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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ss-45화 (45/200)

<-- To, Back. -->

***

"고영아……."

나수정이 축 늘어진 어깨로 걸어가는 박고영을 불렀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도 더 이상 그를 부를 수 없었다. 자신이 그의 고백을 거절한 이상 이미 예정된 수순이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목소리를 막은 나수정의 표정에 슬픔이 보였다. 그녀는 박고영의 고백이 더 없이 기뻤지만, 그 고백을 받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남자 이전에 동생이었다.

물론 나수정도 박고영을 좋아했다. 다만 사랑은 아니었다. 그녀는 때론 친구 같고 동생 같은 그와 오래도록 지금처럼 지내고 싶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나수정이 고개를 떨궜다.

어깨를 들썩이는 나수정의 입술 사이로 그녀의 본심이 튀어 나왔다.

"무서워. 나 너무 무서워, 고영아……."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나수정은 간신히 얻은 인연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사귀다 헤어지는 것보다 이렇게 고백을 거절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나수정은 오래도록 박고영과 함께 웃고 떠들고 싶었다.

이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놓인 건 나수정도 마찬가지였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나수정이 씩씩하게 고개를 들었다.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하고 눈물 자국을 지운 그녀가 미소 띤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자연스레 김선태의 차 조수석에 오르며 힘차게 말했다.

"선배, 가요. 이러다 동문회에 늦겠어요."

"제시간에 오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김선태가 피식 웃으며 차를 몰았다.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에 들어선 김선태가 슬쩍 나수정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무슨 일이야? 딱 보니……."

"아니에요. 그리고 사생활은 존중해 줬으면 좋겠어요."

"사람 무안하게 그렇게 딱 자르냐?"

김선태의 농담 섞인 말에 나수정은 딱 잘라 말했다. 냉정한 그녀의 태도에 되레 김선태만 어색해졌다. 자연스레 차 안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으며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단절되어 버렸다.

이 와중에도 나수정은 박고영을 배려하고 있었다.

여자의 마음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대차게 차였다.

처음에는 그저 창피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숨은 거칠어진지 오래였다.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눈물이 나오지 않게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게 전부였다.

자칫 잘못하면 터지는 화약고.

막 집안에 들어선 내 감정이 딱 이 꼴이었다. 고백 직후 결과를 직감한 이후에 기억이 없었다. 나 원장이 무어라 그랬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병신. 쪼다.

스스로 자책하며 자괴감에 휩싸인 나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든지 들어가 숨지 않으면 부끄러움에 내 몸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았다. 눈앞은 캄캄했고, 귀는 멍했다.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나는 거실 바닥에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울컥!

도저히 치미는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내 눈은 이미 폭우가 쏟아진 댐 같았다. 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갔다.

촤르륵!

옷을 벗지도 않은 채 물을 틀었다.

샤워기에서 차가운 물이 내 머리를 적시며 몸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

짐승의 울음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한 번 터진 감정은 주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울고 또 울며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감정을 토해내고 또 토해냈다.

찬물에 내 몸이 얼어버린 것 같았을 때가 돼서야 나는 조금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고, 더 이상 울분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감정이 사라진 인간처럼 욕실을 나와 냉장고를 열었다. 찬 공기가 뿜어져 나와 내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번쩍 들 법도 했지만 나는 말없이 눈에 보이는 캔 맥주를 모조리 꺼낼 뿐이었다.

한 모금, 두 모금.

식탁에 앉은 나는 말없이 술을 비웠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흐릿했지만 나는 계속 술을 마셨다.

결국 내 기억이 끊어졌다.

***

멍.

온몸에 시퍼런 피멍이 든 것처럼 쑤셨다. 저린 고통 속에서 눈을 뜨니 거실 바닥이었다. 시큰한 약취가 그 순간 내 코를 파고들었다.

암모니아를 뒤집어 쓴 사람처럼 나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아……."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만큼 눈앞에는 참혹한 장면이 연출되어 있었다. 찌그러진 캔은 이러 저리 흩어져 있었고, 구토물로 보이는 게 길게 영역을 점하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행히 어젯밤 실컷 울었더니 가슴은 좀 편했다.

나는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나름 깔끔 떠는 성격이다 보니 이런 처참한 상태를 견딜 수 없었다. 한 시간쯤 부지런히 움직이니 집안이 예전처럼 깨끗해졌다.

내 마음은 여전히 시궁창이지만.

본래라면 일주일에 한 번씩 들리는 아주머니께서 청소와 빨래를 해주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해야 했다. 도저히 오물이 묻은 걸레를 아주머니보고 빨아 달라 할 수 없었다. 쪽팔린 건 사양하고 싶었다.

대충 빨래를 돌린 나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드럽게 화창하네."

유난히 화창한 봄바람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환기를 시키고 나서야 나는 몸을 씻었다. 어젯밤 창피했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저으며 털어냈다.

온몸을 박박 씻고 나오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거실 공기도 좀 나아진 거 같고. 그나저나 이제 어떡하냐……."

고백하기 전에는 억지로 차일 경우를 생각하지 않았다. 막상 고백을 하고 차이자 내 고질병이 도졌다.

"그렇다고 나 원장이랑 인연을 끊어? 무슨 말도 안 되는! 됐어. 얼굴에 철판 한 번 깔자. 까짓것!"

확실히 차인 건 꼴사납고 쪽팔렸다. 다만 나 원장을 안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아직 내 감정은 호감보다 사랑에 가까웠지만, 감정을 잘라내서라도 그녀와 더 오래 인연을 이어가고 싶었다.

나는 이미 나 원장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다.

결국 당당하게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이미 고백한 일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되도록 나 원장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방법을 나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결론은 하나지. 그냥 웃으면서 평소처럼. 그럼 되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나 원장은 의외로 여린 성격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반응할지 도저히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숙취의 여파 때문인지 속만 쓰렸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가지를 챙겨 입었다.

아무래도 속부터 좀 풀어야겠어. 머리가 취했네, 취했어.

지갑과 핸드폰까지 제대로 챙긴 내가 막 대문을 열고 나설 때였다.

"어?"

"어?"

높은 음과 낮은 음이 어우러졌다.

나는 흠칫한 자세로 눈앞에 놀란 토끼 한 마리를 내려다보았다.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있는 토끼는 다름 아닌 나 원장이었다.

침착해. 침착하자, 박고영.

방금 전까지 나 원장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고민했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실연의 상처는 아직 아물려면 먼 것 같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 그래도 한 살이라도 더 먹었다는 걸 증명하듯 나 원장이 활짝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뭐야. 아침부터 어디가?"

"어? 어. 해먹기 귀찮아서……. 나 쌤은 무슨 일이야? 이렇게 일찍."

"무슨 일은. 이거 주러 왔지."

나도 모르게 나 원장이 건네는 쇼핑백을 두 손으로 받았다. 슬쩍 내용물을 보니 잘 포장된 음식 같았다. 출렁거리는 내용물을 보니 국물도 있었다.

이게 뭐지?

의문도 잠시 나는 얼른 고개를 들어 살짝 상기된 나 원장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먹는 거야?"

내 물음이 웃겼는지 나 원장이 작게 웃었다.

여전히 웃는 게 이쁘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 원장이 얼른 웃음을 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먹는 거야. 요 앞 해장국 집에서 한 그릇 싸왔어."

"나 쌤은?"

"나는 거기서 먹었지. 요즘 밥심으로 버티잖아."

"아, 그래?"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다른 분위기였다. 나는 물론이고 나 원장도 어색함이 가득했다. 결국 어색한 분위기에 우리 두 사람의 대화가 끊기고 말았다.

고작 몇 분밖에 되지 않는 침묵.

그 짧은 침묵이 우리 두 사람의 한계였다.

"아, 몰라. 얼른 들어가서 먹어. 나 출근해야겠다."

"나 쌤. 잠깐만."

나보다 한 발 먼저 도망치는 나 원장의 팔을 잡았다. 잘게 떨고 있는 게 느껴졌다. 미안하고 씁쓸했다.

뭐하는 짓이냐, 이게.

여러 감정이 뒤섞였지만 한 가지 감정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살짝 고개를 틀어 내 시선을 피하는 나 원장을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받아주지 그랬어? 뭐야, 이게. 나 쌤 답지 않게."

"……고영아."

나 원장이 쓸쓸한 눈빛이 내 폐부를 찔렀다.

나는 나 원장의 눈빛을 피하지 않은 채 확신을 담아 말을 이었다.

"왜 이렇게 의기소침해? 차인 건 난데. 아마 며칠 걸릴 거야. 나도 사람인데 쪽팔리잖아? 그러니까 며칠 못 본다고 울지 말고. 우리가 본 게 몇 년인데. 어젯밤 하루 일 때문에 어그러질 수는 없잖아?"

"……응. 응, 맞아."

드디어 나 원장이 미소를 되찾았다. 여전히 마음이 편해지는 미소였다. 나는 그녀의 미소를 계속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나는 애써 더 밝은 척을 해야 했다.

"한 가지만 약속해줘."

"응? 뭐든 말만 해. 내가 다 들어 줄게!"

"진짜? 내가 결혼해달라고 하면 결혼 해 줄 거야?"

움찔.

나 원장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똥마려운 다람쥐처럼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농담이라도 그런다고 해주면 안 되나?

살짝 서운한 마음을 뒤로한 채 나는 평소보다 더 크게 웃었다.

"하하! 농담이야, 농담. 쫄았어?"

"씨이, 야! 이 멍청아!"

"아아, 아퍼. 이거 쏟겠다. 어? 진짜 쏟는다?"

내 엄살에 나 원장이 씩씩 거렸다.

분함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나 원장의 머리를 내가 쓰다듬어 주며 내 바람을 전했다.

"나 쌤. 다음에 볼 때는 예전처럼 대하기로. 약속 해 줄 수 있지?"

"……알았어. 약속할게. 너도 그래야 해."

"난 이미 그러고 있는 것 같……악! 나 쌤!"

결국 호들갑을 떨다가 옆구리를 제대로 꼬집히고 말았다. 그래도 나는 웃었다. 옆구리가 따가웠지만 마음은 편했다.

이정도면 선방한 거야. 그런 거야.

나 원장도 한결 부담을 털어낸 얼굴이었다.

나는 내 옆구리를 꼬집고 지나간 나 원장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병원 쪽으로 걸었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그녀가 움찔했지만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녀의 손은 작지만 참 따스했다.

"근데 어제 그 남자 누구야? 설마 내가 그 놈팽이 같은 놈에게 밀린 건 아니지? 그치? 아닐 거야."

"킥! 하여튼……. 아냐. 그 남자가 나 좋다고 쫒아 다니는데. 내 취향이 아니거든."

"올. 인기녀."

순간 취향이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괜히 여기서 더 욕심을 부렸다가 지금까지 극한의 인내로 만들어 놓은 길이 다 무너질 지도 몰랐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확실히 내가 평소와 비슷한 행동을 취하자 나 원장의 미소가 더 진해졌다.

쐐기를 박을 타이밍이네.

"나 쌤. 저기 있잖아……."

"응? 왜 또 분위기를 잡고 그래. 불안하게……."

"한 번 고백했더니 자뻑이 너무 심해졌네, 우리 나 쌤. 예전에는 안 이랬던 거……악!"

"자꾸 놀릴래?"

밑밥을 깔기 위해 옆구리에 또 다시 일격을 허용했지만 참을 만 했다.

나는 괜히 아픈 척을 한 뒤에 지체 없이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게 아니라. 서 간호사. 서 간호사한테는 비밀로……. 응?"

"킥!"

"나 쌤. 웃지만 말고. 더 이상 쪽팔리면 정말 나 다시 방구석에 들어가서 안 나온다? 응? 나 쌔앰. 응?"

내가 슬쩍 조르자 나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일단 킵. 너 하는 거 봐서. 앞으로 잘해라."

"와, 나 쌤. 나 쌤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기회주의자인데? 실망이야. 실망!"

"호구보다는 진상이 낫다며. 전에 네가 한 말이잖아?"

내가 그랬나?

나를 살짝 흘기며 답하는 나 원장의 물음에 마땅히 대답할 게 없었다. 솔직히 그런 말은 했는지 기억조차 안 났다. 확실히 그녀는 나보다 머리가 좋았다.

"……하여튼 머리 좋은 족속들이란."

"뭐라고?"

"아무겁도 아닙니다요. 어? 다 왔다."

"말 돌리기는. 데려다 줘서 고마워."

"뭐 몇 분이나 된다고. 아무튼 나중에 좀 널널해지면 보자. 나 쌤 요즘 다크써클이……."

나는 내 얼굴을 손으로 문지르는 척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덕분에 또 다시 나 원장의 매서운 손길에 당해야했다.

어색한 것보다 백번 낫지.

나름 성공적인 뒷수습을 치른 나는 자연스레 몸을 돌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봐! 이거 잘 먹을게!"

"조심해! 쏟겠다!"

나 원장은 잔소리로 내 발랄한 행동에 답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평소처럼 행동해도 우리 둘 사이의 어색함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어색함으로 떡칠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내 몸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 작품 후기 ==========

반 강제적으로 아침형 인간의 생활 패턴을 따라하다보니 이거 죽겠네요.

고영이에게 미안하지만 어쨌든 이제 판은 만들어졌습니다.

으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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