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58화 (58/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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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지에 맞은 이마가 살짝 부풀어 올랐다.

    이마의 상처는 꽤 쓰라렸다.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만져보니 오돌토돌 하게 솟아 오른 게 느껴졌다.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이제 하다하다 몹한테도 차이는 구나."

    나 원장한테 고백했다가 차인지 얼마나 지났다고.

    내 신세가 참 처량했다.

    "일단 돌려줘야겠지?"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실실 쪼개고 있는 몽마를 노려보았다. 내 서슬 퍼런 눈빛에 몽마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이미 늦었다, 이년아.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며 몽마에게 달려들었다. 전투 중이었기에 몽마는 도망칠 수 없었다. 충분히 피하고도 남을 내 손길을 피하지 못하는 몽마의 눈빛에서 답답함이 보였다.

    "그래봤자지."

    스산한 목소리로 조소를 받아친 나는 그대로 몽마의 양쪽 무릎을 잡았다. 살짝 접힌 다리 때문인지 몽마의 무릎이 딱딱한 당구공 같았다. 나는 새하얀 당구공을 그대로 옆으로 밀었다. 아니, 벌렸다.

    쫘악!

    몽마의 하체가 고스란히 내 눈앞에 드러났다. 연갈색의 줄무늬가 몽마의 팬티 속까지 이어져 있는 모습이 못된 마음에 불을 붙였다.

    나는 몽마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그대로 엑스칼리버를 찔러 넣었다. 망설임 따위는 없었다. 어떻게든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게 얼마짜린데!

    푸욱!

    "치르, 찌르릉!"

    ['줄무늬 다람쥐'에게 606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크리티컬.

    몽마는 절정에 올랐는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새까만 흰자는 보이지 않았고, 본능적으로 두 다리로 내 허리를 감았다. 그녀의 속살도 엑스칼리버를 조이며 더욱 큰 쾌감을 갈구했다.

    그것도 잠시 몽마가 조금씩. 조금씩 흐릿해졌다. 마치 귀신처럼 반투명해진 몽마는 이내 연기처럼 사라졌다.

    단숨에 몽마를 해치웠지만 답답함 심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동화 2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게 없었다.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나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내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물총과 쇼핑백을 챙긴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직 내 오기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늘 안에 어떻게 해서는 이 빌어먹을 다람쥐를 펫으로 만들고 싶었다.

    막 산을 내려고 할 때 내 걸음을 붙잡는 게 있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방금 전 몽마의 제물이 되었던 젊은 두 남자가 보였다. 여전히 기절한 그들의 모습에 짧게 한숨을 내쉰 나는 전화기를 들고 119에 신고를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른척하기에도 찝찝했다.

    괜히 뉴스에 변사체로 나오면 그럴 테니까.

    짤막하게 신고를 한 나는 서둘러 산을 내려갔다.

    ***

    외진 동네라 그런지 콜택시를 부르는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다.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15분이라……."

    나는 동네 편의점에서 얼음 커피를 하나 사서 그 앞에 있는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아직 봄이지만 오늘따라 햇볕이 뜨거웠다. 시원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핸드폰으로 내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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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활력 : 129/720

    + 정력 : 480/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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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타격력 : 253

    + 마법력 :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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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방어력 : 25

    + 항마력 :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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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중률 : 131

    + 회피율 :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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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명도 : 59

    + 치명 증폭 : 125%

    + 치명 저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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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거 생각보다 타격이 큰데?"

    차라리 연속으로 몇 마리 사냥하는 게 훨씬 나았다. 괜히 열 대를 맞고 있으니 활력 관리가 어려웠다. 그냥 사냥은 한 대나 많아야 두 대만 맞으면 됐기에 5마리를 사냥하는 것과 같은 활력이 날아갔다.

    아랫입술을 깨물며 곰곰이 생각을 해봤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물약을 마시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4개의 빨간 물약을 먹으니 활력이 그럭저럭 회복됐다.

    "529. 이 정도면 한 번 더 버티겠네."

    괜히 목이 탄 나는 시원하게 아이스커피를 들이켰다.

    "아으……. 대가리야……."

    진짜 내 머리가 굳은 건지.

    나는 갑자기 차가운 걸 마신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더욱 인상을 쓴 나는 청동 상점을 열었다. 때론 지르고 보는 게 나을 때가 있었다. 오늘 나는 무조건 줄무늬 다람쥐를 포획할 생각으로 맹약의 반지를 살 수 있는 데까지 사기로 결정했다.

    ['맹약의 반지 1개'를 구매합니다.]

    하나의 반지를 사고 또 하나의 반지를 막 사려고 할 때였다.

    [전체 임무 '666의 비밀'을 완료합니다.]

    [기본 보상 '맹약의 청동 반지 1개'를 획득합니다.]

    [추가 보상 '사기꾼의 부적 1개'를 획득합니다.]

    난데없는 임무 완료 메시지에 나는 순간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다행히 본능적으로 벌어지는 입 덕분에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히죽히죽 기쁨을 흘리며 나는 어찌된 일인지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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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66의 비밀]

    + 악마의 숫자를 가지고 질러라.

    + 기본 보상 : 구매 물품의 한 단계 상위 물품

    + 추가 보상 : 구매 상점의 물품 중 임의 물품

    + 전체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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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 임무.

    보스에서 전체 임무는 일종의 히든 퀘스트였다. 물론 무조건 그런 건 아니었지만.

    완료된 임무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내 얼굴에 어려 있던 기쁨이 사막에 흘린 땀방울처럼 날아갔다.

    "……자빠져도 강냉이 가날 새끼야. 니가 그렇지. 니가."

    스스로 자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내가 황금 상점에서 물건을 샀다면 그 물건보다 한 단계 높은 물건을 기본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그랬다면 황금 상점의 값비싼 물건 중 하나가 추가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하필 가장 싸구려 청동 상점이냐고. 아오, 씨!"

    인생에 만약은 없었다. 나는 이미 청동 상점에서 맹약의 반지를 구매했고, 그것으로 보상의 질이 결정 났다. 그나마 일반 경험치 상점이 아닌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아니, 그것도 딱히 그렇다고 할 수 없었다.

    경험치로 물품을 구매하는 일반 상점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었다. 강화제의 경우 1만의 경험치가 필요했고, 그깟 동화 한 개보다는 수십 배의 가치를 가졌다. 게다가 강화제의 상위 버전 아이템이 나왔다면…….

    "뒤져라. 뒤지자. 그냥 죽자, 죽어."

    갑자기 엄청난 우울증이 생길 것만 같았다. 아깝고 또 아까웠다. 차라리 없는 사촌이 땅을 사는 게 더 나았다.

    "에효……."

    우울증의 끝은 깊은 한숨이었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새로 얻은 물품을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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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약의 청동 반지]

    + 신들린 평민의 조련 반지.

    + 100% 확률로 평민 이하 몽마 조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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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만다행.

    물건의 정보를 확인하는 순간 내 머릿속에 스친 감정이었다.

    그 어떤 해장국보다 내 속을 덜 쓰리게 해주는 설명에 나는 그제야 표정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게다가 1회 전투에 한해서 2배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사기꾼의 부적까지 공짜로 얻었다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역시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순간 맹약의 청동 반지로 인해 내 다짐이 흐려졌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반지는 꾸준히 사서 쓸 물건이었다. 이 세상에는 줄무늬 다람쥐 말고도 수많은 몽마가 있었다.

    나는 남은 5개의 동화를 탈탈 털어 맹약의 반지를 구매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빠빵!

    마침 맞게 콜택시가 도착했다.

    ***

    마음이 조급했다. 줄무늬 다람쥐와 섹스 배틀 중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위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만큼 장소가 좋지 않았다.

    도심 한 복판의 공원.

    나는 지금 서울 한 복판의 공원에서 알몸으로 누워 있었다.

    내가 날린 맹약의 반지 한 짝을 끼고 있는 몽마가 엑스칼리버를 입 속 깊숙이 넣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평소라면 엄청난 압박감을 즐겼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제발 좀 빨리 하라고!

    차마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만을 입으로 표할 수도 없었다.

    내 안타까운 바람에도 불구하고 몽마는 대여섯 번 머리를 앞뒤로 흔들고 나서야 공격을 끝냈다.

    퍼억!

    ['줄무늬 다람쥐'에게 109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치명타가 터졌지만 16단계의 다람쥐는 확실히 17단계보다 약했다. 나는 연이어 공격을 포기한 채 방어했고, 몽마는 더욱 다양한 자세로 나를 공략하려 시도했다.

    ['줄무늬 다람쥐'에게 55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방어에 성공합니다.]

    ['줄무늬 다람쥐'에게 63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맹약의 조건을 모두 만족합니다.]

    "오케……읍!"

    나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소리치고 말았다. 다행히 서둘러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숨죽인 채 맹약의 결과를 기다렸다. 찰나의 시간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한없이 느리게 굴러가는 시간이었지만, 시간은 결국 흐리기 마련이었다.

    ['줄무늬 다람쥐'가 맹약을 수락합니다.]

    ['줄무늬 다람쥐'와 맹약에 성공합니다.]

    ['맹약의 가락지 1개'를 획득합니다.]

    [천민 임무 '종속 습득'을 완료합니다.]

    [기본 보상 '500 경험'을 획득합니다.]

    [기본 보상 '동화 1개'를 획득합니다.]

    불끈!

    나도 모르게 두 주먹으로 허공에 어퍼컷을 날렸다.

    드디어 성공했다. 게다가 임무도 하나 완료되니 일석이조였다. 헤벌죽 웃는 것도 잠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옷을 집어 들었다.

    괜히 밍기적 거리다가 개쪽 팔릴라.

    "아씨!"

    마음이 급하다 보니 옷을 입는 게 너무 느렸다. 바지하나 입는데도 뻘짓을 했다. 왼쪽 다리를 넣는데 오른 발을 연속으로 두 번이나 넣는 내 모습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대충 옷을 입을 때까지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완전히 긴장을 푼 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구겨진 옷매무새를 단정히 정리했다.

    "후우……. 진짜 십년감수했네. 후아. 후흐. 흐흐흐……."

    안도의 한숨이 회심의 미소로 변했다. 조금 칠칠맞은 웃음소리가 흘러 나왔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방금 나는 총 다섯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조련에 성공한 상황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공원 숲을 빠져나와 길을 걸으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률이 20%밖에 안 되는 건가? 덕분에 오늘 지겹게 차여 봤네."

    생각보다 출혈이 컸지만 어쨌든 목표를 달성했다는 것에 나는 만족했다. 아직 4개의 맹약의 반지와 1개의 맹약의 청동 반지가 남아 있었다. 최소한 1번. 아니, 어쩌면 2번의 조련에 성공할 수도 있었다.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며 나는 가볍게 공원을 빠져 나왔다. 그제야 묘한 죄책감이 사라졌다. 천성적으로 소심한 성격은 쉬이 고쳐질 것 같지 않았다.

    뭐,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잡아 탄 나는 여섯 번째 사냥감이 있는 곳으로 가달라고 말한 뒤 종속창을 열었다. 종속창의 구조는 상하 2단계로 나눠진 장비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단에는 장착할 종속을 선택하는 곳이었고, 하단은 지금 보유하고 있는 종속을 보여주는 곳이었다.

    나는 유일한 보유 종속의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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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무늬 다람쥐]

    + 친밀도 : 혐오

    + 낮은 확률로 '행운의 꼬리' 발동.

    + 회피 15 상승.

    + 16단계 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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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은 간단했다. 회피를 올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늘만 해도 회피 덕분에 쏠쏠한 이득을 본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근데 행운의 꼬리는 뭐지?

    나는 호기심 깃든 얼굴로 행운의 꼬리라는 글자를 손으로 눌렀다.

    그 순간 추가 정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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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운의 꼬리]

    + 25%의 확률로 모든 공격 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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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괜찮은데? 발동 확률만 높다면. 물론 그렇지 않겠지만.

    처음 대박은 아니더라도 중박이라 생각될 정도였지만, 이내 평박으로 그 단계가 내려갔다. 보스에서 낮은 확률은 정말 극악의 확률을 의미했다. 아예 기대를 하지 않는 게 좋았다.

    입맛을 다시며 눈앞의 창을 닫았을 때 처음 알아차리지 못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친밀도.

    보스에서 친밀도는 5단계로 나뉘었다.

    혐오, 무시, 관심, 호감, 복종.

    친밀도가 높을수록 해당 종속이 참가자를 더욱 열심히 지원한다고 되어 있었지만 무슨 뜻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대충 미루어 짐작하면 몽마의 고유 기술 사용 빈도가 많아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혐오라니."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사람도 처음에 만나면 어색한데 강제로 자유를 뺏은 관계가 시작부터 좋을 리가 없었다. 차근차근 관계를 좋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나는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라는 생각으로 줄무늬 다람쥐를 종속으로 등록했다. 어차피 상징과 달리 종속은 마음대로 탈착할 수 있기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고유 기술이야 없는 것으로 친다 해도 회피 15는 꽤 쏠쏠했다.

    기대한 것보다 좋은 것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닌 애매한 성과였지만 성과는 성과였다.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나는 사냥감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마리당 매출 320. 소비 100. 이정도면 충분하지."

    굳이 종속을 만들기 위해 10대나 처맞지 않는다면 사냥 대상으로 이만한 것도 없었다. 마리당 빨간 물약 한 개를 소비하면 무한 사냥이 가능했고, 200이 넘는 경험치는 내 피와 살이 됐다.

    돈 놓고 돈 먹기. 아니, 경험치 놓고 경험치 먹기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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