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73화 (7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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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매치기 두목이 누운 자세와 똑같은 자세로 소파에 옆으로 누웠다.

    리모컨으로 TV의 채널을 뚝뚝 넘겼지만, 내 눈빛은 지루하기만 했다.

    딱히 내 흥미를 끄는 프로그램이 보이지 않다보니 어느새 나는 스마트폰을 머리맡에 두고 만지고 있었다.

    한참동안 이런저런 사이트를 뒤지거나, 보스 앱을 통해 몽마를 검색해 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 미간이 깊게 파였다.

    "후! 결국 블랙 휩을 잡아야 하는 건가?"

    상황이 좋지 않았다. 20레벨 이상 몽마는 소매치기가 전부였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상황이었다. 전 세계 대도시에는 검은 채찍 같은 몽마들이 나타나 활개치고 있었고, 출현하는 몽마들의 레벨은 기껏해야 21이었다.

    그것도 업해서 그런 거겠지만.

    현재 내 음격은 26단계였다. 그 말은 곧 더 이상 일반 몽마를 사냥해서 경험치를 없는 단계에 왔다는 걸 의미했다. 유일한 방법은 도시 중심에서 활개치고 있는 한 눈에도 위험한 몽마를 사냥하는 것뿐이었다.

    "근데 아무리 봐도 혼자 잡으라고 풀어 놓은 몹 같지 않단 말이지. 이거야 원."

    솔직히 막막했다. 26레벨이 됐음에도 자신감 따위는 생기지 않았다. 사진을 통해 검은 채찍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저건 힘들겠는데.

    위풍당당하게 명동 한복판을 돌아다닌 검은 채찍은 나로서도 부담이 되는 강력한 몽마였다.

    "그런 놈. 아니, 년이랑 싸워야한다니……. 하아!"

    딱히 해법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남들이 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건 싫었다. 어찌됐건 블랙 휩과 싸움은 필연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자세를 바로한 나는 기술창을 열었다. 미래를 위한 소극적인 스킬 포인트 운용은 여기까지였다.

    모든 기술의 정보를 차근차근 다시 한 번 확인해 본 나는 2가지 기술을 골랐다.

    성기 강화와 색기 증가.

    근력, 속도, 명중을 30%나 증가시켜주는 성기 강화는 나보다 강력해 보이는 몽마와 싸울 때 큰 힘이 될 것이 분명했다. 다만 성기 강화를 배우고 나서야 배울 수 있는 색기 증가는 조금 불확실했다. 색기 증가는 악마형 몽마에게 30%의 피해를 더 주는 기술이었지만, 대상이 악마 종족이 아니면 소용이 없었다.

    "검 수련 15%가 더 안전빵이긴 한데. 그래도 우선순위를 두면 이게 더 높지."

    체위 수련을 나중으로 미루게 됐지만, 지금으로써는 이게 맞는 것 같았다.

    7개의 스킬 포인트 중 6개를 사용하여 두 기술을 마스터한 나는 기술창을 닫았다.

    기술창을 닫은 나는 다음으로 동화 상점을 열었다. 이왕 투자한 김에 제대로 투자할 생각이었다. 올 스탯 10짜리 버프인 미치광이의 부적을 동화 10개로 산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근력 10을 올려주는 고발바닥 구이까지 사고 나서야 나는 쇼핑을 끝냈다.

    고작 2개의 1회성 버프를 구매한 것으로 15개의 동화가 사라졌다.

    "좀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일단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보는 수밖에.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면."

    그때는 미련 없이 패자의 날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나름 준비를 끝냈지만, 그것은 기본에 불과했다. 아직 가장 심각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엄청난 난관에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한참동안 말문을 걸어 잠갔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해답은 보이지 않았다.

    "레벨을 올릴 방법이 없으니, 원. 어쩔 수 없나?"

    검은 채찍은 나보다 레벨이 높아 보였다. 당연히 내 침실로 검은 채찍을 끌어 들일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서 검은 채찍과 전투를 치른다면 정말 첫 실전 때처럼 현실에서 옷을 벗어야했다.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에이, 씨! 이젠 나도 모르겠다. 그냥 위장 크림 한 통을 다 처바르고 싸우지 뭐. 설마 크랜징까지 해주는 건 아니겠지?"

    어차피 다른 방법이 보이지 않는 이상 더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더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인 일이었다. 물론 방법이라고 떠오르는 게 마땅치는 않았지만.

    그때 문득 동화 주머니가 생각났다.

    "음. 그러니까 1부터 10까지 랜덤으로 동화를 준다?"

    소매치기 두목을 사냥하고 받은 추가 보상인 동화 주머니는 말 그대로 동화 주머니였다. 다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동화의 개수가 임의로 정해진다는 게 특이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바로 동화 주머니를 사용했다. 동화 주머니는 물품이었지, 화폐가 아니었다. 그냥 가지고 있어봤자 동화 1개보다 못했다.

    이윽고 보스가 내 행운을 수치로 알려주었다.

    ['동화 8개'를 획득합니다.]

    "이게 잘 나온 건지, 아닌 건지. 아무튼 금화 4개, 은화 6개, 동화 48개인가. 이걸로 전혼 사냥에 올인하는 게 나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혼 사냥은 이미 하얀 독수리의 영혼이면 충분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늑대를 키워야했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결국 남은 건 도박뿐이었다.

    "에효. 팔자에도 없던 도박이라니……."

    말은 그렇게 해도 다른 수가 보이지 않았다. 며칠 경험치를 포기하고 사냥하며 추이를 지켜볼까도 싶었지만 그러긴 싫었다.

    딱히 기다린다고 상황이 금방 변할 것 같지도 않고.

    미련을 버린 나는 다시 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도박장으로 이동했다.

    매번 꿈속 공간에 올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 기술이 있다면 가상현실 게임도 꿈이 아닐 것 같았다.

    그 생각도 잠시 나는 문구점 카운터로 걸어갔다. 카운터는 여전히 마하스가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쁜! 나쁜 남자!"

    "뭐래?"

    "전에 내가 그렇게 애타게 불렀는데! 왜 그냥 가요! 나쁘다! 진짜!"

    악마가 인간보고 못됐다고 욕하는 게 웃겼다.

    물론 나는 웃지 않았다.

    "됐고. 뽑기판 좀 줘. 오늘 제대로 질러 보려니까."

    "어머? 진짜요? 너무 막 지르지 말아요. 난 자주 오는 게 더 좋아요. 아직 당신 말고 여길 올 수 있는 사람이 없거든요."

    오! 의외의 정보 감사합니다.

    마하스는 조잘조잘 거리는 와중에도 할일을 잊지는 않았다. 그녀는 금세 내 카운터 위에 추억의 뽑기판을 올려놓았다.

    유리 위에 놓인 뽑기판을 살피던 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마하스. 내가 뽑은 자국이 없는데?"

    "응? 호호! 당연하죠! 그건 그냥 요식행위에 불과해요. 일종의 유희랄까?"

    그러냐?

    마하스가 입을 가린 채 나름 요염하게 웃었지만,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럼 그냥 뽑으면 되나?"

    "네, 그럼 돼요. 하나 뽑을 때마다 동화 하나씩 차감돼요. 자동으로! 편하죠? 그쵸?"

    "어."

    여전히 시끄러운 마하스였다.

    나는 최대한 영혼 없이 답하며 뽑기판으로 손을 가져갔다.

    자고로 남자는 가운데지!

    정중앙에 있는 뽑기 한 장을 뽑아드는 순간이었다.

    [꽝! 다음 기회에.]

    "이런! 꽝이네요.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해 주세요!"

    "발랄하게 말하지 마."

    "싫어요! 마하스는 발랄해요! 발랄해야만해요!"

    에효.

    내가 꽝을 뽑자마자 신나서 양팔을 치켜들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마하스였다. 괜히 그녀에게 화를 내봤지만, 들어 먹히지가 않았다. 그냥 무시하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두 번째 뽑기를 뽑았다.

    오른쪽 최상단!

    [꽝! 다음 기회에.]

    "우와! 또 꽝! 꽝! 연꽝이에요!"

    제발 좀 닥쳐줄래?

    슬슬 오기가 생겼다.

    아니. 안 돼. 그냥 때려…….

    치기는 개뿔! 이번에는 그냥 랜덤으로 가자!

    옛날 버릇처럼 모서리를 먼저 공략하려던 계획을 선회했다.

    뽑기판을 보지도 않은 채 한 장의 뽑기를 시원하게 뽑아냈다.

    마치 잡초라도 뽑아내듯이.

    [축! '땡처리 출입증 1개'를 획득합니다.]

    "땡처리 출입증? 이게 뭐지?"

    최소환 꽝은 아니라는 생각에 살짝 미소를 띠며 물었지만, 마하스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는 입술을 쭉 내밀고 불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저러나 싶었지만,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내 가계가 아니에요. 나도 몰라요."

    아하. 라이벌 집이라 이거지? 오케이.

    대충 상황을 짐작한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마하스가 뒤늦게 소리쳤지만, 그녀의 목소리로는 내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나중에 보자."

    "가지망! 가지망!"

    "나중에라도 보지 말자."

    질질 짜는 마하스를 뒤로한 채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도박장을 나온 나는 보관창부터 확인해 보았다. 다행히 상품은 그대로 있었다.

    "근데 메시지가 묘하게 바뀐 것 같은데? 그것도 주인 닮아가나?"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보관창에 고이 모셔져 있는 상품을 클릭하는 순간.

    나는 다시 꿈 속 세상으로 순간 이동했다.

    어둠을 밀어내고 다시 빛을 찾았을 때 내 눈앞에 허름한 지하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로 들어가라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잔뜩 녹이 쓴 허름한 철문을 열자, 고막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틀렸다.

    끼이익!

    나도 모르게 한 쪽 눈을 찌푸렸다. 다행히 짜증나는 소음은 금세 사라졌다. 그 대신 내 눈앞에 어두컴컴한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났다.

    "여길 내려가라는 건가? 도대체 뭐지?"

    의문이 가득했지만 일단 걸음을 내딛었다. 몇 걸음 앞도 볼 수 없는 어두운 곳이었지만 신기하게도 걷는데 문제가 없었다. 자세히 보니 희미한 빛이 내 걸음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신기하네.

    점점 내 걸음이 경쾌해졌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이내 계단은 끝났고, 나는 지하 창고에 발 딛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사방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화륵! 화르륵!

    횃불처럼 벽면에 일어난 불꽃 덕분에 지하 창고를 더욱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꽤 넓네?

    뚜껑 없는 나무 궤짝에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다양한 물건들 위에 먼지로 덮인 듯 했다.

    호기심에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상자를 향해 걸어갈 때였다.

    가냘픈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날아왔다.

    "손님?"

    "……고양이?"

    흠칫 놀라며 몸을 돌렸을 때 내 눈앞에 나타난 건 사람이 아니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작고 귀여운 검은 고양이였다.

    놀란 내 다리 사이로 사뿐사뿐 지나가며 검은 고양이가 속삭였다.

    "좀 도둑이 올 곳은 아니고. 손님 맞네. 오랜만이네. 반가워. 난 베스. 넌?"

    "고영. 근데 너……. 아니다. 하긴, 이미 과학이고 뭐고 다 붕괴 직전이니까."

    "뭐래니? 아무튼 여기부터 여기까지는 동화 한 개. 저기부터 저기까지는 은화 한 개. 그리고 가장 안쪽은 금화 한 개. 알아서 골라 봐."

    앙증맞은 앞발을 몇 번 휘적거리더니 이내 검은 고양이. 아니, 베스가 다시 사뿐사뿐 걸음을 옮겼다.

    나는 멍하니 그나마 깨끗한 상자 위에 올라가 앞다리를 포개고 눈을 감은 베스를 바라보았다.

    너무 귀여웠다. 너무 앙증맞았다. 너무 사랑스러웠다.

    치명적인 베스의 귀여움에 그만 나도 모르게 실언을 내뱉고 말았다.

    "너도 살 수……커억!"

    나는 채 망언을 끝맺지도 못한 채 뒤로 날아갔다. 허공을 나른 둔탁한 소리를 내며 차가운 석벽에 부딪혔다. 순간 머리가 빙글빙글 돌았다.

    기척도 없이 내 가슴을 머리로 박은 베스가 가뿐히 바닥에 착지하며 사나운 눈빛을 뿌렸다.

    "너 따위 인간이? 나를? 한 번만 더 헛소리 해 봐. 손님이라도 대접해주는 건 여기까지니까."

    이게 손님 대접이냐?

    한 마디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짜 한 마디 더 했다가는 더 큰 곤욕을 치를 것 같았다.

    엄청난 속도로 튕겨 나갔지만, 그런 것 치고는 멀쩡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여기는 꿈이니까. 현실이었다면 후두부 골절정도는 당했을 테지만, 꿈 속 세상에서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가볍게 털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베스의 경고를 충실히 따랐다.

    맞는데 취미는 없으니까. 그런데 뭘 고르지?

    상자의 숫자가 정말 많았다. 대충 세어 봐도 백 개는 넘어 보였다. 그 중 필요한 물건을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웬만하면 폭력 고양이를 보고 싶지 않았지만, 물어볼 존재가 베스밖에 없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베스가 눈을 떴다.

    "만지면 돼."

    "널 만지면……농담! 농담이야. 물건을 만져보라는 말이지?"

    다시 난폭해지는 베스의 눈빛에 나는 눈을 깔았다. 난 연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작은 오기가 생겼지만, 그런다고 내가 헐크로 변신하는 건 아니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다시 상자로 다가간 나는 먼지가 잔뜩 쌓여 있는 물건 중 작은 손거울 같은 걸 잡아 보았다.

    그 순간 내 눈앞에 보스의 정보창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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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 경험 거울]

    + 거울 파괴 시 100 경험 획득.

    + 거래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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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

    경호성이 튀어 나올 정도로 정말 놀랐다. 대박도 이런 대박이 없었다. 잘하면 창피와 불안을 동시에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하 창고에서 유전이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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