어. 어차피 검색이 될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나도 머리가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이정도 자료를 만들었다면 자료 수집에 걸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는 말과 같았다. 아니, 그 점을 제외하더라도 자료는 필요 없었다.

새로운 몽마가 등장한 이상 보스 앱으로 검색을 하면 됐다.

카페에 들어올 때는 혼자였지만, 나갈 때는 혼자가 아니었다.

근처 유명 대학으로 걸어가는 내 옆에 리아가 헤픈 웃음을 흘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침실을 통해 사냥을 한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할 서포터가 필요했다.

"저번처럼 퀵 서비스를 부른 건가?"

"아뇨. 같은 사람을 부르면 혹시 몰라서 이번에는 고용하지 않았어요."

굳이 다른 회사를 이용하면 어떤지에 대해 묻지 않았다. 동일한 업자들은 그들만의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리아는 최대한 정보 누출을 억제하기 위해 나름 신경 쓰는 중이었다.

일단 합격.

리아에 대한 평가가 조금 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믿고 뒤를 맡길 사람이 있다는 건 참 편한 일이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지만, 오래가지 않아 대화는 다시 이어졌다.

리아가 백팩에서 무언가 꺼내들며 내게 들이밀었다.

"그 대신 짠!"

"뭐야, 그건?"

"총이요!"

"……진짜 총은 아니겠지?"

"에이, 여긴 한국이잖아요. 당연히 가짜죠."

리아가 건넨 검은 모형총을 잡는 순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건 BB탄을 쏘는 장난감 권총이었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것도 잠시 리아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내 탄성에 리아가 씽긋 웃으며 기운 넘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거 아세요? 몽마와 접촉은 신체 일부가 날아가서 닿아도 이뤄지는 거?"

"알아."

"그러니까. 네? 아세요?"

"어. 전에 물총을 써 본적 있어. 난 원숭이가 될 수 없었거든."

"아……."

기운차게 설명하던 리아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실망한 리아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실망할 필요가 없다고 위로했다.

"잘했어. 사실 BB탄까지는 생각 못했거든. 이러면 물총보다 확실히 낫겠네. 더 멀리서 쏠 수도 있고."

"특별이 개조한 거라 정확도는 훨씬 높아요. 그리고 소리도 작고요. 그거라면 사람들 사이에 숨어서 침실로 끌고 갈 수 있을 거예요."

리아의 말이 맞았다. 물론 몽마의 발을 조준해야하고, 들키지 않게 조심해야했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기 수월하다는 장점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거 더 작게 개조 못하나? 아예 주머니에 넣고 쏘면 딱이겠는데.

살짝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정도면 감지덕지였다.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리아가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이어서 했다.

"아, 그리고요. 이제 보스 앱을 통해 몽마를 레벨 별로 검색할 수 있어요. 최소한 사냥 전에 몽마의 정확한 레벨을 알 수 있게 됐어요."

"그래?"

그건 좀 낫네.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레벨 차이에 신경을 써야 할 내 입장에 더 없이 좋았다. 그러고 보면 보스는 확실히 우리는 모니터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상관이야?

물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든 말든 내 관심은 오직 하나였다. 나는 보스를 통해 내 불치병을 완벽하게 고치면 그만이었다. 다만 아직 지푸라기에 불과했지만.

떠들며 걷다보니 금세 대학교 정문에 다다랐다.

나는 고개를 돌려 살짝 들뜬 표정을 짓고 있는 리아에게 말했다.

"서포트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그래."

굳이 잔소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눈앞의 사냥터를 정복할 시간이었다.

***

한층 강해진 덕분에 사냥은 수월하기 그지없었다.

교정을 활개 치는 31레벨짜리 응원 단원이라는 몽마는 약했다. 활력은 꽤 높았지만 공격력도 낮았고, 위험한 기술도 없었다. 거슬리는 건 고작 속옷을 입고 있다는 게 전부였다.

나름 3레벨이나 높아서 긴장했었지만, 처음 한 마리를 잡은 뒤로 긴장은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호기심 폭발한 애들이 잔뜩 모여 있어서 좀 긴장됐지만.

오히려 학기 중 대학 캠퍼스에 있는 학생들이 더 걱정이었다.

수많은 팬을 끌고 다니는 아이돌처럼 새로운 몽마 주위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처음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더 잘된 일이었다.

침실에서 절정에 오르며 사라진 몽마가 있던 자리를 벗어나며 리아가 귓속말로 나와 같은 생각을 전했다.

"사람이 많아서 더 낫죠? 다들 정신이 딴 데 팔려 있으니까."

리아의 말대로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그 사이에 숨어서 BB탄 총을 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근데 이상하단 말이야."

"네? 뭐가요? 뭐 잘못 된 게 있어요?"

"아무것도 아냐."

동그랗게 눈을 뜨며 물어보는 리아를 향해 나는 손을 저으며 차분히 답했다.

리아는 무언가 미심쩍은 걸 느낀 얼굴이었지만, 집요하게 캐묻지 않았다. 그녀는 슬쩍 모르는 척 넘어가며 내 호감도를 한 단계 상승시켰다.

"그래요? 근데 어땠어요? 31레벨짜리 몽마. 확실히 강하던가요?"

"강하다……. 글쎄. 보편적으로 보면 혼자 사냥하기 버거울 수 있겠지.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닐 수도 있어."

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민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문득 앞으로 리아와 함께하다보면 그녀에게 내 정확한 레벨을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렙은 피하고, 저렙도 피해야겠네. 무조건 나보다 레벨 높은 놈으로 잡는 게 그나마 낫겠어.

아마 리아는 처음부터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 짐작했을 것 같았다. 다만 나는 아니었다. 나는 솔직히 여기까지는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몽마들의 레벨이 공개되는 건 곧 내 레벨이 공개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냥 그렇다는 말이야. 그리고 경험치는 310을 주더군."

"네? 그것밖에 안 줬어요? 31레벨짜린데?"

리아가 미간을 찌푸리며 수첩에 무언가 적었다. 예상보다 경험치가 너무 적다고 여긴 듯 했다. 자연스레 고민에 빠진 그녀가 말을 아꼈고, 나와 그녀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고민에 빠진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투를 승리로 장식하는 순간 달성한 업적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백마 정복]

그나저나 이 업적은 뭐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