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sunam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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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
남자는 허세의 동물이다. 꼬추에 털 나기 전에는 육체적인 면에 허세가 깃들었고, 꼬추에 털이 난 후에는 정신적인 면에 허세가 깃들었다. 크고 작고의 차이가 있을 뿐 남자는 죽을 때까지 이 빌어먹을 허세를 버릴 수 없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정신승리를 위해 되뇌고 또 되뇌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차인 건 그저 차인 것일 뿐이었다.
머리는 멍했고, 기운은 없었다.
축 늘어진 오징어처럼 나는 방구석에 처박혀 혼자 끙끙거렸다. 중간에 소연이가 연락을 해 왔지만 수업은 다음으로 미뤄버렸다. 지금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수업이고 나발이고 할 수 없었다.
앓느니 죽지. 아니, 그냥 죽어버릴까?
너무 쪽팔렸다. 나 원장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게 겁났다. 괜히 고백해 보라고 부추겼던 소연이가 원망스러웠다.
"지일 아니라고……."
침대 위에서 혼자 난리치다 지친 나는 대자로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아, 눈부시네.
천장은 하늘이 아니었다. 천장에는 형광등이 있었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냥 눈을 감거나 손등으로 가려도 됐지만, 그럴 수 없었다. 괜히 그랬다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쪽팔리게. 남자가 질질 짤 수는 없지."
오랜만에 내 방어 기재가 발동했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자리에 앉은 나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이럴 때는 그냥 딴 생각 안하는 게 최고지.
다행히 내게는 시선을 분산시킬 좋은 대상이 있었다. 보스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좀비처럼 바라보며 여기 저기 둘러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장비가 많이 풀렸네? 다들 운이 좋은 거야? 아니면 내가 구린 거야?"
객관적으로 보면 내 운이 썩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남의 떡이 커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걸 누군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시샘이 났다.
특히 내 부러움을 독차지한 것이 하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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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둥이의 곡괭이]
+ 유명한 바람둥이 평민의 곡괭이.
+ 타격 시 대상의 흥분도 5% 상승.
+ 낮은 확률로 대상의 흥분도 100% 상승.
+ 속도 10 상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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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
고작 평민 등급의 무기였지만 달린 효과가 욕심 많은 개구리 같았다.
처먹처먹하다 배가 터지는 우화 속 개구리처럼 여러 옵션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하나같이 탐이 나는 것들이었다. 특히 흥분도 문제에 트레이너까지 고용한 내 입장에서 보면 유니크 템 못지않았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래봤자 그림의 떡이지. 기껏 사봤자 인벤에 자리만 차지할 뿐이니까."
안타깝게도 나는 카사노바의 곡괭이를 착용할 수 없었다. 내 직업 제한으로 인해 나는 한 단계 낮은 장비만 착용할 수 있었다. 평민 등급의 무기를 착용하려면 나는 31레벨 이상의 귀족이 되어야했다.
"21레벨이 되면 착용할 수 있는 걸 나는 10레벨 더 올려야 착용할 수 있네. 잠깐만. 그럼 왕족은? 설마……!"
별 게 아니라 여겼던 사소한 문제가 갑자기 심각하게 다가왔다. 여느 물건이 그렇듯 자고로 등급이 높을수록 좋은 품질을 가졌다. 가성비를 신경 쓸 정도가 아니면 당연히 높은 등급을 선호하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나였다.
"만렙 찍어도 왕족 전용 장비를 못 차는 건가?"
와락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만렙을 찍어봤자 흔히 말하는 졸업템을 쓰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다.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기껏 꾀를 부렸다가 자기 꾀에 발목이 잘린 느낌이었다.
한동안 나는 심각한 얼굴로 보스의 여러 창들을 뒤져보았다.
"없네. 젠장!"
내 의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 결국 시간이 흘러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좋은 징조는 결코 아니었다.
"이렇게 템빨이 날 줄은 몰랐는데……. 아, 돌겠네."
순간 머피의 법칙이 떠올랐다. 빌어먹게도 이 세상은 엿 같은 법칙을 가지고 있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뭘 해도 안 되는.
드럽고 치사한 법칙에 나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았다.
"하……."
속에 일어나는 짜증을 한숨에 담아 내뱉어 보았지만 가슴은 여전히 답답했다.
결국 나는 도피성 정신 승리를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아냐. 2차 전직도 있고, 3차 전직도 있잖아? 전직하면. 전직하면 다를지도 모르지. 지레 걱정할 필요는 없어.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나?"
나름 타당한 이야기였다.
답답했던 가슴도 조금 풀어졌다. 나는 더 이상 그 문제에 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사이트에 올라온 모든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어차피 노예템은 버리고. 천민 정도면 꽤 쓸 만한 게 있을지도?
"아! 치명의 반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 1레벨만 더 올리면 치명의 반지를 낄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당연히 불가능했다.
전직을 한 이상 평민 등급인 치명의 반지를 착용하기 위해선 31레벨. 즉, 귀족 계급이 되어야했다. 그 말은 곧 11레벨을 더 올려야한다는 이야기였다. 말이 11레벨이지 어느 세월에 올릴지 아무도 몰랐다.
의욕이 팍 꺾인 나는 스마트폰을 침대 위에 던지며 다시 벌러덩 누웠다.
"이거 은근히 지랄 같네. 아, 히말라야 산맥 같은……."
처음 별거 아니라 생각했던 제약이 생각보다 엄청났다. 물품 성능이 생각보다 좋은 건 둘째였다. 남들보다 10레벨 아래의 장비를 끼고 전투에 나서야한다는 건 큰 부담이었다.
의기소침 하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벌떡 일어났다. 더 이상 무언가를 포기하기 싫었다. 사람 마음은 어쩔 수 없더라도 다른 것까지는.
"템빨을 못 세우면 그냥 상징빨로 가면 되지!"
마음대로 탈착이 가능한 장비 아이템과 달리 상징은 한 번 착용하면 고정되는 방식이었다. 마치 붙박이 가구 같았다. 당연히 비용적 효율만 따지면 장비 아이템이 더 효율적이었다.
"어차피 템을 못 끼면. 그냥 돈지랄. 돈지랄 좀 해 보자. 못할 건 또 뭐야?"
이미 현금으로 보스 아이템을 사고파는 이야기가 솔솔 나오고 있었다. 아직 패치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참 빠르게 움직였다.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는 인간다웠다.
결심이 서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다시 스마트폰을 손에 쥐며 활활 타오르는 눈빛으로 상징을 뒤지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막 신나게 웹 서핑을 하는 순간이었다.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아, 진짜. 누구야? 타이밍한 번 기가 막히네."
기껏 타올랐던 의욕이 한 순간에 픽 쓰러졌다. 짜증을 내는 와중에도 초인종 소리가 계속 울렸다.
결국 나는 잔뜩 일그러트린 얼굴을 한 채로 침실을 나섰다.
잡상인이면 쌍욕이라도 퍼부울 생각을 하며 손님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표정을 풀어야했다. 손님은 익숙한 사람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는 버튼을 눌러 대문을 열어 주었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며 소연이가 들어왔다.
"오빠, 안녕? 차였다며?"
"……싸우자는 거지? 지금?"
대놓고 찌르는 소연이의 공격에 나도 모르게 삐딱하게 답했다. 그 와중에도 나는 소연이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젊은 생기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늘씬한 미녀였다.
내 시선이 어디로 향하는 지 파악한 소연이가 두 눈을 치켜뜨며 내 가슴을 찰싹 때렸다.
"이 발랑까진 오빠야. 뭐하니?"
"누구?"
"허이고. 어젯밤 차였다는 양반이……. 왜 차였는지 알겠네."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자 소연이가 연이어 내 마음을 할퀴었다. 그럴수록 나는 더 얄밉게 행동했다. 슬쩍 앞으로 나간 나는 조용히 서 있는 미녀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반갑습니다. 박고영입니다."
"지현아에요."
내 손을 맞잡으며 미녀가 살짝 웃었다. 그 순간 청순하던 이미지가 확 변했다. 웃을 때 가늘어지는 그녀의 눈매에 색기가 묻어났다.
사람 인상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조금 놀라웠다. 동시에 신기했다.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행동하려고 노력했던 게 다 무너졌다.
멍한 눈으로 지현아의 손을 잡고 있는 사이 소연이가 다가와 내 물건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갑작스런 손길에 놀란 나는 본능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뺀 채 소연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왜!"
"……넌 부끄럽지도 않냐?"
"오빠가 하는 짓이 부끄러운 게 아니고?"
하여튼 말빨은…….
소연이의 말빨 덕분에 나는 뒤늦게나마 실수를 깨달았다. 얼른 지현아의 손을 놓으며 살짝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했다. 지현아가 꺄르르 웃으며 손을 저어 답했다.
나는 슬쩍 소연이의 옆구리를 치며 물었다. 아니, 물으려고 했다.
"우리 내일 아침까지 서 있을까? 벌 받는 것처럼?"
"아, 미안. 미안해요. 거실에 앉아요. 뭐 마실 거라도?"
"난 맥주. 너는 뭐로 할래?"
소연이가 내 말을 낚아채며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그 사이 나는 소연이가 말한 맥주와 지현아가 말한 생수를 챙겨 거실로 나갔다. 물론 대충 과일을 바구니에 담아가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이것저것 챙겨 돌아오는 나를 소연이가 활짝 웃으며 반겨 주었다.
"이 멍청한 오빠야. 사과를 생으로 먹으라고?"
"아……."
깎아 먹는 게 귀찮아서 대충 씻어 먹다보니 실수하고 말았다. 서둘러 부엌에서 과도를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식칼을 들고 나갈 수도 없었다.
마음은 급하고 과도는 안보이고.
조급한 상황에 그만 나는 새로운 흑역사를 한 장 만들고 말았다.
접시와 포크. 그리고 과도를 대신할 걸 들고 돌아온 내 모습에 소연이는 물론이고 지현아까지 빵 터졌다.
배를 잡고 꺽꺽 웃어대던 소연이가 급기야 눈물까지 보였다.
왜 웃지?
그때까지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인식하지 못했다.
이윽고 호흡을 가까스로 고른 소연이의 말에 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감자 깎기로 깎아 먹으라고? 어떻게 자르고?"
뒤늦게 내 실수를 깨달았지만 이미 저지른 뒤였다. 이럴 때 선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문제를 수습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냥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것이었다.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아, 몰라. 그냥 대충 먹어. 씻은 거라 그냥 먹어도 돼."
"그럼 그냥 먹어야겠다. 손이 끈적끈적한 건 싫거든."
"그래. 많이 처 드세요. 제발."
"아무튼 잘 먹을 게. 그래도 정성이 갸륵하네."
"아이고, 성은이 망극해야하나?"
나는 여전히 비딱한 태도로 일관하며 소파의 끝에 앉았다. 소파의 길쭉한 부분에도 앉을 수 있었지만 초면에 지현아의 옆에 앉는 게 어색했다. 그렇다고 저 얄미운 소연이 옆에 앉기는 더 싫었다.
내가 좀 떨어져 앉자 소연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하여튼 소심하긴. 아무튼 정식으로 소개해 줄 게. 얘는 우리 가게. 아니지. 내가 예전에 일했던 가계의 세컨드."
"세컨드?"
"두 번째 에이스라고."
"아……. 난 또 뭐라고."
내 묘한 탄식에 소연이가 거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추궁했다.
"이 변태 오빠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변태가 아니라 사고관이 넓다고 해줄래?"
"하여튼 말은 잘해요."
솔직히 소연이가 의심하는 그런 생각을 잠깐 하기는 했다. 다행히 들키지 않은 것 같자, 나는 더욱 단단한 오리발을 내밀었다. 소연이도 증거가 없었기에 말꼬리를 잡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소연이 옆에 앉아 있는 지현아를 바라보았다.
저렇게 예쁜 애가 왜 술집에……. 아니, 아니지. 그거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지.
순간 꼰대처럼 생각할 뻔 했지만 다행히 꼰대가 되지는 않았다. 지현아는 성인이었다. 성인이 자기 결정권을 행사하겠다는 데 타인이 왈가왈부하는 것만큼 꼴사나운 일이 또 없었다.
내 생각은 고스란히 눈빛으로 드러났다.
그것이 신기했는지 지현아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작고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언니 말이 맞네요. 술집 여자라고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던데……."
"내가 그랬잖아. 저 오빠 좀 괜찮다고. 저기가 문제지만."
"야! 내 거기가 어때서! 너도 전에 확인했잖아! 이제 선……다니까."
소연이의 말에 순간 욱해서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그것도 잠시 지현아의 순진한 눈빛에 나도 모르게 움찔하며 말소리를 죽였다.
근데 저 여자는 왜 데리고 온 거야?
나는 차마 대놓고 묻지는 못하고 은밀히 눈빛으로 소연이를 추궁했다.
소연이가 피식 웃더니 지현아의 허리를 껴 앉으며 끌어 당겼다.
"언니!"
"오늘의 선생님이야. 오빠가 차였다고 해서 위로해주려고 헬프 좀 쳤지. 어때? 마음에 들어?"
"또 무슨 헛소리를 하려고?"
솔직히 마음에 들었다. 청순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여자가 매력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것을 당사자 앞에서. 그것도 이상한 의미로 오해할 수 있는 대답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데 무슨 헬프? 설마…….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니면 어떡하지?
내 대답에도 불구하고 소연이는 피식 웃었다. 그녀는 마치 내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내 속마음을 읽는 게 확실했다.
"오빠. 쓰리썸이라고 들어는 봤어?"
========== 작품 후기 ==========
[참가자 '박고영'의 정신 타락 1단계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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