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The Boss-31화 (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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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낮의 사막에서 자는 것처럼 입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으으……."

    가뭄에 몸살을 앓고 있는 입술 사이로 가는 신음이 흘러 나왔다. 따가운 갈증에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던 건 시작에 불과했다. 조금씩 의식이 돌아올수록 내 머릿속에서 고슴도치가 날뛰기 시작했다.

    거기에 숨까지 막히니 도저히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 내려갔다. 진짜 내려가는 게 보였다.

    시커먼 사내놈의 다리.

    뭐지? 저 딴 게 내 침실에 있을 리가 없는데…….

    의문이 커질수록 내 시야도 맑아졌다. 뿌연 시야가 또렷해지며 주변 모습이 들어왔다. 이곳은 내 침실이 아니었다.

    "여기는……."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아니, 당황스러웠다.

    이곳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는 곳이었다.

    "아, 젠장. 망했다."

    선호의 방.

    내 옆에서 엎어진 채 죽은 듯 기절해 있는 놈은 선호였고, 내가 사막이라 생각했던 곳은 선호의 방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

    순간 나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몸을 휘청거렸다. 아니, 술에 취한 사람이 맞았다. 내 끊어진 기억의 마지막 장면은 선호와 함께 폭탄주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퍼 마신 거지? 아, 이 새끼는 왜 술을 마시자고 해가지고!

    기억이 나지 않으니 답답했다.

    "설마 어제 내가 진장 짓을 하……지는 않았겠지?"

    숙취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건 나중 문제였다. 부디 술 취해서 개가 되지 않았기를 바랄뿐이었다. 괜히 미친 듯이 달렸다가 피를 보게 생겼다.

    차마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벌컥!

    "벌써 해가……너 뭐하니? 깼으면 나와서 밥이나 먹어. 어휴, 술 냄새. 창문 좀 열어 놔!"

    "넵!"

    나는 숙모의 일갈에 빠릿하게 움직였다.

    지금 나는 막 배치 받은 신병이었고, 숙모는 해당 부대의 대대장이었다.

    닥치고 까라는 대로 까야했다.

    "저것도 깨워서 데리고 나와. 일단 밥부터 먹자."

    숙모의 목소리가 서슬 퍼랬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내 머리를 쥐어 박았다. 가뜩이나 울렁거리던 머리가 더욱 울렁거렸다.

    "으으……."

    쓰린 속과 울리는 골을 부여잡으며 나는 선호를 깨웠다. 방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내 손도 제법 매운 편이었다.

    찰싹!

    "일어나 새꺄!"

    "으……. 5분만, 3분만……."

    쯧. 예나 지금이나 한 번에 일어나는 꼴을 못 보네.

    나도 그랬지만 선호도 똑같았다.

    결국 나는 그때처럼 최후의 수단을 꺼내들었다.

    푸욱!

    "으아아아악!"

    더러운 건 잠깐이지만 편안함은 오래가는 법이었다.

    나는 선호의 엉덩이 골을 파고들었던 손가락을 빼내며 유유히 몸을 돌렸다.

    "그러게 인마. 형이 일어나라고 할 때 일어나야지."

    "아씨, 형!"

    "조용히 해 인마! 엄마 깼어. 왜 술을 마시자고 해서……."

    "저기. 형. 형이 마시자고 했거든? 형이 2차 가자고 했잖아!"

    "내가? 내가 언제?"

    우리들은 서로 투덕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그 순간 우리는 동시에 입을 다물어야했다.

    우리들의 눈앞에 끝판왕이 허리에 팔을 올린 채 서 있었다.

    "어이, 강아지들.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

    "내가 뭐! 누나는 뭐 술 안 마셔? 누가 보면 수녀님인 줄 알겠다!"

    "야야. 그냥 앉자."

    선호가 괜한 호기로 대들자, 나는 식겁해서 녀석을 말렸다.

    이미 늦었다.

    도끼눈을 뜨고 서 있던 선영이가 지체 없이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퍼억!

    "컥!"

    "선호야!"

    비몽사몽간에 누나에게 대들었던 선호는 제대로 해드샷을 맞고 휘청거렸다. 철퍼덕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 선호를 향해 내가 달려갔다. 다행히 혀를 깨문 것 같지는 않았다.

    망할 년. 운동신경은 드럽게 좋아가지고.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오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영이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김선영! 이건 심하잖아! 이러다가 혀 깨물면 어쩌려고 그래?"

    "지 복이지. 하여튼 오빠도 마찬가지야. 애를 챙기기는커녕 같이 떡이 돼서 집에 들어와?"

    "내가 안 챙기면 너라도 챙겨야 할 거 아냐? 얘도 이제 스물일곱이다. 다 큰 애를 왜 이렇게 쥐 잡듯이 잡어?"

    나와 선영이는 언제나 물과 기름 같았다. 나는 선영이보다 더 친동생처럼 선호를 아꼈고, 선영은 반항하듯 더욱 선호를 괴롭혔다. 악순환은 계속 반복됐고, 결국 녀석의 진심을 알게 된 나는 독립해서 따로 살아야했다.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인가.

    여전히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선영이의 눈빛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한창 예민할 시기에 나로 인해 부모의 관심을 못 받은 게 한이 된 듯 했다. 실제로 나는 그 점에 대해서는 미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냥 날 씹어. 서른이나 돼서 엄한 동생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흥!"

    선영이는 내 직설적인 말에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다행히 시기적절하게 끼어든 숙모 덕분에 더 최악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그럴려면 그냥 치고 박고 싸우지 그러니? 언제까지 그럴래? 얼른 와서 앉어. 국에 밥이라도 한 숟갈 말아서 먹어. 그러다 속 버려."

    나도 한 직설했지만 작은 엄마는 더했다. 숙모의 일갈에 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선호를 일으켜 주었다. 술이 확 깬 선호가 자기 누나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래. 진짜 싸워도 니가 지잖아. 쟤는 타고 났어.

    나도 가끔 선영이를 볼 때면 움찔할 때가 많았다. 내가 이런데 나보다 덩치가 작은 선호는 더했다. 애초에 어릴 적부터 맞고 살아서 그런지 선호는 성인이 돼서도 선영이에게 꼼짝 못하는 경향이 강했다.

    씩씩거리는 선호의 등을 두드려주며 나는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에는 우리보다 일찍 한바탕 한 사람이 있었다. 삼촌이었다.

    나는 삼촌의 맞은편에 앉으며 실실 웃었다.

    "삼촌. 삼촌도 아침부터?"

    "밥이나 먹어. 젊은 것들이 무슨 술이 그리 약해? 누굴 닮았는지, 원."

    "누굴 닮긴! 당신 닮았지! 술도 못하는 사람이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요!"

    "내가 뭘? 얼른 먹자."

    여전히 이 집의 수장은 숙모였다.

    나와 선호는 방금 전 일을 새까맣게 잊은 채 서로 키득거리며 콩나물국에 밥을 말았다. 삼촌이 눈을 부라렸지만 이미 가장의 권위는 떨어진지 수십 년이었다. 아마 세월이 흘러도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실실 웃으며 시원한 국물이 자작자작 밴 밥을 한 숟갈 떠먹을 때였다.

    탁.

    "밥이 목구멍으로 잘도 넘어가나 봐?"

    아오, 저게. 진짜!

    나와 선호의 표정이 똑같이 구겨졌다. 왜 시작 안하나 했다. 선영이는 굳이 우리 앞에서 느글거리는 빵에 잼을 발라 먹으며 비꼬기 시작했다.

    삼촌이 짐짓 엄한 눈빛으로 선영이를 혼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쩌다 남자들이 이리 됐을까.

    이집 남자들의 처지가 더 없이 불쌍했지만, 누구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나와 선호는 이미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하고 있었다. 선영이의 비꼬기에 반응하면 정말 진다는 것을.

    우리 둘이 쳐다도 안 보고 밥을 먹기만 하자 선영이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치솟았다.

    다행히 선영이가 더 우리를 갈구지 못했다.

    그래도 아들들 먹인다고 고기를 구워서 가져온 숙모의 등장은 찌끄래기들의 입을 모두 틀어막아 버렸다.

    "잘 먹겠습니다."

    "땡큐, 마덜!"

    나와 선호가 얼른 숙모에게 붙었다. 그 모습에 선영이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상처가 또 돋은 듯 싶었다.

    그렇다고 꿈쩍할 숙모가 아니었다.

    "작작 좀 마셔. 너희들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젊어서 관리해야지 안 그러면 니들 아빠처럼 늙어서 고생한다."

    "누가 늙었다고 그래! 밖에 나가면 남들이 40대로 알아!"

    삼촌이 남자의 자존심을 세웠지만 숙모의 무심한 눈길에 바로 꼬리를 말았다.

    "애처가."

    "패배자."

    "이게 어디서 아빠를 놀려!"

    괜히 나불거렸다가 혼만 났다.

    나와 선호는 모른 척 고기를 집어 먹었다. 짭쪼롬한 고기는 국밥과 잘 어울렸다. 간간히 매콤한 김치까지 올려 먹다보니 금세 한 그릇을 뚝딱 비워 버렸다.

    숙모는 두 아들들이 잘 먹는 걸 푸근한 미소로 지켜보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부엌에 다녀온 숙모의 손에는 대접에 소복이 쌓인 밥과 국 냄비가 들려 있었다.

    "역시! 센스쟁이!"

    "엄마 최고!"

    우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부족한 허기를 채웠다. 이미 점심때였기에 두 공기도 문제없었다. 실컷 배를 채우고 나니 그제야 조금 숙취가 물러가는 것 같았다.

    나와 선호는 똑같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배를 슥슥 문지르며 포만감을 즐겼다.

    "크윽."

    "꺼억."

    "아씨. 더럽게!"

    선영이가 뭐라던 우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냥 좋았다. 오랜만에 가족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그 증거로 삼촌과 숙모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두 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가움을 표했다. 그 와중에도 숙모는 바지런히 후식을 준비해서 우리들의 앞에 놓았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쌍둥이처럼 똑같이 인사를 한 우리는 잘 익은 사과 한 점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 선영이가 또 잔소리를 했지만 귀에 닿지도 않았다. 나와 선호는 우애 좋은 형제처럼 서로의 입에 먹여주기도 했다.

    물론 조금 과격하기는 했지만.

    즐거운 점심 식사가 끝났을 때 숙모가 우리 앞에 뻘건 물체를 하나씩 내밀었다.

    "설거지는 니들이 해. 엄마 힘들다."

    "옙!"

    "넵!"

    나와 선호 덕분에 삼촌은 오랜만에 습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근데 저 계집애는 손 하나 까닥 안하네?

    선영이에 대한 분노가 살짝 일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원래 딸자식들은 집에서 손 하나 까딱 안한다고들 했다. 어차피 시집가면 죽어라 하게 될 것이기에 나중을 기약했다.

    둘이서 하다 보니 설거지는 금세 끝났다.

    우리는 나란히 거실로 돌아가 그사이 또 숙모가 준비해 준 걸 마셔야했다.

    결코 먹고 싶지 않은 그것은…….

    "작은 엄마. 나 배불러서 더 이상은 못 먹겠어. 이건 삼촌이 먹는 게 좋지 않을까?"

    "나도 배터지겠어. 아빠보고 먹으라고 해."

    "먹으라가 뭐야, 먹으라가. 드신다고 해야지."

    우리들의 투정에 선영이가 또 트집을 잡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겨움에 하는 말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오직 선영이만 인정하지 않을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숙모에게 우리의 투정은 통하지 않았다.

    "입 다물고 얼른 마셔. 몸에 좋은 거니까, 한 방울도 남기지 말고!"

    "어떻게 입 다물고 한약을 먹어? 그리고 그릇에 묻어서 어차피 몇 방울 남을……악!"

    쯧쯧.

    나는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덕분에 등짝에 불이 난 선호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 보니 쟤는 어릴 때부터 꼭 매를 버는 타입이었다. 나도 눈치가 좀 없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쟤는 그냥 대놓고 눈치가 없었다.

    괜한 오기를 부리는 걸 애초에 포기한 나는 숙모가 준비한 정체불명의 한약을 마셨다.

    썼다. 드럽게 썼다. 진짜 씀바귀 즙인 것 같았다.

    "윽! 뭐가 이렇게 써?"

    "원래 몸에 좋은 게 쓴 거야."

    "작은 엄마. 몸에 좋은 건 좋은 거고. 몸에 쓴 건 그냥 쓴 거……악!"

    ……취소다.

    나나 선호나 눈치가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선호 자식이 옆에서 얄밉게 실실 웃었다. 심지어 선영이도 내가 맞는 게 즐거운지 소리 없이 웃는 게 보였다. 게다가 삼촌까지 나를 배신하며 껄껄 웃었다.

    와, 내 편 하나도 없네.

    "자, 이거 먹어. 아."

    "아……. 음. 달다. 엿이네? 작은 엄마가 나한테 엿 먹……악!"

    "진짜 형은 서른이 돼도 눈치가 없다. 꼭 여기서 그런 개그를 쳐야겠어?"

    빌어먹을 말리는 시누이 선호. 두고 보자.

    나름 분위기를 더 띄워 보겠다고 농담을 했다가 볼기짝에 불이 났다.

    나는 엉덩이를 문지르며 대충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댔다. 선호가 날름 내 옆에 따라 앉으며 내 스토커 짓을 했다. 이 녀석은 결혼해도 이럴 것 같아 조금 무서웠다.

    "엄마. 쟤들 검사해봐야 하는 거 아냐? 무슨 남자애들끼리 저렇게 딱 달라붙어 있어?"

    "쟤들이 뭐니, 쟤들이! 오빠한테!"

    "쟤는 동생이잖아!"

    "그럼 오빠랑 동생이라고 하면 되지!"

    두 모녀는 참 지치지도 않았다. 보통 모녀는 친하고 애틋하다고 했는데, 숙모와 선영이는 좀 아닌 것 같았다. 괜히 내 마음이 불편해졌다.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삼촌을 바라보자, 삼촌도 나와 비슷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내 삼촌이 고개를 저었다. 끼어들지 말라는 신호였다.

    나도 알아요. 여기서 끼어들면 선영이만 더 화나는 거.

    남몰래 한숨을 내쉬며 가시 방석을 어떻게 뺄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선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쳤다.

    "헐. 대박. 완전 개쩌네……."

    "야! 국어 선생이라는 놈이 그런 말을 쓰면 어카냐?"

    내가 경박한 선호의 말투를 지적했지만 선호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따라 내 목이 고생이 많았다.

    가족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선호는 여전히 대박을 외치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선호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더니 내 얼굴 앞에 내밀며 소리쳤다.

    "형! 대박이야! 이것 봐!"

    선호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그 흥분은 내 눈에까지 번졌다.

    내 눈앞에 오랜만에 보는 화면이 나타났다.

    그것은 보스의 상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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