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59화 (59/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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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온몸의 근육이 터진 것 같았다.

    "으으윽……."

    침대에서 일어나가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리고, 팔이고 할 것 없이 알이 배어 있었다. 아니, 근육이라는 근육은 모두 정상이 아니었다.

    체력.

    씁쓸하지만 내 본신의 체력이 문제였다. 상태창에 나타나는 활력이나 정력은 충분한 휴식 덕분에 가득 찼지만, 어제 하루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냥한 덕분에 내 체력이 바닥난 상태였다. 오랜만에 느끼는 근육통이 그 증거였다.

    "매일 입으로만 운동해서 그런가. 어후, 진짜 죽겠네."

    끙끙거리는 신음을 흘리며 침대 끝에 앉았지만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손을 벌벌 떨었다. 섹스 배틀이 주는 피로도를 무시할 수 없다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짜 돌겠네. 겨우 하루 좀 무리했다고. 내가 이렇게 저질 체력이었나?"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포기했다. 다시 침대에 누우니 그나마 근육의 고통이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았다.

    근데 잠은 안 오는데…….

    멀뚱히 눈을 뜬 채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도 고역이었다. 마음은 벌써 섹스 배틀에 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데 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괜히 무리했다가 골병들면 안 되니까.

    나름 몸을 생각하며 나는 스마트폰을 찾았다. 다행히 침대 위에 있었다.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며 나는 버릇처럼 보스 앱을 실행했다.

    어제 하루 동안 나는 10마리의 몽마를 천국. 아니, 지옥으로 보내버렸다. 줄무늬 다람쥐만 지독하게 노린 덕분에 3,400의 경험치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음격은 오르지 않았다.

    "아. 퀘스트도 깼으니까 총 경험치 3,900에 동화 1개인가? 빨포 다 쓰고, 주포도 2개나 먹었으니. 1,000을 빼면. 3천도 못 모은 거네."

    나름 산수를 해보니 하루에 3천정도의 경험치를 얻은 꼴이었다. 물론 무리해서 테이밍을 시도하지 않으면 효율이 더 높아 지겠지만.

    입맛을 다시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며 보관창을 열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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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품]

    + 주황 물약 : 3개

    + 노란 물약 : 4개

    + 하얀 물약 : 5개

    + 패자의 날개 : 1개

    + 사정 관리증 : 1개

    + 달달한 도토리 :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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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품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전에 복불복 상자를 까서 얻은 사정 관리증은 여전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줄무늬 다람쥐를 사냥하며 얻은 이상한 아이템 하나가 그 아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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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달한 도토리]

    + 무지무지 쓴 도토리.

    + 줄무늬 다람쥐 전용 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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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템 설명을 확인해 보니 대충 감이 왔다.

    "펫한테 먹이라는 건가?"

    아무래도 몽마 전용. 그것도 줄무늬 다람쥐 전용 소비템인 것 같았다. 굳이 효과도 없는 걸 내 몸에 실험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내 손에 끼고 있는 반지를 스윽 문질렀다.

    스르륵.

    반지를 문지르자 허공에 검은 기운이 몽글몽글 모여 들었다. 검은 연기는 사람의 형태로 변하더니 곧 색을 발산했다. 이윽고 내 머리 맡에 줄무늬 다람쥐가 나타났다.

    나는 그대로 내 펫이었기에 친근하게 인사해 보았다.

    "안녕?"

    "치르 치?"

    줄무늬 다람쥐는 매몰차게 내 인사를 씹었다. 홱 고개를 돌리며 쫑알거리는 소리에는 불쾌한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새침하기는.

    "그래도 대놓고 싫은 척은 너무 한 거 아냐? 내가 주인인데?"

    이제는 대답도 안했다.

    나는 혀를 차며 막 사춘기에 접어든 몽마 바라보았다. 그래도 내 펫이었다. 친밀도를 높여서 나쁠 건 없었다.

    "이거 먹을래?"

    "치르?"

    보관창에서 달달한 도토리를 꺼내들자, 줄무늬 다람쥐가 내 옆에 바짝 붙어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몽마 뒤로 꼬리가 살랑살랑 거리는 게 보였다. 심지어 삐죽 내밀고 있던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입안에 고인 침이 보일 정도였다.

    꼭 강아지 키우는 거 같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몽마는 도토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기가 들어 손을 좌우로 움직이자, 몽마의 머리가 손을 따라. 아니, 도토리를 따라 좌우로 움직였다.

    조금 더 놀려 볼까? 아니. 아니다. 괜히 그랬다가 친밀도가 더 떨어지면?

    작은 유혹을 밀어내며 나는 몽마의 벌어진 입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몽마는 내 손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대한 크게 입을 벌리며 날아오는 도토리를 영접했다.

    "압!"

    "야. 내 손을 먹지 말고."

    사냥에 성공한 악어처럼 입을 다문 몽마로 인해 살짝 놀랐지만 다행히 다람쥐의 턱은 악어처럼 강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몽마의 입술을 느끼며 손을 빼자 손가락 끝에 몽마의 침이 묻어 있었다. 반질거리는 게 꼭 꿀처럼 보였다.

    나도 모르게 몽마의 침이 묻은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갈 뻔 했지만, 다행히 중간에 멈출 수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대충 이불에 손을 슥슥 닦았을 때 몽마는 이미 침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참 귀여운 자세였다. 꼬리가 해류에 휘말린 해초처럼 하늘하늘 거렸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몽마의 모습에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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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무늬 다람쥐]

    + 친밀도 : 혐오

    + 낮은 확률로 '행운의 꼬리' 발동.

    + 회피 15 상승.

    + 16단계 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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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그렇지.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종속창을 닫은 나는 여전히 꼬리만 보여주는 몽마에게 주먹 감자를 덤으로 먹였다. 꼭 먹튀를 당한 기분이었다.

    "그냥 하던 일이나 마저 하자. 하긴. 도토리 한 개로 호감도를 올리는 건 무리겠지."

    애써 자위하며 나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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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착품]

    + 치명의 반지 : 1개

    + 줄무늬 다람쥐의 상징 :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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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의 떡이 2개로 늘었다. 치명의 반지는 31레벨이 돼야 낄 수 있었기에 그림의 떡이었지만, 줄무늬 다람쥐의 상징은 그렇지 않았다. 지금 당장 낄 수 있는 천민 계급의 상징이었다.

    "엉덩이 기술 위력 10% 증가라니……."

    줄무늬 다람쥐의 상징은 정말 내게 조금도 필요치 않았다. 진짜 계륵이 따로 없었다. 상징이라 버리기는 아까웠지만, 내가 쓰면 또 손해였다.

    결국 상점에 팔까도 고민해 보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2,500 경험치를 얻자고 이걸 팔기에는. 좀 그렇지? 그래도 이거 필요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보스가 정한 기본 가치보다 거래 가격이 낮다면 그때 가서 팔아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지금 팔아서 레벨업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는 게 나을 수도 있었지만, 어차피 경험치는 꾸준히 얻을 수 있기에 잠시 유보하는 게 낫지 싶었다.

    소비품을 확인한 나는 마지막으로 수집품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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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집품]

    + 더러운 붕대 : 1개

    + 갈색 줄무늬 꼬리 장식 : 3개

    + 부러진 옥비녀 : 1개

    + 어린 나뭇가지 : 1개

    + 헐벗은 수귀의 상징 파편 : 1개

    + 헐벗은 견족의 상징 파편 : 1개

    + 헐벗은 시랑의 상징 파편 : 1개

    + 헐벗은 해인의 상징 파편 : 1개

    + 헐벗은 선녀의 상징 파편 : 1개

    + 사내의 뿌리 :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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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마리를 사냥하며 잡템은 고작 3개 밖에 얻지 못했다. 이쯤이면 아예 없는 걸로 치는 게 나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의 레벨업 속도가 늦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근히 들어가는 게 많아. 거기에 내가 너무 빨리 튜토리얼을 깨서 다들 레벨도 고만고만하고. 칭호랑 업적이 없으니 더 빡세겠지?"

    물론 몽마의 성체 때처럼 나와 큰 차이가 날 정도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차이는 차이였다. 초반일수록 작은 차이가 도리어 큰 영향을 끼칠 수도 있었다.

    "그나저나 상징 파편은 도대체 어떻게 쓰는 거야? 이거야 원 답답해서."

    정식 서비스가 시작되고 생긴 백과사전이라고 만능은 아니었다. 아주 기본적인 사항만 알 수 있었고, 세부적인 사항은 몸으로 직접 알아내야했다. 매뉴얼은 그저 매뉴얼일 뿐이었다.

    문득 일전에 나를 어이없게 만들었던 아이템이 눈에 들어왔다.

    사내의 뿌리.

    그때 당시 미구현이라는 세 글자로 내 멘탈을 깨부수었던 아이템이었다.

    호기심 반, 기대감 반.

    내 얼굴에 얼핏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사내의 뿌리를 눌렀다.

    팟!

    빛이 폭사하며 순식간에 내 눈앞으로 하나의 반투명한 창이 튀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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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의 뿌리]

    + 신성한 성력이 깃든 뿌리.

    + 신성 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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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 재료?

    내가 앉아 있었다면 고개를 모로 돌렸을 정도로 순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는 백과사전에도 나와 있지 않은 내용이었다. 물론 재료 아이템을 통해 무구나 장식 등을 조합할 수 있다고 적혀는 있었지만, 그 재료들 중에 신성 재료는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머리를 흔들었다.

    "아냐. 괜히 기대했다가 실망할라. 뭐, 재료라니까 그냥 가지고 있으면 되겠지."

    어차피 상점에 판다고 해도 경험치 1밖에 얻지 못하는 물품이었다. 그냥 없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쓰임새를 알게 되면 모를까.

    지금으로써 이것은 그저 긁지 않은 복권과 같았다.

    대박일지 쪽박일지 두고 봐야겠지만.

    "그건 그렇고. 오늘 정말 하루 쉬어야 하나? 그건 좀 그런데."

    곳간 확인을 끝냈지만 아직도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살짝 다리를 들어 보았지만 뻐근한 고통에 얼른 다시 내려야했다.

    아무리 차이가 있다지만, 이렇게 여유를 부릴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나는 게으른 토끼가 되고 싶지 않았다.

    "게으르든, 부지런하든. 난 토끼가 싫어."

    원래 남자라면 토끼라는 말을 싫어하는 법이었다.

    "근데 뭐하지, 이제?"

    현재 내 상황을 확인하고 나니 딱히 할 게 없었다.

    나는 목에 힘을 주고 머리를 세웠다. 여전히 줄무늬 다람쥐는 침대 모서리에 쪼그리고 앉은 채 볼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거참 콩알만 한 거 오래도 씹네.

    살짝 장난기가 동한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녀석을 불러 보았다.

    "람쥐야. 람쥐야. 이리 와 볼래? 여기 재밌는 거 있다?"

    핸드폰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상을 찾아 틀며 줄무늬 다람쥐를 부르자, 녀석이 고개만 뒤로 돌린 채 힐끔 나와 핸드폰을 번갈아 바라봤다.

    거기까지였다.

    줄무늬 다람쥐는 쌩 하니 고개를 돌린 채 또 다시 혼자 놀기 시작했다.

    "쩝……. 천하의 뽀통령도 몽마한테는 안 되나?"

    될 리가 없었다.

    ***

    오후 쯤 되자 근육통이 좀 가셨다.

    중간에 배가 고파 움직일 때만해도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조금 쓰린 정도에 그쳤다. 반나절동안 뭉친 근육을 주무르다보니 조금 풀린 듯 싶었다.

    평소와 달리 따듯한 물에 몸을 좀 지지고 나니 한결 더 나아졌다.

    덕분에 나는 오늘 하루를 공으로 날리지 않아도 됐다.

    "초반이 중요해. 초반이. 뭐든지."

    모든 일은 시작이 정말 중요했다. 시작부터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였다.

    나 원장의 병원과 반대쪽으로 걸어가며 나는 오늘 사냥할 몽마를 검색해 보았다.

    주르륵 올라가는 무수히 많은 몽마들을 나와 근접한 순으로 정렬하다보니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혹시?

    살짝 든 의문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조건을 더욱 좁히며 몽마를 검색해 보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20레벨 이상이 없네. 아니, 두 마리가 있지만. 그건 일반 몹이 아니지."

    검은 채찍과 알몸 신사.

    전자는 여성체였고, 후자는 남성체였다.

    이 두 몽마를 제외하면 20레벨 이상의 몽마가 검색되지 않았다. 우연일리가 없었다. 분명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이오스처럼 이 녀석들도 관문 몹인가?"

    아무런 정보가 없는 그저 추측에 불과했지만 나는 내 생각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몽마들의 레벨이 20레벨 이하일리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부드러운 미소가 나왔다.

    "그럼 내가 최고 렙일 가능성이 높다는 거네?"

    미소도 잠시 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나는 양손을 늘어뜨린 채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계급을 올리려면. 승급하려면 결국 명동 한 복판에 있는 몽마를 잡아야 한다고? 내가? 발가벗고? 명동에서?"

    히말라야.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높디높은 그곳이 떠올랐다.

    죽어도 못했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절대로 명동 한 복판에서 발가벗은 애벌레가 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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