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54화 (5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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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 꿈에서 깼다는 말이 더 정확했다.

    공유된 꿈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물론이 소연이와 현아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미지의 존재와 대면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는 것에 대한 흥분도 있었다. 비단 우리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가 침묵에 빠진 듯 무거운 적막이 이어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정도가 아니라 메테오가 떨어졌네.

    문득 미소가 지어졌다. 생각해보니 더 황당했다. 경직된 사회 속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살아가다가 잃어버린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

    작은 미소는 곧 호쾌한 웃음으로 이어졌다.

    시원하게 웃다보니 속이 뻥 뚫렸다. 복잡했던 머리가 한결 명료해졌다.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소연이와 현아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잖아. 잘됐네. 이제 제대로 즐기기만 하면 되니까."

    "……오빠는 안 무서워?"

    "그냥 소행성이라 생각하면 되잖아. 다행히 소행성 궤도가 지구에 닿을 확률이 없다고 생각하면 편하지 않아? 오늘 하루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뭐 하러 사서 걱정을 해?"

    "나도 찬성! 아니, 동감! 그냥 법. 아니지. 보스의 규칙을 어기지만 않으면 달라질 게 없다는 말이잖아? 차라리 잘 됐어. 이 기회에 강간범들이 모조리 잘렸음 좋겠어."

    여전히 걱정을 버리지 못하는 소연이와 달리 현아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는 게 전부였다.

    적응.

    나는 보스에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삶이 달라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우리의 안전은 국가가 나서서 지켜야지. 그게 국가의 의무니까. 내 피 같은 세금을 왜 내는데?"

    "음……."

    내 단호한 말에 소연이와 현아가 머쓱한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순간 쟤들이 왜 저러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그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찔려?"

    "……조금?"

    "난 조금 많이?"

    소연이와 현아가 되도 않는 애교를 부리며 답했다.

    손가락을 오므리며 답하는 그녀들의 대답이 제법 귀여웠지만, 나는 웃지 않았다. 최소한 옳고 그름의 문제에 있어서 가식을 떨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꼰대처럼 이래라, 저래라. 그러진 않을게. 하지만……. 아니다. 성인인데 잘 하리라 믿어야지."

    "……난 지금부터라도 세금 잘 내고 법 잘 지키고 살 거야."

    "나는……. 헤헤……."

    은퇴한 소연이와 달리 현역인 현아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헤픈 웃음을 통해 어색한 분위기를 해소하려고 했다. 대화를 회피하는 게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는 고개가 끄덕여졌다.

    겨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랄 수는 없지.

    나는 더 이상 서로 민감한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선택은 그녀들이 책임질 것이고, 내 선택은 내가 책임지면 그뿐이었다.

    "아무튼 금수저 영재인 내가 뭐라 하는 건 우습지?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그 전에 뭐 좀 물어 봐도 돼?"

    내가 화제를 돌리려고 할 때 소연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그녀의 결연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연이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결심을 한 듯 나에게 물었다.

    "오빠. 오빠는 우리가 몸을 파는 게 더 싫어? 아니면 우리가 세금을 안 내는 게 더 싫어?"

    "어? 뭐라고?"

    나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소연이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래?

    소연이의 속내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보니 쉬이 답할 수 없었다.

    아니지. 내가 왜?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꼰대질이라고 폄하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내 생각을 주장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개인의 생각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었다.

    나는 단호한 눈빛으로 소연이의 떨리는 눈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세금 포탈이 더 문제라 생각해. 성에 대해 꺼리고 숨기려드는 인식 때문에 비셔스. 아니. 악순환이 반복되는 거니까. 물론 웃음을 파는 거나, 몸을 파는 거나. 이런 식으로 단순한 비교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세금 내고 합법. 아니, 비범죄화만 되도 직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솔직한 내 생각이었다.

    내 말이 끝나자 소연이와 현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눈빛이 복잡해 보였다. 당연히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소연이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했고, 현아는 살짝 말을 돌리는 것으로 주제를 피해갔다.

    "그건 우리끼리 떠든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잖아? 골치 아픈 건 넘어가고. 오빠.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어떻게 해? 내 목적은 하나야. 보스 없이도 이 녀석이 제 구실 하는 거."

    "아……."

    내 짤막한 대답에 질문을 했던 현아는 물론이고 소연이까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아가씨들. 그 싸구려 동정은 뭐야?

    나는 지겹도록 봤던 눈빛에 나도 모르게 짜증을 부렸다.

    "야. 적당히 하지? 내가 어디 가서 그런 눈빛 받을 정도로 못나지는 않았거든? 니들 그거는 아냐? 우리나라 결혼 부부 중 섹스리스 부부가 30%가 넘는 다는 거? 일본에 이어서 세계 2위라는 거?"

    흥분했다.

    약점은 괜히 약점이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욱하다보니 말이 많아졌다. 괜히 후회가 됐다.

    제 발 저린 도둑새끼도 아니고. 이게 뭐야, 쪽팔리게.

    내가 다시 입을 꾹 다물자, 소연이가 슬쩍 다가오며 내게 기댔다.

    "걱정하지 마. 한 번 섰잖아? 그럼 된 거야. 그리고 오빠 고렙이잖아? 좀 천박한 말이지만, 이제 고렙들은 여자들이 알아서 가랑이를 벌릴 걸?"

    "야!"

    "어머? 아닐 거 같아? 정숙한 여자든, 아니든. 여자도 판타지가 있어. 특히 오르가즘에 대한 판타지는 남자들 못지않을 걸?"

    "언니 말이 맞아! 만약 오빠가 진짜 백수였으면, 그랬으면 내가 납치해서 데리고 살 텐데. 쩝. 아쉽다."

    "헛소리 좀 작작해라. 진짜 별 소리를 다 듣네."

    거짓말.

    솔직히 내 속내는 방금 한 말과 달랐다. 나도 남자였고, 오는 여자 막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별. 아니, 고백에 차인 것에 대한 분풀이의 일종일 수도 있었다. 단지 너무 싼티나는 건 싫었다.

    나는 그래도 정이 든 그녀들을 향해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단호하게 말했다.

    "적당히들 좀 해. 일부러 스스로를 낮출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래봤자 우울증 밖에 안 생겨."

    담담하지만 경험에서 우러나는 말에 소연이와 현아가 입을 다물었다. 의표를 찔린 것도 있었지만, 그보다 내가 한 말에 공감이 되는 눈치였다. 복잡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누구나 한 가지씩 고유의 방어기재를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더 이상 우울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스마트폰을 들며 딴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 보스 동기화 앱을 켰다. 정식 서비스가 된 이상 무언가 변한 게 있지 싶었다.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참가자 정보 등록]

    앱을 켜자 하나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어?"

    나도 모르게 놀라 탄성을 흘렸다. 옆에 앉은 소연이와 맞은편에 앉은 현아가 엉덩이를 떼고 머리를 들이 밀었다. 이내 그녀들은 재빨리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들며 앱을 실행했다.

    대화는 필요 없었다.

    우리는 나름 논리적 사고가 가능한 현대인이었고, 금방 감을 잡은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참가자 정보를 수집합니다.]

    [참가자 정보를 분석합니다.]

    [참가자 등록을 완료합니다.]

    순식간에 등록 절차가 끝났다.

    그 순간 진정한 성투난무 참가자가 됐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천민 임무 '실적 적응'을 생성합니다.]

    [천민 임무 '무기 습득'을 생성합니다.]

    [천민 임무 '장식 습득'을 생성합니다.]

    [천민 임무 '상징 습득'을 생성합니다.]

    [천민 임무 '종속 습득'을 생성합니다.]

    [천민 임무 '승급 시험'을 생성합니다.]

    [천민 임무 '무기 습득'을 완료합니다.]

    [기본 보상 '500 경험'을 획득합니다.]

    [기본 보상 '동화 1개'를 획득합니다.]

    [천민 임무 '장식 습득'을 완료합니다.]

    [기본 보상 '500 경험'을 획득합니다.]

    [기본 보상 '동화 1개'를 획득합니다.]

    [천민 임무 '상징 습득'을 완료합니다.]

    [기본 보상 '500 경험'을 획득합니다.]

    [기본 보상 '동화 1개'를 획득합니다.]

    정신 나간 여자가 내 귀에 비명을 지른 것 같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보스의 안내에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그것도 잠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새로 생긴 기록창을 확인했다.

    "아!"

    뒤늦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튜토리얼을 완수하여 천민 계급이었다. 그것도 1단계만 더 성장하면 평민이 될 수 있는 상태였다.

    새로운 계급인 만큼 새로운 임무가 자연스레 생겼고, 그렇게 생긴 임무는 내 성과에 따라 자동으로 완료가 됐다. 물론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임무는 완료되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의외의 성과였기에 나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소연이와 현아의 의뭉스런 눈빛에 나는 헛기침을 하며 핸드폰을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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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전 적응]

    + 음격 10단계 이상 몽마 3마리를 격퇴하라.

    + 임무 현황 : 0/3

    + 기본 보상 : 500 경험, 동화 1개.

    + 천민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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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속 습득]

    + 종속을 보유하라.

    + 임무 현황 : 0/1

    + 기본 보상 : 500 경험, 동화 1개.

    + 천민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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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민 승급]

    + 음격 20단계 이상 몽마 1마리를 격퇴하라.

    + 임무 현황 : 0/1

    + 기본 보상 : 1계급 상승, 2,000 경험, 동화 3개.

    + 추가 보상 : 청동 절구.

    + 천민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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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동으로 완료된 임무를 제외한 3가지 임무는 크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종속 습득이 문제였다. 임무 해결을 위해서는 강제로 동화를 사용해야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조삼모사보다 더 한데, 이건?

    정식 서비스가 되며 달라진 점이 있었다. 튜토리얼에서는 코인 상점을 열 때 해당 동전이 하나씩 소모됐지만, 지금은 그런 제약이 없었다. 아무래도 튜토리얼 밸런스를 위한 일종의 페널티였던 것 같았다.

    뭐, 의미 없는 짓이지만.

    "밸런스는 개뿔이……. 아. 그냥 하던 거 해. 아무것도 아냐. 이제는 동전이 안 들어서 그랬어."

    "아아. 나름 더 편해진 거 같지?"

    "응, 언니. 새로운 게 많은데? 언니도 퀘스트 받았어?"

    다행히 소연이와 현아는 새로운 기능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달라진 점이 어떤 것인지 차근차근 알아보았다.

    세세한 부분에서 달라졌다고 할 수 있었지만, 큰 틀에서는 딱히 달라진 게 보이지 않았다. 전체적인 능력치 변화가 달라진 게 그나마 확 눈에 들어오는 점이었지만, 그것은 이미 패치 중에 알고 있던 사항이었다.

    상징이나 마음대로 탈부착할 수 있게 해주지. 치사하게.

    모든 기능을 둘러본 나는 전체적으로 한 가지 느낌을 받았다. 보스는 인플레이션에 꽤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경험치 소비는 물론이고 시기적절한 동전 소모를 해야 했다.

    이제 섹스할 때마다 경험치를 태워야겠네. 퀘스트도 깨려면 동화 상점에서 재료를 사야하고.

    살짝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입장료가 없기에 마음편이 상점을 둘러보다보니 자연스레 잊어 버렸다.

    동화 상점을 둘러보던 나는 새로 생긴 물품을 주르륵 읽어 보았다.

    "곰 발바닥 구이, 까마귀 뇌 절임, 표범 허파 튀김? 거기에 독수리 눈알 탕. 토끼 발가락 찜. 하아."

    모든 능력을 10씩 상승시켜주는 미치광이의 부적의 하위 호환 아이템이었다. 각기 한 능력치를 10씩 올려주는 요리들은 효과만 보면 썩 괜찮았지만, 딱히 먹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가성비에서 조금 밀리더라도 그냥 부적을 사서 쓰는 게 낫지 싶었다.

    "곰은 힘, 까마귀는 뇌, 표범은 체력, 제비는 속도, 독수리는 정확, 토끼는 행운. 스탯 하나를 10 올리는데 동화 5개라. 그냥 미치광이 부적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냐, 오빠. 그거 중복이 돼."

    "중복?"

    "응. 미치광이 부적이랑 요리 같이 먹으면. 총 20을 올릴 수 있어. 1부터 9까지는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

    현아의 조언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싫었다. 내 비위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때 소연이가 내 미간을 부드럽게 펴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건 펫 먹이인 거 같은데? 펫 먹이로 먹이면 우호도가 높아진대. 우호도가 높으면 펫이 가지고 있는 고유 기술을 자주 사용한대?"

    "어디? 난 못 봤는데. 언니, 어디 있어 그런 말이?"

    "여기. 백과사전에 보면 있어. 강제 지식 전송하면 참가자에게 위협이 돼서 인벤에 너놨대. 이거 읽어 봐."

    "아……. 나 공부하는 건 쥐약인데."

    뒤늦게 인벤토리에 책자 모양의 물품이 있는 게 보였다. 나도 현아의 생각에 동의했다. 공부는 딱히 하고 싶지 않았다.

    자고로 게임은 즐기는 게 우선이잖아?

    내게 성투는 게임에 불과했다.

    목숨을 걸어도 괜찮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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