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55화 (5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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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랜만에 집을 나섰다.

    소연이와 현아는 속닥거리더니 쌩하니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녀들이 사라진 집안은 휑했고, 괜히 더 외로운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나는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은 채 쓸쓸한 공간을 빠져 나왔다.

    목적지가 없다보니 내 걸음은 몸이 시키는 대로 걸었다.

    "아……."

    살짝 딴 생각을 하는 사이 나는 나 원장의 병원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솔직히 외면하고 싶었다. 아직 마음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기에 스스로에게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지. 나 쌤이 그랬으니까. 도망치지 말라고."

    더 이상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좀 변하고 싶었다. 그것이 늦었다고 해도.

    결심이 선 나는 맞은 편 카페에 들어가 나 원장과 서 간호사가 즐겨 마시던 커피를 주문했다. 물론 내가 마실 것도 잊지 않았다.

    잠시 후 커피를 받아 든 나는 성큼성큼 당당한 걸음으로 나 원장의 병원으로 들어갔다.

    "엉?"

    휑했다. 우리 집보다 더 썰렁했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서 간호사가 깜짝 놀라 자리에 일어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얼핏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서 간호사에게 다가가 커피를 건네며 물었다.

    "역시 센스쟁이. 잘 마실게요."

    "왜 이렇게 썰렁해?"

    "……그러게요. 어제까지만 해도 밥도 못 먹을 정도였는데. 오늘 아침부터 예약이 취소되더니 이러네요."

    "나 쌤은? 안에 있어?"

    "네. 아마 주무시……. 아니, 계실 거예요."

    나는 서 간호사를 뒤로한 채 원장실로 걸었다. 물론 노크하는 걸 잊지 않았다.

    또 다시 응급실에 실려 갈 수는 없으니까.

    "……자나?"

    들어오란 소리가 없었다. 몇 번 더 문을 두드렸지만 마찬가지였다.

    결국 나는 인기척을 내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자네."

    나 원장은 책상 위에 시체처럼 누운 자세로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입가에 어린 미소와 미소 사이로 흘러나오는 꿀……. 아니, 침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피곤한 지 알게 됐다.

    나는 쓴 웃음을 흘리며 조용히 책상으로 걸어가 그 위에 커피를 놓고 그대로 방을 나왔다.

    다행이네. 정말.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서운하기는 했지만 그동안 얼마나 나 원장이 바쁘게 생활했는지 알기에 금세 지울 수 있었다.

    나는 다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서 간호사를 보며 병원을 나섰다.

    병원을 나오니 무언가 가슴이 시원했다.

    나 원장의 조언이 맞았다.

    "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니까."

    다리에 힘을 준 나는 힘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도로에 나온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내가 가야 할 곳으로 향했다.

    ***

    선공과 비선공.

    몽마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선공은 말 그대로 움직이며 참가자와 전투를 하는 몽마를 가리켰고, 비선공. 혹은 후공은 참가자가 다가오기 전에는 전투 의지가 없는 몽마를 가리켰다.

    아침나절 명동 한 복판에 나타난 탈수기가 바로 선공형 몽마였다. 그 몽마는 일정 영역을 돌아다니며 참가자와 접촉을 시도했고, 몽마와 살결이 맞닿은 참가자는 예외 없이 전투를 치러야했다.

    반면 참가자가 터치하기 전에는 전투를 하지 않는 몽마도 있었다.

    이러한 비선공 몽마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한적한 산책로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몽마가 그 주인공이었다. 표범 무늬 레깅스를 입은 것 같은 몽마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변 경관을 즐기고 있었고, 그녀의 아래에서는 시민들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스마트폰을 들이 밀고 있었다.

    찰칵, 찰칵.

    도찰을 방지하는 효과음이 제법 시끄러웠지만 몽마는 아예 상관하지 않았다. 그저 비현실적인 몸매를 뽐내며 여유를 만끽할 뿐이었다.

    뭐, 그 덕분에 내가 찾아올 수 있었지만.

    보스는 게임 같았지만 한편으로 게임 같지 않은 면이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전투 편의성이었다. 보스는 전투 대상의 생명력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공격력이 얼마나 쓸 만한지, 혹은 전투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없었다.

    이 점 때문에 사람들은 의외로 몽마와 전투를 꺼리게 됐다. 처음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정보가 모이면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사실 그게 합리적인 판단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게 안전한 것만 취하다가는 만년 저렙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지."

    물론 보스도 실패에 대한 페널티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불능이었다. 다만 처음 몇 번은 어느 정도 감수할 수 있는 정도였다.

    최소한 현실보다는 낫네.

    보스의 페널티를 생각하다보니 현실이 더 삭막하게 느껴졌다. 우리 사회는 한 번의 실패도 용납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에 비하면 보스는 양반이었다.

    "그리고 전투창에 나온 걸 보면 20레벨 이하라는 거지."

    보스와 동기화하면 생긴 스마트폰의 앱은 정식 오픈을 맞이하여 대폭 업데이트 된 상태였다.

    하긴, 전투창이 없었으면. 완전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긴데?

    살짝 몸을 떨며 노가다를 상상하던 것도 잠시 나는 표정을 굳히며 턱을 쓸었다.

    "문제는 사람들의 이목이라는 말인데……."

    나중에 가면 모르겠지만 보스 오픈 첫날 남들의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남들 앞에서 발가벗고 섹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내 성적 취향은 아주 보편적인 남자에 가까웠다.

    한동안 사람들 사이에 섞여 고민을 했지만 딱히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내 귀에 중년 남자의 엄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허! 아빠가 밖에서 침을 뱉으라 그랬어, 그러지 말라고 그랬어?"

    "그러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럼 잘했어? 잘못했어?"

    "잘못했어요."

    "그래.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4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남자의 아이라고 하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렸다.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늦둥이인 듯 싶었다.

    그래도 가정교육은 똑 부러지게 하시네.

    귀한 막둥이라 더 엄하게 키우는 남자의 모습이 참 멋져 보였다.

    그때 내 머리에 한 가지 방법이 번쩍였다.

    이거 잘 하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조심스레 산책로를 내려갔다.

    잠시 후 내 손에는 아이들의 워너비인 커다란 물총과 생수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근처 슈퍼에서 애들 장난감 같은 물총을 사가지고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바글바글했다. 도저히 이대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슬쩍 산책로를 벗어나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따거!"

    중간 중간 가시와 가지에 찔리고 긁혔지만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왕 시작했으니 결과를 확인해야했다. 은근히 비싼 물총 가격 때문이라도 나는 움직여야했다.

    생돈을 버릴 수도 없으니까.

    다행히 산길을 타고 몽마의 근처로 접근하는 동안 더 이상 방해는 없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몽마의 자태에 빠져있었고, 그들은 굳이 산속으로 들어와 접근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를 좁힌 나는 물총의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침을 뱉었다.

    "퉤! 진짜, 별 짓을 다한다. 내가."

    좀 어이가 없었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마음을 다잡으며 물총 안에 생수를 반쯤 채운 뒤 나는 단단히 뚜껑을 닫았다. 이제 남은 건 물과 침을 제대로 섞는 것뿐이었다.

    쉐킷, 쉐킷.

    철렁거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열심히 팔을 흔든 나는 깊게 숨을 마시고 내뱉으며 호흡을 조절했다. 사격에서 중요한 것은 호흡이었다. 물론 견착을 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몽마의 뒤통수를 조준한 나는 나도 모르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것도 잠시 숨을 참으며 방아쇠를 부드럽게 당겼다.

    치익!

    가는 물줄기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생각보다 수압이 약했다. 결국 첫발은 몽마의 뒤통수가 아니라 몽마가 앉아 있는 나무였다.

    흠칫!

    사격 실패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눈치 챈 사람은 없었다. 모두 몽마의 염기에 빠져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다시 조준했다. 이번에는 몽마의 머리 위로 1미터쯤이었다.

    이윽고 두 번째 사격을 시도했다.

    촤륵!

    아싸!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명중이었다. 비록 이번에도 몽마의 뒤통수를 맞추지는 못했지만, 깊게 파인 등에 물이 꽂혔다.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됐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제발이라는 주문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막 열두 번째 주문을 외울 때였다.

    [16단계 몽마 '줄무늬 다람쥐'가 전투를 승낙합니다.]

    짧은 보스의 안내가 떨어지기 무섭게 한가하게 햇볕을 쬐고 있던 몽마가 눈앞에서 사라졌다. 갑작스런 상황에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두 번 다시 몽마는 그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사라진 몽마는 내 앞에 나타나 있었다.

    헐, 히밤. 뭐가 이렇게 빨라?

    섹스 배틀이 아니었으면 눈 뜨고 코 베였을 상황이었다.

    내 앞에 나타난 몽마가 입꼬리를 잡아당기더니 이내 내 어깨를 툭 밀었다. 나는 맥없이 자빠지며 곧 있을 충격에 대비했다.

    응?

    아무런 충격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드럽게. 깃털처럼.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착각할 정도로 나는 천천히 자빠졌다. 덕분에 몸에 충격은 없었다. 그 대신 잃은 게 있었다.

    "어느새?"

    느리게 눕는 사이 몽마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어어 하는 사이 몽마에게 끌려 다닌 나는 알몸으로 변했다.

    진짜 남들 앞에서 이러면, 으으!

    전투는 걱정스럽지 않았다. 다만 남들 앞에서 이런 몰골을 보인다면 혀를 깨물지도 몰랐다. 처음으로 전투가 망설여질 정도였다.

    걱정은 오래가지 않아 사라졌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몽마도 한결 가벼워진 차림새로 변했다.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와……. 쩌네. 쩔어."

    쭉 뻗은 다리는 말의 근육을 이식한 것처럼 탄탄했다. 탄탄한 근육에 아로새겨진 줄무늬는 기묘한 느낌을 주었다. 약물 없이는 만들 수 없는 복근과 가느다란 허리 또한 일품이었다. 다만 가슴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몽마들 중에 가장 작았다.

    아, 몽마도 슴차별이 있구나.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았지만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미안한데 일단 싸우고 보자. 내가 시간이 좀 없어서 말이야."

    마침맞게 보스가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당연히 선공은 내 차지였다. 내 음격은 20단계니까.

    [16단계 몽마 '줄무늬 다람쥐'가 전투를 시작합니다.]

    [공격 우선권 획득에 성공합니다.]

    괜히 늦장 부리다 사람들에게 이 꼴을 들키면 큰일이었다. 마음이 조급했고, 나는 얼른 공격을 시도했다.

    "어? 속옷?"

    막 허리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내 눈에 구릿빛 피부와 비슷한 색을 가진 천쪼가리가 보였다.

    젠장! 가뜩이나 시간 없는데!

    이미 전투는 시작했다. 전투를 끝내기 전에는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당연히 전투를 끝내기 전까지 나는 알몸으로 풍기문란의 표본으로 있어야했다.

    입건되기는 싫거든?

    기술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나는 내 고유 기술을 믿었다. 그 믿음이 힘차게 허리를 들어 올리도록 만들어 주었다.

    푹! 푸욱!

    ['줄무늬 다람쥐'에게 112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줄무늬 다람쥐'에게 291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아오!"

    형편없는 데미지였다. 절대 삽입술 덕분에 속옷을 입고 있는 몽마에게 삽입할 수는 있었지만, 그 페널티로 50%의 데미지를 잃어버렸다. 도둑 삽입까지 터지며 2연격을 했지만 평소의 평타 한 방 보다 못한 데미지였다.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격을 했으니 이제 공격을 받아야 할 시간이다.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첫 실전에 대한 부담을 처음으로 느꼈을 때 내 배 위에 앉아 있던 몽마가 휙! 몸을 돌렸다. 허공에서 180도를 돈 몽마가 내 무릎에 양 발을 올렸고, 내 가슴에 양 손을 올렸다. 몽마의 작지만 매서운 엉덩이는 내 엑스칼리버에 닿아 있었다.

    도대체 뭘 하려고…….

    팔과 다리로 버티고 누운 몽마는 엉덩이를 살랑거렸다. 그 순간 몽마의 허리에 붙어 있는 복슬복슬한 꼬리가 내 엑스칼리버를 휘감더니 탈수기처럼 쥐어짰다.

    "윽!"

    의아함도 잠시 나는 신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어야했다. 나는 지금 신음 소리도 마음대로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진짜 이러다 변태로 몰릴까봐 두려웠다.

    히말라야! 꼬리, 꼬리가 있었어!

    처음 봤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꼬리였다. 골 때리는 점은 분명 살아 움직이는 꼬리가 진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마치 염력을 통해 코스프레 장식품을 조종하는 것 같았다.

    갈수록 태산이네, 이거.

    아득한 느낌에 눈앞이 까마득해질 쯤, 몽마의 공격이 끝났다.

    ['줄무늬 다람쥐'에게 69의 피해를 받았습니다.]

    에게?

    정말 별 볼일 없는 데미지였다. 괜히 긴장했던 게 억울해질 정도였다.

    하긴. 렙차가 있는데.

    다시 공격권을 얻은 나는 지체 없이 허리를 튕겼다. 내 몸 위에 누워있던 몽마가 자세를 바꿀 시간도 아까웠다. 다행히 엑스칼리버는 디테의 가호아래 헛발질을 하지 않았다.

    퍽!

    ['줄무늬 다람쥐'에게 313의 피해를 주었습니다.]

    ['줄무늬 다람쥐'가 절정에 올랐습니다.]

    ['320 경험'을 획득합니다.]

    에게?

    방금 전 했던 탄식이 또 나왔다. 경험치가 너무 적었다. 320 경험이면 16레벨 필경의 10%에 불과했다.

    아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보다 마음이 더 급했다. 나는 사방에 떨어져 있는 내 옷을 주워 입으며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도망치듯 산길을 내려올 때 문득 한 가지 까먹은 게 생각났다.

    "아, 맞다! 테이밍. 아씨. 테이밍 한다는 걸 그새 까먹었네."

    내 건망증은 불치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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