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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ss-43화 (4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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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라지만 밤은 아직 쌀쌀했다.

나는 가장 깔끔한 옷을 입고 나 원장 병원 앞에 있는 카페에서 죽치고 있었다. 벌써 9시가 넘었지만 병원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확실히 요즘 들어 환자가 많아진 것 같았다.

벌써 3시간 째였다.

슬슬 커피 한 잔으로 자리를 죽치는 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아니, 이미 벌써부터 미안했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카페를 나서기 전 화장실에 들어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다듬은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긴장된 마음을 다독이려 노력했다.

밖에서 홀로 기다린 지 30여분이 지났을 때였다.

드디어 나 원장의 마지막 환자가 병원을 나서는 게 보였다.

"후우, 후으, 으으……. 어떡한다냐……."

아무리 깊게 숨을 들이 마시고 내뱉어도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커졌다. 나는 태어나 이렇게 떨렸던 적이 있나 싶었다.

아, 있긴 있었네. 그때.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자 더 이상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 참 기분이 묘했다. 그날의 기억이 내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생각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그것도 잠시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서 간호사가 문단속을 하는 게 보였고, 잠시 후 병원 앞에서 두 사람이 인사하고 헤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다리에 힘을 주었다.

순식간에 도로 밖으로 나가는 나 원장의 앞을 막은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나 쌤!"

"깜짝아! 너 뭐야? 옷은 또 그게 뭐고? 아! 너 면접 본 거야? 그렇지? 그치? 잘했어. 정말 잘했어, 고영아!"

나 원장이 혼자 묻고 혼자 답했다. 그녀는 멍하니 서있는 나를 안더니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게 아닌데.

순간 나 원장에게 페이스가 말린 나는 최선을 다해 반항했다.

"……아닌데."

이것도 아닌데. 흠흠.

내 최선을 다한 반항에 나 원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냐? 에이, 뭐야! 그럼 결혼식? 아니면 상갓집?"

"나도 가끔 정장 입고 싶을 때가 있어."

"그으래?"

나 원장이 삐딱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았다. 전혀 믿지 않았다. 사실 나라도 믿지 않을 이야기였다.

맨날 반바지에 반팔을 입는 게 나니까.

김샌 얼굴로 나 원장이 팔짱을 낀 채 물었다.

"그럼 왜? 무슨 일이야?"

"우리가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나는 사이야?"

"하긴. 우리 좀 못 봤다. 그치?"

"아주 뽕을 뽑으려던데?"

내가 짓궂게 대꾸하자 나 원장이 씰룩한 표정으로 항변했다.

"얘가 말을 해도! 뽕을 뽑는 게 아니라, 열심히 의사로서 사명을 다하는 거야."

"아, 네. 그러세요?"

"너 자꾸 비꼴래? 오랜만에 봐 놓구선!"

"하하, 미안.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반가워서 그랬어. 화내지 마. 응? 나 쌔앰."

"쿡!"

내가 슬쩍 애교를 부리자 나 원장이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다. 역시 예뻤다. 그녀는 웃는 얼굴이 참 아름다웠다.

그래. 하자. 할 수 있다, 박고영!

나는 다시 한 번 나 원장을 놓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검을 빼들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내가 다시 한 번 다짐하고 있을 때 나 원장이 슬쩍 팔짱을 끼더니 걸음을 옮겼다.

"나 피곤해. 집까지 바래다 줘."

"……그쯤이야, 뭐. 근데 진짜 피곤해 보인다. 다크써클이 장난 아닌데?"

"그치? 환자가 많아진 걸 좋아할 수도 없고. 몸은 힘들고. 죽겠어, 정말."

"에이, 환자가 많아지면 좋지. 왜 안 좋아?"

"얘는. 나 의사야. 의사가 그러면 안 돼는 거야."

"하여튼……."

착해 빠졌다.

나 원장의 온기를 느끼며 걷다보니 금세 그녀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가 오늘따라 5초 거리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나 원장의 오피스텔 건물 입구에 선 채 결심했다.

내 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 원장은 팔짱을 풀고 내 앞에 서서 활짝 웃었다.

"고마워! 나중에 이 누나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고영이 맛있는 거 사줄게."

"야. 어디 외간 남자 엉덩이를 두드려? 나 쌤. 이거 성희롱이야?"

"성추행이겠지."

"어, 성추행. 아무튼. 감히 내 백만 불짜리 엉덩이를……야! 하지 말라니까!"

살짝 말이 꼬였지만 나는 되도록 분위기를 잡으려 노력했다.

소용이 없었다.

나 원장은 내가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고 내 엉덩이를 두드렸다.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예전과 달리 나는 나 원장이 여자로 보였고, 나도 그녀가 나를 남자로 봐주었으면 했다.

이거 영…….

이미 분위기를 잡는 건 틀린 것 같았다.

그때 나 원장이 손을 흔들며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다급함에 나도 모르게 나 원장의 손목을 잡으며 그녀의 걸음을 돌렸다.

나 원장이 살짝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할 말 있니?"

"치사하게 차도 한 잔 안주고 그냥 가는 거야?"

"……안 돼. 절대 안 돼! 이게 어딜 숙녀 방에 들어오려고!"

이상했다. 나 원장의 반응이 생각보다 단호했다. 평소 그녀의 사근사근한 성격과 전혀 다른 모습이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왜 이래? 이럼 내가 뭐가되는데?

살짝 화가 났다.

그때 나 원장이 치고 들어왔다.

"아무튼 밥이든 술이든. 뭐든 다음에 먹자. 우리 집에서는 안 돼. 알았지?"

"……치사하게. 됐어."

"에이, 고영아. 화 풀어. 응?"

나 원장이 두 손으로 내 왼손을 잡은 채 몸을 흔들었다. 귀여운 그녀의 행동에 나는 금세 무장해제 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 여자 내 약점을 너무 잘 알아.

나도 모르게 실실 웃고 말았다.

나 원장이 내 미소를 보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자신이 너무 매몰차게 말을 끊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마음이 여리디 여린 여자였다.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자 나 원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녀가 보기에 지금 내 모습은 평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고영아. 너 진짜 무슨 일이야? 아니. 무슨 일 있어?"

"어? 아, 그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족히 천 번은 연습한 것 같은데 막상 고백하려니 입이 얼어붙었다.

하아, 미치겠네.

거기에 걱정 가득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는 나 원장의 얼굴 때문에 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그래도 해야지. 박고영. 넌 할 수 있어!

결연한 마음을 먹자 드디어 입이 떨어졌다.

"아, 별거 아니고. 나 쌤도 보스 플레이어잖아. 그래서 내가 선물 하나 가져왔지."

아, 병신. 난 병신이다. 그것도 상병신이다.

결국 말을 돌린 나는 반쯤 썩소를 지은 채 나 원장을 바라보았다.

나 원장은 그동안 눈치를 다 팔아먹었는지 내 달라진 표정을 읽지 못한 채 순진하게 되물었다.

"선물? 무슨 선물?"

"폰 꺼내서 앱 켜봐. 나 쌤 동기화 했지?"

"동기화? 응. 했지. 환자들이랑 라뽀를 형성하려면 어쩔 수 없거든."

나 원장의 대답은 장황했다. 핑계일 게 확실했다. 얼굴이 붉어진 게 그 증거였다.

완전히 핑계라 할 수는 없나? 그래도 보스 때문에 환자가 늘어난 건 맞으니까. 에이, 그게 무슨 상관이냐.

쓸데없는 생각은 쓸데없었다.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열고 거래창을 눌렀다. 앱이 자동으로 주변 참가자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나 원장의 이름이 거래 상대 목록의 가장 위에 나타났다.

나는 나 원장을 선택하고 물었다.

"거래창 떴어?"

"응!"

"그럼 기대하시라!"

"두구두구두구!"

나 원장은 귀엽게 효과음을 냈다. 저 모습에 내가 반한 걸지도 몰랐다.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순수한 여자였다.

휴. 이거라도 없었으면 어쩔 뻔 했냐? 썩은 붕대를 올렸으면……. 으으!

상상만 해도 싫은 최악의 사태를 면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며 아이템 하나를 거래창에 올렸다.

나 원장이 내 거래창에 올라온 물건을 확인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혜의 안경?"

"나 쌤에게 딱이지?"

"헐……. 대박!"

얼씨구? 저 여자가 저런 표정도 다 짓네?

나 원장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그녀는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좋아하자 나도 기분이 좋았다.

나는 거래 버튼을 눌렀고, 나 원장은 재빠르게 승낙 버튼을 눌렀다.

거래가 끝나자 나 원장이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석고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고,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밝는지 모른다고. 지금까지 게임 한 번 안 해봤다는 나 쌤에게 이런 면이 다 있네?"

"응? 내가 뭐?"

"게임 폐인."

"뭐얏!"

나 원장이 살짝 혀 짧은 소리로 나를 타박했다. 나는 괜히 아픈 척 하며 나 원장의 작은 주먹을 맞았다.

퍽! 퍽!

아, 잠깐만. 이거 진짜 아픈데?

"나 쌤. 농담! 농담이야!"

"맨날 놀리기만 하고!"

"하하, 미안. 벌써 10시다. 늦었다. 얼른 들어가서 쉬어. 하루 종일 일하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나 원장의 투정 아닌 투정에 나는 너스레를 떨며 그녀의 몸을 돌리고 등을 밀었다.

별 저항 없이 걸음을 옮기던 나 원장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으응. 그런데 이런 거 나 줘도 괜찮아?"

"들어가서 템 설명 읽어 보세요. 뭐라고 써 있는지."

어차피 나에게는 계륵이었다. 물론 내가 쓸 수 있는 것과 교환하거나 팔수도 있었지만 딱히 땡기지 않았다. 고작 아이템 하나에 모르는 사람과 얽히고 싶지는 않았고, 돈은 이미 충분했다.

나 원장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또 다시 내 엉덩이를 두드렸다.

"아이구, 잘했어요. 우리 고영이."

"아, 고만 좀 만져라. 그러다 달아 없어지겠다."

"어머? 그럼 안 되지. 우리 고영이 엉덩이는 소중하니까."

"그만 놀리고 얼른 들어가. 벌써 눈이 풀렸네, 풀렸어."

"히힛. 그럼 나 갈게! 고양아 고마워!"

나 원장이 귀엽게 혀를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피곤함이 드러났다.

하긴, 이 여자 성격이라면 환자들 때문에 고민하느라 밤을 샜겠지.

나는 나 원장의 피곤한 어깨를 보며 그녀의 등에다 대고 소리쳤다.

"오늘은 그냥 자! 하루 고민 안한다고 그 사람들에게 무슨 큰일 생기는 거 아니니까!"

나 원장이 다시 몸을 돌리더니 활짝 웃었다. 이내 다시 몸을 돌린 그녀가 살짝 비틀거리며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나 원장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몸을 돌려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효. 에효."

한숨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가 뒤져라, 박고영.

***

집에 들어온 나수정이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채 거실로 들어섰다.

거실에 들어선 나수정이 퀭한 눈빛으로 스윽 둘러보았다.

그 순간 나 원장의 고개를 좌우로 흔들렸다.

"진작에 청소 해 놓을 걸……."

나수정은 자신을 바래다 준 박고영에게 물 한잔 대접하지 않고 그냥 보낸 게 마음에 걸렸다. 마음 같아서는 물이든 차든 대접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도저히 보여줄 수 없을 정도로 집안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진료를 해서 피곤했지만 나수정은 쉴 수 없었다. 그녀는 대충 옷을 벗어 놓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청소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얼마나 안치우고 살았는지 분리수거하는 대만 꽤 많은 시간이 들어갔다.

결국 마지막 쓰레기봉투를 밖에 버리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나수정이 헐떡이며 훌훌 옷을 벗어 던졌다. 청소를 끝낸 지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그녀의 옷이 어지럽게 바닥을 뒹굴었다. 다시 거실을 어지럽힌 나수정인 자기 몸을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 같았다.

***

"아오! 진짜 나가 뒤져야하나?"

고백에 실패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골수에서 솟구치는 쪽팔림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한참을 침대 위에서 몸부림치던 나는 괜히 엄한 침대에 낙법을 펼친 채 벌떡 일어나 앉았다.

"……하물며 나무도 열 번은 찍는데. 아니지. 쓸 만한 나무는 보통 엄청 찍어야 넘어가지 않나? 아니면 전기톱을 쓰거나."

보통이라면 쓸데없는 생각으로 치부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해서든 지금 이 쪽팔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미친놈처럼 떠들다보니 점점 부끄러움에 오그라들었던 손발이 펴졌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나는 고개를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 내일. 내일은 반드시!"

이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 포기하기 싫었다.

나는 나 원장을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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